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시모음
一椀茶出一片心 (일완차출일편심) 한잔의 차는 한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一片心在一椀茶 (일편심재일완차) 한조각 마음은 차에 담겼네.
當用一椀茶一嘗 (당용일완차일상) 이 차 한잔 맛 보시게,
一嘗應生無量樂 (일상응생무량낙) 한 번 맛보시면 한량없는 즐거움이 생긴다네.
中間
林白湖將乘馬, 僕夫進曰: “夫子醉矣. 隻履鞾鞋.” 白湖叱曰:
"由道而右者, 謂我履鞾, 由道而左者, 謂我履鞋, 我何病哉!”
由是論之, 天下之易見者, 莫如足, 而所見者不同, 則鞾鞋難辨矣.
故眞正之見, 固在於是非之中.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낭환집서(蜋丸集序)〉
임백호(林白湖)가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서며 말했다.
"나으리! 취하셨습니다요.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 짝 씩 신으셨어요.”
백호가 꾸짖으며 말했다.
"길 오른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길 왼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무슨 문제란 말이냐?”
이로 말미암아 논하건대, 천하에 보기 쉬운 것에 발만한 것이 없지만,
보는 바가 같지 않게 되면 가죽신인지 나막신인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바르고 참된 생각은 옳다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짝짝이로 신은 임제(林悌)의 신발을 제대로 보려면,
길 왼편에서 보아도 안 되고 길 오른편에서 보아도 안 된다.
왼편도 오른편도 아닌 정면에서 보아야 한다.
그냥 걸어가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짝짝이 신발도
말 위에 걸터앉고 보니 분간할 방법이 없다.
저마다 자기가 본 것만 옳다고 여겨
나막신입네, 가죽신입네 하며 싸운다.
막상 말에서 내려서 보면 둘 다 틀렸다.
짝짝이 신발을 신었을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기에
자기가 본 것만을 고집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듯 미처 생각지 못할 일이 너무도 많다.
내 눈만 고집하고 남의 눈은 인정치 않으니 싸움이 난다.
나는 이게 옳은데, 상대방은 저것이 옳다고 하니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남들도 으레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다가 일을 그르친다.
현상만 보고 우왕좌왕 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을 죽이고 남의 생각만 무작정 따른대서 될 일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지점에 양다리 걸치고 있는데서
해결될 문제는 더더구나 아니다.
이쪽과 저쪽의 문제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사태의 진상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곳을 찾기가 참 어렵다.
-자료출처 鄭 珉 한문학-
笑臥亭
笑觀山色山亦笑 웃으며 산을 보면 산도역시 웃고
泣聽水聲水亦泣 울면서 물소리 들으면 물도역시 울어댄다
단종(端宗)이 물러난뒤 유의손(柳義孫)은 高山에 물러나 살면서 정자(亭子)를 지었다.
그 亭子의 이름이 소와정(笑臥亭)이다.
笑臥亭翁閒臥笑 늙은노인이 한가로이 누워서 웃네
仰天大笑復長笑 하늘을 우러러 크게웃고 또 길게 웃네
傍人莫笑主人笑 주인의 이 웃음을 옆사람들아 웃지마라
頻有爲頻笑有笑 찌푸릴때는 찌푸리고 웃을때는 웃느니라
소와당의 주인 옹(노인)은 한가로이 누어 웃고나서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고 자꾸 웃는다. 눈살을 찡그리고 웃을 일이 있어 찡그리고 웃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은 주인이 웃는다고 웃지말지어라.
주] 이 시는 회헌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의 황방산 아래에서 소와정을 짓고 은거하실 때 수양대군이 임금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데 비유(比喩)하여 지은 시이다.
기양서당
이 서당은 전주 류씨 수곡파의 세덕사이다. 처음에는 기봉 류복기 선생께서 1615(광해군 7)에 서재를 건립하여 강학하면서 제자손들의 수학과 자신의 유식처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1716(숙종 42)에 서당으로 중창하였고, 그후 추원사를 세워 1780년(정조 4)에 기봉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6년(순조 6)에 회헌 류의손 선생의 위패를 추봉하였다. 매년 세초 정월 6일에 후손들이 사당에 정알의 예를 하며 춘추 3월과 9월 초정일에 향사를 치른다.
이 건물은 원래 무실 남쪽 채양 산록에 위치하였으나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안동군에서 이 곳 광산 북록 수곡이주단지 남쪽에 이전 보수하였다. 이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716 년에 서재를 서당으로 중창하였는데 상량문은 호와 류현시 선생이 찬하였고 류봉시 선생께서 글을 썼다. 이때 도감은 류이재, 류화시 선생 두 분이었으며 유사는 류영시, 류덕재 선생이란 기록이 확인되었다. 함께 발견된 '양송장'을 보면 숭정기원후 경신년(1860) 에 강당을 중수했는데 상량문은 도감을 맡은 동림 류치고 선생께서 찬하였고, 동와 류형진, 서파 류필영 선생이 각각 중수기를 썼다. 건물의 구조는 사당인 추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인 역락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 크기의 장방이 딸려있다.
"역락"이라는 강당명은 논어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강당에 딸린 양쪽 방에도 각각 "숭덕재"와 "광업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류의손(1398-1450)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숙이요, 호는 회헌 또는 농암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직제학 빈의 아들로 1419(세종 1)에 생원시에 합격되고, 142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 수찬을 역임하였는데, 1436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곧 직제학에 올랐다. 선생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히고 도승지가 되었다. 그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말년에는 낙향하여 전주 황방산에다 소와정이란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류복기(1555-1617)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성서요 호는 기봉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인의 윤선의 손자로 외숙 김성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구 선생과 교유 하였다. 선생은 근시재 김해, 금역당 배용길 등과 같이 임란시 창의하여 예천 등지에서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 장군을 따라서 화왕산성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굶주려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힘썼다. 벼슬이 예빈시정에 이르렀다.
○ 배향인 : 류복기
○ 위 치 : 안동시 임동면 소곡리
○ 교 통 : 안동에서 영덕방면으로 22km.
夢魂(몽혼) - 꿈속의 넋
이옥봉(李玉峰)
近來安否問如何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해설>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연모의 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성인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사무치는 연모의 정을
그려내고 있다.
승구(承句)에서는 그리움을 달빛에 비추어
하소연하였고, 결구(結句)에서는 꿈 속의 발자취가 현실로 옮겨진다면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되었으리라 하여
임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전구(轉句)에서의 시상 변환이 특히 뛰어나다. (옥봉집(玉峰集)에서)
첫댓글 좋은글 접하네요
지기 아제님 편안한 밤되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