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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 하나님의 선물(딤전 3장 8-13)
성경본문: 디모데전서 3: 8-13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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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직분자 선출을 앞두고 직분자란 무엇인지를 살피고, 어떤 분들이 직분자로 뽑아야 하나님의 기준을 살피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주신 직분도 하나님이 선물이며 직분자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에 주신 여러 가지 직분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동시에 누가 그 직분을 맡았는지 맡은 사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이 된다면 더 없는 값진 생애일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므로 <직분자, 하나님의 선물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선물로 주신 집사, 권사에 대해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기에 앞서 언급한 감독(장로, 목사)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집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질 않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워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그리고 그 직분을 잘 감당하면 어떤 보상을 받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직분자의 자격을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의 자격과 9절의 자격은 내용상 서로 다릅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예, 8절은 도덕적인 자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9절은 신앙적인 자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분자의 자격 기준을 논할 때 영적인 자격보다 도덕적인 자격을 먼저 살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어떻게 섬기는지는 바깥사람이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은 우리의 신앙생활보다 더 주위 사람들에게 더 쉽게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삶은 기본이고 좋은 신앙도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부실한 사람에게 직분을 주는 것은 바깥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1. 직분자의 도덕적인 기준은 존경받을 만해야 합니다.
어떠합니까?
직분자가 될 만한 사람의 삶의 특징을 한 단어로 어떻게 표현합니까?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정중하고”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개역성경은 “단정하고” 또 어떤 번역은 그 말 대신 “근엄하고”라고 하지만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번역은“신중하고”라고 하지만 썩 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기질의 사람은 기질적으로 신중한 처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 말은 옷매무새나 차림새를 말하거나 한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정 기질의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인품이나 사람됨을 전체적으로 나타냅니다.
집사가 될 만한 사람의 삶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번역은 “존경할만하며”라는 것입니다.
남녀 불문하고 공동체를 섬기는 직분 자는 존경받을 만해야 합니다.
성도들뿐만 아니라 그와 이웃해서 사는 동네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까?
존경할 만한 사람은
1.1 자신의 말에 신실해야 합니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구이언’이란 실제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 만나서는 이 말하고 저 사람 만나서는 저 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른 경우도 해당합니다.
또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하는 것도 해당합니다.
소위 ‘침소봉대’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바가 같지 아니한 것도 해당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우리는 말한 것을 의미해야 하고 의미한 바를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 권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참소)하지 말며”라고 규정합니다.
남자 집사인 경우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였습니다.
두 경우 공통점은 말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남녀 불문하고 직함을 떠나서 사람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말이 신뢰할 만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보고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라고 하는 반면 여자보고는 “모함하지 말며”라고 합니까?
“모함하다” “참소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남을 헐뜯는 것을 뜻합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 여자에게 “모함하지 말며”라고 했을까요?
남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상 일구이언할 위험이 큰 반면 여자는 그 기질 상 모함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존경받은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2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남자들에게 대표적으로 자기 통제가 어려운 한 영역을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고 지적합니다. 술에 인박힌다는 것은 말하자면 알코올 중독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알코올이나 니코틴이 중독시키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불건전한 중독성의 취미생활들도 많습니다.
화투에서부터 컴퓨터 게임까지 줄을 지어 있습니다.
컴퓨터 오락에 빠져든 초등학생부터 일중독에 빠져든 어른까지 마찬가지입니다.
바둑이나 낚시, 등산 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도 중독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것도 얼마든지 중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톡이나 카카오 스토리, 페이스북 모두가 중독될 수 있습니다.
존경받은 만한 여 성도의 두 번째 규정은 “절제하며”라고 설명합니다.
남자인 경우“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라는 자리에 여자에게는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남자인 경우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반면 여자인 경우는 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여 성도들 가운데 새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화투로 Q.T. 를 대신하는 분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여간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통제해야지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통제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범적인 생활 훈련을 스스로 하시길 부탁합니다.
존경받은 만한 직분자는
1.3 재정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합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좀 어썩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집사의 주 임무와 관련해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돈을 밝히면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집사가 돈을 좋아하면 가난한 사람 돌보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장사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노력한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부정직한 이득을 탐내는 것은 성경이 금합니다.
이득을 남기는 것은 정당합니다.
다만 부정직한 이득을 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디만큼이 정당하냐 하는 것은 업종에 따라서 기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이나 자격, 아니면 종사한 연도에 따라서 받는 월급액수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부정직한 이득을 탐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팔아넘기는 도박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끼쳐서는 집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집사가 아니라 잡사입니다.
존경받을 만한 권사님이 되기 위해서 세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항목에서도 남자의 경우처럼 예리한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자가 부정직한 수입을 탐하는 일은 여자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남편의 사회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아내가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지출을 한다면 남편은 그 적자를 없애기 위해 무슨 돈이든지 호주머니에 넣을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크게 두 번째 하나님의 기준인
2. 영적인 혹은 신앙적인 자격을 살펴봅시다.
9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우선 집사 직이 교회가 주는 직책이기에 믿음을 따지는 것은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양심과 믿음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모든 도덕적인 판단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믿음이 제 구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양심이 깨끗한 양심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양심은 바르다고 내세웁니다.
문제는 양심이 바르지 못한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로서 죄 용서를 받아야만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깨끗한 양심이라야 믿음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왜 하필 믿음이라고 하는 대신 “믿음의 비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믿음은 본질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공개적으로 선포해도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소유하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전에는 살았지만 이제는 지나가는 세상임을 압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큰 암초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의 비밀을 소유하면 천국의 문이 보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면 내세의 영광이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예수님이 귀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관심이 갑니다.
한 때는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불쌍해집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게 됩니다.
이번에 선출하는 분들은 그 삶이 존경할 만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을 뽑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책망 받을 일이 없으면 집사의 일을 하게 하십시오”라고 성경은 권합니다.
직분자의 도덕적인 자격을 8절, 11절은 각각 논했습니다.
9절에서는 영적 신앙적 자격을 살폈습니다. 이제 집사의 자격심사가 끝나는가 했는데 12절에는 또 하나의 자격 규정이 이어집니다.
3. 가정적인 자격: 여기는 가정에서 그의 모습을 살피도록 합니다.
첫째로 장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1“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다른 여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한 아내의 남편노릇을 제대로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좋은 남편은 결혼 전과 신혼 초에 보였던 관심과 사랑이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결혼기념일, 아내 생일 기억해서 선물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내의 옷차림과 외모에 관심을 나타내며 아내를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입니다.
밥상을 받을 때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행동은 삼갑니다.
아내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부부사이가 나쁜 사람은 직분 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내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다
살다보면 티격태격 하기도 하지만 한걸음 먼저 양보하는 너그러움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아내의 개성과 취미를 존중하고 키워주는 사람입니다.
집안 살림, 가정 경제는 아내에게 일임하여 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내조차 만족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만족하게 섬길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공동체에서 직분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여자들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규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영적인 자격이나 가정적인 자격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그 정도는 상상력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여자들도 역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는 규정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거기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함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신앙공동체의 직분은 믿음의 비밀을 맛본 사람이 맡아야 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믿음의 권속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남 집사에게 물었던 가정적인 규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대신 “한 남편의 아내가 되며”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한 남편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의미합니까?
조금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야 한다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모든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 하나는 맛있는 식탁일 것입니다.
거기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날을 위한 재충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잘하는 것을 우리 남편들은 모두 인정하지만 아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의외로 적습니다.
일방적인 선전보다 대화를 사람들은 누구나 선호합니다.
단둘이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남편을 인정하고 세워주십시오.
중요한 집안 일에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남편에게 할 말이 있거나 따질 일이 있을 때에 남편의 기분을 참작하십시오.
또한 남자들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다음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3.2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대의 자녀로부터 존경을 받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자격이 구비된 사람입니다.
십대의 자녀와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속을 보살필 자격을 갖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녀와 말이 통하는 아버지라야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정적인 자격, 마지막으로
3.3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자기 집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명확하게 들어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처럼 핵가족 제도가 아닌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합니다.
자기 아내와 자녀들로서 가정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종들이 많은 식솔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처신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 구성원이 단순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매일의 삶 속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 13절을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형식은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에 대한 보상이지만 모든 이름의 직분 자들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모든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가지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지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잠간 살펴봅시다.
“아름다운 지위”란 무슨 뜻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서리집사 잘하면 안수 집사 되고 안수집사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아름다운 지위인 감독, 장로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직분에 충성하면 모든 성도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라고 다 같은 권사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직분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은 장로, 집사, 권사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된다고 꼭 같은 직분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람에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고 사진이 실렸다고 성도들이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의 약속은 직분을 잘 감당하면 우선 땅 위에서 성도들로부터 그 직분에 어울리는 존경과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큰 담력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본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에게 직분을 맡깁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받게 되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믿음의 비밀을 맛본 정도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담력에 관해서 약속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행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큰 담력을 가진 분들은 그 행사가 다릅니다.
신앙생활에 활기가 넘칩니다. 겨우 주일 한 번 나오는 예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일주일 세 번 공 예배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의 자리를 사모합니다. 무슨 사역을 해도 열매가 있습니다.
특히 여기 “담력”이라는 말은 성령 충만함과 관련해서 신약에는 자주 나옵니다.
안에서 넘치는 확신 가운데 자유롭게 터져 나오는 말을 일차적으로 가리킵니다.
기도를 해도 틀립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힘이 있습니다. 폭포수와 같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이 힘이 넘칩니다.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도 다릅니다. 듣는 사람이 감화를 받습니다.
“아줌마 이야기는 다르네요.”라고 듣는 사람이 그 힘 있는 증거에 감동을 받습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는 말은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고 다 같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된 교회에서 직분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주님을 따라서 한 날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귀한 직분을 받고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 약속하신 선물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