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문(金文)과 갑골문의 차이
金文은 주(周) 때에 만들어진 상형문자로 청동기에 제작되었거나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상나라 때도 족휘 등이 청동기에 주조되었다. 전국시대 때도 주조했다. 제기인 정(鼎)이나 종(鐘)에 새겨져 있어 종정문 이라고도 한다. 금문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서주시대 때의 문자를 말한다.
청동기는 왕의 상징이듯이 금문도 왕을 칭송하는 내용이 많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복한 역사적 사실도 다루었다.
금문은 형체가 갑골문과 유사하다. 그러면서도 서체와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갑골문은 서체가 칼로 새긴 듯이 날카롭고, 가느다란 모양세이다. 금문은 서체가 더 굵고, 둥글둥글하다. 글자 수도 훨씬 많아진다.
주나라가 상을 정복했지만 문화수준은 상이 훨신 더 높았다. 주는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의 지식인을 데려와 반은 도웁지에 반은 주의 근거지인 서족 지역에 머물도록 했다. 상나라의 지식과 문화를 빨리 흡수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는 정복당한 상나라 문자 갑골문을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 이 정책으로 후에 중국이 분열되었을 때도 같은 문자를 사용하였다. 같은 문자는 중국이 분열하였을 때 다시 통일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주는 갑골문을 공식문자로 태택하였지만 자기나름으로 갑골문의 상형성을 부호화하고, 단순화하여 서체의 가변성을 늘렸다. 이로서 갑골문과 금문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렇더라도 금문에는 갑골문의 ㅚ화성이 많이 남아 있다.
갑골문과 금문의 차이가 문자 형태의 표면성에서 뿐아니라 문자의 사용방식 (또는 문자의 위상)에도 차이가 있다.
갑골문은 제사가 목적이었고,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닌 신을 위한 도구였다. 주나라의 금문은 인간을 위해 사용하였다.
주나라가 다시 여러 작은 소국으로 분열하면서, 각 나라는 형태가 더 아름답도록 문자를 만들었다. 독창적인 문장 형태를 창조함으로 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춘추시대에 더욱 심했다.
이에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다시 문자를 통일했다.(소전) 그래도 글자가 4각형이라는 기본 형태는 보존했다.
첫댓글 언어학자 촘스키는 '언어는 공동체 구성원이 합의한 일종의 계약서이다.'라고 했다. 촘스키는 아주 어렵게 설명을 했지만, 우리는 생략합시다.
인간세상의 사유세계나 삶, 사회생활 방식이 언어 속으로 들어와 있으므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사유나 사회생활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라고 설명할 수 있다.
언어 속의 사유와 사회규범은 유전인자가 되어서 그대로 유전한다. 즉 자손에게 이어진다고 했다.
주가 상을 정복하고, 상의 문자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상의 사유세계나 사회규범을 수용했다는 뜻이다.
周가 그래도 商과 달라야 자신의 정복을 합리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帝사상에서 天사상이네요.
天사상을 설명하고, 합리화 하려다보니 --------
周를 롤-모델로 하는 공자가 자기의 사상을 펼치는데, 周가 商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함으로서 유가학파가 형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