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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나임
창 32: 1-2
인간은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을 가지고 있고,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가지고 있으며,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 세계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실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각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실체입니다. 감각적 실체는 느껴지기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영적 실체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 더 확실하고 불변한 것은 영적 실체입니다. 영적 실체가 보이는 실체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감각적 실체만 추구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추구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은 메소포다미아에서 가나안으로 귀향 하는 도중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과거는 고독과 두려움과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고향 땅을 향하여 길을 진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이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 주었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고향 땅에 돌아오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난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을 때 야곱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을 때 야곱이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이란 ‘군대들', '진영들', '떼들' 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들 즉 마하나임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마하나임 사건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돕기 위한 영물로서 인격적인 실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물이기에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천사가 나타난 사건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큰 위험이 있을 때, 특별한 사역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구원사역에 관계될 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가시적으로 인간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돌아오는 개선 장군을 영접하는 환영 단들처럼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환영하고 영접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밧단아람을 향하여 쓸쓸히 떠날 때에 벧엘 들판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때 하늘과 땅에 걸친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을 꿈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땅을 되돌아오고 있는 야곱에게 또 다시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가 많고, 질서가 있었고,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임전태세를 갖춘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수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6:53절에 예수님께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였습니다. 시편 68:17에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질서가 있습니다. 군대는 질서가 생명입니다. 계급, 조직, 규율이 있습니다. 명령 계통이 엄하고 철저합니다. 천사들의 세계도 군대와 꼭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늘군대입니다.
천사는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천사는 주로 성도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악한 자를 징벌하는 일들을 수행합니다. 그러한 임무수행을 위해서는 자연히 권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4:7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항상 전쟁에 임할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가장 적절하고 타당하고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 장소를 마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II. 마하나임 사건의 의미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나타난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천사가 우리를 위하여 일하는 성격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나타났을까요? 이 사건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인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육신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를 환영하기 위해 마중을 나왔다. 네가 벧엘에서 돌베개하고 잠을 자던 그 날 밤의 사건을 기억해 보라. 너는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의 덕으로 무사히 네 고향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보이지 않게 야곱을 보호하고 지키던 천사들이 이제는 보이는 모습으로 야곱을 맞는 영접대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천사를 보내어 야곱을 환영해 줌으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벧엘에서의 옛 약속을 되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셨던 옛 약속을 회상시킴으로 하나님은 ‘그 언약에 충실하시다’, ‘그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옛날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창 28:15에 그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20년 동안 동행하셨고, 순간순간마다 야곱을 도우셨고, 지키셨고,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야곱이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 하는 것은 야곱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재주가 남다르고 재치가 있고, 수단 방법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성실히 지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20년 동안 내내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이행해 주셨습니다. 지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는 그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고 그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제일 힘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그 약속을 성취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을 잊고 살 때에라도 사건을 통해, 천사의 출현을 통해, 말씀을 통해, 특별한 관계를 통해, 그 약속을 생각나게 해 주실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었음을 깨닫고 내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빨리 옮겨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를 깨닫게 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야곱을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실 뿐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가장 부담스러운 사건인 형 에서의 얼굴을 대하는 문제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삶의 순간마다 위기의 고비마다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이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자기 수단과 방법을 더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야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야곱으로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나타남은 과거에도 내가 보호하였고 앞으로도 내가 보호하겠다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야곱 너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와 같이 세심하게 살피시며 보호하십니다. 시편 91:11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성도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3)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해 주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한 사람 야곱을 환영하기 위하여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환영 퍼레이드를 베푸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한 사람 약속의 상속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하고 필요할 때 하늘 군대를 파송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야곱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에 그 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악된 인간이 깨달아야 할 근본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보다 우리를 더 크게 하고 더 깊게 하고 더 넓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절정입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의 영혼이 불안하고 인생의 삶이 피로에 지쳐있고, 우리의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면 감격의 생활, 행복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에게는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야곱을 군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하나임의 사건은 그 때 한번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항상 계속되는 영적 사건입니다. 마하나임의 축복을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창 32: 1-2
의과대학의 한 교수가 강의 시간에 소변 한 컵을 갖고 와서 말했습니다.
“소변의 색깔을 보아도 병을 알 수 있지만 맛을 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 너희들도 나처럼 맛을 보도록 해라.”
그리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본 다음 컵을 돌리니 학생들이 할 수 없이 맛을 보았습니다..
“제대로 맛을 보았나?”
“예.”
“내가 보기에 나처럼 맛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구나. 나는 둘째손가락으로 찍어서 셋째손가락을 혀에 대었는데 너희는 둘째손가락으로 찍어서 둘째손가락으로 맛을 보더구나.”
학생들이 속은 것입니다.
의사는 정확해야 됩니다. 의사는 정확하게 보고 듣고 행해야 합니다.
아틀란타 대학교 부속병원의 한 의사가 한 번은 어린아이의 신장을 수술하면서 착각을 하여 건강한 신장을 잘랐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며칠 뒤에 죽었습니다.
설교는 몇 십 년 사는 사람의 생명을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우리는 의과대학 교수의 강의를 듣는 의대생보다 더 정확히 들어야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마음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를 3년간 들었어도 망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서 영생을 얻은 우리는 말씀을 더 잘 들어 풍성함으로 나가야 됩니다.
사람은 원수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의 차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기도 합니다. 6.25 전쟁은 우리 동족끼리의 싸움이었습니다. 남한의 사촌과 북한의 사촌이, 남한의 삼촌과 북한의 조카가 싸운 것이 6.25입니다. 또 우리 국군이 우리 시민을 향하여, 우리 시민이 우리 국군을 향하여 무기로 대결한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촛불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저지하는 경찰이나 다 우리 한 가족입니다. 노사분규를 하는 회사의 경영주나 근로자도 다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끼리 싸우니 얼마나 아픈 일입니까?
야곱은 라반의 생질이요 사위입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라반의 딸들이요 야곱의 아들들은 라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그 사위, 딸, 손자들을 다 죽이고 재산을 빼앗으려고 친척까지 동원해서 7일 길을 추격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시니 라반이 들고 있던 칼을 칼집에 도로 꽂고 야곱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전쟁의 무드가 평화의 무드로 바뀐 것입니다. 두 사람이 계약을 하고는 라반이 딸들과 손자들에게 입을 맞춘 후 축복을 하고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면 한 몸인 부부라도 죽자살자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부부와 형제, 가정, 우리 교회, 우리나라에 가득해서 우리끼리 다투고 싸우는 불행한 일이 없기를 원합니다.
라반과 야곱이 작별을 합니다.
이제 야곱은 라반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너를 치지 않고 네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나를 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라.”
라반과 이렇게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길르앗에 그냥 살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네 아비 집,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라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되니 큰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그곳에는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가 있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의 속임수 때문에 축복을 빼앗긴 것을 알고는 야곱을 죽이려 하니 어머니 리브가가 이렇게 말하며 야곱을 하란으로 보낸 것입니다(창세기 27:42-45).
“야곱아, 네 형이 너를 죽여 한을 풀려 하니 속히 하란으로 가서 내 오빠, 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 있어라. 네가 한 일에 대해 네 형의 분노가 풀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데려 올 테니 몇 날만 가 있어라.”
그런데 몇 날이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아니 20년이 지나도 어머니의 소식은 없습니다. 그것은 동생인 야곱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마음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으로 가면 에서의 칼에 죽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죽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감사절인 오늘 제가 받은 말씀이 창세기 28장 1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우뚝 세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집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자손이 복을 받고, 짐승의 새끼,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고,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 잘 되고 높아집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말씀에 순종하니 사자 굴에 들어가야 되듯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말씀에 순종하니 풀무에 들어가야 되듯이, 말씀에 순종하면 죽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는데, 말씀에 순종하면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처자식이 다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하나님 말씀의 길을 택합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에스더가 이렇게 결단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If I perish, I perish.)”
“왕이 나를 죽이면 죽으리라.” 하고는 왕 앞에 나아갑니다.
야곱도 ‘죽이면 죽자.’ 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고향으로 갑니다. 말씀대로 가다가 굉장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늘의 천사들뿐 아니라 무장한 천군들이 그 길에 꽉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 놀라서 “야! 이는 하나님의 군대로다. (This is the camp of God!) 하나님의 군대가 여기 있구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은 두 집단, 두 진영이라는 말입니다. 한 진영은 야곱의 일행, 한 진영은 천군의 집단입니다.
“이 땅에 우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천사들의 군대가 있구나!” 할렐루야!
그래서 야곱은 죽지 않습니다. 에서를 만날 때 죽지 않고 “형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 얼굴을 뵈온 것 같습니다.”라며 서로 안고 웁니다. 할렐루야!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형통하면 좋은데 오히려 불통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편안하면 좋은데 오히려 시험에 들고 어려운 풍랑과 장애물을 만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말씀의 길을 택해야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 죽을 것이 뻔하니 만일 야곱이 다른 곳으로 갔다면 그도 롯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야곱은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씀이 있을 때 내가 있지, 말씀이 없으면 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흙덩어리입니다. 말씀이 있을 때 귀하지, 말씀이, 하나님이 빠져나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
그래서 야곱이 살기 위해 딴 길로 갔으면 망했는데,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말씀의 길로 가니 산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아! 시간이 없는데 주일 낮 예배, 밤 예배, 삼일 예배, 새벽 예배에……. 12시에 자서 4시에 일어나다니,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이 어디 있나? 밤 예배에 그만 빠질까? 새벽기도에 그만 빠질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진하지 못하고 뒤로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니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아, 주일 지키는 것이 좀……. 주일에 편하게 놀면 좋은데, 교사하고, 찬양대 하니 부담이 되어서……. 십일조하고 건축헌금하고……. 내가 교회만을 위해 사네. 뒤로 좀 물러가 볼까?’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에서 39절에 말씀하십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침륜’은 destroy, 멸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뒤로 물러가면 멸망한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축복을 받고 잘될 때도 전진해야지만, 교회생활을 할 때 힘들고 어려워도 전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전진해야 합니까? 천성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우리는 천성에 갈 때까지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 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천당에 갈 때까지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일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 나오는 구멍이 죽는 구멍이라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지 돈 나오는 구멍이 죽는 구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죽을 고생도 해야 하는데 하물며 영생을 얻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믿음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젊은 남자가 목사님의 설교에 권태가 나서 교회에서 뛰쳐나갔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설교가 권태로울 수 있습니다. 설교가 항상 은혜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설교가 밥이 되기도 하고 죽이 되기도 합니다. 죽은 소화가 잘 되니 꼭 밥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교회에서 뛰쳐나가 ‘교회에 계속 다닐까, 말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여러분, 의심하면 마귀가 찾아옵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틈이 있으면 거기에 정을 대고 칠 때 바위가 쫙 갈라집니다. 의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갈까, 말까?’ 하고 고민하는 그에게 친구가 와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이게 자네 하나님이야.”
“그게 뭔데?”
“맛보면 알아.”
마약이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맛을 보았습니다. 마약 맛을 보면 사람이 미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약 맛을 보지 않아서 다 이렇게 무사하게 사는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마약 맛을 보았던 그가 마약에 미쳐 계속 마약을 하다 폐인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떠나가고 자식이 떠나가고 다 떠나갔습니다. 그가 죽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마약 때문에 나는 사랑스러운 내 아내를 잃었다. 내 귀한 자식을 잃었다. 마약 때문에.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잃었다.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제가 오늘까지 목회를 하면서 교회생활이 힘들다고, 헌금이 힘들다고, 충성이 힘들다고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나간 사람 중에 잘된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다 뒤안길로 사라지고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에 남아서 앞으로 전진한 사람은 승리하고 그 집도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약속된 복을 받지 못하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하는데 약속된 창고가 차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될 때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모 회사와 미얀마 정부가 협력해서 천연가스전 발굴 작업을 했습니다. 2년간만 파면 가스가 솟아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3km를 파 들어가도, 추정한 지층을 세 개나 탐사해도 가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공동 투자를 한 다른 나라의 회사들은 다 그 일에서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D회사의 양 상무는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파내려갔습니다. 마침내 2004년 1월, 3km에서 300m를 더 파내려 갔을 때 가스전이 나왔습니다.
세상의 일도 인내해야 얻어지는데 하물며 신앙이겠습니까?
천당에 갈 때까지,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인내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가면 야곱처럼 빛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죽고자 하면 사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북유럽 4개국을 돌면서 감동을 받았지만 특별히 핀란드에서 더욱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핀란드는 역사상 전쟁이 990회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 사상이 들어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피를 흘리며 투쟁하는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공산 사상에 빠지면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의 어머니들이 믿음이 좋아 기도하여 결국 그 나라가 민주주의로 견고히 섰습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나라가 사는 길은 예수뿐이고 하나님뿐이고 교회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국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 우리 개신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지상 천국 같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범죄가 거의 없고 경제인들의 청렴결백 지수가 세계 1위입니다. 세금을 속이는 경제인이 없고, 부정을 행하는 공무원이 없습니다. 사창가가 없고, 스트립쇼를 하는 곳이 없고, 요정이 없습니다. 노래방도 없습니다. 수돗물은 바로 마실 수 있는 100% 좋은 생수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을 교회에서 합니다. 평화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은 개인을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그리고 “마하나임, 두 진영이네. 하나님의 천사들이 있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창세기 31장 3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네 조상, 네 족속의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너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말대로 하면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하나님만 함께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가, 천사가 함께했습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 1장 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는 힘이 대단합니다. 삼손 같은 장사도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쳐 죽인 다음에는 지쳐 쓰러졌는데, 천사는 혼자 앗수르 군 18만 5천 명을 치고도 생생합니다. 한 천사도 그렇게 강한데 천사의 군대가 와서 야곱을 도와주니 누가 야곱을 해치겠습니까?
열왕기하 6장에도,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에워쌌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영안이 밝아진 엘리사의 사환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으니 누가 엘리사를 건드리겠습니까?
여러분, 온 세상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적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길을 가면 하나님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도 함께하며 우리를 도와줍니다.
한 사람이 도와주어도 힘이 납니다.
폴 툴리 교수는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는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킥킥 웃곤 했습니다. 학생들이 자꾸 킥킥거리니 학교 가기가 두렵고 강의 시간이 두려웠습니다. 독일 사람이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잘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터덕터덕 집에 오니 한 학생이 보낸 카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가 때때로 웃는 것은 선생님의 발음이 재미있어서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니 힘을 내세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는 그 카드를 읽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아! 학생들이 웃는 것은 나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있어서였구나.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그가 힘을 얻어 세계적인 교수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한 학생이 도와주어도 이렇게 힘이 나는데,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천사가 돕는데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따라 합시다.
“우리는 신바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니 담대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도움이 없어도 생각만 잘 해도 인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한 중년 부인이 사랑하는 남편을 병으로 잃어버렸습니다. ‘원수 같은 남편……. 내가 눈이 멀었지.’ 하는 남편이라도 죽고 나면 섭섭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며 기대고 살다가 먼저 죽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부인이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부인에게 한 청년이 와서 말했습니다.
“부인, 저는 부인의 충격, 슬픔, 상황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의 무덤에서 사실 겁니까? 저를 보세요. 제게는 제 생명같이 사랑하는 소중한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도 저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며칠 전 그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십 수 년간 함께 살았잖아요. 저는 사랑하는 약혼녀와 하루도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하루도 함께 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저도 이렇게 사는데 남편과 십 수 년을 함께 산 부인이 어찌 이러십니까?”
그때 부인이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한 새댁은 14개월 된 아기를 잃었습니다. 14개월 된 아기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런 아기를 땅에 묻고 오는 엄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댁은 다음 주일에 크게 감사하고 아주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 예쁜 아기를 잃고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한 아기를 14개월 동안 함께 살게 해주셔서 행복을 누리게 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우리 아기가 나보다 우리 아기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내가 왜 슬퍼하겠나?’
이것이 신앙의 위대함인 줄 믿습니다.
따라 합시다.
“믿음은 위대하다.”
아무리 캄캄한 일을 만나도 생각만 잘해도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도우십니다. 천사가 돕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는 걱정이 없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고 기름 값이 비싸니 사람들이 자동차를 세워 놓고 자전거를 많이 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도 예전처럼 쌩쌩 달리지 않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다시피 140, 150으로 막 달렸는데 지금은 기름을 아끼느라 그렇게 달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경제속도로 달리면 기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고도 덜 나고, 사고가 나도 다치기만 하지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동차를 조심해서 타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기름 값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달러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러가 오르니 외국으로 아들딸을 유학 보낸 부모들은 가슴이 탑니다. 또 우리 한국 교회가 2만 명의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했는데, 달러가 오르니 선교비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면 걱정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이사야 40:30-31)
기름 값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달러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주식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우리가 말씀의 길로 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결론적으로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계시다가 서울로 이사 간 여 집사님 한 분이 제게 몇 번이나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힘들어요. 힘들어요. 기도해 주세요.”
학원을 하려고 빌딩을 하나 샀는데, 얼마나 허가가 까다로운지 두 달이 지나도 개원을 하지 못하니 제게 힘들어 죽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제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된다.”라며 더 열심히 기도하며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3일 전에 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목사님! 할렐루야!” 하는 목소리가 팔딱팔딱 뛰었습니다. 두 달 전의 시청 공무원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학생 수를 조금밖에 허락해 주지 않았고, 또 이런저런 일로 허가를 미루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담당직원이 바뀌어 새로운 사람이 왔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서 인원을 두 배로 허락해 주었답니다. 두 달 연장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다며 기뻐서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고 하지 않더냐?”라고 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제가 몇 달 동안 총회 섬기는 일을 하면서 얼마나 욕을 먹고 공개 망신을 당했는지, 아마 제 평생에 들을 욕과 망신을 다 당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칭찬은 들었을지라도, 욕을 들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들을 들으니 참 괴로웠습니다. 실제로 제가 잘못한 일이나 말로 욕을 먹으면 괜찮은데, 이상한 말을 만들어 욕하니 괴로움이 한이 없었습니다.
‘오! 주님. 어찌 이렇게 되나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 몇 달 동안의 일로 인해 얻은 축복이, 얻은 은혜가,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이번에 얻은 것 중에 제일 큰 것은 제 얼굴이 두꺼워진 것입니다. 예전이라면 우리 교인들 중 두세 사람만 제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어도 제가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제게 욕을 해도 ‘흥! 마음대로 해라.’ 하며 뻔뻔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그것을 배웠습니다.
요셉이 누명을 덮어쓰고 감옥에 들어갈 때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는 억울했어도 결국 총리가 됩니다. 할렐루야!
말씀의 길을 따라가면 잘 되어도 잘 되고, 안 되어도 잘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