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그동안 잘 있었니? 지금 우리를 되돌아보니 장하다. 나는 이제야말로 제대로 호흡 보는 연습을 하려고 하고, 가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잘 따라오고 있으니 우리 둘 다 장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연습하여 ‘호흡 보기 연습’의 입문 과정을 통과하자.
지난 번에 우리는 철봉의 비유를 들어보았다. 1분, 2분 동안 철봉에 매달려 있다가 3분 매달려 있자고 해보았단다. 만약 이 철봉의 비유가 힘들다면 다른 비유를 들어서 연습하자. 다음은 책에서 읽은 비유야.
예를 들어 여기 도시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그 도시를 성으로 둘러싸고 문을 하나 만들었어. 거기로 사람들이 드나들어. 나는 성 밖의 한 곳에 앉아 성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어. 나는 1분 동안 그렇게 봤고 2분 동안 또 그렇게 봤어. 이제는 3분 동안 보려고 해. 나는 성 밖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단지 성문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만을 보고 있어.
이와 같이 지금 우리는 콧구멍을 통과해서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보고 있어. 내 마음이 자리를 옮겨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그냥 콧구멍 주위에 앉아 숨이 길게 들어오는지 길게 나가는지, 짧게 들어오는지 짧게 나가는지를 단지 보고 있을 뿐이야. 다른 데 가지 말고 이어보면서 마음이 콧무멍 주위에 머물고 있어.
마음이 다른 곳에 갈 때마다 얼른 발견해서(알아차려서) ‘마음아, 다른 곳에 가지 마. 여기 콧구멍 주위에 머물고 있어. 그래서 숨이 들고 나가는 것이 긴지 짧은지를 이어봐.’ 하고 일깨워주고 있어. 우리는 이런 활동(기능)을 사띠(sati)라고 이름 붙였어. 한자로는 염(念 생각 념)으로 번역하고, 우리말로는 마음챙김,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한다고 보았어.
이제 우리는 5분까지 연습하려고 해. 3분을 넘어 5분 동안 호흡을 이어보려고 해.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우리가 지난 번에는 ‘호흡을 보자’고 자꾸 말을 일으켜서 마음이 게을러지거나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것을 막으려고 했어.
오늘은 내가 배운 다른 방법을 하나 들려줄게. 나는 지금 호흡을 이어보면서 연습하고 있다고 해볼게. 그럼 먼저 내 마음의 상태를 발견해. 그리고나서 내 마음이 호흡 보기 연습을 잘 하고 있는지 못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판단해). 그리고나서 어떻게 해? 마음이 호흡을 잘 이어보고 있으면 그 잘하는 상태는 계속 유지해야 하고, 마음이 다른 데로 가버리거나 하면서 못하고 있으면 그 못하는 상태를 버리고 빨리 제자리로 돌아와야 해.
그래, 이것은 우리가 계속 해 왔던 방법이야. ①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발견하고(알아차려서), ②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판단해(알아내). 그러고 나서 ③잘 하고 있으면 그 상태를 유지하고, 못하고 있으면 그 상태를 버리고 잘 하고 있는 상태로 돌아가야 해.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돼.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발견하고(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옳음은 유지하고 그름은 버리고 옳음으로 되돌아간다.’ 라고.
이제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어구로 말해 보려고 해. 이것을 빠알리 어로 하면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라고 한단다.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 ātāpī sampajāno satimā. 즉, 내 마음상태를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여, 그름은 버리고 옳음만 유지시키려는 의도적인 행위'라고 하는구나.
예를 들어볼게. 지금 내가 앉아서 호흡 보기 연습을 하고 있어. 나는 1분, 2분을 무사히 넘어갔어. 이때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발견하고 판단해 보면 잘 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 잘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나아가. 그런데 3분 쯤 되어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어. 그럼 얼른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발견하여(알아차려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봐(판단해). 그러면 그것은 그른 상태야. 그래서 나는 얼른 그 그른 상태(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을 버리고 옳음(호흡 보기)으로 돌아오도록 해. ‘마음아, 딴 데 가지 마. 호흡을 이어 봐’하면서.
그래서 나는 3분을 지나갔어. 4분이 되니 다시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갔어. 몇 초 지났어. 아차,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좀 늦게 발견했어.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내 마음이 다른 곳에 간 것은 호흡 보기 연습에서는 그른 것이니까, 다른 곳에 간 이 마음을 빨리 버리고 다시 호흡을 이어보는 잘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단다.
이렇게 마음이 콧구멍 주위에서 달아나 다른 곳으로 갈 때마다 이 마음을 발견해서(알아차려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서, 못하고 있으면 그것을 버리고 빨리 잘하는 상태로 돌아와야 해. 물론 현재 내 마음 상태를 발견했더니 잘 하고 있더라, 그러면 잘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잘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해. ‘음, 잘 하고 있어. 그러니 게속 호흡을 이어보자.’ 하면서 연습한단다.
오늘 우리는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라는 말을 한번 들어보았다.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 ātāpī sampajāno satimā
마음의 현재 상태를 발견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옳음은 유지하고 그름은 버리고 옳음으로 돌아온다.
* 아따삐 : 열심히
* 삼빠자노 : 분명한 앎
* 사띠마 : 알아차림을 가지고서
10 복습
그동안 잘 있었니? 우리가 여기까지 왔단다. 처음에는 1분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제는 5분을 연습하고 있구나. 앞으로 몇 달간 계속 5분을 연습하자.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상황만 주어지면 그 상황에 맞게 어떤 데서는 1분, 어떤 데서는 2분, 어떤 데서는 3분, 어떤 데서는 5분, 이렇게 자유자재로 호흡을 보아낼 수 있도록 연습해 놓자.
그럼 오늘은 복습하자. 오늘은 이야기를 만들어볼게. 그동안 책에서 읽고 강의에서 듣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과 내가 생각한 것 등을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볼게.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어낸 인물이야. 만화라고 할까, 공상 만화라고 할까, 하여튼 그런 설정도 좀 했어.
이야기 1
어느 날 빙청 선인이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대들은 이제 산을 내려가 100일 동안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라. 그러면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라.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보배로운 사람들을 보거든, 100일 후에 돌아와서 그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보아라.”
제자들은 산을 내려왔습니다. 흩어져 100일 동안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100일이 지나자 모두 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빙청 선인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다. 그대들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 보배로운 사람을 만났다면 그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보아라.“
제자1이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챙기며 길을 걷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감각기관을 거두어들여 욕탐이 흐르지 않게 하여 자신을 보호하면서 길을 걷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에게도 마음 빼앗기지 않고 자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감관기관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제자2가 말했습니다. “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일어나도 질투가 일어나도 교만이 일어나도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감정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영원히 내 것인 양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나교 물었더니 마음챙김(사띠, 알아차림)하면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자3이 말했습니다. “저는 정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책의 표현대로 하면 그는 ‘피부와 힘줄과 뼈가 쇠약해지고 몸에 살점과 피가 마르더라도 남자다운 근력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분발로써 얻어야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리라.’ 하고 정진을 시작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자4가 말했습니다. “저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책에 나오는 표현을 쓰면 ‘우리는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자가 되리라. 우리가 입은 작은 호의라도 빼놓지 않을 것이다.’는 말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또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일부를 나누어주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그 베푸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이 모두 그 베푸는 사람을 가까이했고, 그를 위해 주었습니다.”
이야기 2
어느 날 붓크무라 도사가 제자 산뜨에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그대보다 먼저 입문하여 공부하던 꾸살라가 있었다. 그런데 꾸살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놀고 장난만 치다가 여기서 쫓겨났다. 그런데 꾸살라가 깊이 반성하고 열심히 정진하여 다시 공부하러 이리로 올 예정이다. 이제 그대가 세상에 나가 꾸살라를 찾아오라. 가서는 꾸살라라고 생각되는 세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라. 그 세 사람 중에서 꾸살라가 없다면 그냥 혼자서 돌아오라.”
산뜨는 산을 내려와서 꾸살라를 찾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산뜨가 사람1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윤회합니까?” 사람1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산뜨는 다시 꾸살라를 찾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서 또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잠들어있고 누가 깨어있습니까?” 사람2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꾸살라일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산뜨는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산뜨가 물었습니다. “번뇌는 어디에나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멈춥니까?” 사람3이 대답했습니다. “마음챙김(사띠, 염(念), 알아차림)에 의해 번뇌가 멈추어집니다.” 산뜨가 다시 물었습니다. “번뇌는 무엇에 의해 부수어집니까?” 사람3이 대답했습니다. “지혜에 의해 부수어집니다.”
산뜨가 몇 가지를 더 질문해도 되느냐고 하자 사람3이 아는 것이 있다면 물음에 따라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산뜨가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3이 대답했습니다.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산뜨가 다시 물었습니다. “호흡은 어떻게 관찰합니까?” 사람3이 말했습니다. “숨을 쉬면서,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압니다.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쉴 때에는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압니다.”
산뜨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호흡에서 호흡을 이어보면서 머뭅니까?” 사람3이 대답했습니다.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판단합니다(압니다). 그래서 잘하고 있으면 그 잘하는 것을 계속 유지합니다. 잘못하고 있으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잘하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호흡에서 호흡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산뜨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할 수 있습니까?” 사람3이 말했습니다. “있습니다. : 호흡에서 호흡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하여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어한다. : 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산뜨는 꾸살라를 찾았고, 두 사람은 함께 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야기 3
전기수는 이야기 1과 이야기 2를 방금 읽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더욱 분발하고자 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면 앉아서 호흡 보기 연습을 해나갔습니다. 1시간 동안 앉았는데 아직도 호흡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늘 다른 생각에 빠져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음챙김(사띠, 알아차림)이 몇 번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것도 생각을 잡아매는 것이구나. 마음챙김, 여기에는 생각이 이리저리 날뛰지 않는구나.’ 하고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기수는 용기를 내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도 할 수 있다. 호흡을 보자, 호흡을 보자.’ 하면서 계속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기수는 시민명상교실에 꾸준히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또는 버스에서 내릴 때 시민명상교실의 고급반에 다니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이야기 1이나 이야기 2에 나오는 그런 제자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훌륭한 사람들과) 비슷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말을 할 때도 마음챙기면서(사띠하면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쁘고 해로운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좋은 행위만 했습니다. 그들이 악을 행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전기수에게 말했습니다. “호흡을 잡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 오신 것처럼 틈틈이 몸과 말의 행위를 잘 제어하셔요. 그리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나쁘고 해로운 생각들을 떨쳐버리도록 하셔요.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더라도 공부의 영역에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공부해 놓으시는 것이 좋다고 봐요. 나중에는 자신이 그 길잡이를 토대로 길을 걸어갈 테니까요.”
전기수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전기수는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 남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했습니다. 마음으로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곧 떨쳐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다시 고급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잘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일어난 일로 남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사과하는 경우는 내가 몸으로 남에게 해를 입혔거나 말로 남에게 해를 입힌 경우랍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질투나 미움이나 분노는, 그것을 내가 진저리치고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지, 그것을 남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사회에서 계(戒)의 영역은 몸과 말의 행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다시 고급반의 사람이 말했습니다. “전기수님, 반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반성했으면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할 때에도 공부할 수 있어요. 호흡을 보시면 되어요.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입문반에서 배운 긴 숨인지 짧은 숨인지를 이어보는 거예요.”
어느 날 다시 고급반의 사람이 말했습니다. “전기수님, 입문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은 아마 이런 뜻일 거예요. 내가 버스나 지하철을 탔어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 이렇게 계속 "자애"의 마음을 냅니다. 그렇게 차에서 내릴 때까지 연습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 안의 사람들이 아프지 않기를, 위험이 있으면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연민"을 연습합니다. ...”
고급반 사람이 더 말해 주었습니다. “이 차 안의 사람들이 성공하면 나도 좋겠다, 이 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잘 되기를, ... 이렇게 그들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합니다. "함께 기뻐함"을 연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나는 평온하게 그를 대할 것이라고 연습합니다. "평온"을 연습합니다.” 이렇게 고급반의 사람은 전기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후에 집을 나서니 날씨가 화창했고 밖에는 낙엽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봄에 싹을 틔워 파릇파릇하던 것이 여름에 무성하게 우거졌다가 가을이 깊어가니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늘 언제나 그대로인 채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을에 사람들도 여름과 다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과 온화한 바람 아래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빨리 때로는 한가로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댓글 늘 정진하시는 모습이 보기좋습니다.
고요2님 만큼 열정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 참 드물지요. 정진하시는 분의 글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확실히 차이가 나지요.
장문의 글들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고요2님처럼 부처님 법을 사모할 수 있게되길 빕니다.
너무 과분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읽어주시고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은하의 돛님께서 꼬리말로 들려주신 말씀을 생각하다가, 제게 어떤 생각이 떠올라 호흡 보기 연습에 적용해 보게 되었습니다.
은하의 돛님께서도, 화엄의 모든 회원님들께서도 모두 행복하셔요.
[마음이 콧구멍 주위에서 달아나 다른 곳으로 갈 때마다 이 마음을 알아차려서 다시 콧구멍 주위에다 마음을 고정시키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알아차렸다는 것은 마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뜻이됩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요...'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콧구멍주변에 주의집중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행위였을까요?
즉 우리가 호흡연습을 하는 까닭이... '마음을 한 곳에 붙들어 매어두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호흡연습을 하는 것일까? 입니다.
해피스님께서 호흡의 들고 남을 볼 때.. 콧구멍 주변에 공기가 들어오고 나감을 살피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콧구멍 주변에 공기가 들어오고 나감을 집중하여 봄으로서 고요2님이 얻으신 것은 무엇인가요?
공기의 들고 남을 콧구멍 주변에 고정시켜서 그것을 일일이 알아차림 했다면 우리는 공기의 들고 남을 관찰함으로써 '신촉'을 알아차림 한 것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한 가지 다른 질문은..
호흡을 길게 내쉬고 길게 내쉰다고 안다
호흡을 짧게 내쉬고 짧게 내쉰다고 안다라고 부처님께서 호흡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숨을 길게 쉴때 길게쉰다고 알고, 짧으면 짧게 쉰다고 아는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일까요?
저는 당시 그것을 읽으면서 .. 그래서 뭐? 길게 쉬니까 길다고 알고, 짧게 쉬니까 짧게 쉰다고 아는데... 그래서 뭐? 라고 의아해했었어요. 이게 무슨 수행이야? 라고요.
그럼에도 부처님께서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깊은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고요2님이 열심히 공부하셨고, 호흡연습도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부처님은 왜 그와 같이 호흡이 길면 길다고 알고, 짧으면 짧다고 안다 라고 하셨는지.. 그에 대한 의문은 풀리셨는지요?
멋진 글을 적어주셨는데.. 기왕이면 이와 같은 의문에 답도 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
첨언:
위 2번째 댓글 첫번째 질문에서...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마시고.. 마음이 집중하고 있을 때의 상태를 해체해서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입니다.
우리가 이미 이론으로 배웠거든요. 그러니 배운바에 따라.. 하나의 마음이 일어났을때(콧구멍 주변에 마음을 고정시켰고 그것을 파악했을때) 그 하나의 마음은 무엇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라는 것을 파악해보셨는지요?
고요2님 글을 읽고는 .. 좀 아쉬웠던 점이 있는데요.... 제시하는 수행방법을 따라 수행했다는 말만 있지.. 그 수행으로 스스로 알아차림한 바 무엇을 어떻게 알았다고 설명하신 대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 우선 저는 아직 호흡 보기 연습의 입문 과정을 연습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과 관련한 어떤 것들을 알아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우선 집중이라도 해내자’ 고 생각하여 콧구멍 주위에 내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을 좀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은하의 돛님께서 언급하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못해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이 호흡 보기 연습할 때면 세상의 걱정 근심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하다는 그 결과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은하의 돛님께서 (저에게 또는 공부하시려는 분들에게) 다시 공부 자료를 제시해 주시니,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념처 경의 신념처 부분을 다시 살펴보고, 호흡 보기 연습을 하면서 은하의 돛님께서 던져 주신 문제들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며칠 뒤 제가 나름대로 답을 찾게 된다면 그때 글을 올리겠습니다. 며칠 뒤에도 못 찾았다면 못 찾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하의 돛님, 공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뒤에 글을 올리려고 했으나, 부득이 오늘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어제 대념처 경의 신념처 부분을 조금 읽었습니다. 오늘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 앉았습니다. 호흡 보기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은하의 돛님께서 언급하신 문제들을 풀어보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저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들은 지금 내 수준에서는 풀지 못한다.’고. 그래서 이 문제들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의 문제를 풀려고 해보았습니다.
저는 은하의 돛님께서 내어주신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답을 모릅니다.
비록 저는 문제를 못 풀었지만, 은하의 돛님께서 저에게 맞추어서 문제를 내어주시면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점을 다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저의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다른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아, 그동안 내가 해내지 못했던 신념처의 앞부분을 나는 이렇게 이렇게 수행하면 되겠구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경전의 해당 부분을 이렇게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해도 되는지를 다시 점검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내 자신에게 맞는 이 방법으로 하면 될 것이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대로 경전을 이해하는 힘이 있을 것이다. 이제 오늘 나도 신념처 앞 일부를 나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참고로 지난 번에 꼬리말로 올려주신 은하의 돛님의 말씀을 생각하다가, 저에게 일어난 어떤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저는 그 생각으로 호흡 보기 연습을 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에게 일어난 생각 : ①이 사념처 수행은 출가 스님들이 하시는 수행이다. 그분들은 바로 사띠(마음챙김, 알아차림)를 확립하고 신념처 수행을 하실 것이다.
②그런데 나는 사띠를 확립하지 못한 채 신념처 수행을 하려니까 처음으로 나오는 호흡 보기 연습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③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사띠를 조금이라도 생겨나게 해서 호흡 보기 연습을 하자. ④어떻게? 내 경우에는 마음속으로 ‘자리에 앉자, 이제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자. 사띠하자’고 결정하면 된다. 그러면 점점 마음챙김하지 않았던 일상의 상태와는 다른 상태가 된다. ... 이렇게 하여 나는 마음챙김을 일으켜 놓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챙김을 더 일으켜 놓도록 해본다. 그러고 나서 이제 ‘대상’으로 향한다. 자, 그럼 신념처 수행을 시작하자.
그동안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참고로, 혹시 더 문제를 내어주실까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미리 ‘이 부분은 제가 못합니다.’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 현재 저는 신촉을 못 봅니다.
2. 현재 저는 마음을 못 봅니다.
(저의 생각 : 1. 부처님께서 신념처를 설하신 이유는 제 나름대로 한 가지를 생각했는데, 저는 ‘몸에 대한 사띠를 철저히 닦는다, 계발된 느낌을 얻어(또는 안전하게) 몸에 대한 탐과 고뇌를 제어한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2. 저는 현재 호흡에 따른 감촉을 못 잡고 있습니다, 단지 숨의 길고 짧음에 대한 신식은 호흡 보기 연습에서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3. 마음에 대해서는 훗날 심념처 부분에서 연습하겠습니다.)
념처수행이 바로 사띠를 확립하기 위한 수행인데 사띠 따로 념처수행 따로 인가요? 사띠라는 것은 지금 이자리에서 일어난 이 마음 즉 '법'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구요. 념처수행은 그러한 사띠에 능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아는데요. 고요2님의 말씀은 좀 이상하죠.
그리고 출가승과 재가자의 수행이 별개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재가자는 출가자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 일어나는 일체의 법을 바르게 알기 위해 반드시 출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재가자도 분명 일체의 법에 능통해질 수 있고 사띠와 사마타에 능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재가자도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은하의 돛님께서 제게 댓글 달아주시느라고 혹시라도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제 견해를 밝혀놓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제 견해입니다.
1. 우리는 계행과 관련된 법들은 늘 들어왔고, 계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법들은 우리가 많이 익숙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현재 마음을 볼 때, 이런 것이 있는가 없는가는 대체로 무난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그런데 특별한 법들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수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호흡만 해도 몸에 와 닿는 ‘감촉’이 있고, 몸-감촉에 따른 ‘신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3.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호흡을 붙잡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흡을 보기 전에 먼저 ‘사띠’를 일으켜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 저는 사띠를 ‘선(善) • 유익함을 향하고 기억하는 마음의 바탕 + 정신차림(현재의 내 마음 상태를 발견함)’이라고 이해합니다.
5. 그래서 저는 사띠를 먼저 일으켜 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사띠를 일으켜 놓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일으켜 놓습니다.
6. 그럼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그런 것이 수행과 관련한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마음먹거나 결심하는 것) 그런 것이 법(法, 담마)에 해당됩니까?’ 하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①자기 자신에게 사띠를 일으키고 더욱 일으키는 것은 :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수행과 관련된 것입니다.
②그리고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게 마음먹고 결정하는 것이라서 <법과 법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것을 여기에 적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기 자신이 이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특별한 법(法)에서도 사띠를 닦아 사띠를 강화하고자 합니다.’ 하고.
7.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은 경전에 나와 있는 그 이상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대념처 경은 비구 스님에게 설하신 것이라서, 법을 듣는 비구 스님분들은 다 수행을 잘 하실 것이고, 재가자 중에서 수행을 잘 하시는 분들 말고 저의 경우와만 비교해서 제가 못한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라는 이 부분은 은하의 돛님께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8. 결론 : 그래서 저는 자기 자신에게 사띠를 일으켜 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로 분류하는 범주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이상의 분류에는 남자나 여자의 항목은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항목은 또 다른 분류로 구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이런 분류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일례를 들면 ‘물음 : 누가 수행합니까? 남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답변 : 자기 자신입니다.’ 라는 분류일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하는 것을 사띠라고 하고요. 우리가 드러난 법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즉 드러난 법 앞에 깨어있기 위해서는, 불법에 대한 신심과 그 신심을 받쳐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사띠란.. '신심과 지혜를 바탕으로' '지금 드러난 법'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 되겠죠
그러니까 고요2님이 사띠의 정의를 [선함과 유익함을 향하고 기억하는 마음의 바탕과 함께하는 정신차림] 이라고 하셨는데요. 여기서 선함과 유익함을 향하고 기억하는 마음은 신심과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구요. 정신차림이란 그러한 신심과 지혜로 드러난 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띠가 바로 알아차림(있는 그대로 봄, 정신차림 등)이라구요. 그러니까요. 사띠를 확립하고 그 후에 신념처 수행을 한다는 말은 이상한 말이 되는 거예요.
[선삼과 유익함으로의 향함]은 바른 사띠를 하기 위한 조건인 거예요.
우리가요 바른 사띠(알아차림)를 하기 위해서는요.. 처음에 둘이 대화했던 것처럼 법에 대한 얼마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법에 대한 이해는 또 그 이해만큼의 신심을 가져다 줘요. 이해와 신심은 우리를 당연히 선함과 유익함으로 향하게 하고 그것을 기억하게 할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바탕에서 이제 부처님이 제시하신 바와 같이 사띠(알아차림, 호흡법 등)를 해보자는거예요.
사띠라는 단어 갖고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구요. 그런 단어에 대한 논쟁이 호흡연습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호흡연습을 하려면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목표를 미리 정해야 한다고 알아요.
만일 신념처에 대한 마음챙김을 하겠다고 정한다면.. 우리의 감각기관을 사띠하겠다는 것이 되잖아요. '안이비설신' 이 다섯가지의 감각기관중 하나를 정해 사띠하겠다는 말이되죠.
혹은 오온에 대한 마음챙김을 하겠다고 정한다면..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중 그 어떤 것을 정하여 사띠하겠다는 것이 되겠지요.이렇게 하나의 방향을 잡고 그것에 대한 확실한 알아차림을 목표를 세워 사띠를 해야만이 바른 사띠가 되는 거죠.
고요2님의 글에 딴지걸 마음은 전혀 없구요. 그냥 궁금해서 질문했던 것 뿐이고요.
콧구멍 주위의 호흡의 들고 남에 집중하였다면 '안이비설신'중 '신' 즉 '감촉'에 대한 알아차림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질문했었구요. 그것을 알아차림 했다면 '연기'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마지막 댓글들을 지우셨네요. 읽고 있노라니 서로 소통이 잘 안되고 있구나 싶어 그만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마침 댓글도 지우셨으니 제가 더 이상 뭔가를 말해야할 필요는 없는건데요. 한가지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고요2님께서 [신촉, 감촉에 대해서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건 출가자등 수행이 깊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적으셨었죠?
그에 대해서는 마지마니까야 분석 품에서 여섯감역에 대한 분석의 경을 올려놓았으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시면 [촉각과 감촉을 경험하고] 등 촉각, 감촉, 인식되는 감촉이라는 표현들이 나와요.
호흡연습 입문하시는데 들숨과 날숨을 콧구멍 주위에 집중을 하여 본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콧구멍 주위에 집중하여 본 것이 뭔가요? 바로 촉감, 감촉이예요. 이건 출가하여 특별히 수행을하는 수행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다 경험되는 사실이예요.
이와 같은데 [신촉 촉감 등을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연기' 운운한 것은요... 오늘 올려놓은 니까야에서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여섯 내적 감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여섯 외적 감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여섯 의식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 등등 이하 생략]
여기서 여섯 내적 감역은요.. 반드시 여섯 외적 감역에 조건지어질 때 알려지는거예요. 내적 감역은 외적 감역과 연기하기에 드러난다는 뜻이되죠. 그 유명한 경구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인 거죠. <내적감역이 있으므로 외적감역이 있고...>
일체의 드러남은 조건지어짐 즉 연기에 의한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제가 호흡연습으로 알아차림한 그 첫번째 것이거든요
어떤 부분들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져서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댓글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또 그 댓글에는 신념처 앞부분에 대한 제 견해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릇된 것을 들려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이 나의 견해를 지적하면서, 나는 바르다고 생각하는데 남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댓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 연기는 이렇지 않을까요?
* 연기는 늙음과 죽음을 철저히 알아야 하고, 태어남을 철저히 아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중생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괴로움들을 철저히 아는 내용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연기의 정형구가 나오는 경전을 찾아보면, 그 정형구 다음에 어떤 것이 그 정형구의 뜻인지 부처님께서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알려주시는 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M137에는 연기의 정형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2.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잡는다’에서
* 저는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겠습니다. : ‘몸-감촉’을 조건으로 ‘신식(身識)’이 생기는데,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모르고서 어떻게 그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알 수 있습니까?
*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 눈이 나쁜 사람은 저것이 나무인지 바위인지는 잘 안보여서 모르지만, 저것이 소리, 냄새, 맛, 감촉은 아니고 뭉뚱그려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이라고 압니다.
* 그래서 저는, 부처님께서 신념처 앞부분에서 ①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②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
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고 가르쳐 주신 대목에, 저의 생각을 적용해서 연습해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왜냐하면 콧구멍에서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못 느끼는 사람은 배의 불룩거림이나 숨소리 등으로 호흡의 길고 짧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제가 감촉을 못 느낀다고 한 것은, 콧구멍에서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못 느낀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점을 제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다른 분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 저의 이런 이해와 적용은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증명되지 않았고, 제가 잘못하는지도 모르니까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방법은 나중에 틀렸다고 생각되면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3. 제가 한번 이해한 방식의 신념처 앞부분 수행
*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못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 그런 그가 신념처 수행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합니다.
* 그러면 ‘앉는다’ ‘고요하다’라는 말이 갖는 마음 상태가 됩니다. 즉 부처님 가르침이 의미하는 마음 상태로 지향되어 일상의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 상태가 되어 갑니다.
* 즉 마노(意)-법(法), 의식(意識), 셋의 화합 촉, 수(受)가 진행되었고, 이 수(受)에 대한 앎을 가진 마음(心)이 되었고, 이 마음
은 특별합니다.
* 즉 이 마음(心)은 안정되었고 또렷하고 준비가 되었습니다.
* 그러면 그에게 자연히 호흡이 드러납니다. 그에게는 배의 불룩거림이나 숨소리로 호흡이 드러납니다.
* 그리고 이 배의 불룩거림이나 숨소리로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압니다. 그러나 배의 불룩거림이나 숨소리가 호흡의 길고 짧음을 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 그렇게 신념처 앞 부분의 ①과 ②의 과정을 합니다. 숨이 긴지 짧은지를 알도록 수행합니다.
* 그러면 어느 순간 숨소리도 가라앉고 자신의 손이 없는 것 같고 자신의 발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몸이 어디 있지?’ 해야만 비로소 ‘아, 여기 있네’ 하게 됩니다.
* 그때(몸이 어디 있는지 모를 때) 잘못 될 수 있으니, 그릇된 방향으로 갈 수 있으니, 다시 손과 발을 찾아서 ③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고 내쉽니다.
* 아까부터 숨소리는 가라앉았습니다. 숨소리로 호흡의 길고 짧음을 이어본 경우라면 어떻게 합니까? 이 부분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추측하자면 그는 여기 ④신행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이 단계에서 혹시 호흡이 주는 감촉을 알고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는 몸과 관련된 것은 모두 가라앉았고 외부의 공기 알갱이가 있다면 그것이 코로 들어오면서 남기는 감촉만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 수행을 잘 하시는 분들은 바로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붙잡아 가르쳐주시는 대로 수행을 잘 하실 것입니다.
* 그러나 저는 콧구멍에서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못 느끼기 때문에 대념처 경의 신념처에서 제시해 준 방법에 어긋나지 않게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신념처를 연습하고자 합니다.
(이상은 제가 한번 이해한 것으로서 검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하니, 그냥 안 읽으신 것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시 참고로, 몸의 부위 관찰이나 부정관을 닦을 때 그냥 부정관을 닦으면 피곤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호흡과 관련하여 사띠가 생겨나서 확립된 경우라면 부정관을 닦아도 위험하지 않고 잘 닦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