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장 1978 / 김선화
그곳에 가면 비릿한 짠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퇴계로 쪽으로 길을 잡으면 건어물 시장이 주를 이룬다. 산골에서 자란 내게 그 비릿한 냄새는 서울살이의 설렘과 두려움이고 다른 한편의 생동감이었다. 휘황찬란한 잡화부터 전국 각처의 어물들이 밀집해 있는 상점들 덕에 눈이 호사를 누렸다. 고개만 살짝 돌려도 삐들삐들한 굴비 두름이 줄줄이 걸려 있어, 책에서 배운 자린고비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저 먹음직스러운 바닷고기를 밥 한 술 뜨고 바라보기만 할 때에는 보통 결심이 아니지 않은가. 그때 나는 그 길목의 물상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내 안의 나를 다지고 있었다.
오빠는 신이었다. 여덟 살 아래 동생에게 서울 간 오빠는 안 되는 게 없고 못 할 일이 없는 존재였다. 그가 과히 허풍 치는 일은 없었으나 매우 똑똑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고향마을 사람들은 그를 인정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그보다 멋진 남자는 없는 것 같았고, 꽤 쓸만한 자리에 여동생 하나쯤 박아 넣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라 여겼다. 열 동생을 둔 맏이로 간신히 중학교 졸업장을 따낸 그였지만, 평소 책벌레 소릴 들으며 유식 떠는 모습에서 절로 그렇게 믿음이 갔다. 한데 이 동생의 성화에 잡아놨다는 취직 자리가 가관이었다. 명색이 내가 재봉 분야에서 기술자 소릴 들을 만한데, 막상 정해진 곳으로 가보니 오빠의 중학교 동창생이 운영하는 소규모 봉제공장이었다. 사업장의 규모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고, 고향 사람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점이 적이 불편했다. 공장 대표는 이웃마을의 소 거간꾼 아들인데, 인상이 그다지 진실해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통하여 내가 그 밑에 든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그 집 부자父子의 신용이 좋지 않다며 조심 또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을지로에 있는 중부시장. 그 초입의 허름한 빌딩이었다. 소상공인들이 다닥다닥 모여들어 분주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실상 오빠의 동창생은 허울뿐인 대표이고, 제대로 된 능력은 앞머리 훌렁 벗겨진 고안사(디자인, 재단, 공장장 겸직)가 발휘하고 있었다. 그만이 의류시장의 흐름이라든가 해당 분야의 고급인력들을 훤히 꿰고 있어 일머리를 잡아나갔다. 고안사라는 직함은 그의 지긋한 경륜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비교적 듬직했다.
재봉틀 대여섯 대가 놓인 공장 안은 재봉사들 머리 위로 널찍한 목재다락이 가로놓여 있어 갑갑했다. 한 차례씩 일어서려면 다락 받침목에 머리를 툭툭 부딪쳤다. 하루 열두 시간 근무를 마치면 모두가 돌아가는데, 나는 따로 숙소가 없어 공장 바닥을 청소하고 자리에 들곤 했다. 그래도 그때만이 온전한 나를 만나는 평화로운 시간이고, 나를 위하는 공간이어서 그런대로 하루의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기거하는 건물 2층엔 수도시설이 없었다. 건너편 건물 1층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물을 길어 날라 식수로 사용했고, 빨랫감도 들고 내려가서 해결해야 했다. 한데 그 공공장소에는 전등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옆 동의 흐린 불빛에 의존해 더듬더듬 쌀을 씻고 빨래를 할 때면 오싹해질 때가 여러 번이었다. 시골에서조차 샘물을 울안까지 호스로 당겨 사용했는데, 역易으로 1978년의 서울 그곳에서는 물을 길어 들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게다가 공동수도는 따로 잠금장치도 없고 콘크리트 벽면이 볼품없이 깨져있어, 노쇠한 쇠파이프 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굵은 줄기의 물이 나왔다. 하수구의 논도랑처럼 드러나 있었으니, 그 실정에서도 밤낮으로 흘려보내는 물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일까. 계절이 한겨울이었다면 얼어서 고장 난 것을 미처 손대지 못했나 하고 이해라도 하련만, 폭한 봄 날씨임에도 어인 연유로 그처럼 수돗물을 낭비하게 했는지, 또 누군가는 분명 관리를 했을 터인데 왜 천장에 알전구 한 개가 달려있지 않았을까. 40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그때의 의문은 생생하여 흔전만전 넘쳐나던 물소리가 쟁쟁 걱정 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불안요인이 되기도 하고 깊은 서정에 잠기게도 하나보다. 만약 그때의 그 물소리가 산골 물소리여다면 시름겨운 심정에 다소 위로로 다가와 평화의 장단이 되어 곱절로 펄떡였으리라.
도시에 대한 동경을 막연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온 것은 아니지만,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환경은 나를 번번이 놀라게 했다. 생활식수보다 더한 불편요인이 화장실 사용이었다. 먼 데까지 결어가서 돈을 내야 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장 안의 숙련된 기술자들은 점심시간 외엔 퇴근 시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들 옆엔 뚜껑 덮인 플라스틱 통이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처음엔 그것의 정체가 의아했으나 개인 커튼 뒤로 살짝살짝 숨었다 나오는 그녀들을 보며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처럼 얼치기야 한참씩 걸어가서 회당 20원을 내야만 하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했지만, 고급인력들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사社측에서 볼 때 지장이 많았다. 물질적 손해로야 월급 2~3만 원이던 내 입장에서도 만만히 여길 일이 아니었다.
매번 돈을 들고 화장실에 드나들던 것도 그 시대의 우수 어린 문화라면 문화일까. 화장실 앞 의자에서는 점잖아 뵈는 수위守衛 아저씨가 앉아서 돈을 받고, 사용료를 낸 사람에게는 휴지를 몇 칸씩 떼어주었다. 오가는 길 양옆엔 염색공장이나 여러 부품가게들이 갖가지 냄새를 풍겨왔다. 시큼한 염료 냄새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자존감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문명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에도 이처럼 열악한 조건의 생활현장이 있다는 데에 덜컥 겁이 났다. 동생들 학업을 책임지기 위해 아늑한 둥지를 박차고 나온 내가 기껏 유료 뒷간에 다니는 일로 머뭇거려야 하다니 하루 뒤의 내일이 암담할 따름이었다.
결국 나는 두 달을 간신히 채우고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부모님 우려대로 공장 대표의 신용을 존중할 수 없어 제3의 자리로 이동을 꾀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오빠에게 말을 넣었지만, 외려 가난한 집 장남으로서 고뇌에 찬 한 청년의 인생 문제가 더 커 보였다. 가슴이 답답해진 나는 점심을 굶더라도 시장통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억척스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목소리를 귀에 쟁였다. 이곳저곳의 상인들 소리는 부지런함이 몸에 밴 외침이었다. 그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내 몫이고, 당장의 안정감보다도 보장된 미래를 꿈꾸는 것 또한 내가 그려갈 밑그림이었다. 잠시라도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공상에 빠져 시장을 질러 나오면 어느 틈에 퇴계로 쪽에 닿아 길 건너편을 바라다보고 서 있는 내가 보였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함흥냉면집 불빛이 환하다. 단정한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과 고급 승용차들이 들고 났다. 나비텍타이를 한 미소년들이 허리를 각이 지게 굽히며 그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데, 이편에서 건너다보는 세계는 딴 세상 같았다. '내 동생들도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면 철공소에서 연장을 만지거나, 염색공장에서 물감 밴 원단을 안아 나르거나, 식당에서 허리를 굽히며 접시를 나르겠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서둘러 돌아와, 공동수도가 있는 빌딩 2층의 구멍가게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그곳은 물건 파는 것 외에도 이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한다고 들어 둔 터였다. 어디가 될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갈구하며 가만가만 내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해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첫댓글 벌써, 가을속으로 들어 왔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이곳저곳 방황하다 을지로에 머물던 기억, 아련한 추억속 그림자를 보는 듯 합니다.
네, 풍요로운 가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