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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죽음의 땅에서 들리는 소리
(一)
"대단하군! 이런 상처를 입고도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조중이 흘린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반여량의 상처는 깊고도
중했다.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상
처였다.
하지만 감응의 기본이 뇌력이지 않은가. 정신력을 들자면 반여
량보다 뛰어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금창약(金瘡藥)을 모아 보죠. 이건 턱없이 부족하니..."
이미 많은 난전(亂廛)을 치른 끝이라 모두들 금창약이 동난 상
태였다. 각기 지니고 있는 금창약을 모아서 쥐어짜듯이 바르고
상처를 동여맸을 때는 새벽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지독하게 당했군. 누구에게 당했나?"
조중은 익히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이만한 상처라면 감히 검을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던 곱추 괴인이 아니겠는가.
"혈갈류... 혈갈류입니다."
반여량은 넋이 반쯤 빠져나간 듯 힘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동기감응 감여는 뇌력을 집중해 묘혈을 찾는다. 그것으로 족해
야한다. 거기서 더 발전해 염력을 얻고,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
은 감여가가 택할 행동이 아니다.
비보감여.
사부님이 말씀해 주신 길은 어떤 길인가.
반여량은 재삼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염력을 발산하고 그 다음
에 느낀 엄청난 두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장문혈을 베인
아픔도,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 검흔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머
리가 반으로 뽀개지는 통증.
정상이 아니다.
세상에 염력을 구사하는 인간은 많다. 투시(透視) 달인도 있
고, 미래(未來)를 볼 수 있는 사람, 죽은 영(靈)과 교감을 이
루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두 자연적으로 형성된 능력이기에
고통을 받는다거나 하는 부자연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여량은 감응을 한 번 펼칠 적마다 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전에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인당을 통해 염력을 발산하
고 난 다음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컸다. 만약 옆에 적
이 있어 단칼에 목을 베어와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으리
라. 아니, 목을 베어오는 줄도 몰랐으리라.
혈갈류가 죽고 난 다음 반여량은 그 자리에 쓰러져 심한 경련
을 일으켰다. 전에는 그저 탈진한 듯 기운이 빠진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 경우는 크게 달랐다.
땅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어렴풋이 생각나기로는 소리도 마구
지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
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근 세 시진 동안이나 고통에 몸부림친 끝에 반여량은 간신히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았다. 제정신이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라.
얼마나 극심하게 뒹굴었는지, 혈갈류에게 베인 상처가 입을 쩍
벌렸다. 가뜩이나 상처를 바로 치료하지 않아 출혈이 심한 상
태에서 세 시진이나 흘렀으니.
그런 몸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밑으로 향하는 길을 따
라 천근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무의식 중에 떼어 놓았다. 움직
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뒹굴고...
확실히 비정상이다.
감응의 도가 깊어질수록 고통은 더욱 극심해진다.
'원인을 알아야 해. 원인을...'
"혈갈류...? 음! 남은 한 사람의 작호가 혈갈류였군."
조중은 기이한 눈빛으로 반여량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배류시가 강하다 하지만 곱추 괴인 한 명만 죽이는 것
도 벅찰 텐데 하물며 혈갈류까지.
"여산 밀옥... 여산 밀옥에 곽소저가 있습니다. 산귀, 석수
도."
"뭐야!"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일시에 터진 경악성이었다.
"아니, 왜...?"
오히려 놀란 사람은 반여량이었다.
그는 일행을 둘러보며 의문이 가득한 눈길을 던졌다.
"누가... 누가 여산 밀옥에 처제가 갇혀 있다고 말해 주던가?
혈갈류인가?"
"그렇습니다."
"하하하! 어림없는 소리... 모함이야. 밀옥에 갇힐 리 없어."
"당주...?"
"이보게. 밀옥이 어디인 줄 아는가? 바로 곽가장의 뇌옥(牢
獄)일세. 흉악한 자들을 잡아 가두는 뇌옥이란 말일세. 그런
곳에 곽 소저가?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뭐라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 혈단 사람이 곽가장 무인을 잡아 곽가장 뇌
옥에 가두다니.
"뇌옥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곳이야. 그곳에 갇히면
그 누구라도 빠져나올 수 없어. 죽기 전에는..."
동목이 조중의 말을 뒷받침했다.
"혈갈류는 분명히 밀옥이라 했습니다."
"으음...!"
깊은 침음만 터져나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탈명화검의 복수를 하겠다고 시작된 걸음이다. 그러나 일행은
혈단으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받은 끝에 세력이 와해되고 말
았다.
앞에서 형제들이 죽어간 것은 비통했지만 승리는 의심하지 않
았다. 장주에게 또 다른 복안이 있을 줄 알았다. 장주는 혈단
이란 존재를 알았고, 일행이 받는 급습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
였으니까. 하지만 비수당이 몰살하고 비화당, 일심각까지 초토
화된 지 이틀이 지나도록 구궁산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맴돌았
다.
이제 복수는커녕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이백여 명의 절정 무인들
틈바귀를 비집고 나간다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불
가능하다.
"기(氣)! 추풍, 자네의 동기감응으로 곽소저나 석수의 기를 읽
을 수는 없을까? 곽 소저가 밀옥에 갇혀 있을 리는 없고, 놈들
이 우리의 이목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다면..."
학구는 말을 하다 말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름
없는 자신들의 이목을 돌려서 무엇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혈갈
류가 죽어가면서까지 그런 심계(心計)를 쓸 이유가 무엇일까.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촌락에 갇혀 있다고 말하면
일행의 발길을 묶게 된다. 알고도 떠날 수는 없는 일, 일망타
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곽 소저가 일반 여인도 아니고 장
주의 다섯째 딸인 바에는.
"일단 그 문제는 차후로 미룹시다. 무녕 분타까지 가서 차후
대책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동목이 제동을 걸었다.
그의 말은 현실을 가장 직시한 말이었다. 곽소저가 눈앞에 잡
혀있다 할지라도 구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일단은 힘을 얻어야 한다.
"으음! 그래야겠군. 동목, 연환궁 말고 다른 병기는 없는가?"
"없습니다. 다른 병기를 제조하려면 화덕이 있어야 합니다."
동목은 나뭇가지를 깎아 급히 만든 연환궁을 만지작거렸다. 원
래는 이십시(二十矢)를 한 줄에 꿰어야 한다. 그러나 철도 아
닌 나무로 급히 만드느라고 십시(十矢)밖에는 꿸 수가 없다.
그것도 이제는 무용지물이다. 화살 없는 활은 밑 빠진 항아리
나 진배없으니까. 전처럼 급히 화살을 만든다 해도 수백 개에
이르는 화살을 짊어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지. 어떻게 빠져나가 보세. 능공십자, 놈들의 위치
는?"
"전혀 파악할 수 없습니다. 혈조수의 비기를 물려받은 놈들이
라 은신술이 기막힘니다."
'혈조수...'
반여량은 남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음모의 희생자인 남가일족. 그들은 혈조수란 오명을 뒤집어쓰
고 죽었다. 혈단 인물이 그들의 후인이라... 그런데 정작 혈조
수의 후인인 남노인은 동혈 인에서 혈단 인물들에게 복수를 하
려 했다?
얽히고설킨 문제들.
다른 무인들이 들것을 만들어 왔다. 반여량의 몸 상태는 걸어
갈 수 없을 만큼 위중했으니.
"일심각... 윤각주로군요."
반여량은 수풀더미 한 곳을 가리켰다.
개미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누렇게 마른
풀잎과 뜨거운 열기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반여량의 말이 끝나
기 무섭게 풀더미가 들썩이더니 허름한 나무꾼이 모습을 드러
냈다.
촌로들이 입는 허름한 의복에 머리는 풀어서 무명 끈으로 질끈
묶었고, 얼굴에는 숯검뎅이가 칠해져 일심각주 윤명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하하! 역시 추풍이군. 추풍 앞에서는 어떠한 은신술도 소용
없겠어. 다행인 줄 알아. 나는 또 놈들인 줄 알고 공격하려고
했지."
윤명이 호들갑스럽게 주절대며 다가섰다. 그러나 그의 성명 병
기인 단창은 보이지 않았다. 단창은 고사하고 검 한 자루, 우
모침 하나 없었다.
"이런! 많이 당했군 그래. 하기는 무공을 모르니. 그런데 처제
가 보이지 않네? 저부, 처제는?"
"놈들에게 잡혔다."
조중은 툭 던지듯 짤막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이런...! 내 이놈들을 그냥!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무녕 분타로 간다."
"후후! 제가 잘못 들었나요? 철수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잘못 듣지 않았다."
"후후후! 그렇군요. 혈육로를 거쳤다는 비수당 무인도 철수를
할 줄 아는군요."
"혈육로에서 배운 백전 중 퇴전(退轉)이 있습니다. 싸움에 패
한 이상 물러나는 것이 병법(兵法)입니다."
조중 대신 학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후후후! 산전(山戰)은 없어? 암전(暗戰)은? 능공십자, 너는
무인이 되지 말고 병법가가 될 걸 그랬어."
"저부, 장주님의 명대로 일행은 내가 인솔합니다. 모두 방향을
돌린다. 놈들을 어쩌지는 못해도 처제가 놈들 손에 있다는 것
을 알면서 퇴각할 수는 없다."
윤명은 호기 있게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자,
"각주님."
살아남은 일심각 무인 세 명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범도(范蹈), 살아 있었구나. 더러운 놈. 형제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물러설 생각을 하다니, 네가 그래도 일심각 무
인이냐! 나에게 무공을 배운 놈이야!"
"각주,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제 양심에 비추어 떳떳하
면 그만이니까요. 좋습니다. 각주님 말씀대로 놈들을 급습하겠
습니다. 단, 이번에는 각주님께서 앞장을 서 주십시요. 못난놈
들이라 어떻게 공격하는지 모르겠군요."
윤명의 안색이 벌겋게 상기되었다가 새하얘졌다.
"네 놈이 감히...!"
쉬익!
윤명의 신형은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날아올랐다.
범도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신형을 뒤로
뺌과 동시에 검을 뽑으며 삼혼검법 환결(幻訣)을 엄밀하게 펼
쳤다.
"하하하! 느려! 그 정도로는 어림없지."
윤명은 검막(劍幕)을 비집고 들어서며 오른손을 쪽 뻗었다. 바
위도 두부처럼 으깨어 놓는다는 응조수(應爪手)였다. 범도의
목줄기가 막 움켜쥐어지려는 찰나,
"그만!"
우렁찬 일갈과 함께 조중이 신형을 날리며 목봉을 짓쳐냈다.
윤명이 범도의 목줄기를 잡아 비튼다면, 등에 목봉 세례를 받
아야 할 상황이었다.
윤명은 황급히 신형을 뒤틀며 응조수로 목봉을 받아갔다.
퍼억! 터억...!
기이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각기 일 보씩 물러섰다. 목봉과
응조수가 부딪친 결과, 두 사람은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했다.
윤명이 촉망스럽게 무공을 펼쳤다면 전개했을 살초를 조중은
전개하지 않았으니 누가 낫다 말할 수 없었다.
"저부, 정말 저와 한수 나눌 생각입니까? 장주님의 명령이 아
직 유효하다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군요.
하극상(下剋上)이군요. 그렇습니까?"
"..."
"물었습니다. 장주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분이 그만한
대답도 못하십니까?"
윤명의 말투는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는 조중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이 끊어지
는 순간까지 신의(信義)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다. 조중과 일전
을 겨룬다고 해서 무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무서운 사람은
혈단 인물들. 그 중에 특히 곱추 그 놈... 이곳에서 티격태격
하기에는 놈들이 있는 촌락과 너무 가깝지 않은가.
윤명은 곱추 괴인이 반여량에게 죽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윤명, 우리는 힘을 합해서 빠져나가야 한다. 쓸모없는 행동을
하지 마라. 이렇게 만난 것도 다행이니..."
"처제를 두고 간단 말입니까? 후후! 꽁지 빠진 수탉 같으니라
구."
이때였다.
보다 못한 학구가 윤명이 숨어 있던 풀숲에서 지게 하나를 찾
아 들어올렸다. 나무로 얽기설기 만든 지게에는 땔감으로 씀직
한 장작들이 수북히 묶여 있었다.
"각주, 이 지게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무인이 지
게를 지고 풀숲에 숨어 있다? 그 이유를 말해 주시겠습니까?"
"학구!"
조중이 버럭 노성(怒聲)을 질렀다.
윤명이 풀숲에서 기어 나올 때 모두들 그의 곁에 지게가 있는
것을 보았다.
살아남은 일심각 무인 삼 인은 고통스러웠다. 무엇을 바라고
피를 흘렸는가. 비수당주가 혈지(血地)를 넘나들 때, 자신들의
각주는 나무꾼으로 변장하여 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사람.
그들은 차라리 윤명을 앞세워 촌락으로 돌진하고 싶은 심정이
었다. 그렇게 죽는다면 떳떳하지나 않은가 말이다.
얼굴이 시뻘개진 윤명은 아무 소리 못하고 학구를 매섭게 노려
보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학구는 열 토막으
로 분시되어 죽었으리라.
"윤명, 처제는 밀옥에 갇혀 있다고 한다. 일단 무녕 분타로 가
서 다음 일을 모색해 보자."
조중이 무안해진 윤명을 다독거렸다.
윤명이 한 행동은 곽가장뿐만이 아니라 검을 든 전 무인의 수
치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지각색의 사람이 어울려 사는 게
아닌가. 윤명이 왜 홍홍록록이란 작호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본심은 아닐 것이다.
"치잇...!"
윤명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중은 고사하고 자신의 수하들도 이런 꼴을 보고서는 따를 리
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구궁산에 있
는 놈들만 죽이면 차기 곽가장 장주로 지목을 받는데 여기서
물러나야 하다니. 좋다. 그것은 너무 실력차가 크다는 변명으
로 무마할 수 있다. 하지만 처제라도 데려가야 하지 않는가.
처제가 사로잡힌 것을 번연히 알면서 물러섰다면 입이 열 개라
도 할말이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 동안 숱한 사람을 죽여왔지만 자신이 죽으리라는 생각은 꿈
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
자... 윤명은 손발이 얼어붙었다. 눈을 감고도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무쾌타 삼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단창을 버리고 지게를 만들었다. 흑의인들을 속이기 위해 잔나
무 가지를 잘라서 나뭇단을 만들어 짊어졌다.
"청산(靑山)이 있는 한 녹수(綠樹)는 걱정 없어."
이빨이 따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 윤명은 떨리는 마음을 간신
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곽소연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처제만이라도 데리고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런데 없다. 아무도
없다. 하기는 그때까지 제자리에 있을 턱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도저도 못한 채 구궁산을 떠돌던 중이었다.
이제 곽가장 식솔을 만났고, 처제의 행방도 파악했는데, 놈들
의 손에 잡혀 있다면 빼내서 같이 가야 하는데, 조중과 다른
놈들이 목숨을 걸어 준다면 처제 한 몸 빼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데.
윤명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치잇! 어디 두고 보자. 특히 범도, 학구, 조중. 네 놈들은 나
에게 죽는다. 반드시...!'
"가자."
조중의 명이 떨어지자 일행은 더 이상 윤명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동목과 학구가 길을 열었고, 일심각과 학구가 들것을 들었다.
그 옆에서 일심각 무인 세 명과 조중이 삼엄한 눈초리로 사방
을 예의 주시했다.
혈단과 마주친다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니까.
* * *
"좌측으로 가죠."
"또? 아무 기척도 없는데?"
"여섯 명입니다. 그 중 두 명은 아주 강한 것 같은데요."
늘 이런 식이었다.
반여량은 갈기가 곤두선 짐승처럼 다가올 위기를 예감했다. 그
리고 살기가 뻗치지 않는 길 아닌 길을 헤쳐나갔다. 때로는 가
시덤불 속으로, 때로는 수심 깊은 강을 건너기도 했다.
알고 쫓기는 자와 모르고 쫓는 자.
이상한 상황이었다.
혈단인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지 않았는가. 쫓는 자가
혈조수의 후인이라면 일행을 죽이기에는 아주 적절한 인물을
고른 셈이다.
구궁산에서 무녕 분타까지는 백여 리, 가는 길도 수만 갈래였
다. 그러나 쫓는 자들은 도주로(逃走路)를 정확히 예견했고,
늘 한걸음 앞서 달려와 길목을 지켰다.
이치대로라면 조중 일행은 벌써 걸레 조각처럼 육신이 찢겨져
죽었어야 옳았다. 아니면 수십 번에 이르는 혈전이라도 치렀어
야 했다. 그만한 각오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검 한 번 맞대지
않고 험로(險路)를 무사히 빠져나와 무녕 분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서 있었다.
조중은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반여량을 만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만약 반여량이 아닌
다른 감여가가 길을 같이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
까? 대답은 아니었다. 기운이 강한 자. 그들은 혈함망, 혈류묘
가 아니면 적어도 그와 버금가는 자이리라. 윤명이 한 놈을 맡
아 한 놈만 상대한다 해도 조중은 자신없었다.
곽가장 사람들 중에서 반여량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조중
자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달리 감흥이 깊었다.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감여가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
었는데. 만약 반여량이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영원히 만나지
못했으리라. 지금처럼 찰나간에 예기(銳氣)를 읽고 몸을 사리
는 자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조중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천애사시 동목도, 능공십자 학구도, 그 날 이후부터 말을 잊어
버린 윤명도 같은 생각을 했다.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반여량은 뜻밖의 말을 토해 냈다.
"뭐라구?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게."
"무녕 분타,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던
강한 기운. 그것이 느껴집니다."
반여량은 가급적 염력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뇌력을 집중하
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응을 느낄 수 있는데 더 높은 경지를
사용할 필요가 무엇인가. 특히, 한 번 사용할 때마다 극심하게
밀려오는 두통은 무척이나 참기 힘들었다.
"흥!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지금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혈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무녕 분타를 장악했다는 소
리야?"
윤명이 기어이 심통 뒤틀린 소리를 내뱉었다.
장악이라 하려고 하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 동안 보아온 혈
단인들이라면 일개 분타쯤 소리 소문 없이 장악하는 것은 문제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운(戰運)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중 일
행이 보기에 무녕 분타는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했다.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그 기운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반여량의 음성에는 힘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이지(理智)가 흐려졌다. 남들보다 배는 강하다는 체력이지만
혈갈류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깊었다. 더군다나 한여름에 변변
히 약도 바르지 못해 상처가 곪아 버렸다.
조중이 내공요상법(內功療傷法)을 일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운공도 기력이 웬만큼 있을 때나 가능했다. 반여량처럼 신열
(身熱)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운공을 펼칠 만한 생각도 치밀
지 않았다. 그것이야 정신력으로 이겨낸다 해도 등줄기와 옆구
리를 갈라 버린 검상이 지독히 깊어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었
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곽가장으로부터 맡은 일은 끝난 셈이다. 구궁산까지 안내하는
것이 반여량의 소임이었으니까. 곽가장 분타가 어떻고, 장주가
어떻고, 윤명이, 조중이... 무림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자신
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떠날 생각이었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무림을 떠나 감
여나 하며 전국을 유랑할 셈이었다. 풍경 좋은 곳이 나오면 머
물고, 지루해지면 또 길을 떠나고. 이것이야말로 감여가 다운
생활이 아니던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염력과 동기감응 감여와의 차
이점이었다.
동기감응을 익힌 끝이 염력이라면 그 동안 많은 무수한 경전들
은 무엇 때문에 읽었단 말인가. 학문(學文) 십 년, 산세(山勢)
십 년, 감응 십 년을 해야 비로소 눈이 뜨인다고 말씀하신 사
부님의 의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염력만 깨달으면 감응이 느껴
지고, 산세는 저절로 보이는 것을.
무녕 분타까지 오면서 깨달은 것은 사부님이 염력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사부님은 순수하게 동기감응 감여만을 아셨다. 굳이
수준을 논하자면 구궁산에 가기 전, 반여량의 수준이랄까.
나머지 문제는 시일을 두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시는 염력 따위에 미련을 갖지 않을 생각이니
까.
그것도 정신이 남아 있을 적의 일이었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
을 할 수 없었다. 험로를 거쳐 무녕 분타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그의 긴장은 급속도로 풀어져 버렸다.
"으음! 혈단이 강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곽가장과 전면전을
치를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네. 만약 무녕 분타를 공격했다
면... 그건 우리를 공격한 것과는 틀려.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
이지만 무녕 분타는 움직이지 않는 거점일세. 지형. 지형을 공
격한다는 것은 곽가장과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이 되지. 우리를
공격하면 그 공격자만 보복의 대상이 되지만, 거점을 공격하면
공격한 문파 전체가 보복 대상이돼. 그렇기에 아무리 약한 무
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할지라도 거점은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거야."
흔치 않은 경우이지만 곽가장 무인이 공격받은 예는 전에도 있
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곽가장 분타가 공격받은 전례는 없었
다. 그만큼 곽가장이 크다는 소리와도 맥을 같이 했다.
조중은 반여량을 믿는 마음이 컸지만 혈단이 곽가장 분타까지
손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믿으신다면..."
반여량은 목 안으로 잠겨들어가는 음성을 흘린 후 다시 혼절해
버렸다.
"이런!"
조중은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반여량을 보며 어두운 그
림자를 떠올렸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요."
"음...! 마지막 말이 걸리기는 하지만... 들어가세."
일행은 무녕 분타를 향해 신속하게 신법을 펼쳤다.
무녕성(武寧城)은 서하(西河)에 위치했다.
태평산 산자락을 한쪽 끝에 잡았고, 광활한 평야를 주변에 둘
러쳤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특산물이나 절경, 명승지는 없지
만 광산물(鑛産物)과 농산물(農産物), 그리고 수산물(水産物)
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곽모천은 옥순산 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무녕성에 기반을 구축
한 절검문(切劍門)을 통합하여 무녕 분타로 만들어 버렸다.
전례에 없던 기사(奇事)였다.
절기를 창안하여 세(勢)를 형성한 문파가 다른 문파에 머리를
숙이는 예는 일찍이 없었다. 더군다나 일개 분타로 전락하여
현판(懸板)까지 떼어내는 수모를 감수하다니.
홍세(洪歲) 이십구년, 곽모천이 절검문을 방문한 지 단 두 시
진만에 전격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비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자진해 버
린 문도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 얼굴을 들고 살 명분이 없다며
홀연히 떠난 무인도 있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는 곧 채워졌고, 무녕 분타는 절검문의 영
화를 서하에 던져 버린 채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현재의 무녕 분타주는 호소봉왕(好笑蜂王) 가심(架沈), 곽가장
사십칠 개 분타 가운데 단 세 명밖에 없는 여분타주(女分舵主)
중 한 명이었다.
그녀에 관해 알려진 바는 전혀 없었다. 하다못해 나이는 물론
출생(出生)까지 비밀이었다. 억양으로 미루어 광동(廣東) 사람
이라는 말도 있었고, 혹자는 수공(手功)보다 각법(脚法)이 뛰
어나 강북(江北)에서 이름을 떨쳤던 여걸(女傑)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었다.
나이도 그랬다. 행동이나 품위로 보면 사십이 훨씬 넘은 것 같
은데, 주름살 하나 없는 탱탱한 피부는 이제 갓삼십을 넘겼다
고 할 만치 젊었다.
호소봉왕 가심은 만면에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활짝 담
고 조중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마치 일행이 올 줄 알았다는 투였다.
작호에 호소(好笑)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로 웃음이 헤펐지만
천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무림인이라면 봉왕(蜂王)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봉왕, 여왕벌의 매서움을.
"호소봉왕, 장주님께 연락드릴 게 있다. 천광탄을 준비해라."
분타에 들어서기 무섭게 윤명은 자신이 마치 일행의 영도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호호호! 벌써 장주님께 연락을 받았어요. 심신이 노곤하실 테
니 우선 목욕이나 하시고 푹 쉬시라고. 그러면 다시 연락을 보
내 주시겠다고. 호호호! 장주님 명입니다."
"뭐라고? 장주님이 벌써 모든 사실을 안단 말이?"
윤명이 화들짝 놀라 가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무슨 생
각이 들었는지 조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부, 그새 연락을 취하셨습니까?"
"..."
"섬섬섬! 하기는 그렇군요. 수하들이 전멸하다시피 당했으니
책임을 회피해야겠죠. 섬섬섬!"
윤명은 환하게 열렸던 미래가 암울하게 가라앉는 절망을 느꼈
다.
곽가장을 떠나올 때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비수당과 일
심각 무인들이라면 세상에 못할 일이 무엇이랴. 탈명화검을 죽
인 놈. 그 놈은 반여량이 찾아 줄 것이고, 자신은 일거에 휩쓸
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다음 돌아오는 것은 차기 곽가
장주라는 명예.
이제는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차기 곽가장주는 고사하고 처제까지 놈들 손에 빼앗겼으니 그
책임을 어떻게 회피하랴.
윤명은 무녕 분타주를 구슬려 재반격을 시도할 참이었다.
어떻게 하든 놈들만 분쇄하면,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해
도 처제만 빼내오면 장주를 대할 면목이 설 텐데.
"이보시게, 분타주. 급히 의원을 불러 주게. 상세(傷勢)가 급
한 사람이 있어."
조중은 윤명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
다.
"호호! 그래야지요. 이 사람이 추풍이라 불리는 반여량인가
요?"
가심의 눈가에 진한 호기심이 일렁거렸다.
"급히 출혈은 막았지만 한여름이라 염증(厭症)이 심해."
"호호! 염려하지 마세요. 저희 무녕성에는 화타(華陀)에 비견
되는 신의(神醫)가 있죠. 이 정도의 상처라면... 보름이면 완
쾌되겠군요."
"음... 수고 좀 해주시게."
말을 하는 가운데도 조중은 예리하게 무녕 분타의 곳곳을 쓸어
보았다. 반여량이 말한 마지막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전운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느 분타처럼
조용한 가운데 묵직한 기운이 흐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약해진다더니... 괜한 우려였어.'
조중은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 버렸다. 오랜만에 술 생각이 간
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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