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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놈은 마치 스스로 몸집이 불어나는 악마 같았어. 음기와 악기
를 받아들인 결과가... 음기를 지닌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나는 똑똑히 보았어. 동사택 서사택을 뚫은 다음부터 나는...
놈을 피해 다녔지. 다행이 나의 동기감응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지만. 흐흐흐...! 그렇지. 그렇게 도망다니며 십
오 년을 살아왔어. 저주받은 땅에서... 흐흐흐!"
이십여 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만한 세월을 이 동혈
속에서 살아왔다면 천형(天刑)에 버금간다. 어둠이 앞을 가로
막아 노인을 볼 수는 없지만 자조적인 음성만으로도 비통한 심
정을 알 수 있었다.
"노인장께서 제게 펼친 염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수족이 얼
어붙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만한 염력이면 혈단 인물들을 상
대할 수 있을 텐데요?"
"혈단?"
"노인장께서 말씀하시는 흑의인들이 혈단입니다."
"크크크...! 그렇군. 이십 년 만에 원수가 누구인지 알았군."
반여량은 측은한 눈빛을 던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얼굴 가득히 지울 수 없는 사기가
침식해 있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사기. 그의 운명은 몇 시진
남지 않았다. 이제 분가루를 칠해 놓은 듯 하얀 그의 얼굴에
불그스레한 혈색이 비치면 한 많은 세상을 등져야 하리라.
"처음에는 몰랐다. 감응으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는 꿈에
도 생각하지 못했어."
반여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가. 조중과 학구에게 시험하지 않았던들 확신을 갖지 못했으리
라.
"감응으로 사람을 공격해 보았나?"
남저명의 말 속에는 진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천형의 땅에서 이십여 년을 살아온 자부심이리라. 박쥐를 잡아
먹으며 살아온 인생. 그러나 사실 먹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먹을 것만 충분하다면 보다 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침묵과 어둠이었다.
"공격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행동을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 뿐,
노인장께서 제게 펼친 것처럼 몸을 얼어붙게 만들 지경은 아닙
니다."
"크크크! 아니야. 감응은 깨달음이지 수련이 아니야. 잠시 머
뭇거리게 만드는 것이나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나 똑같아. 내가
길을 환히 보고 걷는다면 자네는 안개 속을 걷는다는 차이뿐."
남저명의 음성에는 호의가 깃들었다. 지금은 같은 동기감응 감
여가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 기타 다른 세상사는 포함되
지 않았다.
"인체에는 단전(丹田)이 세 개 있지. 상단전(上丹田), 중단전
(中丹田), 하단전(下丹田). 사람들은 단전하면 하단전만 생각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야. 크크크! 부처님의 혜안(慧眼)이 무엇
인 줄 아는가? 크크크! 상단전이야. 상단전으로 사물을 보니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이는거야."
반여량은 묵묵히 들었다.
사부님에게 무수한 소리를 들었고, 그것은 거의 대부분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지만 상단전과 관계된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크크크! 사부 이름이 안철주라고 했나? 대단한 사람이군. 내
생각이 또 틀렸어. 나는 남가일족이 아니면 동기감응을 깨닫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혼아가 무공을 펼칠 때
종종 무서운 기운이 흘러 나오더니만... 인당(印堂:미간). 네
인당을 만져봐. 볼록할 거야. 크크크! 감응을 느끼는 인간들은
몸 안에 강력한 기가 흐르지. 범인들보다 열 배는 강한 기. 나
는 느낄 수 있어. 네 몸에 흐르는 기를... 저 멀리... 저 멀
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느꼈어!'
청붕성일 게다. 반여량이 청붕성에서 느낀 악기는 과연 노인이
흘려보낸 것이다. 반여량은 미간을 만지작거리며 노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그의 인당은 유난히 볼록했다.
"기운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냐. 뇌력? 흥! 그것은 모두 인당
을 개발하는 수법에 지나지 않아. 천지의 소리를 듣는 것이 첫
째요, 기운을 읽는 것이 두 번째다. 점점 감응이 높아지면 인
기(人氣)를 파악할 수 있고, 거기에 도를 더하면 감응을 전달
할 수 있다. 후후! 그것을 투시(透視)라고 하는 거야. 인당에
서 보이지 않는 빛이 발산되며 상대를 읽고 공격하는 것. 지금
은 뚜렷이 보이지 않겠지만 감응을 계속 펼치다 보면 빛이 발
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이것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면 감응이 곧 염력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궁금했던 모든
사실이 실 타래 풀어지듯이 풀려 나갔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
라면 청붕성까지 기운을 전달한 정도는 가벼운 일에 속한다.
맞을 것이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 조중이나 윤명이 파악하지 못한 무
인의 존재를 깨달았고, 거기에 인원까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다른 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 전에도 기운을 읽고 잊어 버리지
는 않았지만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뿐만 아
니라 인원수까지 알아 맞히다니. 갑자기 생긴 능력이라 다소
의아해했었는데. 전처럼 읽었던 기운이 달라붙고, 그 기운에서
파생되어 나간 잔여 기운인줄 알았는데...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느냐? 밖에 더러운 놈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냥 보내 주더군요."
"그냥 보내 줘? 카카카! 그렇군. 네 놈이 혼이를 죽일 수 있다
고 믿지 않았겠지. 크크크! 놈들은 혼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어. 내력으로 치료하려 하더군. 주화입마라도 걸린 줄 알
고... 흥! 어림없는 짓! 온갖 지랄을 다 떨던 놈들은 안 되겠
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잠잠했어. 그러다... 나는 감응을 받
았어. 나와 같은 동기감응. 멀리 멀리서..."
청붕성일 게다. 이백여 리 떨어진 자신이 감응을 펼칠 때 노인
도 감응을 펼쳤다. 감응과 감응은 그래서 만났다.
"놈들의 의도를 알았지. 동기감응 감여가를 데려오는 거야. 혼
이를 치료하려고. 섬섬! 네 놈이 오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
놀라운 일이다. 남저명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자신이 오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혈단이다. 그제 밤 사건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노인에게 조정을 받은 곱추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고,
귀면무인들은 오히려 막아선 기행(奇行). 그랬구나. 그래서 곽
가장 무인들은 가차없이 죽이면서 자신에게는 살검을 들지 않
았구나.
그럼 탈명화검을 죽여 곽가장으로 보낸 것이 고의적인 행동이
란 말인가. 곽가장주가 동기감응 감여가를 동원할 줄 어찌 알
고...? 그런 점까지 계산했다면 혈단은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다.
'도와 줘.'
반여량은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곱추 괴인 '혼'은 노인의 명에 따라 비수당 무인 세 명을 베고
함상까지 죽였다. 거기까지는 이성을 찾지 못한 상태. 천광탄
의 밝은 빛이 뇌에 충격을 주었다. 잠시나마... 혼은 도움을
원했다. 그래서 돌아간 것이다. 동혈로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너도 참 불쌍한 놈이구나. 사지를 제 발로 기어오다니. 그렇
게 생각했겠지. 네 놈... 네 놈이 나의 모든 것을 망쳤어. 나
는... 나는 이 동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놈들이 들
어와야 하는데... 놈들이... 크흑!"
노인은 웃다가 울었다.
혼이라는 사람처럼 남저명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남저명은 뛰어난 감여가다, 아니, 감여가가 아니다. 동기감응
을 펼친다고 모두 감여가가 되지는 못한다. 세상 사람을 편하
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은 감여가가 아니다.
"크크크...!"
남저명은 반여량의 생각을 읽은 듯 툴툴거리며 웃었다.
"나는 오늘 아니면 내일 죽는다. 사기에 버틴다고 버렸지만 속
으로 곪아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이런 곳에 뼈를 묻으니...
크크크! 죽어서도 원귀가 될 거야. 혼이를 데려가서 그나마 위
안이 되지만. 섬섬! 놈들... 감여가를 부르면 될 줄 알았던 모
양이지? 그러나 뇌(腦)란 놈은 기회를 한 번밖에 안 주지. 일
단 손상 당하면 영원히 복귀하지 못해. 크크크!"
남저명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산사람들이
다. 남저명도 그렇지만 혼의 운명도 기가 막히지 않은가. 어렸
을 때 동혈에 들어와 어둠 속에서만 살다 가다니. 무공을 가르
쳐 준 사람은 혈(血) 자(字) 돌림의 삼 인이 분명하다. 또한
그의 어머니인 듯 싶은 음갈마희 초초를 죽인 사람은 동혈을
들어오다 만난 혈갈류일게다.
과연 혼의 본명은 무엇이고 원래의 신분은 무엇일까? 누구의
자식이기에 동혈로 밀어 넣었을까?
반여량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를 죽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배
류시의 위력이 엄청나지 않았던들 지금 죽어 있는 사람은 자신
이었으리라. 그를 죽인 것은 당연했다.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번 사기에 물든 뇌는 다시 정상으
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남 노인에게 들은 말은 놀라웠다.
옥순산 전투는 곽가장의 단독 무훈(武勳)이었다. 그런데 남가
일족이 옥순산에서 죽었다니. 그것도 혈조수라는 오명을 뒤집
어쓰고 말이다. 이치대로라면 혈단 인물이 곽가장 무인들이어
야 한다. 그러나 혈단은 곽가장을 공격했다.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반여량은 노인을 정시(正視)했다.
보기만 해도 두통이 치밀고,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
거리게 만들던 악마적 기운. 산발한 머리, 뼈만 앙상한 몰골,
미친개처럼 번뜩이는 눈동자.
"혼이라는 사람... 쇠사슬에 묶여 있던데 누가 제압했습니까?"
반여량은 노인과 혼, 두 사람 모두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크크! 본인이 스스로 그랬어. 인간답게 살려는 욕망이 스스로
를 결박하게 만들었지만... 크크! 그 놈은 제 무공이 어느 정
도인지도 몰랐어. 그 놈이 살인을 할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거
든. 크크크!"
"당시... 무인들을 뒤쫓을 때 감응 능력이 어느 정도였습니
까?"
"크.. 크크! 당시의 감응 능력? 크크크! 네 놈에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어. 크크크...!"
이제는 이성을 잃어간다.
그는 광인(狂人)과 정상인, 그리고 신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복수라는 명제도, 이 동혈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기
억하지 못한다. 사부도 이랬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반여량은 침울하게 남저명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감여가의 종국(終局)인가. 모두들 이렇게 죽어야 하는
가. 깨끗이 맑은 이성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차라리 검에 맞아 죽는 것이 낫겠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철없는 우리 동기감응 감여가 제 발등에 떨어진 불조차 끄지
못하면서 언감생심 옆집에 일어난 불을 걱정하는 놈. 쯧쯧! 바
보인가, 철부지인가?"
"..."
"사기를... 느꼈나? 이곳의 기운이 어떤지 잘 알 테고... 어
때? 감여가답게 풀이해 보지?"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지. 사부님은 운명 직전에 비보감여를 누
누이 부탁했다. 그런 당부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감여에 대한
것을 물어오셨다.
"어둠뿐이군요. 사람이 밝음을 대하지 못하면 음기에 노출됩니
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변하고, 머리색도 변하고...
모든 게 변합니다."
성품이 어둠에 짓눌린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미 남저
명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노인도 자신의 상태
를 잘 알것이다. 남의 기를 읽는 것 못지 않게 자신의 기를 읽
을 줄 아는 것이 동기감응 감여가이니까.
반여량은 사부에게 했듯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곳은 모든 게 돌입니다. 돌은 기가 뭉쳐진 덩어리. 독특한
기운을 발산합니다. 날이 더우면 온기를, 날이 추위면 한기
를... 그래서 여름에 돌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면 더욱 덥고,
겨울에는 더욱 춥습니다. 정원에 놓인 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집 안이라면 문제가 큽니다. 인간도 기의 덩어리이지만 돌처럼
단단하지는 않습니다. 이겨낼 수 없죠. 양택(陽宅)에서 집안에
수석(水石)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곳은 전부
돌입니다. 인간의 기운을 빼앗아 가는 곳이죠. 머물 곳이 못
됩니다."
"또... 또... 말해... 봐."
"기는 몸 속으로 들어와 육체에 머뭅니다. 또 육체는 집에 머
물죠.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주하는 집과 교감을 나
눕니다. 맹자(孟子)는 '거주하는 곳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
죠."
노인은 몸을 뒤로 눕혔다. 이제는 앉아 있기도 괴로운 게다.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박쥐 한 마리가 그의 마지막 식사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수맥(水脈)이 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지럼증이나 속병, 허리에 통증이 생기지만 이곳을 치는 수맥
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심한 정신 질환을 않게 될..."
"그만!"
괴인은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뇌... 력... 인당... 뇌력..."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남 노인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뒀다. 순간, 착각일까? 그의 몸에서 사기가 사르르 소
멸되며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영혼을 좀먹던 사기가 마침내 그를 풀어 준 것이다.
쿠우우우...!
물길을 따라 십여 장쯤 내려가자 핏빛을 머금은 잔혹한 기운이
환상처럼 아스라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동혈에 머물러 있던 사기였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무서운 사기를 내뿜는단 말인
가?'
반여량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뿜어져 나오는 사기는 천지간의 모든 기운을 밀집시켜 놓은 듯
지독히 강하고 날카로웠다.
'정면 대결을 하면 진다, 나보다 감응이 강했던 남 노인도 사
기를 어쩌지 못했는데...'
반여량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씻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맙소사!"
시신, 시신, 시신...
서쪽으로 뚫린 동혈에는 시신이 가득했다. 그리고 안개가 낀
듯 희뿌연 어둠 속에 동그란 붉은 기운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원한량(怨恨靈)...'
반여량이 본 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습기가 많은 곳이라 발생
하는 현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시신이 내뿜는 원한이었
다. 너무나 한이 많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기
운,
상가(喪家)에 갈 적에는 금기(禁忌)하는 것이 많다. 혼인을 앞
둔 처자, 임신한 아낙, 체질이 허약한 사람 등은 상가에 가서
는 안 된다. 상문살(喪門殺)을 견디지 못하고 빙의(憑依:나쁜
기가 인체에 스며드는 것)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조심하는 상문살도 색깔로 보면 흰색에 지나
지 않는다. 지금처럼 검은 바탕에 붉은 반점이 떠오른 것은 명
백한 살기요 사기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적개심을 가지면 살(殺)이 인다. 상대를 죽
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살은 영혼에 각인되고, 죽는 순간까
지 잠재 되었다가 영혼이 위축될 때 폭발해 나온다. 이름난 도
부(刀夫)가 잡은 고기는 특히 연하고 맛있다. 짐승을 죽이면서
살기가 일지 않도록 깨끗하고 편안하게 죽인 까닭이다. 이것이
감여가들이 말하는 살기다.
반여량이 보기에 동혈에 가득 차 있는 시신들은 살기를 가득
띤 채 죽었다. 최대한 적개심을 촉발시킨 후 죽였다. 누가 이
토록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까?
이제는 음기가 가득한 동혈에 사기까지 어우러진 원인을 알았
다.
"으음...!"
신음을 터뜨린 반여량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 시신의 대부분이 뼈만 남은 인골(人
骨)이지만 한을 품은 채 방황하게 만들 수는 없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一時) 불(佛) 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 이와 같음을 내가 들으니,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
독원에 거주하시어...
그의 입에서 업보차별경(業報差別經)이 도도하게 풀려 나왔다.
그는 장의이며 감여가일 뿐이지 시다림(尸茶林:고승이 망자에
게 베푸는 설법) 법사는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지
지 않았다. 망자에게 가장 적합한 묘혈을 골라 주고 안장하면
할 일이 끝나니까. 적어도 상방성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다림 법사가 망자에게 무슨 경전을 읊어 주는지 알 턱이 없
었다.
그나마 업보차별경이라도 읊어 주는 것은 사부님에게 글을 배
울때 불경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여량은 곧 무아경(無我境)에 들어가 망자를 위로하기 시작했
다. 비록 그들에게 적합한 경전은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해 주
고 싶었다. 억울한 울음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으니까.
반여량이 성심 성의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한령은 흑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보감여.
사부님 말씀대로라면 흑기를 지워야 한다. 산 밑에 있는 사람
들이 마음껏 양기를 쬐며 살 수 있도록. 하지만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동혈을 막아 흑기를 가둬 버리는 것.
그게 나을 것이다.
억울한 원혼은 이제 그만 쉬어야 한다. 깊고 깊은 침묵 속에
서.
"휴우!"
장탄식을 터트린 반여량은 동혈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순
간, 그의 몸은 말뚝을 박아놓은 듯 딱 멎어 버렸다.
육십을 넘어선 듯한 노인.
그가 가슴에 검 두 자루를 껴안고 묵묵히 다가섰다.
혈갈류다. 귀면을 쓰지 않은 모습이지만, 동혈을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백의(白衣)를 입었지만 첫눈에 알아볼 만큼 그의 기
세는 독특했다. 강인하고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 강유
(剛柔)가 적절히 배합되어 편안하게 느껴지는 기운.
"네가 나온 것을 보니... 혼이는 죽었겠군."
"그렇소."
반여량은 조중이 말해 준 무공을 사용할지 아니면 동기감응을
사용할지 망설였다.
혈갈류에게는 동기감응이 별로 소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
공? 하지만 토납술(吐納術) 정도로 알았던 것이 무공이라 한들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바에야, 아니 안다 할지라도 정통으
로 무공을 익힌 절정고수를.
어떤 것도 자신없었다.
혈갈류를 죽일 방도는 있다.
배류시.
단 한 번 남은 기회를 사용하면 된다. 혼이라는 초절정 고수도
배류시를 피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혈갈류쯤이야. 하지만 아무
리 절정 병기가 있으면 무엇할까. 품에서 꺼낼 여유조차 주지
않을 것을.
"쿠쿳!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중원에 피바람이 불겠군."
혈갈류가 낙심한 듯 중얼거렸다.
"음갈마희 초초를... 죽인 사람이 당신입니까?"
반여량은 '간살(姦殺)'이라는 말 대신 죽였다는 말로 표현했
다.
"남저명이라는 친구를 만난 게로군. 지독한 놈이야. 이십 년
동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다니."
"알고 있군요?"
"물론 우리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 하지만 남저명이라는 친구
가 이 동혈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어. 혼이
가... 혼이가 이미 망가진 후였지."
혈갈류의 음성에는 진한 정이 묻어나왔다. 혈육(血肉)이나 표
출할 수 있는 뜨거운 진심이었다.
"혼이는 음기를 타고났어. 딸이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덴
데... 불행히도 아들이었지. 그것도 좋아. 그저 평범하게 일생
을 살아간다면 괜찮아. 그는... 무가에서 태어난 것이 불행이
야. 무공을 익혀야 하고, 강서성에서 가장 순음지기가 강한 곳
이 이곳. 여기서 무공을 익혀야만 주화입마를 벗어날 수 있다
고 하기에... 후후! 원래 무인들이란 강하면서도 약한 면이 있
지. 미신(迷信)에 불과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으니."
"혈갈류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순음지기는 믿지 않
으면서 혼이라는 사람이 망가진 것은 악기 때문이라고 믿습니
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하라고 한 사람은
옳은 지적을 해줬습니다. 그 노인의 말대로 음갈마희의 색기가
그렇게 대단했다면 그녀의 자손은...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하
면 일취월장했을 겁니다. 양목을 베지만 않았다면, 동혈을 마
주 뚫지 않았다면 말이죠."
"후후! 이제는 다 지나간 일..."
혈갈류의 안색에는 회한이 물결쳤다. 그리움이기도 했다. 반여
량은 이런 눈빛을 잘 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띠었던
눈빛, 한한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는 마음이었
다. 그는 음갈마희 초초라는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혼이가 당신 자식입니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혈갈류는 그런 분위기를 풍겨 냈으니까.
"아니야. 그는... 휴우! 그만두세. 이미 지난 일인데... 혼이
를 죽였다면 배류시를 사용했겠군."
"그것까지 알고 있었습니까?"
반여량은 깜짝 놀랐다. 혈갈류가 장담한 대로 혈단의 이목은
천하 곳곳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진육이 배류시를 남 몰래
건네 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조수, 학구, 동목 그리고 자
신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후후! 진육이 당문에서 파문된 당일상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
랐어. 만약 그가 협곡에서 십팔나포술을 펼치지 않았다면 지금
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자신을 철저하게 은폐할 줄 아는 친구
였지. 최고의 비기를 죽음 직전에서야 펼치다니.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네는 동혈에 들어가지 못했어."
늦게 알았다는 말이 된다. 자신이 동혈에 들어간 다음에.
"한 가지만 더 묻죠. 혼이에게 제가 필요했다면 청붕성에서는
왜 죽이려 했습니까?"
"허허! 혼이는 잘못 태어난 아이지. 이대로 죽었으면 하는 바
람이 컸어. 잘 됐어, 잘 죽었지. 살아 있어봐야 고해인 것
을..."
"내가 혼이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까?"
"너는 당연히 제압될 테고...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을 지
닌 상태에서 제압하면 감응으로 악기를 누를 수 있다고 믿었
다. 영혼을 끄집어 내서 정신을 순화시키면 되니까. 혼이는 그
럴 능력이 충분했다."
반여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태라면 도와 주고 싶지 않아도 도와 줄 수밖에 없다.
몸이 자유를 잃은 상태, 거기에 악기를 쏟아 낸다면... 감응을
일으켜 저항할 수밖에 없다. 맑은 정신으로... 동혈 안에 있는
악기와는 정반대의 기운이다. 혼은 그 정신을 받아들일 작정이
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잠재한 악기를 몰아내려 했
다. 기운이 강한 감여가 끼리라 가능한 말이다.
"하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만났다면... 너는 죽었을 게다.
허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자, 검을 들지. 자
네를 살려보낼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배류시를 상대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검이라면 상대해 주겠네."
혈갈류는 반여량의 발 앞에 검 한 자루를 내던졌다. 아무 문양
(文樣)도 없는 평범한 철검(鐵劍)이었다.
"청붕성에서... 사부님의 함자를 꺼내 놓았습니다. 사부님을
어찌 아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허허! 곧 죽을 사람이 궁금한 것도 많구먼, 혼이에게 구궁산
을 추천해 준 사람이 바로 안철주라면 대답이 됐나?"
"음...!"
침음이 새어 나왔다. 사부님이라면 구궁산을 찾아든 이유가 설
명된다. 이런 지형은 오직 동기감응 감여가밖에 찾지 못할 곳
이니까. 사부님은 어째서 피를 부르는 혈단인을 도와 주었을
까? 그토록 비보감여에 매달리셨으면서. 새롭게 드는 의문이었
다.
"자, 이제 검을 들지."
"나는 검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럼 그냥 죽을 덴가?"
"돌맹이를 집으라면 집겠습니다."
검을 잡는 방법도, 초식을 전개하는 요령도, 높은 수준에 이르
렀다는 내공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바에야 검을
잡은들 무엇하랴, 하는 심정이었다.
"하하하! 돌맹이라... 좋네. 감히 이 혈갈류 앞에서 돌맹이로
싸우겠다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하하! 집어들게."
반여량은 단단해 보이는 조약돌 두 개를 집어들었다. 일단 감
응을 펼침과 동시에 돌맹이를 날리고, 혈갈류가 주춤하기만 해
준다면 배류시를 꺼내들 심산이었다.
"승부는 단 일초식에 날 거야."
"그렇겠죠."
뚜벅! 뚜벅...!
혈갈류는 팔짱을 낀 채로 거침없이 걸어왔다. 그의 가슴에 푹
안긴 검자루에서 예리한 살광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남 노인은 뇌력이 아니라 상단전이라 했다. 인당을 통해서 빛
을 발산한다고...'
고오오오...!
감응을 펼쳤다. 상대를 읽는 것은 필요 없었다. 상대를 족쇄에
채워버리듯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 신(神)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특정한 종파(宗派)에 심취하
지는 않더라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간절히 갈구하
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야 좀더 나은 나를 발견할수 있을 것
이다.
'인당에서 빛이 나온다. 빛이 나온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뇌력을 집중시키자 뜨거운 불줄기가 전신을
한바퀴 휘돌더니 독맥을 타고 올라 백회혈(百會穴)을 지나 인
당에 집중되었다.
파아앗...!
세상이 갑자기 시커먼 빛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시커먼 암흑... 그 한가운데 노란 원이 생성되었다. 그리
고 혈갈류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타앗!"
반여량이 일갈을 터뜨리자 모든 현상이 눈 녹듯이 걷혀 버렸
다. 세상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혈갈
류의 모습이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불쑥 튀어올랐다.
쉬익! 빠악...!
혈갈류는 돌맹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주
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반여량을 바라보더니 입가를 씰룩거렸다.
"동기감응인가?"
"그렇소."
"충고 한마디 하지. 무인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아.
단 한 번. 그것으로 승부를 갈라야 돼. 자네는 주어진 기회를
쓸모없이 써버렸어."
스릉...!
검이 뽑혀져 나왔다. 생사대적(生死大敵)을 만났다는 투혼도
힘차게 뻗어 나왔다.
'그렇군. 무인에게는 방심이 최대의 적이었군.'
검을 뽑은 혈갈류와 조금 전의 혈갈류는 판이하계 달랐다. 어
머니품처럼 잔잔한 물결과 세상 그 무엇이라도 삼켜버릴 듯 맹
위를 떨치는 파도. 똑같은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다.
반여량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무인에게 방심이 최대의 적이라면 감여가에게는 격동(激動)이
최대의 적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져야 한다. 거센
폭풍우에도 미동(微動)조차 하지 않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야
한다.
파아앗!
말은 많이 들었다. 흑의인들은 한결같이 동자료, 화합혈, 장문
혈, 회음혈만 노린다고. 그렇게 죽어간 무인들도 많이 보았다.
동자료를 베이면 뇌수가 흐르고, 화합혈을 베이면 꽈리가 터지
듯이 피분수가 솟아오르고, 장문혈을 베이면 창자가 흘러나왔
다. 회음혈을 베이면...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한결같이
처참한 자상들. 혈갈류가 노려오는 곳은 머리였다.
반여량은 조금 전에 펼쳤던 동기감응을 다시 펼쳤다. 인당에서
분출되는 기운은 하얀 그물이 되어 혈갈류를 옭아매리라. 그리
고 자신은 다시 돌팔매질을 하게 될 것이고... 이번에는 잠시
도 지체하지 않고 배류시를 꺼내야 한다.
"허엇!"
반여량은 다급히 헛바람을 내질렀다.
깜깜한 세상 속에 혈갈류의 모습이 뚜렷이 비치는 것은 똑같은
데... 분명히 발산한 염력에 전신이 동여매지는 것 같았는데
... 베어온다. 동기감응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검날이 짓쳐
온다.
그는 황급히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스르륵 빨리듯 물러서는 육신, 몸안에 휘도는 불기둥을 발바닥
용천혈에 집중시킨 결과였다. 조중이 태극도해라 말해 준 내공
이 무의식 중에 펼쳐진 것이다.
혈갈류의 검세가 돌변했다.
이번에는 가을날에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 가볍기 그지
없는 검세.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거력은 살을 저미기에 충분
했다.
고오오오...!
다시 동기감응을 펼쳤다. 하지만 소용없다. 혈갈류는 무형의
기세로 감응을 제치고 다가선다. 그가 펼치는 것은 내공이다.
내공으로 감응을 차단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혈갈류가 말한
의미를 진정으로 알았다. 주어진 기회를 쓸모없이 사용했다는
진의를.
'무인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무공뿐인가!'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이었다. 혈갈류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았다.
파아앗!
되는 대로 돌맹이를 던져 냈다. 비록 동기감응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잠시만, 잠시만 머뭇거리게 할수 있다면.
역시다. 상대가 안 된다. 신법으로 돌맹이를 흘려버리고 연이
어 짓쳐대는 검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다.
"커억!"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치밀며 무릎이 푹 꺾였다. 장문혈!
비수당 무인들이 숱하게 죽어가야 했던 바로 그 요혈이었다.
그나마 엉겁결에 펼친 신법이 치명적인 일격은 모면해 주었지
만 행동이 급격하게 둔해졌다.
'이런...!'
처음 맞아 본 검날.
상처에서 이는 아픔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스멀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렇구나! 사람이 죽음과 직면하면 이런 감정이 드는
구나. 무덤덤하게 맞이할 줄 알았는데. 차라리 단칼에 목이 잘
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앞으로는 돌맹이를 던질 때, 내면에 침잠된 기운을 손에 집
중시켜 보게. 그리고 난 다음 던지는 거야.
조중이 한 말이다.
반여량은 다급히 땅바닥을 뒹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거나
집어들었다. 돌맹이가 잡힌 것은 행운이었다. 부질없는 몸짓이
나마 두어 번 더 할 수 있으니까.
혈갈류는 몸을 운신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역시 무공을 익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몸놀림부터 다른 것을. 특히 그는
그가 말한대로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허억!"
등줄기를 싸늘히 훑고 지나기는 검날.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생사가 급박한 상태에 치달아 있지
않은가. 조중이 말한 대로 내면에 들끓는 기운을 오른팔에 집
중시켜 돌맹이를 날렸다.
쐐에엑...!
파공음이 틀리다. 과연 내력을 집중하니 뇌력만 집중한 것과는
위력이나 속도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타앙!
혈갈류는 돌맹이를 가볍게 검날로 튕겨 냈다.
"후후...!"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반여량이 하는 행동은 그저 힘없는 벌레
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내력을 한 점에 모아 날렸건
만 혈갈류의 신법을 머뭇거리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무엇으로...'
한순간,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뇌력도, 내공도, 내공과 내력을 접목해도 혈갈류를 상대할 수
없다. 이제 무엇으로 그를 저지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 앉아서...?
반여량은 황급히 좌정했다.
언뜻 보면 얌전히 검을 맞겠다는 뜻으로 비춰질 행동이었다.
사실 반여량은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그 동안 배우
고 익힌 동기감응으로 맞설 뿐. 그나마 믿는 것은 첫 번째 돌
팔매질로 혈갈류의 이마에서 핏방울을 터뜨렸다는 것.
고오오오...!
다시 동기감응을 펼쳤다.
이번에는 좀 전과 다르다.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는 일체
의 무아경. 상방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묘혈을 골라 줄 때 펼
쳤던 동기감응이다.
혈갈류를 죽이겠다는 생각조차 없다. 아니, 혈갈류라는 사람조
차 잊어버렸다.
그런데... 아니다.
혈갈류의 모습이 비춰진다. 분명히 눈을 감았는데 환히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또렷하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데
혈갈류가 서 있는 모습만 명확하게 부각된다.
그는 거미줄에 얽힌 사람처럼 발버둥친다. 아! 그의 몸에서 무
서운 기운이 뿜어진다.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은 칭칭 몸을 휘
감은 거미줄을 가닥가닥 끊어낸다. 그리고... 짓쳐온다.
쒸이익...! 퍼억!
혈갈류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우뚝 멈
춰섰다. 그리고 더 이상 짓쳐오지 않았다.
반여량은 조용한 적막을 느끼며 눈을 떴다.
세상이 맑다. 깨끗하다. 구궁산에 와서 처음으로 산천 초목의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이제야 알았다. 동혈에 깃든 흑기는 진
혼(鎭魂)으로 달래 줄 성질이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한이라서 깨끗이 태워 버려야 한다. 맑은 불길로...
산에 나무를 다시 심고... 구궁산 전체를 살려야 한다. 그래야
살기로 가득 찬 산이 영산(靈山)으로 변한다.
다음에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혈갈류가 비쳐들었다.
"빠르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힘없는 음성. 그의 복부에 커다란 구
멍이 뻥 뚫리고, 흘러나온 핏물이 백의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반여량의 손에는 배류시가 들려 있었다.
무의식 중에 살고자 하는 본능이 저지른 행동. 품속에 손을 찔
러 넣고 배류시를 꺼내 발사한 것은 실로 순간이었다.
"후후후! 암기의 제왕은 단연 당일상. 하지만 이제는 자리를
물려줘야겠군. 너에게..."
"아닙니다. 배류시는 전부 사용했습니다. 이제 사용할 암기가
없습니다."
"그런가? 혼이에게 두 번이나 사용했나?"
반여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그렇지. 그 정도는 되었을 거야. 정신만 맑았다면 능
히 천하제일인도 가능했을 텐데..."
혈갈류는 짙은 여운을 남긴 채 말을 끊고, 잠시 피로 물든 복
부를 내려다보았다.
"엄청난 위력이군. 그 죽통을 버리지 마라. 곽가장 제조각에
가져가면... 만수일귀라면..."
혈갈류는 반신이 마비되는 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순간,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차게 땅에 꽂고 허리를 반듯이 폈
다. 죽어도 땅에 쓰러져 죽을 수는 없다는 기개였다.
"산귀는 어디 있습니까?"
"후후! 왜? 구하고 싶은가?"
"그래야겠죠."
"어림없는 소리... 여산(廬山) 밀옥(密獄)... 한 마디만 더...
헉! 동혈 안에 죽은 사람들은... 헉! 아프군. 남저명... 그 친
구 걸작이야. 동기감응... 저주의 동기감응..."
혈갈류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펼친 동기감응에... 내가 당할 뻔했어. 그래서...
동혈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헉! 심령술(心靈術)... 그것만
은 절대로... 저주... 저주!"
혈갈류는 눈을 부릅떴다.
굳어진 동공... 그는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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