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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卷
但聞柔櫓聲 (어디서 노 젖는 소리가 들리고)
第 一 章. 손에 묻은 피는 지워지지 않고
(一)
반여량은 허리를 잔뜩 웅크리고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배류시를 오른손에 거머쥐었다. 혈갈류를 만났을 때처럼 병기
도 꺼내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토굴은 사방이 확 트인 것처럼 넓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사위를 분별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런 대
로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진다. 물이
있으리라.
발바닥에 작은 돌들이 밟혔다.
둥그런 조약돌...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다듬어진 조약돌들.
저벅! 저벅...! 떼구르르....!
발에 채여 어디론가 굴러가는 조약돌 소리가 넓게 퍼져 나갔다
가는 곧 회음(回音)이 되어 돌아왔다. 소리로 추측하건대 넓이
가 족히 이십여 장은 되는 대광장(大廣場)이었다.
사람이 자그마하게 파놓은 듯한 토굴인 줄 알았던 것이 천연
동굴이라는 점도 놀랐지만 그 속에 이만한 광장이 있으리라고
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인공으로 다듬은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캬캬캬...! 잘 왔다. 어서 와라. 어서 와...'
죽음을 예고하는 소리가 망령처럼 들려왔다.
손에 땀이 흐른다. 등줄기에도, 이마에도, 콧등에도... 세상에
태어나 지금처럼 긴장한 적이 있었을까.
배류시를 다시 한 번 꽉 움켜잡았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라고는 작은 대죽통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류시가 수중에
없다 해도 그는 들어왔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싶은 기
운을 감지한 이상 정체를 봐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감여가
에게 지워진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저벅! 저벅...!
조약돌 틈새기로 차디찬 촉감이 전달되었다. 예상대로 물기였
다.
물길이 흐르는 곳을 더듬어 올라갔다.
천연 동굴 안에 흐르는 물길은 지극히 위험하다. 느닷없이 돌
기둥같은 석주(石柱)가 길을 막는가 하면, 깊이가 한 자를 넘
는 웅덩이가 나타나는 것도 예사였다.
햇볕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위험한 동물은 서
식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박쥐 정도. 더군다나 동굴 안은 공기
가 희박하여 몸집이 큰 동물은 살지 못한다. 풀이 자라지 않아
초식 동물은 없고 전부 육식 동물들뿐이지만 환경에 변화가 없
고 생존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사람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은 없
다.
반여량은 근 일 각을 소모하고서도 끝닿은 데를 찾지 못했다.
졸졸졸...!
발바닥에 와닿던 물기는 이제 완연히 개울물 소리를 내며 흘렀
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이 많아진다? 기현상이었다. 아니면 저
반대편에 또 다른 통로가 있으리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
게 되어 있으니까.
반여량은 불현듯 천광탄에 생각이 미쳤다.
묵빛 구름 속에 하얀 백린(白燐)을 반짝이는 신호탄. 대낮에는
검은 구름으로, 야밤에는 반짝이는 백린으로 수많은 밀어를 전
해 주지 않는가. 품속에 화섭자를 지니고 있지만 주변에 불을
당길 만한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습기가 많은 동굴 안
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
보다 어려우리라, 그래, 천광탄이라면...
쉬익! 퍼엉...!
천광탄이 요란한 소리를 흘리며 터졌다.
반딧불 수천만 마리가 아우성치는 듯 무수한 백린이 사방을 휘
감은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 아름다웠다. 붉은 석순(石
筍), 석주(石柱).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이 붓으로 그릴 수 없
는 절묘한 미(美)를 지닌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군!"
저절로 튀어나온 탄성이었다.
이런 곳에 그토록 지독한 사기가 머물러 있다니.
그는 곱추 괴인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보이지 않는다. 백린이 동굴 안을 구석구석 비춰 주었지만 그
어디에도 곱추 괴인은 없었다. 그렇다고 미로(迷路)처럼 엉클
어진 작은 틈새기까지 일일이 뒤지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볼을 당길 만한 물건을 찾기로 했다.
백린은 금방 소멸된다. 그 안에 빛을 밝혀 줄 만한 물건을 찾
지 못한다면 곱추 괴인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어디로 간 것
일까? 왜 감응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랬다. 반여량은 모
든 능력이 상실된 듯 감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치 마음이
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휴우!"
가볍게 한숨을 불어낸 후 백린이 빛을 발하고 있을 때 잔가지
라도 주워들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돌로 감싸인 곳
이라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일이지만 그러다 문뜩 그는 등
뒤에서 싸늘한 예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등골에 찬바람이 스쳐가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어느 새 등뒤로...'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엇!"
반여량은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한 걸음 훌쩍 물러섰다.
전신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맨 곱추 괴인이 그의 등뒤에서 요악
한 눈길로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가 등뒤에 나타난 것은 실로
눈 깜짝 할 순간. 발자국 소리도 기류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
다. 누가... 누가 초절정 고수인 곱추 괴인을 제압하여 쇠사슬
로 묶어 놓았단 말인가.
"크크크...!"
냉혹한 웃음소리. 반여량은 배류시로 곱추 괴인을 겨냥했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동기감응을 살생에 이용하는 한 그를 죽일 적임자는 자신이라
고.
그런데 손끝이 덜덜 떨려나온다.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큰 죄악을 짓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후들후들 떨린다.
"누... 구... 냐?"
희미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인간이 내뱉은 말. 그래, 그도 역
시 인간에 불과한 것을. 반여량은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나를... 고쳐 줘."
뜻밖에도 곱추 괴인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런
눈빛은 곧 사이한 눈빛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건 뭔가? 이건...?'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네처럼 탁하게 갈라진 음성이지만 그는
분명히 도움을 요청해 왔다.
"캬아아악...!"
곱추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취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며 곧이라도 덤벼들듯 발버둥
쳤다. 전신을 휘감고 있는 쇠사슬을 끊으려는 모양이다.
반여량은 엉겁결에 배류시를 발사할 뻔했다. 그러나,
"나를... 고쳐 줘."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분명히 이성으로 한 말이다. 눈빛이
변한다. 또 이성을 잃었다. 곱추 괴인은 이성과 비이성 사이를
찰나간에 넘나들었다. 광기(狂氣)에 찬 눈이라든가, 입에서 토
해지는 썩는 냄새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반여량은 감응을 펼쳐 기운을 읽고자 했다.
'헉! 철벽(鐵壁)이다!'
괴인의 머릿속은 그 무엇으로 뚫을 수 없었다. 엄청난 사기에
돌돌 말려 금장철벽(金張鐵壁)을 능가하는 제방을 쌓아 놓았
다. 그뿐만 아니라 벌집을 건드렸을 때 벌떼가 달려들듯이 단
단하던 일각이 벌어지며 검은 묵기(墨氣)가 슬슬 풀려 나왔다.
청붕성에서부터 읽었던 악마적 기운.
반여량은 악마적인 기운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황급히 감응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름다운 동혈이 바로 사기
를 태동(胎動)케 하는 요지(要地)였다. 더군다나 반여량과 곱
추 괴인은 서로 이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굳이 동기감응을
펼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뼈마디까지 으스스하게 떨려온다는 것
은 괴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자는... 곧 죽는다.'
혈색이 메말라 광채가 전혀 없다. 눈빛이 밑으로 처지면서 하
시(下視)하고 있다. 입술이 푸르고 혓바닥이 자색으로 물들었
다. 안광(眼光)은 흩어지고, 발산하는 묵기는 성질이 냉(冷)하
다.
죽기 바로 직전에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곱추 괴인에게는 상반된 색채 두 개가 공존했다.
살고 싶은 유혹과 죽음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기. 본능을 억
눌러 버리는 철벽과 그 철벽을 뚫고 나오려는 본능. 희망과 좌
절, 밝음과 어두움...
- 강 두 줄기가 나란히 흐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너야 할
강이다. 첫 번 째 강은 무난히 건넌다. 건너고 싶지 않아도 건
너야 한다. 그 강은 세월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주
맑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환경에 더렵혀지
고 짓이겨진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상태로 두 강 사이에서
평생을 마친다. 그런 일생을 거부하고 갓난아기 적에 가졌던
맑은 영혼을 되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도인(道人), 승려(僧
侶)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머지 강을 건너려고 한
다. 그곳은 신(神)이 주관하는 영역이며, 동심(童心)이 있는
곳이다.
해탈이라는 이름의 강을 건넌 자들은 깨끗한 영혼을 얻는다.
그 영혼은 아이가 지닌 영혼과는 다르다. 아이는 깨끗하나 무
지하다.
두 번째 강을 건너면 깨끗하면서도 세상 모든 이치를 한눈에
꿰게된다. 이미 신이 되었기 때문에.
육신은 강을 건너지 못했는데 정신만 건너려는 자들도 있다.
그런 영혼은 자칫 강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방황하게 된
다. 육신은 인간 세상에 있는데 정신은 인간과 신 사이를 오간
다. 미친자들이다. 그렇기에 미친 자가 내뿜는 영혼은 적어도
강을 건너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깨끗하다.
반여량이 남창을 떠나올 때 돈을 벌겠다는 마음과 사람들을 위
해 보시(布施)해야 한다는 갈등을 겪었을 때처럼, 곱추 괴인도
두 가지 기운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사기에 지배를 당할지라도 무공의 바탕이 되는 사기를 버려서
는 안 된다는 마음과 본래의 정신으로 살아가고픈 욕망.
반여량은 한한에 대한 복수심이 미약했다. 배신조차 이해하고
다독거릴 만큼 사랑이 깊었다. 충격이 너무 커 잠시 이성을 잃
기도 했지만 본래의 반여량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
다.
곱추 괴인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
용이 있으랴. 그는 정심한 무공을 익혔을 터였다. 그것이 음기
와 혼합되면서 혼탁해졌고, 새로이 생성되는 강한 음기와 탁한
기운을 담뿍 담은 음기가 상충하면서 육신에 깃든 진기를 눌러
버렸다.
본신 진기가 물이라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는 기름인 셈. 물
과 기름이 한데 뭉쳤으니 겉돌 수밖에 없다. 거기에 기름의 종
류도 다르지 않은가.
몸이라고 정상일 리가 없다.
강한 자극은 제일 먼저 머리에 미친다.
단단하고 굳센 머리지만 섬세하기도 한 머리. 사기가 임맥이나
독맥을 흐르면서 머리를 쳐버린다.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과 진배없는 충격이다.
청량한 진기는 머리를 윤택하게 해준다. 영양(營養)을 공급해
준다. 그래서 내공이 정심한 사람은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눈
빛이 맑으며, 기억력이 탁월하다.
곱추 괴인은 머리에 자극을 받을 때마다 성정이 폭급해지리라
당연하다. 신경이 예민해지니까.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두통에
시달려야 하니까.
"까아아악...!"
드디어 흉성(凶性)이 폭발했다. 잠시나마 떠올랐던 인성(人性)
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사람은 오직 살인에
미친 살인마였다. 그제 밤처럼 어둠에 길들여진 악마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꾹!
반여량은 배류시의 단추를 누르고 말았다. 곱추 괴인의 공격이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무엇보다 몸을 칭칭 동여맨 쇠사슬이 썩
은 새끼줄 끊어지듯이 잘라지는 데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배류시에서는 아무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우모침이 가득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 무엇도
튀어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끄윽...!"
세상에 거칠 것이 없어 보이던 곱추 괴인이 복부를 움켜쥐고
비칠거렸다. 그것도 잠시, 곱추 괴인은 흉성이 치미는지 누렇
게 변색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의 복부! 괴인의 배는 보기만 해도 처참할 만큼 찢겨진 상태
였다. 조중이 옳았다. 당문 암기의 총체인 배류시는 그만한 역
할을 해 주었다. 함상을 단 일격에 죽여버린 괴인이 눈 깜짝할
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다니. 그런데도... 그런데도 웃
는단 말인가.
꾸욱!
이번에는 냉정하게 가슴을 겨냥하고 배류시를 발사했다.
"까아아악...!"
움찔 놀라 몸을 부르르 떠는 괴인.
청붕성까지 발산시킨 염력(念力)도 소용 없었다. 아니다. 만약
그런 염력을 펼쳤다면 반여량은 배류시를 들 기회조차 잡지 못
했으리라. 천운인가? 곱추 괴인은 이성과 사기 사이에서 잠시
방황했고, 반여량은 그 기회를 잡았다. 왜 그랬을까?
괴인의 앞가슴은 쏟아져 나온 핏물로 흥건했다.
"끄륵...!"
곱추 괴인은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를 흘리며 모래성이 허물어
지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안 갤!"
뼛골을 얼려 버릴 듯한 냉음(冷音)이 터지며 동혈 한구석에서
검은 인형(人形)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는 무공을 모르는지
십여 장을 달려오는 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키가 무척이나 작고 등까지 살짝 굽은 노인이었다. 특이한 것
은 그의 피부색. 너무 창백하여 마치 회칠을 한 듯 했다. 머리
와 수염까지 하얗게 새어 더욱 초췌해 보였다.
"이런...!"
노인의 장탄식은 절망에 가까웠다.
"끄으으...! 내가... 이겼어. 내가..."
"이 노옴! 너는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되는 놈이란 말얏!"
"홀가분해. 이렇게 홀가분한 것을..."
"흐흐흣! 홀가분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누구 좋으라고. 흐
흐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직도 모르나? 너는 원귀(怨鬼)가
될 거야. 약속하지. 꼭 그렇게 만들어 놓고 말겠어."
노인과 곱추 괴인은 서로 잘 아는 듯했다. 그러나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주고받는 말 속에 악담(惡談)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서. 이건 악담 정도가 아니라 증오였다.
"좋아.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곱추 괴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회광반조(廻光反照)의 현상이다. 눈가에 화색이 돌고 몽롱하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반여량을 바라보았
다.
"고맙소. 나를 죽여 줘서... 사실 그 동안 무척 괴로웠거든."
반여량은 곱추 괴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사
람이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하니 행복한
편이다.
곱추와 같이 넋이 반쯤은 나기고 반쯤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면 충동에 휘둘리는 육신이 저주스러웠을 게다.
"정말이었군요. 도와 달라고 한 말..."
"후훗! 정말이었소. 나는 또 당신을 죽이게 될까봐 걱정... 쿨
럭!"
곱추는 작은 몸을 바르르 떨며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그의
입에서는 빨간 핏물과 함께 조각난 내장부스러기가 섞여 나왔
다.
"다행... 다행... 크윽!"
그는 사기와 격렬히 싸우는 듯 눈을 부릅뜨더니 깊은 숨을 마
지막으로 영면(永眠)에 들었다.
사기에 젖은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혈 전체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흑색 물결을 토해 내고 있지만 사기의 진원
지(震源地)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생활
한다면 그 누구라도 미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리라.
반여량이 언뜻 본 동혈은 인간이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동사택(東舍宅:집의 중심에서 대문이 놓인 방위가 동쪽인 집)
서사택(西舍宅)이라 한다. 한 집의 기운은 동의 기운이나 서의
기운 중 하나를 받아야 한다. 이 둘은 각기 섞일 수 없는 독특
한 기운이다. 왜냐하면 동은 떠오르는 기운, 서는 지는 기운이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혈은 기운 두 개가 얽혀든다. 문이
두 개라서 들어오는 기운이 마구 섞이고 있다. 당연히 맑은 기
운 대신 탁한 기운이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기는 낮에는 밑에서 위로, 밤에는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이곳은 산 중턱, 낮의 기와 밤의 기를 모두 받아들
인다. 그것도 정면으로.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무공이 강한 인
간이라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나쁜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 것은 역시 벌목(伐木)이었다.
구궁산의 모든 음기가 모여드는 지형에 양목인 소나무를 말끔
히 베어 버려 음기가 거침없이 흘러내리니...
반여량이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기의 존재였다. 동혈 안
에 엄청난 사기가 응어리져 있는데 도무지 그 까닭을 파악할
수 없었다.
백린(白燐)은 맡은 소임을 다했다.
종유석에 촘촘히 붙어서 빛을 발하던 별똥 중 아직까지 여광
(餘光)을 토해 내는 것은 두세 개에 지나지 않아 사위가 컴컴
한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백린은 빛을 발하고 물체를 태우지만 불과 같은 화기(火氣)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만약 반여량이 횃불을 들었다면? 사기와
화기는 극성이다. 반여량이 곱추 괴인은 신경적으로 공격해 왔
으리라. 어둠과 적막속에서 산사람은 모두 그렇다.
'헉! 이자다. 이자... 이자가 청붕성까지 악마적인 기운을 보
내 왔다. 곱추가 아니라 이자야.'
깜짝 놀랐다. 노인이 내뿜는 기운은 가히 악마와 버금갔다.
왜? 왜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곱추가 발산하는 기운은 강했다. 자신과 버금갈 정도로. 하지
만 노인이 발산하는 감응은 더 강했다. 곱추는 무공과 감응이
어우러졌다. 노인은 감응만 느껴질 뿐 무인이 지닌 예기(銳氣)
를 발산하지 않는다. 곱추는 무인, 노인은 동기감응 감여가다.
단정할 수 있다.
먼 거리를 격하고 감응을 전달하려면 적어도 노인 정도는 되어
야 한다. 반여량 자신도 구중산에 와서야 악기의 정체를 감지
하지 않았던가. 노인... 노인이 청붕성으로 감응을 보내왔다.
- 인간의 몸에는 인간삼보(人間三寶)라는 것이 존재한다. 껍데
기에 불과한 육신이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복잡하지. 신기색
(神氣色). 이것이 인간삼보다.
신은 몸 안에 있고, 기는 살갗 안에 있으며, 색은 살갗 밖에
있다. 신이 온화하지 못하면 진신(眞神)이 아니며, 기가 맑지
못하면 진기(眞氣)가 아니다. 또한 색이 윤택하지 못한 것은
진색(眞色)이 아니다. 이를 각기 신부족(神不足), 기산(氣散),
허색(虛色)이라 한다.
신은 안광(眼光)에 나타나며 성정을 말해 주고, 오장육부(五臟
六腑)의 정(精)은 기색(氣色)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기를 색으로 비유하면 오색(五色)으로 대별(大別)할 수
있는 바, 청색(靑色)은 우색(憂色)으로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
는 자이다. 청색은 간(肝)에서 관장하니 기색이 그러하면 간이
썩은 게지.
청색에도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파란 하늘색은 활색(活色)이
나, 바닷물빛처럼 검푸른 색은 사색(死色)이다. 적색(赤色)은
노색(怒色)이다. 불꽃처럼 선홍빛은 활색, 거무죽죽한 붉은빛
은 사색이다. 백색(白色)은 애색(哀色)이다. 눈빛같이 깨끗한
색은 활색이나, 투명하지 못하고 탁한 백색은 사색이다. 흑색
(黑色)은 사색(死色)이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색은 활
색이나, 답답한 듯한 흑색은 흉색(凶色)이다. 황색(黃色)은 길
색(吉色)이다. 비단에 물감을 들인 듯한 색은 길색이나, 가을
은행잎처럼 탁한 황색은 사색이다.
이러한 내기(內氣)가 외기(外氣)와 접하고 춘하추동(春夏秋
冬), 이십사(二十四) 절후(絶候)의 영향을 받으니...
인간의 살갗에 나타난 색으로 사람의 성정과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이다. 사부님이 일러 주셨으되 감여와 관계가 없
는 듯하여 흘려듣고 만 말씀이었다.
흑색은 신장(腎臟)에서 나온다.
그 누구든 감응을 펼친다면 자신의 기운을 함께 싣지 않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동혈에서 생활한다면 오장육부가 다 썩되 특히 신
장이 상하리라. 그러나 이 정도로 기운이 강하려면 다른 외기
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내기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노옴! 네 놈! 네 놈 때문이야!"
느닷없이 노인이 검을 들어 짓쳐왔다. 바로 곱추 괴인이 차고
있던 검이었다. 검법을 모르는지 검날에 예기가 전혀 실려 있
지 않은 검공(劍功). 그러나 반여량은 전혀 날카롭지 않은 검
날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아무리 발
버둥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학구와 조중
에게 걸었던 감응과 비슷한 종류였다. 비슷하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노인이 반여량에게 걸어 온 것은 감응의 정도를
지나서 염력(念力)에 가까웠다.
반여량은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맑게 가라앉히고 곱추 괴인과는 반대로
사통팔달(四通八達)시켰다. 염라대왕의 호곡성보다도 무서운
흑기(黑氣)를 접해 봤기에 만약의 경우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수차에 걸쳐 생각하지 않았는가.
염력이 머릿속을 휘젓는 것도 빨랐지만 대응하는 것은 더 빨랐
다.
노인의 검이 지척에 닿을 찰라 반여량은 염력에서 빠져나와 뒤
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엇!"
노인은 크게 놀랐는지 경악성을 터뜨렸다.
"네, 네 놈이 감응을...?"
"그렇습니다. 나는 동기감응 감여가입니다."
"허... 허허허...!"
노인은 기가 막힌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실소는 곧
허탈한 웃음이 되어 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야. 기가 막힐..."
노인은 뚫어지게 반여량을 응시했다. 더 이상 공격할 의도는
없는것 같았다.
노인은 놀랍게도 박쥐를 먹었다. 요리를 하지 않은 채 날것 그
대로 우걱우걱 씹어먹는 모습은 뱃속의 것이 모두 기어 나올
만큼 역겨웠다. 그는 반여량이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식사
에 열중했다.
'미쳤다. 미친 인간이다.'
괴인을 가까이에서 보니 전에는 읽지 못했던 광기(狂氣)가 두
드러지게 읽혀졌다. 살기를 표출시킨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리
라. 그렇다면 심상을 전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그
것은 정상적인 인간만이, 그리고 동기감응에 탁월한 능력을 지
닌 인간만이 펼칠 수 있는 뇌의 총체적 힘이지 않은가.
이윽고 머리와 발만 남겨 놓고 박쥐 한 마리를 다 먹은 노인은
남은 찌꺼기를 한쪽 구석에 던져 버렸다. 그곳은 박쥐 무덤이
었다. 두더쥐를 닮은 작은 머리와 짧은 발톱이 수북히 쌓인 무
덤.
"크크크크...!"
노인은 포식을 했다는 듯 만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여량에게
는 비단폭을 찢는 듯한 살음(殺音)으로 들렸지만.
"동기감응은 어떻게 배웠습니까?"
노인은 새삼스럽게 반여량의 존재를 발견한 듯 기이한 표정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동기감응을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동기감응..."
노인의 음성은 한결 또렷해졌다.
침침하던 안색도 많이 풀렸고, 미친 듯이 발산하던 광기도 한
결 누그러졌다.
"후후후! 너는 누구냐?"
노인은 곱추가 먼저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의 표정은
무척 곤혹스러워 보였다.
반여량은 이유를 안다.
반항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읽고 간 염력. 괴
인이 시선을 든 잠깐 동안 반여량은 발가벗겨진 채 그의 앞에
서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그의 앞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통용
될 것 같지 않았다.
노인은 이미 반여량의 모든 것을 읽었다.
품성, 무공, 기질...
노인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것은 반여량의 몸을 탐색하듯이
훑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반여량이라고 합니다."
반여량이 먼저 대답했다. 괴인의 기세에 눌리고 만 것이다.
"크크크! 감여가라. 그것도 동기감응 감여가. 크크! 하기야 세
상은 넓으니까. 동기감응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노인은 반여량이 던졌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요. 세상에서 동기감응을 익힌 사람은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익힌 동기감응은 나보다
훨씬 뛰어났소,.내가 펼친 감응을 저지하고 나를 읽어 버렸으
니까. 그런 감응을 좋은 곳에 썼다면 좋았을 것을...'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기이한 눈으로 보았다. 세상에 자신 외
에 동기감응을 익힌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
니까. 그것은 충격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分身)을
만난 충격.
"사부님에게 배웠습니다. 안철주라는 분이셨죠."
"안... 철주?"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마 안철주라는 이름자를 들어
보지 못한 듯했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죠. 동기감응을 어떻게 배웠습니
까?"
반여량은 심력(心力)을 북돋기 시작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전의(戰意)를 내버려 두었다가는 막상 그가
검을 날려올 때 멍하니 서서 맞을 수밖에 없으리라. 공격할 의
사가 없다고 할지라도 대비는 해둬야 마땅했다.
"크크크! 동기감응을 어떻게 배웠느냐고? 크크크! 내 이름은
남저명(藍這明)이다.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이름이지."
노인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무척이나 허탈하고 쓸
쓸한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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