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수 천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수많은 예언을 받았고 이후 번영과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지나 결국 고대했던 메시아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일 종교지도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바르게 가르쳤다면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바르게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거절했고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사랑의 열매에 대해 강조하시기도 했고 세상이 너희를 핍박할 것이라고 예언하시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회당에서 출교당하고 나아가 죽임당하기까지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의 가정들을 연결하는 예배와 교육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유대인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형제요, 자매였던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고 척결하는 행위는 마치 갈멜산의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처럼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잘못된 확신 속에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알고 예배하십니까? 예수님은 죄인이었던 나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이 구원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분이신 것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비로소 감사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통해 이방은 물론 만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흘려보내시기 위함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를 드리는 헌신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결이 다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수 천년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서 갖게 된 본질적 신앙은 잊은 채 메시아를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줄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 줄 존재로만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근심이 더 깊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해 훗날 출교당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세상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령님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길이 없는 광야를 지도나 내비게이션 없이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세상에 한쪽 발을 디딘 채 살아간다면 아는 길이라며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지 않는 운전자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무시한 채 내 생각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위로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용기와 새 힘을 주시며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듯 성령님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멍에와 고삐를 이용해 우리를 바른 길로 강제로 끌고 가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최근에 성령님께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그 마음에 얼마나 순종하셨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대로 좌회전하거나 유턴하고 싶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에 좀 더 집중하고 그 마음이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음을 확신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지키고 돌보십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