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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돌아보소서
시편 80:1~19
오늘 저녁 봉독한 시편 80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큰 환난 중에 있을 때 쓴 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를 통해 많은 환난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이 큰 환난에서도 그들을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환난 속에서도 노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택한 백성이 되었다고 하여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제는 닥치는 이 환난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환난 때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 이하에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어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리라” 하셨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했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아니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들어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환난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첫째, 1-3절은 양 떼 같은 이스라엘을 돌아보소서 하는 호소입니다.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여기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양 떼로 비유했습니다.
시편 100편 2절에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은 너무 유명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될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도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한 것은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양은 짐승 중에서도 지혜롭지 못한 짐승입니다. 다른 짐승은 밖에 나갔다가도 자기 집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을 집에서 키워 보면 멀리 갔다가도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얼마나 용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양이란 짐승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길을 스스로 찾아다닐 줄 모르는 짐승입니다. 이렇게 양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고집은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현명한 것 같으면서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본향을 떠나 이 세상에 와서 살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본향 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갈 길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해매다가 쓰러져 죽는 심령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고집이 얼마나 강합니까? 그러나 길을 잃어버린 양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왔다는 말은 없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목자에 의해서만 양의 우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천하 만물에는 다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는 길, 자동차가 가는 길, 서울로 가는 길, 부산으로 가는 길, 형이하의 길, 형이상의 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는 길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길이 있습니다. 딸은 딸의 길이 있고, 아들은 아들의 길이 있습니다. 스승에게는 사도가 있고, 여성에게는 부도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지도자의 길이 있고, 국민은 국민의 길이 있습니다. 신사에게는 신사도가 있고, 무사에게는 무사도가 있습니다. 바둑에는 기도가 있고, 장사하는 데는 상도가 있습니다. 성공의 길도 있고, 실패의 길도 있고, 승리의 길도 있고, 패배의 길도 있고, 행복의 길도 있고, 불행의 길도 있습니다. 밝은 길이 있고 어두운 길도 있습니다. 진리의 길이 있고 죄악의 길이 있습니다. 향상의 길이 있고 타락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는 옳은 길이 있고 틀린 길이 있습니다. 옳은 길을 정도라 하고 그른 길을 사도라고 합니다. 큰길을 대도라고 하고 작은 길을 소도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야 할 인생의 정도와 대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좁은 길을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좁은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넓은 길의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길을 잘못 가면 올바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왜 유황불의 세례로 망했으며 영원의 도시 로마는 천년도 못 가서 무너지고 말았습니까? 가야 할 길을 안 가고, 안 가야 할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기차가 궤도에서 벗어나면 탈선하여 사상의 비극을 자아냅니다. 자동차가 차도에서 벗어나면 전복합니다.
길을 바로 가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얼마나 힘찬 말씀입니까? 얼마나 깊은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인생의 정도는 대도입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 평화의 길, 자유의 길, 구원의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따를 때 생명을 얻고, 진리에 이르고, 자유함을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고 우리가 그 길을 따르고 있으며, 또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이 길을 따를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사의 길을 갈 수 없고 동물의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듯이 짐승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간의 길을 가야하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인생의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행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길을 찾는 지상의 나그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우리의 본향을 찾아갈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양인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양입니다. 우리 스스로 방어할 능력도 없고 우리 스스로 살아갈 만한 방편도 없습니다. 갈 길도 찾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의 양 떼들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갈 때 평안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얼마 가지 아니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 때가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활은 의존성을 떠난 인간의 생활이기 때문에 비극이 있을 뿐입니다.
양은 언제나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짐승입니다. 내가 유리 방황할 때에 주님이 나를 찾으셨다는 이 사실이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 분은 나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시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신 분이며, 나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부족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와 주셨습니다”(에벤에셀)라고 간증할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세상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살피시고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호소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어찌할까’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겐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모든 환경이 어렵고 캄캄하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의 등을 땅에 대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환경 요인으로 인해서 눕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늘에 캄캄한 구름이 덮여 있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희망이 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자매님이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얼마 전에 사랑하는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애들 셋을 데리고 아주 어렵게 어렵게 지내시는데, 살기가 너무 어려워 약을 먹고 죽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해서 도무지 일어나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면 어디에서 새 힘이 솟아나 며칠 동안을 살고, 또 피곤해서 지쳐 있다가는 삼일 기도회에 나와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사신다면서 “목사님! 제 주변에는 저와 같은 사람이 여러 분 있어요. 아마 교회에 나오는 것이 없었으면 벌써 죽은 지 오래일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의 양무리인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상처를 받습니다. 슬픔의 상처가 가슴 깊이 새겨집니다. 실패의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오류나 잘못도 마음의 상처입니다.
이 상처받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은 소생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다시 새로운 삶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이 복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잘못된 길로 갈 염려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희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향하여 그 영광된 빛을 비춰 주시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입니다.
이 시인은 너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꼭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고물에서 주무실 때 풍랑을 만났습니다. 자기들의 기술과 경험으로 최선을 다해 노를 저어 가려 했으나 저희 능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겁이 나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이 시인과 환난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을 불러 깨우는 것입니다. “주여, 더욱 더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주의 백성을 힘차게 도와주세요. 주여,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행하세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앞에서 행하셔서 그것을 보는 그들이 만족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세 지파는 성막을 뒤따라 광야를 행군한 이스라엘 진영의 기병대였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들을 앞장 서서 가던 하나님의 능력의 궤가 그들의 원수들을 혼비백산시켰던 일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둘째로 4-7절은 “눈물로 양식을 삼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소서” 하는 호소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마음 속에는 심각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노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하나님의 노하심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통 때에 그의 백성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노하셨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의 죄와 그 원수에 대해서 노하시는 것은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노하신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지연시키셨을 뿐 아니라, 기도 자체도 불쾌하게 여기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할지라도 죄를 품고 기도하거나 욕심으로 잘못 구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문맥상으로 보아 하나님이 노하신 것이 아니라, 저희가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나 응답되지 아니하니까 하나님이 노하신 것으로 생각한 것같이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인내와 끈기를 시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그의 백성의 슬픔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5절 말씀을 보세요.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매일 눈물 속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리울 때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며, 저희들의 실망하는 것을 볼 때 원수들은 서로 웃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일을 개시하게 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를 기적적으로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의 성이 아이라는 성인데, 그 도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아주 작고 모든 형편이 많은 군인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은 수의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 장군과 장로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땅에 엎드려 울며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차라리 이럴 바엔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기에 그냥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습니다.
주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쫓겨 돌아왔으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제가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우리를 포위하고 아예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서 끊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크신 이름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여호수아 장군은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이것이 이 시인의 기도의 취지입니다.
오늘 본문 4절과 마지막 절인 19절에도 똑같은 말씀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시인은 자기 민족이 하나님의 길에서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돌이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이킬 때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뒤로 하고 멀리 떠나갈 때, 가면 갈수록 우리 앞에 검은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집니다. 이제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향하면 우리를 두렵게 하던 검은 그림자는 더 멀리 뒤로 물러가고 오로지 하나님의 밝은 광채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정욕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보세요. 아버지를 떠나 허랑 방탕하던 아들이 주려 죽게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도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비추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끝으로, 8-19절까지는 “버림받은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돌아보소서” 하는 호소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것은, 아마 팔레스틴 지방에는 포도나무가 많기 때문에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8절을 말씀을 보세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하던 처지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옮긴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이요, 이 포도나무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연약하므로 받침대가 필요하며, 생각지 않았던 가지들이 뻗어나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 포도나무를 심으셨고 오늘까지 보존해 오셨습니다. 비록 그 주위에 있는 이웃들이 이 포도나무를 해하려고 시도했지만 꺾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9절에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여” 했고,
10절에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도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처럼 왕성한 것을 말씀합니다.
가나안의 산들은 포도나무 그늘로 덮였고,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길게 뻗쳐 있을지라도 포도나무 가지처럼 연약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훌륭한 백향목의 가지처럼 튼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강한 용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배권은 이웃나라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덩굴이 강까지 미쳤습니다” 남쪽으로 애굽의 강, 북쪽으로는 다메섹강, 동쪽의 유브라데강까지 미쳤습니다.
다니엘서 4장 20-21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강대함을 무성한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가지와 덩굴은 이렇게 퍼졌으나, 그 열매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한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호세아서 10장 1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포도를 기대하여 오셨는데 들 포도를 보셨습니다.(사 5:21)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지 못하고 들 포도를 맺었다면 그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바로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랑하셔서 영적으로 말해서 황무지와 같은 곳에 포도나무를 100여 년 전에 옮겨다 심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한국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기독교 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부흥과 성장을 가져와서 이제는 세계 교회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덩굴이 강까지 미쳤습니다.”
이제 이 포도나무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만큼 무성한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포도나무에 포도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이면 찍어 불에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덩굴만 뻗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열매 맺는 포도나무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개인이든, 교회든 포도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이 요한복음 15장에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그의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담대한 간증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떠나 있으면 그 가지가 아무리 충실해 보여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열매 맺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원하는 대로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리고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좋은 열매 맺으면 좋은 나무요, 나쁜 열매 맺으면 나쁜 나무입니다. 긴 설명이나 선전이 필요 없습니다. 무슨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포도 열매를 맺읍시다.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 한다고요? 이사야서 5장 1-7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였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같은 진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택한 백성의 비극입니다. 우리 한국에 심어진 포도나무는 아주 좋은 포도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사회에 유익을 주고,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탄식의 비밀
(시 80:1-19)
찬송 545장
시편 80편의 배경은 바벨론이 아닌 앗수르에 의해 B.C.722년 즉 유다보다 132년 앞서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민족적 애가입니다.
그래서 본시는 원수에 의해 패망한 이스라엘 민족의 참상이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애끓는 호소가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을 한 포도나무에 비유하면서 그 넝쿨이 산들을 가리우고 바다까지 강까지 뻗었거늘 어찌하여 불타고 작벌 당하듯 하셨느냐고 호소합니다.
이 시편기자의 통곡은 우리 마음속의 성령의 탄식하시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쳤어도 마음에 깊이 듣지 않고, 그저 평안하겠지, 강한 애굽이 우리를 도울 테니까 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섬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영적위기 개인적 국가적 위기를 깨닫고 진실로 회개하고 돌아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참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