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이의 엽서편지
끓어올랐던 청춘
쇼난편지 238호(2024년 8월)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
"너의 젊은 날, 너를 만드신 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장 1절)."
1.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청춘시절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뜨면서 세상의 현실과 마주하는 시기다. 나는 그때 어떻게 살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나는 나의 청춘시절 넘쳐흘렀던 순수한 자유와 유연한 마음가짐을 평생 소중히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2.
최근 해마다 발행하는 '미기와(みぎわ, 시23편의 시냇가라는 뜻)' 제64호에 금년에도 응모하였는데, 나의 젊은 청춘 시절과 1960년의 안보투쟁 과정을 쓴 글이었다. 그때는 당시 정부(岸信介 총리)가 미일안전조약의 군사동맹강화를 의도한 신안보조약을 강행한 시점이었는데, 당시 피끓는 청년들의 투쟁을 쓴 것이다. 이 신안보조약이라는 것은 중의원 국회에서 난투 끝에 참의원으로 회부했던 것이어서 분명히 자연승인을 노린 행동인 게 뻔하게 드러나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중의원이 가진 우월권(특권) 중 하나로써 참의원에서 법안을 부결했더라도 60일이 경과하면 중의원에서 재의결하여 법안을 성립시킨다는 헌법 59조를 악용한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3.
내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향의 사범대학을 중퇴한 후 도쿄로 올라와 H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법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열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은 12월에 청천벽력같은 폐결핵 선고를 받아, 학생 사나토리움(WUS 세계학생봉사단)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단체의 일본지부 이사장이 야나이하라 다다오 선생이었다.
다음해 2월, 그곳 도서관에 있었던 이와나미서점 기증실에서 쓰카모토 선생의 잡지 '성서지식'을 보게 되었다. 주필이신 쓰카모토 토라지 선생의 단도직입적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이 나의 회심을 가져왔다. 이후 사카이(坂井基始良) 씨의 도움으로 본격적으로 성서를 손에 들게 되었고, 노보리토학료에 1960년 5월에 들어갔다.
대학과정이 끝나가던 저 운명의 1960년 6월 15일, 정부의 안보조약 자연 승인에 반대하는 대규모시위가 있었다. 나도 당연히 참가하여 스크럼을 짜고 국회를 향하여 발을 맞춰 행진하였다. 메이지유신단이라는 우익의 난입으로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그 충돌의 와중에 동경대학교 학생 樺美智子 씨의 익사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나는 병을 앓고난 직후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중도에 학료로 돌아가기로 했다. 늦은 밤에 겨우 도착했는데, 학료를 책임지고 있었던 료장이신 사토미(里見) 씨가 우리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셔서 너무나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다음 엽서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