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개혁의 선구가 되었던 대표적 인물 이승훈(李昇薰·1864~1930).
조선후기 평안도와 황해도는 광산 개발, 인삼 재배, 중국과의 무역 등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개성(開城)의 송상(松商)과 의주(義州)의 만상(灣商)이 그 예이다. 경제력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관직 진출에서 차별을 받자 관서 지역 인사들은 개항 후 서구 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매우 개방적 태도를 보여 개혁의 선구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다.
'이승훈씨는 원래 한미한 집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는데, 어려서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인간의 도리를 할 정도의 항산을 갖게 되었다. 심지가 충실하고 품행이 맑아 도내 실업가의 신망을 얻어 영업이 막히지 않았으나 의협심이 뛰어나 가난한 자를 구휼함에 난색을 표하지 않았다. 풍족한 재정가가 아님에도 시국의 정황을 관찰하여 국가의 전도를 생각함에 교육이 제일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재산을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황성신문' 1909년 2월 9일자 '이승훈씨의 역사를 들어 전국인사들에게 고한다'는 논설 내용이다. 평북 정주(定州)에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이승훈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정주의 놋그릇 상점 점원으로 시작하여 유기공장을 가진 사업가로 성장했다. 1907년 그가 도산 안창호의 영향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할 때 '군수의 방해와 사족들의 냉소'를 이겨내야 했다. 오산학교가 생긴 뒤 그의 '한마디 말과 한방울의 눈물'에 감동한 각지 인사들이 앞다투어 학교 설립에 나서, 7개월 동안 정주군에 무려 48개의 학교가 새로 생겼다. 순종이 그곳을 순시할 때 이승훈을 초치하여 접견하고 격려금을 하사했다.
▲ 1912년 태극기를 든 오산학교 2회 졸업생들.
그가 세웠던 토착 유기공장이 일본 도자기의 대량유입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1908년 2월 토착자본가들과 연합하여 '평양자기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이승훈은 "외래자본 특히 일본 대자본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관서지방의 토착자본이 결합해야 한다"며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고려자기 이후 한국의 공업이 타락했는데, 평양자기회사의 자기 제조로 물품의 아름다운 실효가 나타났으니 이후 제반 실업이 연속하여 일어날 줄을 믿으리로다(1909.10.18.)'고 발전을 축원했다.
자본금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한 자기회사와 달리, 서적상 '태극서관'은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태극서관은 각급 학교에 교재를 공급하여 교육구국운동을 뒷받침했고 '신보'의 평양지사 건물로도 사용됐다. 안창호·이승훈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은 이곳에서 자주 회합하여, 태극서관은 관서 구국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1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데라우치 총독 살해 모의 혐의로 이승훈 등을 체포 투옥시켰다. 3·1운동 때 이승훈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또 옥살이를 했다. 사업가 겸 교육자, 출판인, 독립운동가로 '1인 다역(多役)'을 해야했던 그의 삶은 곧 시대의 요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