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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요,평화의 지도와 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단군가족
장준하,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항상 가슴 밑에서부터 싸한 아픔으로 먹먹하게 한다. 그는 지금 지하에서 조차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을까.
장준하(張俊河 1918~1975)는 일제 때에는 총을 들고 왜적과 싸우고 8.15후에는 이승만독재시대와 박정희독재시대를 지내오며 온몸으로 민권투쟁과 민족통일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빼앗긴, 우리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같이 타오르는 존재이다.
그는 압록강과 가까운 평북 의주의 한 벽촌에서 기독교 목사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소학교와 중학을 마친 후 평북 정주에서 신안소학교의 선생으로 있다 일본으로 단신 건너가 신학대학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장준하는 조선인 유학생이자 신학교 동료들인 문익환, 문동환, 박봉랑과 자주 어울렸는데 이 세사람은 나중에 우리나라 만주주의를 위해 애쓰는 유명한 목사가 된다.
1943년 26세가 되던 다음 해 장준하는 여름방학 때 고향으로 갔다가 학병 징집장을 받게 되고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로 학병으로 나가기 전 장손으로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신부는 항일투사 김준덕의 맏딸로 그가 소학교선생을 하던 시절부터 유난히 똑똑하고 따르던 5학년 학생이던 김희숙으로 그 후 여학교학생이 되어서도 줄곧 서로 편지 왕래를 하면서 연정이 싹튼 사이였다. 그들은 종교차이(김희숙집안은 캐톨릭)를 극복하고 그 해 11월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다음 해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그 부대에 마음맞는 조선인 학도병 세사람과 함께 탈출을 하여 사흘을 굶으며 낮엔 수수밭에 숨어 있고 밤에만 걸어서 중국군에 편입된다. 그곳에서 먼저 일본군에서 탈출해 온 김준엽(金俊燁 1920~2011 9대 고대총장)을 만나 네사람은 너무도 기뻐 밤새 김준엽과 지나온 일을 얘기하며 앞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다짐하고 그로부터 김준엽과 장준하는 평생 동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그 다음 달 7월 28일 다섯사람은 충칭에 있는 임시 정부를 찾아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거리의 두배인 무려 6천리의 온통 벌판과 산뿐인 길을 걷는다. 한낮엔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낮엔 잠을 자고 해가 지면 걷고 어떨 때에는 나흘동안을 한 밤도 안 자고 꼬박 걷기도 하였다.
몇개월 후 조선청년들이 많이 있다는 임천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가 다섯사람은 사개월동안 훈련을 받고 그 안에서 장준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민족의 앞길을 밝히자는 뜻으로 <등불>이라는 첫 잡지를 만들어 조선청년들간에 인기가 높아졌는데 이것이 후에 <사상계>로 이어지는 그 첫 잡지의 시도가 된다.
훈련반을 졸업한 장준하와 일행은 중국군 준위 계급을 받았으나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는 조국이 주는 계급장을 받고 싶었다. "우리는 임시 정부로 가야 합니다. 임시정부는 조선의 청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동지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장준하와 오십여 동지들은 임시정부로 향해 떠난다. 모두들 여름에 받은 낡은 푸른 색 옷만 걸치고 내복도 없이 찬 바람부는 겨울바람을 뜷고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가며 길을 재촉하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중국군 준위 계급이 있어 중국군사령부로 찾아가 겨울 군복과 식량을 얻어 온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 공명도 무서워하던 험준한 파촉령 산맥을 넘어가기 위해서. 길을 잘못들어 눈밭에서 밤을 지새며 잠들지 않도록 서로를 후려치고 붙들어주면서 장준하는 다짐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해. 지금 이 형벌은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내 자손에겐 결코 이런 고생을 물려주지 않겠다" 그는 이 자신과의 다짐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한다.
1945년 1월 드디어 장준하와 김준엽은 충칭(重慶)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고 그 해 8.15를 맞는다.
장준하선생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중국 충칭(重慶) 시안에서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훈련을 받던 때의 장준하(오른쪽)
아래는 박정희 일본군 중위
박정희와 장준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중국에서 맞은 8.15직후였는데 일제의 항복으로 패잔병이 된 일본군 중위의 박정희는 중국인 복색을 하고 북경에 나타나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는데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일본군대에서 왜 탈출하지 않았는가,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본장교로서 한국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 아닌가, 또한 일본장교라는 과거를 별로 참회도 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세하는데 대해 통렬하게 공박한다. 박정희가 그 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부끄러워 반성하는 바가 있었을 텐데 그 후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그 때 장준하에게 내심 앙심을 먹었던것이 분명하다. 박정희의 인생에서 그 당시 장준하만큼 바로 면전에서 당당하게 그를 꾸중한 사람이 있었을까. 마음속으로는 꾸중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나 용기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는 일국의 정상이라는 권력이 쥐어졌을 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이고 숙청하였으니 바로 그 힘을 갖기위해 구테타를 일으킨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준하는 그 때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되고 그리하여 숙명적인 관계가 될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장준하는 1945년 그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등을 역임하고, 1953년 4월 한국전쟁중 피난지 부산에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해 민족의 앞길을 예비한다는 취지아래 월간 <사상계>를 창간한다. 부산 피난지에서 사무실도 없어 온종일 다방에서 부인 김희숙과 차 한잔으로 점심을 떼우며 만든 첫 창간호는 국판 100면 정도였고 두사람은 부산시내 책방을 돌며 그 책을 진열해달라 사정을 했는데 그 다음 날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그 어려운 피난시절 중에도 3천부가 팔리는 이변을 낳고 그 후 이희승(李熙昇 1896~1989)국어학자등 부산에 피난 온 많은 양심있는 지식인들의 글을 모아 점점 400면 정도로 증면한다.
남북으로 나뉘어진 분단조국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온 장준하는 더욱<사상계>에 온 정열을 바쳐 잡지를 발전시킨다. 매달 사상계의 권두언으로 쓰는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었고 많은 학자들도 좋은 글을 써서 잡지를 도와주었는데 그 중엔 장준하가 오래 전부터 존경해온 함석헌 선생도 있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 가장 유명하다. 장준하와 함석헌선생은 자기 욕심만 찾는 이승만대통령과 썩은 정치인들을 꾸짖고 온 국민들에게 통일을 이루는데 앞장서자고 외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두 사람은 사복한 경찰들에게 붙잡혀가 두들겨 맞게 되고 그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은 <사상계>를 더 많이 사주었는데 경찰들은 책방들을 돌아다니며 <사상계>를 압수하려 했지만 책방주인들은 책이 없다며 숨기면서 몰래 사람들에게 팔아 그 달 사상계는 한권도 남김 없이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승만정권은 결국 국민들 눈초리가 두려워 그 두사람을 방면하게 된다.
그런 중에도 <사상계>는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고 신인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하는데 동인문학상은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문학적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56년 제정한 상으로 '67년 재정난으로 중단되어 '79년 동서문화사가 인수했다가 '87년부터 조선일보사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시상하고 있다.
1958년 이승만정권은 간첩 색출과 반공체제 강화를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대폭 강화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간첩개념 확대, 불고지죄 엄벌, 변호사 접견 금지, 2심제 폐지, 언론보도 규제 등을 골자로 한 이 보안법은 헌법이 정하는 국민의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 요소가 많아 논란이 많았다. 야당의원 91명은 '보안법개악반대투위'를 구성하고 옥외집회를 준비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집회가 불가능했으며 신문편집인협회도 반대성명을 발표했으나 요지부동이던 자유당은 12월 19일 국회법사위에서 자유당 국회의원만으로 3분만에 법안을 날치기로 가결한다. 야당의원들은 본회의장 농성에 돌입했으나 12월 24일 한희석 국회부의장은 무술경위 3백여명을 국회 본회의장에 투입, 강제로 야당의원들을 들어내 밖으로 내쳐진 상태였다.
장준하는 이승만 정권에 치를 떨며 '그런 깡패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하며 <사상계>의 권두언을 쓰려하다 그만 펜을 던져 버려 그 달 <사상계>엔 하얀 백지의 권두언이 실리게 되었는데 독자들은 그 권두언의 '무엇을 말하랴!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보고도 장준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이심전심 알아 들어 이해하였고 이것이 그 유명한 <사상계>의 백지 권두언 사건이다.
1960년 3월 16일 이승만은 마침내 대통령선거에서도 부정을 저질러 분노한 시만들은 거리로 나와 이승만정권을 몰아내는 싸움에 나서고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재자의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게 되자 이에 더욱 분노한 국민들은 끝내 독재자를 몰아내는데 승리한다. 4월 26일 이승만은 미국으로 도망쳐 버리고 그날 장준하는 종로거리에 나와 시민들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른다.
4.19의거로 국민들은 자유로운 선거로 새 정부를 세우고 장준하와 사상계 사람들은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다. 어느 날 민주당 정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국토건설사업에 책임을 맡아 달라고 거듭 부탁하여 승락하고 의욕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민주당 정부의 김영선 재무부장관은 사상계가 빚이 많은것을 알고 걱정말고 국토 건설사업을 열심히 하라며 돈을 건네었고 처음엔 거절했으나 마침내 장준하는 빚에 쪼들리는 사상계를 구하려고 돈을 받는다.
5.16 구테타가 일어나자 모든것이 흐지부지 되고 다시 사상계로 돌아와 장준하와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5.16을 비판하고 군인들은 당장 물러나라 주장한다. 이에 박정희정권은 장준하가 혼자서 돈을 가로챘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썩은 언론인'이란 딱지를 붙여 잡아 들인다. 결국 장준하는 민주당 정부가 사상계를 도와 준 돈을 모두 군사 정권에게 돌려 주기로 했는데 신문과 방송에서는 마치 장준하가 진짜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부패 언론인 장준하, 가로챈 돈을 모두 돌려 주기로 하다' 라고 보도하여 독자들은 사무실로 전화를 하여 장준하를 욕하는 등 그 뒤 사상계의 인기는 많이 떨어지고 책도 절반도 팔리지 않게 된다. 언론의 위력이란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장준하는 아픔을 딛고 오직 잡지만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군사정권의 탄압과 국민들의 오해를 이겨내려고 온 힘을 다하였는데 1962년 8월, 필리핀 정부는 장준하에게 막사이사이상을 수여하며 상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장준하는 지식인으로서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어 바르고 공정한 언론으로 큰 공을 세웠다. 잡지를 내면서도 돈을 벌거나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 또한 국민들을 올바로 이끌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로 나서게 하였다"
박정희는 사상계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서점주인들을 협박하여 잡지를 모두 사상계 사무실로 반환하게 하고 그리하여 사상계는 망한다는 소문이 나게 되어 빚 갚으라는 전화가 빗발치어 드디어 빚쟁이들은 사무실로 쳐 들어와 전화기등 모든 집기까지 가져간다. 장준하와 가족들은 연세대 앞에 작은 터를 마련하여 7년이나 걸려 손수 지어 한달밖에 안된 처음으로 마련한 집까지 팔고 알거지가 되어 박정희가 원한대로 거리로 내 쫒긴다.
<사상계>는 재정난이 계속되면서 발행인이 부완혁(夫玩爀 1919~1984)으로 바뀌어 명맥을 이어가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실었다는 이유고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는다. 오적은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참가한 다섯 매국노,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이르는 명칭인데 김지하는 그 오적대신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도적으로 삼아 판소리의 아니리 쪼로 신랄하게 그려 나간다. 당시 갓 서른살 밖에 되지 않았던 청년 김지하가 지금 보아도 어떻게 그렇게 잘 쓸수 있었는지 감탄스러운데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린것은 다섯 도둑 중 아마 장성(將星)아니었나 싶다.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 쉬엇 열중 열중 열중 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 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 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어수공방전(雲雨魚水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그리하여 장준하는 이제 글 마저 쓸수 없는 상황에 떠 밀리어 정치인으로 일어서게 되었으니 1966년 10월 대구 수성천 모래밭에서 그 유명한 '밀수왕초'연설을 한다.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는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위해 돈을 마련하려고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싼 사카린을 몰래 들여 와 국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더러운 돈을 챙겼습니다. 그런 일에 앞장 선 박정희는 밀수 왕초입니다"
1967년 윤보선 대선 지지 유세중에 그는 박정희의 친일파 경력을 문제삼았다가 국가 원수 모독죄로 구속된다. 박정희는 어찌하든 자신을 건드리는 걸 싫어하여 5적 중에 장성을 언급한것이 심기에 걸렸듯이 자신의 친일 경력을 들먹이는것이 불쾌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친일 경력을 모욕적이라 생각할 만큼 내심 부끄러워했다는 뜻인지 그냥 단순히 약점 건드리는것을 싫어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3개월간 투옥되고 그 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압도적인 표로 당선된다. 그는 국회의원 지내는 4년동안 올바를 정치인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4년 내내 월급은 만져 보지도 못한다. 월급이 나오면 사상계가 남긴 빚으로 빚쟁이들이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1972년 7월 4일, 남북이 단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7.4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어 장준하는 가는 곳마다 박정희 정부의 이번 행동을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박정희정부가 공동 성명을 잘 지켜 나가도록 밀어 주자고 말하고 여러 잡지와 신문에도 그런 그의 생각을 싣는다. 나는 이 때 정말 장준하의 인격이 남다르구나, 역시 대인 다운 애국자구나 하고 실감한다. 그도 인간인 이상 그 동안 박정희에게 당한 개인적인 사심이 조금은 남아 있을 법도 하련만 그의 머릿속엔 오직 나라의 이익만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는 언론에서 강력하게 주장한다.
"통일보다 높은 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 되는 것이며, 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통일을 통해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석달이 조금 지난 10월 17일 박정희는 자신의 특기인 변심(變心)이 또 발동했는지 갑자기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도 강제로 문을 닫아 버리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시 5.16 구테타 시절로 되돌아 간다. 그것을 박정희정권은 '10월 유신이라 부르며 '유신 헌법'에 의해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수 있게 된다.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저지하다 구속되었을 때 구명활동을 위해 장준하 국회의원 사무실을 드나들었던 이부영(李富榮)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선생의 비서로 근무하던 손수향씨를 알게되고 장준하선생의 중매로 그 둘은 73년 결혼에 골인한다.
둘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워 두 사람은 존경하는 장준하선생을 아버지로 모시자는 합의하에 그 후 선생을 극진하게 모시게 되는데 김구 선생의 수제자이자 비서가 장준하 선생이었고 장준하 선생의 제자이자 비서가 이부영, 손수향부부라 할수 있으니 김구 선생의 정신은 오늘 날까지 그 부부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겠다.
이부영은 나의 남편 최무수(崔武秀)와 같은 정치과 동창으로 학교 때는 조용한, 요즘 말로 '꽃미남'에 속하던 학생이었는데 그는
장준하 선생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74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서명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 안에 있던 정의감이 표출되기 시작한듯 하다. 장준하 선생은 이부영의 재야투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동아투위사건을 지원하기도 하면서 이부영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후에 5공화국 시절 전두환의 철권통치를 막내리게 한 사람도 이부영이었으니, 대통령 직선제의 개헌의 단초를 제공한 박종철군의 고문사건 폭로자가 이부영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부영은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하면서 고문경찰관들에게서 박종철군의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더있으며 치안본부장이하 여러명이 사건 축소를 위해서 개입한 진상을 알아내어 몰래 쪽지를 써서 외부로 유출했고 그 쪽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6월항쟁의 불씨가 된다.
'78년 내가 진주의 교직에 있을 때 조선일보 맨 아랫단에 짤막하게 이부영이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그의 고된 민주화투쟁이 너무 가슴이 아파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미결수 이부영 귀하 라고만 써서 위로편지를 한장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래놓고 과연 그가 받아 보았는지 어쨋는지 확인할수도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중에 '90년대 우리가 서울로 이사가서 이부영정치후원회에 가입해 부부끼리 나오라는 모임이 있어 나가 봤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 때 삼엄하던 '70년대 말기의 박정희시대, 서대문 구치소 독방에 수감되어 면회도 편지도 일체 금지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편지가 와서 끝까지 다 읽어 본 순간 간수장이 황급히 달려와 제발 안 읽은 것으로 해달라, 편지를 전해 준것을 알면 자기가 모가지다 라고 사정하며 내 편지를 뺏아 가더라 한다. 그래서 조금만 연결되도 얽어매서 잡아가던 시절이라 내게 혹시 해가 가지 않았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그러고 보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그 당시 서울이 아닌 시골 벽지에서 과수원이나 하며 교직에 있었던 것이 위험한 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조건 아니었나도 싶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하며 내 편지가 위로가 되었었냐 했더니 한번만 읽었는데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하였다. 그는 우리 결혼식에 와 주었는데 우리는 그가 결혼할 때는 시골에 살고 있어 가주지 못한것이 빚진 기분이다.
이부영은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16대 국회의원 후원금 중 남은 5억원을 장준하선생 추모비용으로 내 놓았으며 재야생활을 끝내고 제도권에 투신한 뒤에도 지금 껏 장준하 선생의 추모사업에는 발 벗고 나서고 있고 현재 '장준하선생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여러가지 당위성으로 보아 현재 이부영만큼 더 적격자가 없을 것 같다.
'73년 12월 24일 장준하는 서울 YMCA 회관에서 수십명의 기자들 앞에서 박정희대통령에게 유신 헌법을 고치기를 요구하며 백만 명 시민들의 서명 운동을 시작함을 알린다. 그는 먼저 그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읽어 나갔고 신문들은 큰 기사로 다루며 그 명단을 내 보낸다.
"장준하, 함석헌, 법정, 이희승, 김수환, 김지하, 박두진, 백기완, 홍남순..." 모두 39명이었는데 사람들은 앞 다투어 서명을 하여 열흘도 못가 40만명이 넘는것을 보고 박정희는 두려움을 느끼고 '74년 1월 장준하를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하여 장장 15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장준하가 구속되자 가족들은 당장 끼니거리가 없어 걱정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멀리서도 찾아와 동네 쌀가게에 돈을 주고 한가마를 배달시키고 어떤 이는 돈을 놓고 가는 등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 가족을 따뜻하게 돕는다. 장준하는 복역하던중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장준하가 그 안에서 죽으면 박정희로서도 곤란한 일이라 그 해 '7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는데, 장준하는 나와서도 병약한 몸으로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하게 촉구하여 각계에서 그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그는 재야세력의 구심점이 된다.
다음 해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국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사한다. 당시 정부는 '실족사'라고 발표했으나 그 발표를 듣는 국민들은 그 실상을 이미 짐작할수 있었고 1949년 김구선생이 비명에 가실 때 못지 않게 모두 가슴 깊이 비통한 눈물을 흘린다.
그로부터 삼십오년이 지난 2009년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소식'을 들으면서 국민들은 장준하의 의문사와 너무나 유사한 점에 놀란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함에도 외상이 별로 없었다는 점, 목격자 진술의 부정확성과 그 진술마저 자주 번복되는 점, 또 목격자에 대한 신원 미확인 등이 이유이다.
시인 고은(高銀)은 말한다. "장준하선생, 저는 감히 당신의 이름 석자 앞에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여드립니다. 그것은 중세, 근세의 소위 문신(文臣), 귀족들의 개수작 같은 호(號)가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온 몸을 바친 민족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죽음에 귀납되어 온 것입니다. 민족 장준하 선생, 당신은 이미 이렇게 이름 부르기 전에 민족 자체에 돌아갔으며, 민족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곧 당신입니다."
법정(法頂)스님은 그의 <아! 장준하 그 심지에 다시 불길을>이란 저서에서, "나의 사상, 주의, 자유, 재산,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체계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위대한 자기 희생없이는 통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것이다" 라 말하며 장준하를 기린다.
김수환(金壽煥 1922~2009)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것 뿐이다" 라며 애도하였다.
문익환(文益煥 1918~1994)목사는 친구 장준하의 상을 치르던 날 가장 슬프게 대성통곡을 하며 울고 장례후 일주일 간 식음을 젼폐한 채 장준하의 영정을 붙들고 있다가 '이제 내가 장준하가 못 다한 길을 가겠다'며 신학자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거리의 목회자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하면서 늦게 세상에 눈을 떴다고 자신의 아호를 '늦봄'이라 짓는다.
그런데 윤이상, 장준하, 이부영 이 세사람은 모두 나라를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였으나 모두 부부간의 애정은 남달랐으니 윤이상 장준하 두 선생의 아내들은 남편의 사후까지도 지금 껒 남편의 명예회복과 사인규명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남녀간의 애정이란 편안하고 별 문제가 없으면 곧 이어 권태기가 오고 시들해 지는데 비해 큰 이상을 위해 전심을 다 하는 남편을 보면서 존경을 바칠수 있는 아내는 어떤 고초라도 각오할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서 권태기가 올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아내의 믿음 속에 남편은 힘을 얻고 그리고 아내의 고생을 미안해 하고 또 고마워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애정은 더욱 견고해 지는 법 아닌가. 그런 인격을 가진 진실된 사람이니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 던질수도 있게 되고 아내도 인격적으로 대하며 사랑할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이부영이 결혼한 지 두해도 지나지 않아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동자로 구속되자 손여사는 막 두째아들 도균이를 연년생으로 낳고 기르는 것도 힘들 때 재판현장을 쫒아다니며 옥바라지 하느라 몸이 약해져 젖먹이에게 줄 젖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한다. 더구나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던 때 당장 월세를 낼 돈도 없었던 데다 갓난아이가 시끄럽다고 방을 비워달라는 독촉을 받아 남편 이부영이 감옥에 있던 2년 7개월동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섯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할 만큼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 당시는 어린애들이 있다하면 복덕방에서 방을 소개도 안해주어 방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손여사는 그 시절 고생한 것을 한번도 불평한 일이 없으며 평생 남편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였다. 지금 껒 손여사의 얼굴은 항상 평화롭고 사랑에 넘쳐 있으니 부잣집에 시집가 평생 호의호식하며 지낸 많은 평범한 주부들보다 그녀가 불행했다고 말할수 있을까.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 누가 더 의미있는 미소를 띄울까.
1945년 8.15직후 북경에서 박정희와 장준하가 처음 만났을 때 장준하는 박정희를 준열하게 꾸짖었으나 박정희는 아무말도 대꾸를 못한다. 그 당시 일본 패잔병으로서 광복군 대위인 장준하에게 잘 못 보였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상태였으니까.
5.16후 박정희는 <민족일보>와 <사상계> 두 일간지와 월간지를 죽이려 민족일보의 자금은 일본 조총련계에서 온것이라고 억지로 몰아붙여 조용수를 죽이기까지 했지만 장준하는 오래전부터 광복군 대위였음을 아는 그로서 차마 공산주의로 몰아 붙일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6,70년대를 거치며 박정희는 장준하의 목숨같은 <사상계>를 빼앗고 장준하를 37번이나 체포하여 고문 폭행하고 9번이나 투옥하면서 자신의 완전한 승리에 만족했으리라. 그러나 장준하의 맥은 이부영을 위시하여 또 많은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고 박정희는 이부영을 '75년부터 '91년 사이에 5차례에 걸쳐 6년 8개월간이나 감옥에 갇우고 이어 전두환은 그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에 까지 입학을 시켰으나 이부영은 지금껒 당당히 살아 남아 그 스승 장준하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75년 장준하가 포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실족사' 란 이름으로 죽었을 때 박정희는 마지막으로 더욱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4년 후 자신도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고 난 후 지금 과연 누가 승리했을까. 누가 더 국민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인가.
첫댓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을 한껏 불사르고 가신 분이지만 우리에겐 그리 익숙치 않은 장준하선생의 생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이나 읽었네요 ㅎㅎ 잊지 말아야할 역사 입니다
지금은 바른말을 하는 분도 거의 없지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시기에 적절한 내용입니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