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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하늘은 반여량을 도와주지 않았다.
아침녘에 산기슭에서 생긴 안개구름이 산으로 올라오면서 사위
를 희뿌옇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시야(視野)가 좁아진 것
도 아니다. 보일 것은 다 보이면서 날씨만 흐렸다.
곱추 괴인에게는 행운이요, 반여량에게는 불운이랄까.
"괜찮겠어?"
조중은 동굴 속에서 던졌던 물음을 다시 던졌다.
"괜찮습니다. 하하! 이래봬도 무당파의 진산비기를 익히고 있
는 몸 아닙니까."
반여량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눈썰미가 예리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차게 굳어진 얼굴하며, 잔뜩 힘주
어진 눈동자.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나?"
"음! 저 소나무 앞까지 가셨다가 오른쪽으로 빠져서 산줄기를
타고 곧장 내려가십시오. 쉽지 않을 겁니다.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예요."
반여량 일행은 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숨어서 대
화를 나누었다. 일 장쯤 앞에 어른 몸뚱이만한 바위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고, 그 좌측에는 말라 죽은 고목 한 그루가 썰렁
한 가지만 드러낸채 서 있었다. 그 앞으로 다시 서너 그루 나
무가 있고, 십 장쯤 더 가면 완만한 능선 위로 가지를 넓게 펼
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별나게 드러났다.
"행운을 비네."
"그래야겠죠. 저 역시 행운을 빌겠습니다."
"후후! 무인에게 행운이라. 그래, 무운(武運)이 따르는 사람처
럼 강한 사람은 없지."
"미시정(未時正)까지 기다리겠네."
"미시초(未時初)입니다."
"미시정!"
"후후!"
반여량은 가볍게 웃었다.
조중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무공을 익히면서 자제력이
많이 함양되었고, 혼인을 한 뒤로는 오히려 유하다시피 되었지
만 싸움에 임하면 여지없이 그 성격이 표출되었다. 지금이 바
로 그렇다. 조중은 한치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까지 발갛게 상기되었다. 모두가 자신을 생각해서 한 말인
줄은 알지만 한 시진이란 시간은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기에 충
분했다.
"좋습니다."
"살아라."
조중은 반여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후 앞으로 나갔다.
"자네 같은 사람은 내 일생에 처음 만났어. 감여가가 무인이
라. 후후! 살아라. 살아서 다시 한번 비무해 보자. 전에는 내
가 패했지만 다시 겨루면... 후후! 각오해야 할 거야."
학구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차라리 웃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 굳어진 얼굴에 입가만 실룩거리는 모습.
그나마 학구로서는 노력한 것이다. 그는 반여량의 어깨를 가볍
게 한 번 툭 친 다음 조중을 따라 신형을 날렸다.
두 사람의 신법은 정교하면서도 민첩했다.
눈 앞 바위 밑까지 가는 것은 잠깐이었고, 고사목(枯死木)을
지나 나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 또한 얼마나 빠르고
부드러운지 감탄이 절로 터져나왔다.
학구가 뒤를 돌아보며 아무도 없다는 표시로 손을 크게 휘저었
다.
'내가 움직일 차례군.'
반여량은 조중과 학구가 했듯이 바위와 고사목을 기점으로 몸
을 은폐시킨 채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채 고사목
에 이르기도 전이었다.
파아앗...!
환상처럼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들.
모두 일곱이었다. 그들은 개똥벌레가 발광(發光) 하듯이 희뿌
연 안개 속에 검은빛을 그리며 짓쳐들었다. 목표는 조중과 학
구. 다행히 반여량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지러이 얽혀들던 사람들은 곧 쓰러진 자와 도주하는 자로 구
분되었다. 소리는 일절 나지 않았다. 살이 베어지고, 빨간 선
혈이 튀기고, 병기 떨어지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질 뿐.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능선 위로 까맣게 몰려드는 점들을 보면
차라리 주저앉고 싶은 생각부터 들게 했다. 뿐만 아니라 반여
량은 그속에서 살갗이 떨리는 잔인한 살기를 읽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조중과 학구. 그들이 도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 있었다. 올 것을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수색을 하지 않
았던 거야. 곱추... 그자다. 그자만이 나를 알아. 저들이 죽는
다면 내가 죽인 거야.'
반여량은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그렇게 장승처럼 있고 싶었다. 가는 길은 다르지만 진심
을 열어준 사람들이기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학구, 자네의 느낌은 어떤가?"
"장을 떠나기 전에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무 냉정한 것은
안 좋다. 그 말씀대로라면 안 좋습니다."
"후후후! 좋아, 어떻게 싸우면 좋겠나?"
"저도 한 말씀 올렸었죠. 비수당원에게 조심이라는 말은 필요
없다. 부딪쳐 오면 깨트리고, 막으면 뚫을 뿐이다."
"하하하...!"
조중은 가슴이 모처럼 후련해졌다.
어차피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지금처럼 중과부적(衆寡
不敵)이 확실한 상황에서는 대처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어떤
가, 학구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와 마음껏 무공을
펼치다 죽는 것도 시원하지 않은가.
실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괴롭던 참이었다.
옥을 조각해 놓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 한 팔에 둘러지는 개미
허리, 늘 간단히 뒤로 묶은 머리, 언제 봐도 아름다운 아내였
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마음씨였다. 꾸밈을 싫어하고 정리하
기를 좋아해 항시 방이 깨끗하고 검박했다. 청소도 항시 손수
했다. 곽가장의 셋째 여식 곽선연이 그렇게 산다고 하면 그 누
구도 믿지 않으리라.
'그런 일은 아란(兒蘭)이에게 시키지.'
'가가(哥哥)와 제가 사는 방인걸요. 우리가 사는 방은 제가 쓸
고 닦을 거예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하! 왜 그렇소?'
'가가와 저의 숨결이 묻어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모든 게 소중
해요.'
이제는 약간 노곤한 듯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
"학구,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럽지만 그 동안 참 많이 도와줬어.
고맙네."
"후후! 선수를 뺏겼군요. 그 말은 제가 먼저 하려던 말인데.
장주님께서 얻으신 사위분 중에 제일 멋졌습니다. 이제 와서야
말씀드립니다만 광창조가의 소가주가 비수당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괘씸했죠. 감히 광창조가 따위가 비수당의
당주직을 맡다니. 후후! 말이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 * *
"더군다나 첫모습을 보이실 때 단의(短衣)에 고습( 褶)을 받
쳐입은 모습이라니. 후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
았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면 나도 어지간했군."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응? 뭔가?"
"우리 비수당 이백 명... 죄송하지만 당주님 수하가 아닙니
다."
"..."
"삼공녀(三公女)가 저희의 실질적인 상관이죠."
"무... 슨 소린가?"
뜻밖의 소리였다. 농(弄)삼아 말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학구
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으니까.
"무공에 조문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조문이 있습니다. 삼공녀는
저희들 조문을 움켜쥐고 있죠. 움치고 뛸 수 없도록 당주님이
비수당을 맡기 전에 저희는 삼공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주
님이 명령을 내리면 삼공녀에게 의향을 물어보곤 했죠."
"음...!"
"후후! 당주님이 비수당을 맡은 다음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
습니다. 당주님의 명령을 자신의 명령처럼 따르라는 분부가 계
셨죠. 당주님을 광창조가의 풋내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충성을
바친 이유입니다."
"음! 그랬군."
비수당원들은 처음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당시에는 그
것이 비수당의 전통인 줄 알았는데 조중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 곽선연이 자신
을 그토록 생각해 주었다는 게 가슴 한구석을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당주님을 만나서 인의(仁義)를 알았습니다. 자칫 야성(野性)
으로 끝날 뻔했던 제 인생에 새로운 빛이었죠. 고맙습니다."
"자, 이제 통쾌하게 무공을 펼쳐 보세."
"그러죠."
흑의인들은 급격히 거리를 좁혀 왔다. 아니, 거리가 좁혀졌다
생각되자 일제히 검을 날려 왔다.
쉬익! 빠악...!
조중은 전면에서 덮쳐 오는 검날을 신법으로 피하며 목봉을 휘
둘러 머리를 부숴 버렸다.
"그때 전수해 준 조가봉법은 다 익혔나?"
"아직... 타앗!"
싸아악...! 써걱!
"게으르군. 무인이 무공을 밥먹는 것보다 좋아해야 하거늘."
"후후! 연마할 시간이 있어야죠. 매일 피를 보고 살았는데."
"고생했다."
"뭘요?"
조중과 학구는 벌써 흑의인 다섯 명을 베어내는 중이었다.
학구가 막 동자료를 스쳐가는 검의 주인공을 베어내자, 갑자기
흑의인들이 썰물 빠지듯 물러서며 둥글게 빙 둘러쌓다. 그리고
흑의인들중 귀면(鬼面)을 뒤집어 쓴 흑의인 두 명이 앞으로 나
섰다.
"..."
"..."
잠시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조중, 안됐다."
극히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음성이었다.
"혈함망, 여러 번 만나는군."
이제는 음성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상대. 그 동안 눈앞에서 유
유히 수하들을 죽인 혈함망이었다.
"그렇지. 그때 최선을 다해서 잡았어야지."
혈함망은 검 대신 비차(飛叉)를 꺼내들었다.
"독문 병기인가?"
"아니. 어제 비차 쓰는 법을 배웠는데 시험하고 싶어서."
조중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혈함망은 격동지계(激動之計)를 쓸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또
한 무공이 절정에 달한 사람이 아직까지 비차 쓰는 법을 몰랐
다면 말이 안 된다. 그는 철저하게 조중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다.
"하하! 좋아, 좋아."
파앗!
조중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하늘에 있는 형제들아! 못난 당주에게 마지막 힘을 다오! 기적
을, 기적을 다오!
목봉이 신랄하게 파고들었지만 혈함망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채 허공만 갈랐다.
"험! 저것은 도기룡!"
오히려 놀란 사람은 학구였다. 혈함망이 사용하는 신법은 자신
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신법, 도기룡이었다. 빠른 보법과 상반
신의 유연성이 극도로 요구되는 신법이 혈함망에게서 완벽하게
재현된 것이다.
"학구, 우리도 하지."
다른 귀면 무인이 자모도(子母刀) 한쌍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
다.
"응? 나를 아는군. 이름을 알고 싶소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흑의인들은 곽가장 무공뿐만 아니라
문도 개개인까지 상세히 아는 듯했다. 혈조수의 후인이라. 얼
마나 절치부심(切齒腐心)했기에 그만한 정보를 얻어냈을까.
"혈류묘(血流猫). 과히 듣기 좋은 작호는 아냐."
"그렇군. 듣기 좋은 작호는 아니군. 피를 흘리는 고양이라. 기
왕이면 도둑고양이라고 하는편이 어울리겠는데."
'다 끝났어. 미시정이라. 미시정까지 기다릴 사람은 우리가 아
니라 추풍, 자네가 될 거야.'
학구는 귀면무인의 기세에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이 두 무인이 귀면을 섰다는 것은 오늘 알았지만
가공할 무위는 그제 저녁에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마
지막 죽는 순간까지 비수당 양대주로 떳떳이 죽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피우웅! 피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벌떼처럼 하늘을 가득 메운 화살더미는 수백여 명이 일시에 쏘
아낸 듯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탁! 타악! 탁! 탁!
흑의인들은 일제히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
들에게 화살이란 별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화살 수가
너무 많아 상대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점은 심리적으로 큰
압박감을 주었다.
조중과 학구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
견해냈다.
동목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일심각원 세 명과 함께 땅굴 속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동목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리고 이 많은 화살은?
그럼 곽가장에서 지원대가 왔단 말인가.
그렇다. 일심각과 비수당을 미끼로 풀어놓고도 아직까지 아무
런 행동도 없는 것이 의아스럽던 차였다. 틀림없이 장주가 보
낸 사람들이 공격을 시작한 것일 게다.
조중과 학구는 망설임 없이 신형을 날렸다.
쉬익! 쉬이익...!
귀면무인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
만 짜증스럽게도 그들에게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운신의 폭이 극히 적었다.
그 틈을 놓친다면 어떻게 험한 무림에서 살아남을까. 조중과
학구는 신속히 신형을 날려 구릉 위로 올라섰다. 그때까지 화
살은 쉼 없이 날아들었고, 흑의인들은 제자리에서 화살을 쳐내
기에 여념 없었다.
"동목, 자네가..."
"말은 뒤에 합시다. 빨리 가야 합니다."
"뭐? 장에서 사람이..."
"장은 무슨 장입니까? 빨리 갑시다. 이제 철수들 하세."
동목은 대답 대신 흑의인들에게 날린 화살 한 대를 건네주었
다.
아! 화살은 겨우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화살을 날린 사람도 땅굴 속에 숨어 있던 일심각원 세
명이 고작. 그들이 조중과 학구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것은 연환궁(連環弓)이 아닌가?"
거칠게 깎은 나뭇가지와 적은 인원으로 흑의인들을 무력화시킨
비밀은 연환궁에 있었다.
연환궁은 제조각주(製造閣主) 만수일귀(萬手一鬼) 첨필선(詹筆
仙)과 함께 강서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匠人) 가문이던 창
병가(蒼兵家)의 정혈이 깃든 병기였다.
일궁에 화살 열 대를 꿸 수 있으며 장전(裝)이 용이해 일인이
능히 스무 사람 몫을 해낸다는 신병(神兵). 한때는 강서 무림
계 모든 문파가 탐냈을 만큼 성세를 구가하기도 했던 가문. 그
러나 화덕이 터지는 바람에 가주를 비롯하여 장인 모두가 몰살
해 버리는 사단이 벌어져 하루 아침에 멸문해 버린 가문이었
다.
"동목, 그럼 자네가...?"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조중과 학구는 궁금증을 억누르고 황급히 신법을 펼쳤다. 흑의
인들은 무더기로 쏟아지던 화살 공세가 끝나자 독 오른 독사처
럼 달려 들었다. 동목이 도주하기에 충분한 거리를 벌어 줬지
만 한치도 방심해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반여량은 나무 서너 그루가 있는 곳에서 조중과는 반대 방향인
왼쪽 능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조중과 학구에 대한 염려는 떨쳐 버렸다. 그들이 죽고사는 문
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비록 천하의 병기 배류시가 있다
지만 곱추 괴인을 죽이려면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 살
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곱추 괴인을 죽이든 죽이지 못하든.
악마적 기운은 능선 위에서 흘러 나왔다. 오급산과 백부하, 청
붕성에서 읽은 살기는 능선 뒤쪽에서 살갗에 달라붙듯이 뻗어
나왔다.
동기감응을 펼친 결과였다.
곱추 괴인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리라.
그 날, 비화당원들이 몰살당하던 그 날, 반여량은 동기감응 감
여가끼리는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의 기를 읽는 사
람들이니 인간의 기 또한 못 읽겠느냐는 정도가 아니라 전생부
터 이어온 듯 끈끈하게 달라붙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정체는 모
른다. 단지 느낌일 뿐이니까.
파앗!
반여량은 조중이 일러준 대로 진기를 일주천(一周天) 한 다음
단전으로 되돌아 온 진기를 용천혈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과연
몸이 훨씬 가벼워지며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음...! 내공이라. 이것이 내공이었군. 내가 무공을 익혔다?
사부님이 무공을? 아니야, 무공을 익힌 분이 아니셨는데.'
스물네 살에 자연의 소리를 들은 다음 제일 먼저 사부의 기운
을 읽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사부밖에 없었으니까. 읽
으려고 해서 읽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읽혀진 것이다.
사부의 기운은 차고 냉정했다. 그릇은 대해(大海)를 담을 듯
컸지만 기질이 순했다. 사부의 성품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가. 차고 냉정하기에 다른 감여가들이 냉대하는 동기감응을 익
혔고, 기질이 순하기에 비보감여를 택했다.
그런 성품에 기질을 강하게 연마하는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말
이 되지 않는다. 무공이란 권각을 수련하는 것 못지않게 정신
을 강하게 다듬는 것이라서 무형 중에 사람의 기를 바꿔 버린
다. 여태까지 보아온 무인들이 한결같이 강경(强硬) 일색인 점
이 바로 그렇다.
'으음...! 그렇지. 부를 줄 알았어.'
반여량은 음침하게 들려오는 지옥의 소리에 생각을 접었다.
'카카카...! 어서 와. 빨리... 빨리 와...'
곱추 괴인의 기운은 축축하고 음습했다. 하늘에는 검붉은 구름
이 떠있고, 화산처럼 붉은 산은 울음을 토해냈으며, 흐르지 않
는 개울 물은 갯벌처럼 탁하고 짓물렀다. 무엇보다 사람을 공
포로 몰아가는 것은 어둠이었다. 짙은 어둠. 그속에 무엇이 있
는지는 알수 없지만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어둠이었다.
반여량은 다시 한 번 배류시를 어루만졌다.
그는 곱추 괴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청붕성에서 악마
적인 기운을 읽을 당시만 해도 그것이 인간이 내뿜는 기운이라
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백여 리.
곱추 괴인은 오백여 리를 격하고 반여량의 존재를 알았다. 그
리고 심상(心象)을 보내왔다.
- 일점(一點)에 뇌력을 집중하면 심상(心象)이 그려진다. 마음
의 그림.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너에게 달렸다. 화공(畵工)
이 붓을 잡듯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다. 감
여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그려라. 자기를 버리는 그림, 약자
를 돕는 그림을 그려라.
사부님도 심상에 관한 말을 들려 줬다. 하필이면 한한에게 모
든 마음을 주고 있을 때. 과히 중요하지 않은 말 같아서 흘려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말이었으니...
곱추 괴인이 반여량의 존재를 알고 의도적으로 심상을 흘렸다
는 사실을 알고서도 한참이 지난뒤에야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
랐다.
상대는 강하다.
무인으로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감여가로서는 반여량보다 한참
위에 서 있는 강자다. 사부님... 사부님과 견준다면 어떨까?
버금간다는 말은 사부님을 존중해서 하는 말일 게다.
뇌력에 힘을 더해 염력(念力)으로 사용하는 상대.
반여량은 사십여 장을 은밀히 움직인 끝에 너구리굴같이 입구
가 좁은 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악기가 흘러 나오는 곳을. 그리고 귀면을 쓴 채 앉아 있는 흑
의인 한 명을.
악기에 정신이 몰입되어 그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실
수랄까.
"잘 왔다."
음성은 부드럽고 포근했다. 그러나 반여량의 감응은 그의 그릇
이 뱀의 피부처럼 차고 소름끼친다는 사실을 읽어 냈다.
"어디서 무공을 익혔나? 신법이 제법 빠르던데."
"두 명이 말했소.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소."
"후후! 무인치고는 궁색한 변명이군."
반여량은 뜻밖에도 이들이 곽가장에 대해서 소상히 안다는 사
실을 알아냈다. 또한 흑의인의 말투에서 마치 자신을 알고 있
는 듯한 어감을 받았다.
'응?'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청붕성에서 읽었던 기운과 눈앞에 있는 흑의인이 내뿜고 있는
기운은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청붕성에 나타나 자신을 죽
이려 했던 흑의인은 바로 이 사람이다.
"반여량, 청붕성에서 너를 보았을 때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제법 쓸 만한 신법을 익혔다니... 사람
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흑의인은 스스로 청봉성에 나타났다는 것을 시인했다.
"당신이 그럼...?"
반여량은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하려고 애썼다. 호랑이에게 물
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던가. 조중이 말하기를 혈함망
같은 고수는 품속에 있는 배류시를 꺼낼 틈조차 주지 않고 마
혈(痲穴)을 제압한다고 했다. 그 말은 옳을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귀면무인을 향해 뇌력을 집중시켰다. 조중과
학구에게 확인하고, 산 정상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감응이
었다.
기로써 기를 억누르는 것.
만물 구석 끝까지 가득 퍼져 있는 것이 공기이기 때문에 기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따라서 공기를 사이에 두고 물건
끼리 접촉을 시키려면 이동이라는 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기는 그렇지 않다. 기가 물이라면 공기도 물이기 때문에 움직
임이 없이도 전달되고, 공격성을 띠면 상대에게 위압감을 준
다.
무인은 연기를 했기 때문에 기가 날카롭고 강건하다. 그래서
범인들이 볼 때 무인들이란 아무리 성품이 부드러워도 일단은
두려운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범인들도 마찬가지로 기를 이
동시킨다. 악의를 품은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고 쏘아보는 눈길
이 바로 그렇다. 단지 반여량처럼 간동하고 들차게 공격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 나다. 내가 너를 죽이려 했지."
"작호를 알고 싶소만."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혈갈류(血喝 )라 부르게."
흑의인의 말투가 변했다.
완전한 하대에서 온말로 바뀌었다. 이런 사실은 본인조차도 모
르고 있으리라.
'기가 위축되었어. 조금만 더...'
반여량은 품속에 있는 배류시를 꺼낼 시간이 필요했다.
"혈갈류... 피를 마시는 족제비라. 혈함망, 혈갈류... 한결같
이 작호들이 선뜩하군."
고오오오...!
말을 나누는 가운데도 반여량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뇌력이 분
출되었다. 그러나... 반여량은 일순간 자신의 내력이 차단당하
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시냇물이 강물을 만난 듯 유유히 섞
여들던 기운이 갑자기 제방이라도 쌓아 놓은 듯 뚝 끊어졌다.
그렇다. 무인에게도 기를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 있다. 바로
내공이다. 기 자체를 이끌어 내서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위축된 기운을 되살려 내는 정도는 극히 간단하다.
조중과 학구는 반여량이 감응을 공격에 사용하리라고는 전혀
몰랐기에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혈갈류라는 무인은 기의 공격
에 대해서 안다는 말이된다.
역시 곱추 괴인 그가 곁에 있으니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닐 게
다.
혈갈류는 심리가 위축되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내력을
운집 했을 테고. 그런데도 곱추 괴인은 비화당과 일심각 무인
들을 가볍게 베었다. 발산하는 염력이 그들의 내공 정도는 간
단히 제압할 경지다.
반여량은 살아돌아갈 수 없는 사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며 실없는 뇌력을 거둬 버렸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혈함망이 비수당을 공격할 때... 혈함망
은 오로지 비수당에게만 공격을 집중시켰소. 일심각을 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비수당을 쉬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 살기는
비수당에만 머물렀소."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죽이려 했냐는 말이냐?"
혈갈류는 다시 하대를 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전에 온말을 사
용했다고는 짐작도 못하는 듯 했다.
"그렇소. 더불어서 사부님 성함을 말했는데... 사부님은 어찌
아는지 묻고 싶소."
순간, 혈갈류의 전신에서 살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곧 봄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
"휴우! 모든 게 운명이겠지.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좋
아. 그건 아무래도 좋아. 한 가지 묻겠다. 이 암굴 속에서 무
슨 기운이 흘러나오는지 말해 봐라. 반여량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읽을 테지?"
혈갈류는 반여량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악마적 기운이오. 검고, 차고, 생명이 없는 사기..."
"잘 맞췄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다. 저 기운을 없앨 수 있나?
사기만 말이다."
'사기만 없애...?'
"토굴 속의 기운이 밝은 보름달이라면 나는 반딧불이오. 무인
들이란 권각을 맞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감여가끼리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소. 저 사기와 나는 네 번을 부딪쳤는
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소."
"으음...!"
혈갈류는 침음성을 토해냈다. 그리고,
"들어가라."
뜻밖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길을 열어 줄 줄이야.
미심쩍은 생각이 부쩍 치밀었다. 그러고 보니 산정에 나타나던
무인들도 자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청붕성에서는 죽이
려 했으면서... 그러고 보니 그저께 혈전이 벌어진 날은 상황
이 바뀌었다. 곱추 괴인은 무서운 살기를 드러낸 데 반해 이들
삼 인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곱추 괴인
의 진로를 번번이 차단하지 않았다면 천광탄이 터지기 전에 목
숨을 잃었을 터였다. 당시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철수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응?'
"안에... 곱추 괴인이 있소?"
굳이 물어 볼 말도 아니었다. 토굴 안에서 풍기는 것은 뱃속의
것을 게워 내게 만드는 비린내였다. 색깔로 구분하면 칠흑 같
은 검은 색이요, 맛으로 비유하면 소태보다도 더 쓴...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지독한 맛이었다. 살갗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 스
멀거리는 느낌은 오싹 소름을 돋게 했다. 곱추 괴인, 그가 아
니라면 풍길 수 없는 기운이었다.
혈갈류의 동공에 잠시 복잡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그렇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소. 혹시 곽가장 곽 소저와 산귀, 석수를
잡아가지 않았소?"
"그런 것은 감응으로 느낄 수 없나?"
"나는 감여가이지 신이 아니오. 존재가 있다면 몰라도 지나간
흔적을 찾아 내지는 못하오."
"맞다. 그들은 우리가 데리고 있다."
혈갈류는 순순히 시인했다. 여태까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반여량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혈갈류는 바람에 날려가듯 유유한 신법으로 토굴 옆의
암석과 암석 사이의 작은 틈으로 모습을 감췄으니까.
과연 그 자리는 넓은 개활지를 관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자리
였다. 그는 조중 일행이 소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과 반여
량이 몸을 은신해 있다가 반대 방향으로 치달리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듯 했다.
반여량은 어둠 속에 눈빛만 반짝이는 암석 사이를 잠시 쳐다보
다가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 第 二 卷 終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오늘도 감사요...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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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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