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는 가장 중요한 성적 감각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기피하고 있다.
냄새는 가장 강렬한 자극제이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눈이 참 아름답다”
또 청각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을 만날 때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귀가 참 밝다.”
그러나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 참 냄새를 잘 맡는다.”
이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냄새를 잘 맡는다는 뜻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냄새를 잘 구별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악취를 잘 맡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후각은 이제 악취만을 맡는 기능으로 타락해 버렸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제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자신의 성적(性的)인 냄새를
샴푸와 향수와 비누로 지워버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냄새를 두려워하고 있다.
왜, 그럴까?
냄새는 가장 강한 성(sex)의 자극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그들의 냄새를 통해서 사랑에 빠진다.
동물들은 그들 각자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냄새가
가장 잘 조화되었다고 느낄 때 사랑을 한다.
그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냄새를 서로 섞음으로서
존재의 깊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사람도 어릴 때 천진함 그대로
인간 본연의 향기로 나와 너를 섞는다면
이 사바세계가 어찌 불국토가 되지 않겠는가?
사향노루는 암컷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그 자신의 성적인 에너지를 향냄새로 바꿔서
암컷을 매혹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암노루들은 그의 향기에 매혹되어 그에게로 몰려오게 된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당황하고 있다.
그 자신도 역시 그 자신에게서 풍기는 그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향 냄새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배꼽 밑에서 풍기는 그 냄새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그 향기의 출처를 발견하지 못한다.
중생이란 이 사향노루와 다를 바가 없다.
생명의 축복이, 우주의 이 신비한 힘이,
그리고 삶의 희열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모르고 있다.
어리석은 사향노루가 자신의 냄새를 찾아 동으로 서로 달려가듯,
그대도 미친 듯이 동으로 뛰고, 서로 뛰어가고 있다.
그대 자신의 배꼽 밑에서 나오는 그 향냄새의 출처를 찾아.
그대 사향노루여,
그대가 그 향기를 찾아 달려가면 그럴수록 향기만 더 퍼지나니,
이제 들판은 그대가 지나가는 곳이면 발 닿는 곳이면
어디서나 사향 냄새로 진동할 것이다.
지금의 그대도 이런 사향노루와 다를 바 없다.
사향노루가 산과 계곡을 누비듯,
환영(幻影)의 바람 따라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있다.
행복과 진리를 찾는다고 매스컴에 이름이 뜨고,
브라운관에 얼굴이 비친 사람들을 찾아서,
이 모임 저 세미나에 열을 올리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기기 앞에서 밤을 새우면서
인터넷을 통한 죽은 지식의 향기를 더듬고 있다.
그러나 사향은 그대 내면에 있다.
감로는 그대 내면 속에 있다.
단숨에 들이키라. 순간이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머뭇거리다가는 그 감로는 말라버릴 것이다.
당장, <여기, 그리고 지금> 마셔야 한다.
어떠한 준비 절차도 필요치 않다.
그것은 그대 내적 본질의 핵이기 때문이다.
감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그대 자신의 것이다.
이 사향은 그대 배꼽 속에 숨겨져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것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고 있다.
이 뭐꼬? 를 찾아
도를 구하고 진리를 찾는 그대여,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라.
진리는, 도(道)는, 그대의 가슴속에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