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여당 당대표 눈썹이 화제였다. 그분은 희미해진 눈썹에 문신을 새겨 짙게 만들었단다. 대중 앞에 나서는 정치인은 연예인만큼 외모에 신경이 쓰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눈썹도 빠지게 마련이다. 어디 세월의 푯대가 눈썹뿐이겠는가. 목욕탕이 아니면 드러내기 곤란한 데도 마찬가지다. 그곳에도 성글어지지는 않아도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기는 매한가지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기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이 몇 개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다. 유전자는 외모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깊숙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현대의학은 질병에서도 가족병력이 다음 세대에 미치는 상관관계는 아주 높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배우자 선택에서 양가는 집안의 내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친가 외가 모두 대머리 인자를 타고 났다. 어질 적 어슴푸레 남은 기억으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이마가 벗겨졌다. 그러니 아버지와 외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대머리가 우성유전임은 알고 있다. 다섯 형제 가운데 나는 젊은 날부터 이마가 훤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 짓궂은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처럼 이마가 넓었던 다른 친구와 누가 더 넓은가를 실제로 재어보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스스로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이름이다. 성씨야 물려받는 것이라 고정불변이다. 근래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절차를 거쳐 개명하는 사례도 더러 보았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다. 자녀의 이름을 호적에 올렸던 부모가 나중 생각해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는 일도 보았다. 아니면 부모가 정해준 이름이 성년이 된 자녀 본인이 마음 들지 않아 바꾼 경우였다.
나는 주자의 34세손이다. 시조 희(熹) 할아버지는 송나라 때 인물로 공맹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다. 이후 원나라가 들어서자 정통 유학은 핍박받고 학자들은 남쪽으로 밀려났다. 시조의 4대손 셋째 잠(潛) 할아버지께서는 오랑캐 학정을 피해 숨어든 곳이 고려였다. 요즘 말을 빌리면 정치적 망명이었다. 그 후 고려 말 주자를 섬겼던 안향과 정몽주가 나왔다. 이어 조선이 개국되었다.
이렇게 우리 집안 성씨는 이 땅에 퍼져갔다. 전남 화순 능주에는 주자묘( 朱子廟)와 동원사(東源祠)를 세웠다. 경북 울진과 경주 집성촌에는 주가가 그곳에서는 손에 꼽히는 성씨다. 내 고향 의령 운곡에서도 주자가 유학의 도를 동쪽으로 옮겨 왔다는 도동사(道東祠)를 모셨다. 우리 마을에서 옮겨간 집안들이 자굴산 밑 양성마을과 남강 변 월촌마을이다. 나중에 인근 도시로 흩어졌다.
내가 집안 내력을 에둘러 얘기함은 이름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주자의 34세손은 빛날 돈(暾) 항렬을 받았다. 거기다가 나는 다섯째 아들이었기에 다섯 오(五)까지 점지되어 있었다. 형님 네 분 가운데 셋째는 나처럼 사물의 순서를 나타낸 숫자인 석 삼(三) 자를 받았다. 나는 여태껏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내 이름이 자랑스럽고 아주 당당하다고 여긴다.
오래전 일로 나이 서른을 앞두고 장가 들 때다. 이마가 벗겨지기로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총각시절도 그랬지만 나는 지금껏 얼굴에 무엇을 찍어 바르지 않는다. 결혼 전후 해 누군가 남성용 화장품을 보내왔다. 그 출처가 선을 본 뒤 예식을 앞두고 있던 아내 쪽인지, 친구였는지, 다른 지인이었는지 관심 없었다. 상표가 한자로 쾌남(快男)이라 적힌 크림과 로션임은 기억에 희미하다.
글쎄, 성의를 봐서 개봉은 했지만 한두 번 찍어 바르다 그만두었다. 그 후에도 내 뜻과 상관없이 드물게 화장품이 생기더라만 나는 철저히 외면했다. 나는 여태 외모 치장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다니는 이발관이다. 나한테 사치지만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감겨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발사가 드라이기를 들면 나는 놀라 ‘로션은 찍지 마셔요.’다. 1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