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예배학 칼럼 1
“모이는 공예배의 중단은 제일 먼저, 선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최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신원균 교수(분당한마음개혁교회,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회장,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
현재 모이는 공예배 논쟁으로 한국교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각 당회는 신중하게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공예배를 너무 쉽게, 선제적으로 대대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떠밀리듯 중단한 예는 종교개혁 500년 역사 이래로 정말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역사적으로 장로교, 청교도는 ‘엄밀한 주일성수자’라는 명칭으로 불릴 정도로 주일에 모이는 공예배를 목숨처럼 지켜왔던 성도들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외치며 주일 공예배의 자유와 확립을 위해서 수많은 희생과 피를 흘렸습니다.
물론 전쟁, 재난, 전염병과 같은 특별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성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난이나, 임시 중단, 장소를 이동하여 예배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수많은 선조들은 피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성도들과 공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희생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나 칼빈, 베자, 낙스가 사역한 흑사병의 시절에도 예배가 중단된 예는 거의 없을 정도로 공예배는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하는 유형교회의 본질이요 성도들의 거룩한 사명입니다. 전염병과 같은 특별하고 부득이한 경우의 공예배 지침은 유형교회의 본질과 4계명의 성경적 중요성과 교회역사의 여러 실례들과 장로정치의 교회법 아래에서 그리고 국가적인 형편을 고려하여 당회가 자발적이며 공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엄중한 일입니다.
장로교회는 의료적 대책을 무시하고 기도와 신앙행위만 강조하는 이원론적인 ‘율법주의’를 반대합니다. 오히려 의료적 수단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는 ‘일반은총’을 존중하기 때문에 재난 시에 국가의 보건정책에 협조하며,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료적인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윤리’, ‘무율법주의’처럼 주일성수와 모이는 공예배를 쉽게 포기하고 부득이한 상황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한국교회 역사는 초기부터 모이는 유형교회 질서를 무시하는 ‘무교회주의’나 개인의 주관적 신앙만 강조하며 공예배를 회피하는 ‘무형교회 중심주의’와 같은 잘못된 교회론들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 SNS의 발달로 ‘사이버교회’, ‘가정교회’, ‘열린교회’, ‘유튜브 신앙’ 등과 같이 신무교회주의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유형교회의 공예배 중단은 신중해야 합니다.
전염병과 공예배의 신학적 문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1편에서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2편에서 히브리서 10장25절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현장의 공예배를 부정하는 분들이 근거로 삼는 대표적인 구절이며, 히브리서는 전염병을 무시하고 현장예배만 고집하는 분들이 근거로 삼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을 개혁주의 교리 안에서 바르게 이해한다면 전염병과 공예배의 신학적 과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4장 23-24절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현장 예배’를 부정하는가? 이 구절은 우선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NA28]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 “4:24 [KJV]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이 구절은 16-17세기에 재세례파와 퀘이커교도, 경건주의, 신비주의, 자유파(아그리콜라) 등을 통해서 모든 형식적 예배를 부정하고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과 뜨거움의 예배를 강조할 때 사용했던 근거구절입니다. 19-20세기에 미국부흥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도 동일하게 형식적이고 질서적인 예배를 거부할 때 사용했습니다. 21세기에는 코로나 전염병 아래서 현장 예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과연 이 구절은 형식적이고 현장 예배를 거부하는 구절인가요?
위 구절은 신약예배의 본질을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4장 문맥의 흐름을 보면 형식적 예배나 현장예배의 거부가 아니라 구약의 예배형식이 신약에 새롭게 바뀌었다는 중요한 선언입니다. 즉 “(히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는 선언처럼 구약의 의식적 제사적 예배가 신약에 와서 제사의식이 폐지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육체적이고 의식적이고 제사형식적인 구약예배형태에서 영적이고, 내적인 형태로 신약의 예배형태가 변화됐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선언에 기초하여 신약적 예배는 구약의 외적형태의 의식적 제사예배와 달리 영적이며 내적인 형태이며 예수님의 말씀(성경)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라고 합니다. 이 본문은 의식적 제사예배와 영적인 새로운 질서적 예배의 대조 개념이지 현장 예배나 질서적 형식 예배를 부정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마치 영의 새로운 것과 의문의 묵은 것(롬7:6),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영으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3:6)처럼 구약의 제사적 율법적 문자와 신약의 성령의 역사와 영적인 형태의 대조입니다. 물론 구약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드렸지만 외적인 제사의식 때문에 구약예배는 항상 외적인, 육체적인 예배로 불렸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원과 복음의 본질의 더욱 명확해져서, 그리고 예배 질서가 간략하고 보편적으로 드릴 수 있는 간편함에서 영적이라고 불려집니다.
이 흐름 아래서 칼빈과 박윤선 목사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된 자가 온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신약예배의 특징을 제시하였고, 그 예배는 반드시 진리(성경)이라는 계시에 기초해서 드려져야 하는 규정적 성격이라고 언급합니다. 즉 신자의 정성, 마음도 포함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성령과 성경 개념입니다. 성령(신령)과 성경(진리)의 의미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신약교회가 선포됐듯이 성령의 오심으로 구약예배가 폐지되고 신약의 새로운 예배가 시작됐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 신약의 예배는 주관적 뜨거움이나 현장이 없는 무형식이나 무질서의 예배가 아니라 가르침, 기도, 떡을 뗌(성찬), 교제(행2:42)에 기초하여 신약성경이 명령하는 새로운 질서적 예배인 규정적 예배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청교도 주석의 대표인 M 폴과 근대 미국장로교 신약학자인 핸드릭슨은 개인의 마음도 포함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제사예배와 대비되는 영적이고 내적인 형태로 소개하며, 그 기준은 성경(진리)에 기초한 신약적 예배로 소개합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마음으로, 진심으로’와 ‘성경으로’의 뜻으로 제시합니다. 역시 이들도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신자의 진심을 담은 신약적 예배의 변화를 제시하고, 그 예배는 반드시 신약성경의 규정적 질서 예배로 향합니다.
원문적으로 보면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에서 ‘퓨뉴마티’는 통상 ‘성령’에도, 신자의 진실된 ‘마음’에도 모두 사용합니다. 즉 둘 다 가능한 해석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퓨뉴마’의 뜻은 4장 전체의 문맥에서 봐야 하고, 그런 문맥에서 보면 둘 다 가능합니다. 특히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πνεῦμα ὁ θεός)라는 표현에도 역시 프뉴마가 사용됩니다. 이런 흐름 때문에 KJV은 in spirit and in truth라고 번역했고, 제네바바이블은 “in Spirit and Truth”라고 하여 대문자로 표시해서 의도적으로 ‘성령’과 ‘성경’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진리(ἀληθείᾳ)라는 표현은 진실함으로, 진심으로의 뜻이 아니라 계시, 성경으로 표현입니다. ‘알레떼이아’를 신약에서는 대부분 성경이나 예수님(진리)에 대해서 사용하지 인간의 마음에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번역은 개정판의 ‘영과 진리’가 조금 더 좋습니다.
결국 요4:23-24절은 형식적 예배나 현장 예배를 부정하는 표현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예배질서의 변화를 강조하는 선언입니다. 즉 제사중심의 구약 예배가 예수님의 중보사역 완성과 성령의 오심으로 새로운 영적 예배로 전환됐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신령(영)으로 예배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영접한 중생된 신자들의 영적 본질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진정(진리)로는 새로운 신약질서의 예배 규정을 언급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신약예배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제사장이 아닌 목사의 집례로, 할례와 유월절이 아닌 세례와 성례로, 예루살렘 한 곳이 아닌 모든 지역의 장소에서 예배하는 간략하고 보편적인 예배질서형식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신약 이후로 더 이상 구약적 제사예배를 드리지 않고, 보다 더 영적이고 내적이며, 보다 간략하고 보편적인 예배질서로 드려집니다. 주일성수와 현장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특히 성례는 현장성을 기본으로 집례되는 것이기에 절대로 편지나 통신으로 온라인으로 세례나 성찬을 줄 수 없습니다. 다만 부득이함과 특수한 경우에 임시적이고 제한적으로 말씀중심의 공적예배를 온라인으로 허용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조 21장8항 이 안식일은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나아가 공적이며 사적인 예배와 부득이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의무를 위하여 전체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요한복음 4장을 근거로 현장예배를 무시하고 무형식 예배, 무질서 예배, 온라인 예배가 예배본질인 것처럼 말해도 안 되고, 반대로 현장예배만이 성경적 예배고 그 어떤 부득이함의 경우라도 온라인 예배는 악한 것이라고 비판해도 안 됩니다. 성례는 현장성이 본질이기에 위기상황에서는 잠시 보류하고 늦추어 진행하시고, 말씀중심의 주일공적 예배는 부득이한 경우 임시적인 방식을 허용해 주되, 현장예배가 느슨해지거나 게을러지지 않도록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의 대혼란 시대에 개혁주의 예배관이 회복되고 속히 성도들과 현장에 모두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예배의 자유가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신원균 교수(분당한마음개혁교회,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회장,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