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완이라 썼다. 도서는 완당이라 찍었다. 늙은 완당이 썼다는 말일 게다. 쾌활이라니. 쾌(快)의 마음 심 변과 활(活)의 물 수 변이 닮았다. 마음은 물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여기서 뜻을 읽는다 했는데 읽는다는 것은 '본다'라는 뜻과도 같다. 사람들은 보통 문자는 읽는다 하고 그림은 본다 하는데 보거나 읽거나 매 한 가지 아니던가. 단지 문자일 때 읽는다고 쓰지만 문자 뿐 아니라 사물이나 삶을 통칭할 때도 읽는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너를 읽거나 삶을 읽는다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꽃을 읽거나 산하대지를 읽는다는 표현도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문자를 읽는다고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수행자들이 경(經) 읽는 것을 두고 '경을 본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렇듯 문자에는 본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마음도 그렇고 물도 그렇고 움켜쥐거나 붙잡아 놓을 방도가 없다. 마음이 있느냐 했을 때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없다고 대답할 수도 있는데 이는 둘 다 맞다. 물질적 의미에서의 마음이란 없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또한 틀린 것이 된다. 움켜쥐면 잡힌듯 하던 물은 기실 잡힌 것이 아니다. 틈만 나면 흘러가거나 증발하는 것이므로 없는 것이 된다. 이를 있다고하는 것은 우리의 오감이 있다는 현상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바다도 그렇고 접시물도 그렇다. 출렁이는 것을 보고나 끓어 넘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있겠나. 마음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과 물은 그래서 닮은 속성을 가졌다. 마음도 물처럼 증발하나요? 좋은 질문이다. 마음은 그러나 물리학적 입장에서의 물처럼 증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잠시 흩어지거나 잠잠하거나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시기질투를 만나면 언제고 발동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몸이 없다면 마음은 있을 수 없다. 몸이라는 그릇에 담겨있을 뿐이다. 몸이 죽으면 마음은 당연히 사라진다. 죽은 몸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추억되는 실체 없는 무엇이다. 다만 설령 죽은 이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이 진리본체와 같은 것이라면 조건은 달라진다. 그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도 이생에 몸을 받아 나투는 것으로 화현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죽는다고 진리가 소멸되던가 아니다. 진리 이전도 없고 진리 이후도 없는 것처럼 진리에는 생성과 소멸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절대진리라 하는 것이다. 절대는 상대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절대 뿐이다. 죽은 사람의 마음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그 몸이 주인공, 곧 마음이 진리라면 가능하다. 진리에는 높거나 낮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하는 시시비비가 없다.
사진에 보이는 쾌활은 늙은 완당의 역작으로 노완이라 도서했다. 늙은 완당이 썼다는 말일 게다. 가야산 청량사 차방에 걸린 것인데 복각을 했는지 각슈(刻手)는 비백이고 농담이고 다 칼질해서 맛은 덜 하지만 어쨌든 완당의 것임엔 분명하다. 그도 육송도 아니고 수입 다그라스 목판에 새겼는지 풍화 겪을 일도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첫댓글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