직관경험담 에세이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E62018 김지원
합리모델과 직관모델.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은 이 단어가 가져다주는 생소함에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강의 초반에는 무슨 개념인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합리는 합리적인 모델인가? 그러면 직관은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모델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으면서 합리와 직관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은 내 경험 중 어떤 것이 합리모델은 따른 것이었는지, 어떤 경험이 직관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직관을 경험했던 일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보다 생생하게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일을 꺼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공교롭게도 가장 최근 직관을 경험했던 일은 내가 코로나에 걸렸던 순간이었다. 남들이 한창 학기를 시작하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 나는 코로나를 맞이하고 방 안에서 호되게 앓고 있었다. 검사를 받으러 간 날이 2월의 마지막 날, 확진 판정을 받았던 날이 3월 1일. 3개월은 더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날짜조차 생생하다. 사건의 경황은 이러했다. 졸업식을 하고 친구들과 졸업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일이 터진 것이다. 그전까지 어떠한 전조 증상도 없었기 때문에 코로나가 찾아올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가검사를 하기 전날 밤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거나 몸살 기운이 있다거나 하는 느낌조차 없었다. 오히려 시장 구경을 하느라 한 바퀴를 빙 돌고 신나게 코노에서 노래까지 부르고 들어왔는데 쌩쌩했다. 일은 새벽에 터졌다. 중간에 자다 깼는데 유독 목이 칼칼했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집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서 목감기 약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중간에 다시 눈을 떴고 몸이 급격하게 좋지 않아졌음을 느꼈다. 사실 저녁을 먹고 속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증상이 체했을 때와 비슷해서 단순히 체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 순간 코로나라는 세 글자가 머리를 스쳤다.
다음을 설명하기에 앞서 나는 코로나를 상당히 많이 비껴간 편이었다. 애초에 외출을 즐기는 편도 아니거니와 돌아다니는 구역이라고 해 봤자 동네 주변이 다였고 남들이 다 걸릴 때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으며, 백신까지 성실히 맞은 선량한 시민이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 확진자와 한 방에서 생활했는데도(내 의지가 들어간 일이 아니었다.) 멀쩡했기에 나는 속으로 나를 무증상자 또는 슈퍼 항체 보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진자와의 생활이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시 나는 막학기를 위해 복학했었고, 기숙사에 입사했었다. 고로 룸메이트와의 공동 생활을 필수적으로 해야만 했는데 바로 나의 룸메이트가 코로나 확진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본인이 확진 위험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마스크를 벗고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고 나와 대화를 하고 잠을 잤다. 며칠 뒤 내가 날벼락을 맞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나는 저녁으로 사온 곱창을(심지어 첫 끼니였다.) 먹으려는 순간 룸메이트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보건소 직원 분의 연락을 받았고, 그대로 격리 숙소로 끌려갔었다. 운이 나쁘면 2주 간 격리를 할 수도 있다는 말에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멘탈이 나간 상태였다. 주변에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을 많이 봤는데 잠깐 대화하거나 밥을 먹은 것만으로도 확진이 되었다고 했었다. 하물며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 나는 어떻겠는가. 심지어 한 공간에서 잠까지 잤는데!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내가 양성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했다. 더군다나 기말 시즌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기말 시험이고 뭐고 죄다 꼬이게 생길 판이었다. 룸메이트가 기숙사에서 나온 첫 번째 코로나 확진자였는데, 그 이후로 또 양성 판정을 받은 기숙사생이 나온다면 전원 귀가 조치라는 말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여차하면 왕복 4시간 가량의 거리를 통학하게 생긴 것이다. 입맛은 뚝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잠조차 오지 않았다. 밤 12시에 교수님께 메일을 드리고 학과 조교선생님께도 연락을 드리고 친구들과 의미 없는 카톡을 주고받으며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샜다.
저 때 양성 판정을 받았더라면 지금 직관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음성 판정을 받았고, 한동안 과 친구들에게 ‘걸어다니는 백신’과 ‘비대면 수업의 요정’이라는 제법 깜찍한 타이틀까지 받았다. 전자는 영광스러웠지만 후자는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하여튼 이런 일까지 겪었기에 어지간한 상황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나였으나 그날 새벽만큼은 달랐다. 머릿속에서 코로나라는 세 글자가 둥둥 떠다니고 드디어 찾아왔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서둘러 친구를 깨워 마스크를 쓰게 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자가진단 키트를 사와 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검진한 결과 예상대로 두 줄이 선명하게 떴다. 나는 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엄청 무섭고 떨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머릿속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까, 덤덤했다. 조금 멍한 정신으로 서둘러 엄마에게 연락을 하고, 친구와 보건소로 검사를 받으러 가고, 알바하는 곳에도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인 3월 1일 양성이라는 문자를 받았으며, 그렇게 2박 3일로 예정되어 있던 나의 졸업 여행은 투병이라는 명목 하에 난데없이 무기한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코로나에 걸리고 1주일 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다. 우선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는 오한과 두통, 잠을 자고 있어도 침만 삼키면 찾아오는 목 통증 등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약국 약이 들지도 않아 병원 약을 처방받아야 했는데 심지어 내가 확진 판정을 받은 날은 공휴일이라 약을 구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중간에 속이 뒤집혀서 4일간은 이온음료를 제외한 어떤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선 사전투표, 개강, 같이 있던 친구(당연히 양성 판정을 같이 받았다)와의 우당탕탕 격리 생활까지,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그 때 있었던 일들을 엮는다면 시집 분량의 책은 족히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에세이를 적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만일 그때 내게 찾아온 직감을 무시했다면, 단순히 체한 것이나 목감기로 생각하고 본래 매뉴얼대로 약국이나 간 다음 집으로 가자. 라는 루트로 행동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집에 가서 며칠 더 버티다가 코로나 확진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도 곤혹을 겪을 것이며 가족들도 날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그 순간 찾아온 직감을 무시하지 않고 내 직관대로 행동한 덕분에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직관은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순간 머릿속에 번뜩 하고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역시 주저하지 말고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직관에 몸을 맡기길 바란다.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위기에서는 합리보다 직관이 더 빛을 발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나 역시 정해진 매뉴얼에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앞으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찾아온다면 흘려넘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