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감성(고통불가성)
마태복음 8:23-27
2025년2월23일 주일낮 11시
인도 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고통불가성
그리스 종교 전문가 로버트 파커는 그리스 신들은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나이가 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신들은 인간의 형태를 지녔다. 이들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고 성적 접촉도 가질 수 있었다."(매튜 바렛, 186) 합니다.
이 신들은 부도덕하고 변덕스러웠습니다.
그리이스 신들은 감성적입니다.
격정 혹은 감정에 따라 마음이 움직입니다(매튜 바렛, 187-8).
그리이스 신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무감성적(고통불가성)입니다.
하나님은 정서적 동요가 없으십니다.
일시적 기분이나 인간의 행동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감성적인 분이 아니십니다(매튜 바렛, 189).
하나님은 인간처럼 불안, 공포, 정욕, 탐욕, 격정, 감정 등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매튜 바렛, 191).
무감성(고통불가성, impassable)은 하나님의 완전한 선과 견고한 사랑을 강조합니다(매튜 바렛, 193).
얼마전 우리나라 어느 도시 아파트 안 침대에 누워 있던 여덟살 짜리 소년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깔고 있던 전기 매트에 불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소년은 침대 옆에 서서 잠시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 순간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어린 소년은 침착하게 침대 안쪽으로 올라가서 매트에 연결된 전기 전원 플러그를 뽑았습니다.
그 다음 매트 불을 껐습니다.
물론 초기 발화라 가능했지만 그 어린 소년은 침착하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침대에 쪼그려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 어린 여덟살 소년의 침착성, 순간적 판단력은 위기 관리와 해결에 필요한 능력입니다.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할 분은 냉철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8:23-27 KOERV에 보면,
[23]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배에 올랐습니다.
[24] 갑자기 호수에 폭풍이 심하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파도가 배를 덮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깊이 잠들어 계셨습니다.
[25] 제자들은 예수께 다가와 그분을 깨우며 말하였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고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27] 제자들이 놀라서 말하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실까? 바람과 파도까지도 이분의 말씀에 순종하는구나!”
하나님의 고통불가성(무감성) 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파도의 자연재해 앞에서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냉철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님이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워하고 당황한다면 권능자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여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감성(고통불가성) 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주님은 평안을 누리며 자연을 명령하여 순종케 하는 신적 권위,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불변성과 함께 무감성(고통불가성)은 하나님의 속성 즉 완전함입니다.
(매튜 바렛, 개혁된실천사, 2021, 201).
무감성(고통불가성)은 영향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영향받지 않으십니다(202).
2025년 2월 현재 인류가 두려워하는 것중 하나는 핵전쟁입니다.
핵전쟁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영향받지 않으시고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수 현실태"(악투스 푸루스)입니다.
순수 현실태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엇도 활성화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충만한 상태이십니다(203).
인간은 술이 취하면 정상적 생활이 어렵습니다.
술이 취한 사람이 운전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번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탤런트 김*론의 경우 약 2년전 음주 운전 사고를 크게 낸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언론이나 유튜브, sns등의 성숙하지 못한 점도 자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술, 마약 등에 영향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주님은 술이나 마약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 호흡하는 것, 만지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즉 후각, 시각, 청각, 촉각, 미각, 곧 오감의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육감의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에게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어떤 예지력, 통찰력, 경험, 본능, 관찰과 생각에 의해 나오는 육감에 의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육감이 뛰어나면 사기나 사고나 불행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감이나 육감으로 살아가는데, 아무리 인간이 주의하고 애써도 안되는 일과 영역이 있습니다.
그 때 무감성(고통불가성), 순수 현실태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 은혜가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삼위 간의 사랑은 충만하여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으십니다.
무감성(고통불가성)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보증입니다(매튜 바렛, 개혁된실천사, 2021, 204).
이스라엘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에 모압 왕 발락은 두려웠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발람은 선견자로서 전쟁 때 적을 저주하여 아군 편에 승리를 안겨 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보다 모압왕 발락이 주기로 한 금과 은을 좋아했습니다.
야웨 사자가 발람이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야웨 사자는 발람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타고 가는 나귀의 눈에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나귀는 야웨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좁은 길목에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금방 칼로 내리칠 기세여서 나귀는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발람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나귀를 재촉하여 채찍질을 여러번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귀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했습니다.
나귀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 22:28) 라고 발람에게 말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발람도 야웨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깜짝 놀란 발람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발람은 그 후 이스라엘을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사람이 조종할 수 없는 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매튜 바렛, 개혁된실천사, 2021, 205-207).
하나님이 고통가능한(감성적인) 분이라면 복음의 약속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피조물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의 속성, 본질, 행동이 요동한다면,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현재와 장래 약속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변하면 하나님의 감정, 약속도 흔들립니다(매튜 바렛, 개혁된실천사, 2021, 221).
한 나라의 국민이 불안해지는 것은 어떤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고통가능한(감성적인) 하나님이라면, 그분의 존재와 말씀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확신이 없는 불안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221).
대인관계에서 어려운 것은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변덕이 심하다면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외부 영향에 민감한 사랑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무감성(고통불가성)은 요지부동의 공의와 사랑이 서는 토대입니다(Weinandy, 재인용 매튜 바렛, 222).
외부 영향에 따라 고통가능하시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감성적인(고통당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동정해야 할 분이고, 우리가 의지하거나 안식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엘리가 사사 겸 제사장으로 있을 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첫 전투에 패했습니다.
그들은 패한 이유가 야웨 언약궤가 없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사무엘기상 4:1-22 KOERV에 보면,
[1] 사무엘이 지도자 사사로 이스라엘 곳곳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는 매우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계속하여 주님 앞에서 점점 더 악한 일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블레셋군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2] 블레셋군은 이스라엘군 앞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공격을 시작하여, 전투가 진행되자 이스라엘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군이 이스라엘의 병사 약 사천 명을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3]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병사들이 진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블레셋군에게 지도록 하셨는가? 실로에서 주의 계약궤를 모셔 오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그것이 우리와 같이 싸움터에 나가서 우리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거기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는 전능하신 주의 계약궤를 메고 왔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계약궤와 함께 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범죄자들이었습니다.
[10]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온 후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니 이스라엘군은 크게 져서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군이 보병 삼만 명을 잃었습니다.
[11] 거기다가 하나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18] 베냐민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말하자 엘리는 성문 곁 그가 앉았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가 노인인데다 살이 쪘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는 이십 년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좋은 것은 자기들이 먼저 가로채 먹었습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욕보이고 자기들 욕심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조종당하지 않으십니다.
삶의 회개와 변화가 없는 이스라엘과 엘리 가문을 블레셋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을 차나 집이나 어느 곳에 부적처럼 두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사무엘기상 5:1-12 KOERV에 보면,
[1] 블레셋군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다음 그것을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갔습니다.
[2] 그들은 그 궤를 다곤 신전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다곤 신상 옆에 두었습니다.
다곤(Dagon)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주로 농업과 풍요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곤 신상은 상반신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고,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전 안에 두었을 때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사울의 갑옷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곤 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다가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하면서 물고기와 연관된 신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Bing, copilot).
왜 블레셋군은 야웨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까?
고대 사람들은 전쟁을 신들의 싸움으로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은 고대 가나안 지방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위치한 인도유럽인 계열의 민족 집단입니다. 이들은 주로 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등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5도시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강력한 적으로 자주 등장하며, 다곤 신을 숭배했습니다.
블레셋인들은 '바다 민족'으로 불리며, 에게해나 크레타섬 등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삼손과 골리앗의 이야기 등으로 유명합니다(Bing, copilot).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고 믿었습니다.
[3] 다음날 아침 일찍 아스돗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다곤이 주의 궤 앞에 쓰러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곤 신상을 일으켜 세운 다음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4]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도 아스돗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다곤 신상은 다시 주의 궤 앞에 쓰러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이 부러져 문지방 위에 얹혀 있고 다곤의 몸통만 남아 있었습니다. [5]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문지방을 밟지 않고 넘어서 들어갑니다.
[6] 주께서 아스돗과 그 가까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치셔서, 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종기에 걸려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 그들에게 쥐를 보내시니 쥐들이 그들의 배와 땅 위에 들끓었습니다.
[7] 아스돗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이렇게 심하게 벌하니 그 신의 궤를 여기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
[8] 그리하여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의 모든 통치자를 불러 모으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통치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기시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옮겼습니다.
[9]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가드로 옮기자 주께서 그 성읍을 내리치시니, 그 성읍 사람들이 너무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주께서는 어린 아이나 노인이나 가리지 않고 온 성읍 사람이 종기를 앓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0]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으로 들어오자 에그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고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우리에게 가져왔구나.”
[11] 그리하여 그들은 블레셋의 모든 통치자를 불러 모은 다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와 우리 백성을 모두 죽이겠소.”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치셨으므로 많은 사람이 죽으니 온 성읍 사람이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12]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종기에 걸렸습니다. 온 성읍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는 무소부재 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계시든, 블레셋 사람들 중에 거하시든지 하나님의 속성과 전능하심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조종당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 자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블레셋 지역에서도 고통불가성(무감성)의 하나님, 영향받지 않으시는 그분의 속성이 드러났습니다.
무감성 즉, 고통당하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과 요새이십니다.
"고통이 없어야 하나님 사랑이 이타적이고 유익할 수"(Weinandy, 재인용 매튜 바렛, 222)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감성적인 즉, 고통불가성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222).
성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성의 충만함 속에, 사람의 몸으로 고난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십자가 고통의 피해자는 아니십니다.
인간은 고통이나 사고나 사건이나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때로 무력하고 가망이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고난의 피해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인간과 똑같이 고통의 피해자라면, 그 분은 가망이 없고, 무능하고 무력하여,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 자신의 사명을 치밀하고 빈틈없이 제어하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차근차근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고, 자신의 구속의 고난을 예언하고 알리십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의 구원과 부활의 과정을 총체적 주권을 행사하여 이루어가십니다(마 16:21-23).
마태복음 16:13-20 KOERV에 보면,
[13] 예수께서는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 예레미야이거나 다른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도 말합니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누구라 말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17]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복이 있다.
네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18]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힘이 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 하나님께서도 하늘에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용서하기로 한 것이면, 하나님께서도 하늘에서 그것을 용서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서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KOERV에
[21]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겪으셔야 할 일들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 선생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2-23 KOERV
[22]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주님,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습니다.
[23]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나라! 너는 내 앞길을 가로막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통불가성(불감성)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음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거저 주어질 것을 보장합니다(223).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영향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제우스나 다른 우상과 다릅니다.
우상숭배는 신을 인간과 같은 속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영향받지 않으시는 분, 불감성(고통불가성)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약곱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 자손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