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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5) 수녀님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다?
수도회마다 고유한 카리스마 지녀
우리는 일상 속에서 ‘카리스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저 사람 참 카리스마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흔히 카리스마는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을 일컫는 말로 쓰이곤 합니다. 그런데 수녀님, 혹은 수사님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어쩐지 수녀님들, 수사님들과 ‘카리스마’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합니다.
실은 수도생활을 하는 모든 수녀님, 수사님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카리스마’는 우리가 평소에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말하는 ‘카리스마’와 어원도 같습니다.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그리스어로 ‘은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상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견진성사 때, 또 성령 강림 대축일 때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19세기 철학자 막스 베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카리스마’라고 부르면서 ‘카리스마’라는 말이 교회 밖에도 널리 알려졌는데요. 사실 이 의미는 ‘카리스마’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리고 카리스마는 조금 더 좁은 의미로 수도회가 성령께 받은 고유한 은사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의 존재 목적, 사명, 영성, 정신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수도회의 숫자만큼 다양한 카리스마가 있고, 수많은 수도회들이 각자 자기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는 수도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 카리스마는 수도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들도 수도회의 은사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제3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방법이 있고, 여러 가지 형태로 후원이나 협력을 통해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카리스마, 곧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1코린 12,11 참조)
물론 우리 눈에 더 뛰어나 보이는 카리스마도 있고, 너무 흔해 보이는 카리스마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카리스마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카리스마를 지녔는가’ 보다 ‘이 카리스마를 통해 사랑을 실천했는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축성생활을 전공한 성삼의 딸들 수도회 총봉사자 국춘심(방그라시아) 수녀님은 “모든 은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므로 어떤 카리스마가 우수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1코린 13,1-2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은사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5) 입당 성가와 입당송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하느님 향한 행렬에 동참하는 것 깨닫게 도와
‘입당’하면 아무래도 행렬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입당 행렬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 미사에서의 교황님과 추기경단의 행렬입니다. 당시 저는 전례 실무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작 10분 전에 미사를 시작하라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전례 담당자의 사인을 보았습니다. 시계를 가리키며 ‘아직 행렬 출발 시간이 안 되었다’고 하니, ‘교황님이 준비되었으니 바로 시작하라’는 답변이 왔지요. 그래서 정한 시간보다 일찍 시복식 미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2시간 전에 모두 들어와서 준비하고 있는 신자들을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가 느껴지는 입당 행렬이었지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입당 성가나 입당 행렬을 포함한 시작 예식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집에서 주일 모임(사도 2,46 참조)을 해야 했으며, 잦은 박해로 인하여 몰래 모여서 성찬례를 거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3세기의 문헌인 유스티누스의 「호교론」(제1권 67장 3절)과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22장 8절)에 따르면 미사는 집전자의 인사와 독서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자유가 주어지고, 황제의 배려로 대성당을 짓게 되면서 서서히 박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격식을 차린 예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로 거행되던 시작 예식을 정비하고 고정시킨 것은 16세기의 트리엔트공의회 직후 비오 5세 교황이 반포한 「로마 미사 경본」(1570)부터였습니다. 이 「로마 미사 경본」은 오직 사제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이 반영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로마 미사 경본」(1970)에서 입당에 대한 첫 마디가 “교우들이 모인 다음 사제가 부제와 봉사자들과 함께 들어올 때 입당 노래를 시작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로 교회가 교우들의 모임을 우선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당 성가는 언제 도입되었을까요? 「주교 실록」(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입당송은 첼레스티노 1세 교황(423-432)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분명한 증거는 5세기 이래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정기적으로 일곱 교회를 돌면서 ‘순회미사’를 거행할 때,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는 교황궁에서부터 행렬하며 부른 속죄대송과 ‘기리에’ 호칭기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렬을 하면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점차 정착되고, 주교와 사제의 집전 미사에도 적용되어 결국 모든 미사의 기본 절차가 되었습니다.
입당 성가는 본래 입당 행렬에 맞추어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지만, 요즈음처럼 입당 행렬의 시간이 짧은 경우에는 “함께 모인 이들의 일치를 굳게 하며, 전례 시기와 축제의 신비로 그들의 마음을 이끌고, 그들을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에 참여시키는 목적”(「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을 고려하여 입당 성가를 2절까지 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당 성가를 부르지 않으면 입당송을 해설자의 인도로 신자들이 함께 하거나 사제가 직접 낭송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8항 참조) 입당 행렬에 동반하는 입당 성가 또는 입당송은 미사에 참석한 모든 이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행렬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 공동 집전 사제가 ‘낮은 소리’로 감사기도를 낭송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실제 미사를 집전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모상은 주례 사제입니다. 공동 집전자는 주례 사제와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모상인 주례 사제의 집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를 거행할 때 공동 집전자가 주례 사제의 이 ‘유일한 모상’을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감사 기도는 미사거행의 절정이며 사제가 담당하는 기도 중 으뜸입니다. 주례 사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모상으로서 교회 공동체와 한 몸으로 성부 하느님께 이 기도를 바칩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주례자의 기도’라고도 불립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0항, 78항)
이 기도에 동참하는 신자들은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귀담아 들어야 하며(총지침 78항) 감사 기도의 마지막인 마침 영광송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이 응답하도록 되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주례자의 기도를 함께 낭송하지 말아야 합니다.(총지침 236항)
공동 집전자 또한 감사기도 중 함께 바치는 부분, 특히 축성말씀(“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을 낭송할 때는 주례 사제의 유일한 모상을 가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submissa voce) 낭송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주례자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 한 분이신 주님의 모상이 잘 드러나고 교우들이 그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총지침 218항)
[교회 상식 팩트 체크] (4) 3년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리면 성경 대부분을 읽을 수 있을까?
‘대부분’은 아니지만 중요 내용 다 읽는 셈
‘어? 어제 읽었던 부분 다음 내용이네?’
며칠간 연달아 미사에 참례해 보셨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독서가 매일 이렇게 이어진다면 매일 미사를 드리면 성경을 거의 다 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더 예리한 관찰력이 있으신 분이라면 「매일미사」나 교회 달력이 가·나·다해로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텐데요. 그럼 3년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 성경 대부분을 읽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을 살펴봤습니다. 1969년 발행된 이 지침은 전례, 특별히 미사를 거행할 때 성경이 어떻게 선포돼야 하고 언제 성경의 어느 부분을 봉독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사 독서를 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주제의 조화’와 ‘준연속 독서’입니다. 주제의 조화란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특별히 복음과 어울리도록 독서를 배정하는 방식입니다. 준연속 독서는 완전히 연이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경의 순서에 따라 독서를 읽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대림·사순·부활 시기 같은 전례 시기는 ‘주제의 조화’가, 특별한 주제에 집중하지 않는 연중 시기에는 ‘준연속 독서’가 강조됩니다. 우리가 ‘독서가 이어진다’고 느낀 것은 바로 미사 독서 배정에 ‘준연속 독서’가 반영됐기 때문입니다.
지침에 따르면 주일·축일의 경우는 가·나·다해, 3년을 주기로 미사 독서가 배정됩니다. 평일은 해마다 같은 독서를 봉독합니다. 다만 34주간 이어지는 연중 시기의 평일 제1독서는 짝수·홀수해 2년 주기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각각 3년과 2년 주기로 반복되는 미사 독서 배정을 보니, 일단 신약은 거의 대부분을 읽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은 물론이고 서간과 묵시록도 주일 제2독서와 평일 제1독서 중에 대부분 봉독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는 ‘대부분’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구약의 방대한 양을 독서에 다 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를테면 구약을 준연속으로 읽는 연중 시기 평일 독서목록을 보면 42장에 달하는 욥기는 1년 중 1주간 동안만 배정됐습니다. 이 목록에는 일부 짧은 예언서들이나 너무 긴 부분을 읽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성경들도 빠졌습니다. 목록에서 빠진 성경들은 다른 전례시기나 주일에 일부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내용은 봉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례 중 구약을 다 읽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다. 미사 독서에는 성경의 중요한 부분은 모두 담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대림 시기 등에는 주일과 평일 독서가 겹치기도 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중복되더라도 빼놓지 않고 읽기도 합니다. 특히 지침은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 구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모두 들을 수 있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3년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리면 성경의 ‘대부분’까진 아니더라도 중요한 부분은 다 읽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4) 성당 문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느님의 신비로 이끌어 주는 성당 문
-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대성당 정문. 성당 문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게 하는 공간으로, 부산하고 급하게 들어가기보다는 침착한 걸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좋다.
‘문’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16년 방영된 ‘도깨비’에는 많은 명대사가 있는데, 그중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대사가 기억에 오랫동안 남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문’을 통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신기한 모습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은 ‘내가 여는 문을 통해 내가 원하는 공간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지요.
문은 여닫는 기능을 통해 연결과 분리, 그리고 환영과 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용도에 따라, 공간의 활용 방법에 따라 문은 다양하게 설치됩니다.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는 분들을 위해서 화장실 문을 여닫이가 아닌 옆으로 밀게 하는 미닫이로 만들어 쉽게 들어가고 나오게 하지요.
성당 문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게 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당 문은 바깥과 안 사이에, 장터와 성역, 세속 것과 하느님께서 축성한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거룩한 표징」에서 우리가 성당 문을 지나갈 때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안에 속하지 않는 것은 생각, 근심, 걱정, 호기심, 허영 할 것 없이 모두 밖에 놓아두고 들어오시오. 성역에 들어오는 만큼 자신을 정화하시오.” 그래서 문을 부산하고 급하게 들어가기보다는 침착한 걸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 문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가시는 분은 주교입니다. 주교는 성당 봉헌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하느님 집의 문을 주교 지팡이로 두드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내게 들어오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9)의 시편 24장을 노래합니다.
성당 문은 사람을 바로 하느님의 신비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의 신비를 실제 사건이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공간에 들어와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과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거룩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신앙인은 성당 문을 통해서 들어가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성령 안에서 받는 성사 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는 죽음을 맞이한 후에 시신이 되어 나가는 곳도 성당 문입니다. 곧 성당 문은 생과 사가 드나드는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당 문을 들어서면서, 먼저 열어야 하는 문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문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세상의 여러 잡다한 소리로 인하여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산 거처인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 못되면 나무와 돌로 쌓은 성당 문에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높고 묵직한 성당 문을 열어본들 우리 안의 문이 안 열려 영광의 임금께서 들어오지 못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알기쉬운 전례상식] 음식은 제대로 알고 먹어야!
마리아 할머니가 딸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손녀도 돌아와 식사 전 기도를 바치고 음식을 들고 있는데 수저를 제대로 사용 못하는 손녀를 눈여겨보시던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얘야, 음식을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니?” 손녀는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제 친구들은 음식을 먹고 싶은 대로 먹어요∼” 하고 대답하더란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애야, 버스가 도착했다고 네 맘대로 올라탈 수 있니? 버스가 도착하면 기다렸던 사람들부터 순서대로 올라타고 버스비를 내지 않겠니? 우리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농부들이 땀흘린 노동으로 땅을 일구어 얻은 양식이니 마땅히 하느님과 농부들에게 감사드리며 정성껏 먹어야 하지 않겠어∼?” 할머니의 이 말씀을 귀여겨듣던 손녀는 수저를 제대로 쥐고 바른 자세로 음식을 들더란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축성된 빵을 들어 올려 ‘그리스도의 몸.’하고 말한다. 서서 영성체를 하려 할 때 ‘아멘.’하고 응답하며 성체 앞에서 존경을 표시하는 동작으로 신자 각자는 정중하게 절하고 주님의 몸을 손으로 받아 모신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60항 참조). 영성체 전 모든 신자는 이렇게 환호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이제 신자 각자는 주님의 식탁에 함께하고 있음을 환호하며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큰 목소리로 “아멘.”이라는 신앙 고백과 함께 주님의 현존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왼손을 오른손으로 받들고 주님의 몸을 손으로 받아 모시는데, 양손을 십자형으로 만들어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써만 현세적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315-387)는 이렇게 설명했단다. “오른손은 임금님을 받들어 모셔야 하므로 왼손으로 옥좌를 마련하시오. 손바닥 위에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고 ‘아멘’이라 응답하시오.”
그런데 과자를 먹는 것처럼 성체를 집으려는 동작을 취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성체를 바로 모시지 않고 제자리로 들고 가는 신자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영성체하는 신자는 입으로 성체를 모시거나, 또는 허락된 곳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손으로 성체를 모신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영성체하는 이의 선택에 따라 손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다. 영성체하는 이는 축성된 빵을 받은 다음 곧바로 다 먹어야 한다”(161항). “신자들 스스로 축성된 빵과 거룩한 잔을 들고 모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신자들 사이에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한국 교구들에서 신자들은 무릎을 꿇거나 서서 영성체한다. 영성체하려는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성체 분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경우 이 규범에 대한 필요한 교리 교육을 하여 신자들을 사목 차원에서 잘 이끌어 주어야 한다.”(160항) 영성체 때가 되면 ‘음식은 제대로 알고 먹어야 한다!’는 마리아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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