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24일 성탄전야였다. 평소 일체 경호를 하지 못하게 했던 영부인께서는 그날도 나만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쓸쓸하게 지낼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였다. 그 당시 서울에는 영등포 합숙소와 남대문 합숙소, 동대문 합숙소 등 근로자 합숙소가 3곳이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내의 근로자 합숙소를 찾은 육영수 여사가 근로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육 여사는 명절 때나 연말이면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았으며 근로자들도 그런 육 여사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막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근로자들과 육 여사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근로자들의 애로사항, 정부에 대한 요망 등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시험에 실패해 날품을 팔고 있다는 손근숙(가명)이라는 청년이 정부 시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태도가 매우 도전적이었으며 자포자기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새마을운동은 길만 넓힌다고 되느냐, 공무원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아느냐 등 육영수 여사로서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집요하게 들고 나왔다. 특히 서울시 민원창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불친절을 사정없이 규탄했다.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민원창구에 배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육 여사께서는 끝까지 웃으면서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영부인께서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지금 곧 합숙소 세 군데를 들러서 손 청년을 포함해 근로자 몇 사람을 청와대로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각 합숙소에서 3명씩을 골라서 9명을 데리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양택식 서울시장이 접견실에 들어와 있었다. 영부인께서 그를 부른 것이었다.
영부인은 준비한 만둣국을 일행에게 대접하면서 어젯밤 손 청년이 한 이야기를 양 시장에게 했다. 그리고는 “이 청년에게 맡겨볼 만한 일자리가 없을까요?” 하고 의견을 물었다. 영부인의 뜻은 단순히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 찬 그에게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고충과 애로를 직접 경험토록 해 줄 기회가 없겠느냐는 뜻이었다.
양 시장은 손 청년을 다음날 서울시장실로 불러서 본인이 희망한다면 그를 임시직으로 채용할 용의가 있음을 일러주었다.
1974년 1월 4일자로 손근숙 청년은 임시직으로 채용되어 관악구청 민원봉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민원창구에 앉은 그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말단 공직자의 생활이 너무 달랐다. 박봉에 힘겹고 고달팠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결국 사표를 내고 관악구청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의 손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혹시 고시에 합격해 희망하던 고위공직자의 길을 갔는지 이 글을 쓰면서 매우 궁금해진다.
지방 방문을 간 육영수 여사.
청와대에 온 ‘앵벌이’ 소년
1973년 2월, 늦겨울 추위가 예사롭지 않던 어느 날 경기여고를 다니던 박 대통령 둘째딸 근영양이 하굣길에 광화문 부근 육교 위에서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엎드려 구걸하는 속칭 ‘앵벌이’ 소년을 보았다. 근영 양은 청와대로 돌아와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육 여사는 비서실 직원을 시켜 급히 그 소년을 청와대에 데리고 오도록 했다. 10세 정도의 부랑아였다.
영부인은 그 소년이 입을 옷을 사오도록 하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킨 후 새 옷을 입히고 저녁을 먹였다. 나는 그 소년이 어디서 잠을 자고 있는지 가서 보고 오라는 영부인의 지시로 그날 밤 소년을 차에 태우고 소년이 사는 곳으로 갔다.
신촌 연세대 맞은편 언덕 위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 이르자 그 소년이 땅 밑으로 연결된 듯한 통풍구로 기어들어갔다. 으스스했지만 나도 손전등을 들고 그 소년을 따라서 좁은 통풍구로 겨우 기어들어갔다. 캄캄했다. 머리 위쪽에는 철근이 삐죽 나와 있었고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소년을 따라 엉금엉금 기어서 ‘형들하고 잠자는 곳’이라는 구석까지 갔다.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낡은 담요가 몇 장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형’들은 없었다. 모두 돈 벌러 나간 모양이었다. 콘크리트 기둥 벽에 그때 유행하던 유행가 가사 한 구절이 낙서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면서도 노래로 시름을 달래는가, 아니면 희망을 꿈꾸는가 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튿날 밤 형들과 함께 신촌시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시립부랑아아동보호소’에라도 보내야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튿날 약속시간에 신촌시장에 갔다. 그러나 그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보고를 받은 영부인께서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그때 안 사실이지만 부랑아들은 아동보호소에 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수용되었다가도 틈만 있으면 도망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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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김두영 (前청와대 비서관)
첫댓글
마음이 따뜻해지는'
우리의 엄마 같으신 국모
육영수여사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볼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최숙영 작가님
이젠 춥다는 말이 나옵디다
옷 따습게 입으시고
감기 걸리지 마시고요
감사한 맘으로 다녀가옵니다
여유로운 하루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