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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사이다
‘고구마와 사이다’는 언제부터 환상의 콤비가 되었을까? 자고로 달짝지근한 고구마는 신김치를 길게 찢어서 함께 먹어야 제맛이라고 말한다면 ‘옛날 사람’ 취급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고구마’라는 말이 ‘답답함’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성격이 답답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넓게는 사회문제나 정치적 상황이 답답하다는 의미로도 혼용된다. 반면 사이다는 고구마 같은 사람 혹은 상황이 해갈되는 의미로 쓰여 ‘사이다 = 통쾌함’이라는 공식이 완성되었다.1) ‘고구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나문희 배우의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 밈이다. 또 필자가 애정하는 유희의 남성 듀오 ‘노라조’의 2018년 싱글 앨범 〈사이다〉도 현대인의 답답함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이요원·윤상현 주연의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2016)를 고구마와 사이다의 전형으로 기억한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남정기(윤상현)는 중소기업 화장품 회사인 러블리 코스메틱 마케팅부서에서 과장으로 일한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자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을’의 대변인이다. 드라마는 황금화학이라는 대기업 갑질에 꽥 소리조차 못 내는 고구마 같은 답답한 현실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황금화학 출신 엘리트 옥다정(이요원)이 러블리 코스메틱 본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야기는 급변한다. 옥다정은 황금화학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오를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만 별명이 ‘욱팀장’일 정도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까칠한 성격이다. 둘의 조합은 ‘고구마와 사이다’처럼 안 어울리지만 그래서 더 환상의 콤비가 된다. 드라마는 고구마처럼 답답한 현실을 과하지 않게 그리면서 이를 해결해가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따뜻하고 청량하게 그려낸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소심하지만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 남정기와 까칠하지만 능력 있는 본부장 옥다정의 인물 설정이었다. 드라마는 남정기에겐 가장이라는 무게와 현실에서의 타협, 옥다정에겐 성공의 과정에서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부당하고 폭력적인 과거를 서사로 부여한다. 그리고 이 둘의 조합을 제목처럼 ‘욱씨 + 남정기’로 합쳐놓으면서 고구마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은 실력과 따뜻한 마음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설정이 현실을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드라마의 관심은 현실이 아니라 청중의 기대에 있기 때문이다. 실력만 있고 성격이 나쁘거나, 성격은 착한데 실력이 형편없다면 극 중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끌어갈 자질이 충분치 않다. 소위 ‘주인공의 자질’ 말이다.
‘착한 주인공’은 대중문화의 불문율과 같다. 과거에는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속 주인공은 멋진 외모와 함께 선한 인상을 가진 배우들 몫이었다. 모름지기 주인공은 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착한 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를 좋아하고 지지하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와 같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도 해당 인물이 못됐다면 (이기적이거나, 속물적이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다면) 관객들은 그를 좋아하기에 주저할 것이다. 시청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우리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의 진심과 노력을 이해한다. 대개 이야기는 꼬이고, 때로 주인공은 실패하거나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관객들은 주인공을 응원한다. 착한 심성의 주인공은 어떤 관점에선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그가 베푼 선행은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대중문화 속 주인공의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이는 착하고 성실한 자에게 행복한 삶이 보상으로 주어지길 바라는 우리 사회 집단의식의 투영이기도 하다.
물론 ‘새드엔딩’도 존재한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도 비극은 존재했으며,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시리즈도 있다. 하지만 비극 서사는앞서 언급한 ‘착한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비극은 인간을 복잡한 인물로 그린다. 주인공을 포함한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이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덜 착한’ 혹은 ‘욕망의’ 주인공을 자신과 사회에 비추어 참담한 비극을 피하고자 하는 교훈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해피엔딩’은 현실을 잊게 하는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새드엔딩’은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경고와 교훈을 제공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라. 등장인물 중 누구도 완벽히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불평등한 세상은 결국 각자가 욕망에 따라 파국으로 끝을 맺도록 이끈다. 그의 영화에서 파국이란 빗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만큼 자연스럽다.
나쁜 놈 전성시대
그런데 대중문화의 흐름을 보면, 언제부턴가 나쁜 놈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OCN 오리지널 드라마에서 시작해 영화로도 제작된 〈나쁜 녀석들〉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착하지 않으며, 이른바 ‘나쁜 놈 잡는 나쁜 놈’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를 대중들에게 알렸다.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나쁜 녀석들〉은 조금 껄렁하고 스타일리시한 경찰의 활약을 보여주었던 반면, 한국 드라마에선 과거 범죄자를 수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차별성을 보인다. 이 시리즈 포스터를 보면, ‘완벽한 사냥을 위해선 더 지독한 사냥개가 필요하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데,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전과자나 범죄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드라마 속 나쁜 녀석들은 겉으로는 나쁜 과거나 성향을 가지지만 속으로는 순수하거나 따뜻한, ‘아주 나쁘진 않은’ 녀석들로 그려지며 주인공이 되어 등장한다.
이 드라마 시리즈의 영화판인 〈나쁜 녀석들: 더 무비〉의 한 포스터에는 ‘사상 최악의 탈주사건 발생! 그들의 법 없는 검거작전이 시작된다!’라고 적혀있다. 악당을 잡기 위해서는 ‘법 없는’ 검거 방식도 허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법을 어기는 일을 개의치 않는 ‘위법적’ 방식이다. 전자는 사법적 체계 안에서 힘의 사용을 허용받은 집단이 나온다. 검찰, 경찰, 군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반면 후자는 법과 질서를 어기면서 힘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연상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tvN 드라마 〈방법〉은 정의로운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실현하는 ‘방법’의 아슬한 경계에 대해 묻는다. 여기서 ‘방법’은 사람의 손과 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저주 혹은 주술을 의미한다. 이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일 뿐이지만, 연상호 작가는 그 저주의 이름을 ‘방법’으로 부르면서 현실 속 정의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방법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다시 말해, 악을 징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디까지 가능한가 묻는 셈이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수단은 무조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사적 복수는 현대판 홍길동전인가
몇 해 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빈센조〉를 기억할 것이다. 배우 송중기는 멋진 ‘수트핏’을 뽐내며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고문변호사 빈센조 까사노 역을 맡았다. 자기 이익을 위해 불의를 일삼는 악덕 기업 바벨제약에 맞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금가프리자 상가와 입주민을 대신해 ‘독하게’ 싸워 복수해주는 내용이다. 이로써 박재범 작가는 전작인 〈김과장〉, 〈열혈사제〉에 이어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통쾌한 액션 ‘사이다’ 장르를 이어갔다. 이 드라마 속 빈센조는 초반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이익(상가에 묻힌 금괴)을 위해 싸운 것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대기업·정치인·법조인·언론인으로 이어진 ‘한국의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 드라마는 동안 외모에 선한 인상인 송중기가 ‘마피아 고문변호사’를 맡았다는 설정으로도 논란이 되었고, 복수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범죄나 폭력 등이 쉽고 가볍게 다뤄진다는 측면에서도 논란의 요소가 존재한다.
같은 시기에 방영된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힘없는 자를 위해 대신 복수를 하는 ‘사적 복수’라는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직접적인 복수와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풀어내기 위해서인지, 〈빈센조〉보다 악역 묘사가 훨씬 더 악랄해져야 했다. 법 밖에서 교묘하게 약자를 괴롭히는 나쁜 놈의 수위는 이전보다 더 개인적이고, 더 지독했다. 그럴수록 ‘사적 복수’가 더 통쾌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하는 나쁜 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귀신은 뭐 하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정의의 심판이라는 이유로 내려지는 처벌 수위가 상당히 폭력적인데도 청중들은 ‘저런 놈들은 당해도 싸지’라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민심이 이렇다면, 이런 현상은 가히 ‘현대판 홍길동전’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아 보인다. 사적 복수 열풍은 우리 시대에 정의 구현과 사적 복수를 대신 처리해주는 ‘의적 홍길동’을 대중이 원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 속 정의 추구
이런 배경에는 공권력을 향한 불신이 자리한다. 한국 역사에서 권력은 힘 있는 자의 편이었고 약자에게 유독 가혹했다는 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주장이 역사적 평가로서 진실인가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대중문화가 권력기관을 부정적으로 재현하는 부분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러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좁게는 권력기관에 대한 불신과 넓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주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런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현상에 대해 동시대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자리한다는 점을 자뭇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 대중문화에 ‘정의를 추구하는’(justice-seeking) 내용이 유독 많다는 평가는 사실일까? 〈뉴욕타임스〉 최상훈 기자는 ‘BTS에서 오징어게임까지: 어떻게 대한민국은 문화강국이 되었나’라는 기사에서 한류의 다양한 맥락을 소개하면서, 한국 문화의 특징을 풍부한 정서적 표현과 예민한 정치 문화적 대응으로 꼽는다.2) 최상훈은 오늘날 한류가 한순간에 생겨나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가 지나온 역사적 특수성(전쟁과 분단, 군부독재와 민주화, 경제적 급성장과 경제적 불평등 등)에 대중문화가 명민하게 반응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한국 대중문화는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차리는 ‘예민한 코’(a keen nose)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주로 사회 변화에 관련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3)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적 복수’가 흥행하는 사회,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지옥〉 등이 한류를 대표하는 사회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크 히어로는 없다
영웅을 뜻하는 히어로(hero)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나쁜 놈이 주인공인 경우, 혹은 자경단이나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에 ‘다크 히어로’(dark hero)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dark(어두운, 나쁜)와 hero(영웅, 주인공)가 합쳐진 신조어인데, 실제 영어권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악당을 의미하는 빌런(villain)이나 전형적인 영웅(주인공)과는 다른 인물로서 ‘anti-hero’ 개념을 사용한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베놈〉,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데드풀〉 등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높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특징은 주인공 설정이 정형화된 ‘슈퍼히어로’와 다르다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한국 콘텐츠와는 차이를 보인다. 간략히 비교하자면, 한국 대중문화에서 청중이 ‘나쁜 주인공’ 시각에서 불의한 권력과 체제에 함께 대항한다면, 미국 대중문화에서 청중은 악당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악당이라는 점에서 ‘anti-hero’(주인공)를 친근하게 여기게 한다.
이쯤에서 이번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한 시점부터 내내 마음 한편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문제적’ 영화 〈조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배트맨’의 악당 캐릭터인 조커(호아킨 피닉스)의 탄생 과정을 주제로 한 스핀오프 영화이다. 영화적 재미보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로 ‘유명한’ DC 코믹스의 확장 유니버스 영화답게 ‘조커’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에 집중하여 그가 왜 악당이 되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아서 플렉이 자신이 처한 ‘인생이란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로서 희극인(코미디언)이 되는 것마저 좌절되자, 부조리한 현실을 비웃는 희대의 악당 ‘조커’로 분신하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심지어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로써 이 영화는 청중에게 ‘악당 조커의 탄생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가, 아니면 사회에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영화 〈조커〉 그리고 소위 ‘사적 복수’가 대중문화에 유행하는 현상에 관하여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영화가 가진 ‘서사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 미디어라는 특성 혹은 한계에 관한 것이다. 먼저, 영화 속 주인공의 서사는 제작자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를 소비하는 청중은 영화가 재현하는 서사 외에 다른 관점을 알 길이 없다. 누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에 따라 청중의 반응은 달라지게 된다. 비단 〈조커〉뿐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던 나쁜 놈 잡는 나쁜 놈들을 우리가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그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업 영화라는 한계 속에서 안전장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쁜 놈이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인간적인 면과 선한 면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가 상대하는 악당(혹은 사회악)은 ‘죽어 마땅할 만큼’ 나쁘게 묘사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야기 속 사적 복수와 폭력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사실 청중들 가운데 조커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4) 그럼에도 사적 복수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하나의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습관은 과거나 지금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 다크 히어로를 말하기 전부터 거론되었던 오래된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영웅을 원한다. 특히나 세상이 어수선하고 적이 강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력한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전쟁 문화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스-로마 시기의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한 지배로 얻어진 ‘지배자의 평화’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슈퍼히어로의 원조 ‘슈퍼맨’은 냉전 체제의 산물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국가 연합은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강력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이 과정에서 적은 악마화되며 공포는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우리를 지키기 위한 힘은 강력할수록 좋은 것이 되었다.
‘폭력은 나쁘지만 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폭력은 정당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가리켜 ‘구속적 폭력’(Redemptive violence)이라고 한다. 구속적 폭력은 전쟁 문화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논리이다. 이는 힘 있는 자가 사회를 통치할 때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분단의 논리가 그랬고, 군사독재의 명분이 그랬으며,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사적 복수나 자경단 같은 또 다른 이름의 구속적 폭력을 지지한다.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처단하고, 그 자식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복수의 명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다. 중국 무협 소설이나 영화의 코드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상황에서, 한쪽 서사에만 집중하며 누군가의 복수를 통쾌하게 여기며 즐기고 있다. 그 강력한 힘이 다시 우리를 파괴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만일 지구 최강 슈퍼맨이 우리 편이 아니라 적의 편이라면?’ DC 코믹스의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무시해선 안 된다.
폭력의 사슬을 끊으려면
‘사적 복수’ 현상에 대한 또 다른 문제의식은 그것이 판타지이며 세속 문화의 특징과 한계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사적 복수(혹은 다크 히어로)의 대중문화가 제시하고 공유하는 세계관은 법과 이성이라는 세속 사회 틀 안에서 이뤄진다. 나쁜 놈을 잡기 위해 더 나쁜 놈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더 강력한 힘을 갖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적 복수는 판타지일 뿐이다. 만일 초법적 사적 복수가 가능한 사회라면 그곳이야말로 ‘힘센 놈’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다수의 ‘사이다’ 드라마가 재현하는 현실이란 공권력이 무너진 혹은 타락한 세상에서 법 밖에 있으나 여전히 ‘정의로운 영웅’을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영웅은 존재하기 어렵다. 또한 정의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호한 영역이다. 반면에 폭력은 여러 이름으로 반복된다.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한국 정치를 봐도 그렇다. 양당 모두 각자의 정의를 외친다. 국제사회는 또 어떤가. 각국의 이익이 곧 정의가 되고 이를 위한 강력한 힘이 곧 정의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선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면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대중문화 속 사적 복수가 고구마 같은 현실을 잊게 하고 통쾌한 사이다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복수의 복수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폭력으로 폭력을 맞서는 일은 쉽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복수는 쉽지만 용서는 어렵다. 세속 미디어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법과 이성의 논리로는 폭력을 멈추고 용서를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의 역할이다. 르네 지라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이 세상의 폭력의 사슬을 끊는 ‘마지막 희생양’으로 보았다. 어쩌면 대중문화 속 나쁜 놈 전성시대와 사적 복수 열풍은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비폭력과 용서, 정의와 사랑이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바람이 내재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