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趙昌鎬(1886∼1922)】 "매국노 이완용(李完用)ㆍ이용구(李容九) 처단 기도 애국지사"
조창호(趙昌鎬.1886.10.9∼1922.7.11)
독립운동가. 평양 출신. 이재명(李在明) 등과 함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ㆍ이용구(李容九)의 처단을 기도한 애국지사이다. 일찍이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안창호(安昌浩) 등 민족지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아 독립사상이 투철하였다.
1909년에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주동이 되어 한국정부와 일제 통감부에 ‘한일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매국행위를 감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이재명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이완용ㆍ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의 박태은(朴泰殷)의 집에 모여 처단계획을 세웠는데, 조를 나누어서 그는 김정익 (金貞益)과 함께 이용구를, 이재명ㆍ이동수(李東秀)ㆍ김병록(金丙錄)은 이완용을 각기 처단하기로 하였다. 또한, 전태선(全泰善)과 함께 무기수합의 책임을 맡아 김이걸(金履杰)을 통하여 권총을 구하였으며, 그밖에 거사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거사준비를 마친 뒤 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기회를 엿보다가 1909년 12월 22일, 종현(鍾峴) 천주교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벨기에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이재명의 주동으로 저격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이재명은 체포되고, 뒤이어 이용구를 처단할 계획이던 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평양 출생. 일찍이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분개하여, 그 조약에 앞장섰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과 일진회(一進會)를 통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고자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9년 12월, 평양 박태은(朴泰殷) 집에서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재명(李在明)ㆍ김정익(金貞益)등 의혈청년들이 모여 이동수(李東秀)ㆍ김병록(金丙祿)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그와 김정익(金貞益)은 왜놈의 주구인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오복원(吳復元)ㆍ박태은ㆍ이응삼(李應三) 세 명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담당하고, 그와 전태선이 거사에 필요한 권총과 단검을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출발하여 국적(國賊)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태를 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1909년 12월 20일 밤 김용문으로부터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3일 명동성당(明洞聖堂)에서 거행되는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와 동지들은 이 기회에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2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이재명은 성당 문을 나서 마차에 오르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거꾸러뜨리고 덤벼드는 차부 역시 찔렀으나 호위 경관들에게 피체되었고, 이재명의 피체와 함께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으로 이용구의 처단을 맡았던 그와 동지 대부분도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15년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보훈처 홈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