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彌勒佛)은 미래불이다.
미륵신앙은 내세신앙이다.
후삼국의 궁예(弓裔)와 고려 우왕 때 이금(伊金)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혹세무민함으로서 미륵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북이면 원덕리 미륵석불
다음은 이 미륵불에 얽힌 이야기.
6. 25 동란중 이 곳을 지나던 한 인민군이 '이런 돌기둥은 없애버려야 한다'며 미륵불의
면상에 총질을 했다.
그 인민군은 5리도 채못되는 사거리에서 피를 토하고 급사했다.
며칠 후, 이 마을 한 노파는 코가 몹시 아파서 온갖 치료를 다해 보았으나 별무 효과였다.
불심이 강한 노파는 꿈에 미륵을 본 후 아들을 불러 미륵불에게 치성을 드리도록 일렀다.
미륵불을 찾아간 아들은 자기 어머니의 아픈 코와 같은 위치의 미륵불 코가 깨어져 있고
그 자리에 박혀 있는 총알을 발견했다.
아들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총알을 빼냈다.
그 뒤 노파의 코병이 말끔히 나았을 뿐 아니라 80 넘게 장수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의 이 미륵불에 대한 신심이 깊어졌다.
아들낳지 못하는 여인의 백일기도와 치성드리는 이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
(주인공 노파 아들의 이름이 강대엽이라던가)
교통수단이 없던 때 남도인은 물론 이 재를 넘어야 했던 이들(유배자 등)은
해발 400m 산등성이에 올라야 했다.
길손 외에는 인적이 드문 것을 도적떼가 모를 리 있는가.
그래서 애환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꼬불꼬불 신작로가 개설될 당시의 고개마루는 276m였던가.
1번국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확장과 포장을 거듭하며 깎아내려 220m인가.
기차가 지나가도록 굴을 팠다.
차량이 고속으로 달리기 위해 또 굴을 뚫었다.
복선, 차선 확장 등의 이유로 굴은 자꾸 늘어났다.
용도폐기된 굴도 있다.
이제는 국도에도 굴이 필요한가 보다.
하긴 토목기술의 발달로 굴 뚫는 일이 식은 죽 먹기라는데 아니 그러겠는가.
갈재는 굴 공화국이다.
글 위는 장성쪽에서 보는 갈재 / 글 아래는 정읍쪽의 갈재(통일공원)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싸움때 나는 처음 석달을 서울에서 보내야 했다.
이른바 적치 3개월이었다.
1. 4 후퇴는 밀리고 밀기 반복의 2번째 사건이다.
나는 전북 정읍땅으로 밀려왔다.
고향땅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태어난 곳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고 여기 정읍 시내에서 특별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그 곳은 아직도 적의 수중에 있으며 내 가족은 몰살당했고 나는 대를 이을 유일한 생존자
라는 이유로 감시(?)가 철저했으니까.(여러 날이 지난 후 잘못된 정보였음이 밝혀졌지만)
여기도 밤마다 전투가 벌어졌고 피아간 희생자가 속출하던 때였다.
이 때 나는 호남중학교(표석) 임시 수강생이었다.
호전되는 전세 따라 북상할 때까지 5개월간.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개교했다는 소규모(당시) 사립중학교지만 나로 하여금 피난중에
방황하지 않고 면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학교다.
그런데도 나는 그 후 단 한번도 이 학교를 찾지 못했다.(무에 그리 바빴는지)
그랬는데 삼남대로 덕에 표석이라도 어루만져 볼 수 있었다.
팔인회맹유적선돌(위)과 설명비(아래)
정읍고모네장터
이모네 보다 고모네가 더 친근한가.
전북 정읍시 북면이 만들어 낸 지자체 최초의 브랜드.
365일, 연중 무휴의 상설 농산물 시장이란다.
짚삿갓 쓴 나무장승이 인상파다.
숙빈 최씨가 천애의 고아 거지소녀때 대각교에서 부임중인 영광군수 민유중을 만남으로서 신데렐라가 된다.
그 대각교 옆에 만남의 광장 표석이 섰다.
21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이조 500년사에서 유일한 무수리 출신이다.
'무수리'는 궁중 나인의 세숫물 시중을 맡았던 여종이다.
임금(영조)의 콤플렉스를 이해할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