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불해수도(衆生不解修道)
중생은 도를 닦을 줄 모르니,
변욕단제번뇌(便欲斷除煩惱)
곧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
번뇌본래공적(煩惱本來空寂)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장도갱욕멱도(將道更欲覓道)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한다.
일념지심즉시(一念之心卽是)
한 생각 그 마음이 곧바로 이것인데,
하수별처심토(何須別處尋討)
무엇 때문에 다른 곳에서 찾는가?
대도효재목전(大道曉在目前)
큰 도는 눈앞에 밝게 드러나 있지만,
미도우인불료(迷倒愚人不了)
뒤집혀 헤매는 중생은 알지를 못하는 구나.
불성천진자연(佛性天眞自然)
불성은 타고난 그대로여서 자연스러우니,
역무인연수조(亦無因緣修造)
닦아서 만들 까닭이 없다.
우인탐착열반(愚人貪著涅槃)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하고 집착하지만,
지자생사실제(智者生死實際)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생사(生死)가 곧 실상(實相)이다.
중생여불무수(衆生與佛無殊)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으며,
대지불이어우(大智不異於愚)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네.
하수향외구보(何須向外求寶)
어찌하여 밖에서 보물을 찾으려 하는가?
신전자유명주(身田自有明珠)
자신 속에 본래 밝은 보배구슬 있는데.
정도사도불이(正道邪道不二)
바른 길과 삿된 길은 둘이 아니고,
료지범성동도(了知凡聖同途)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을 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오본무차별(迷悟本無差別)
미혹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생사일여(涅槃生死一如)
열반과 생사(生死)가 하나로써 같구나.
무유일법가득(無有一法可得)
얻을 수 있는 법(法)은 하나도 없으니,
소연자입무여(翛然自入無餘)
자재하게 저절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네.
✔ 도를 닦으려는 많은 이들은 번뇌가 도의 장애라고 하니, 번뇌를 끊어 없애려고만 한다. 그러나 번뇌는 끊으려고 애쓴다고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번뇌를 끊어 없애려는 의도가 바로 번뇌이기 때문에 더욱더 번뇌는 치성할 뿐이다. 끝나지 않는 번뇌와의 전쟁에 공연히 힘쓸 필요가 없다.
그냥 번뇌를 내버려 두라. 번뇌가 올라올 때, 생각이 올라올 때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이 올라오도록 허용해 주라. 그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인연 따라 그저 올라올 뿐. 그냥 내버려 두되, 번뇌를 따라가거나, 번뇌에 끌려가지만 말라. 번뇌를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그냥 올 때 오도록, 갈 때 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
바로 그 때 번뇌의 근원, 번뇌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번뇌는 실체가 아니며, 나를 해치거나 괴롭힐 아무런 힘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전부다. 문제는 거기에 내가 공연히 의미를 부여하고, 붙잡고 늘어지면서, 좋다 거니 싫다 거니 하고는 취사선택한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올라오는 번뇌를 대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라. 그 때 번뇌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번뇌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번뇌가 본래 없음을 깨닫게 되면, 저절로 번뇌는 사라진다.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더라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번뇌의 진실과 마주할 때 도가 드러난다.
번뇌와 싸워 이겨야지 도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번뇌를 허용해 주었는데 도리어 도가 드러난다. 도는 본래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있던 도를 보지 않고, 곁에서 잠깐 올라왔다 사라지는 아지랑이 같은 번뇌를 보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에 도와 함께 있던 번뇌만이 보였던 것이다.
본래 우리는 도를 가지고 있었다. 도를 가지고서 도를 찾아 온 것이다.
한 생각이 올라온다. 바로 그것이 곧바로 도다. 파도가 곧바로 바다인 것과 같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생각이 올라왔을까? 그 생각의 출처가 어디인가? 그 생각은 어디에서 생겨났고,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 색즉시공(色卽是空), 생각이 올라온 바로 그 자리에 자성, 불성, 깨달음, 마음, 도가 있다.
큰 도는 눈앞에 밝게 드러나 있지만, 중생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불성은 본래 타고난 천진한 자연 그대로의 본래의 성품이니, 이미 있는 것이어서, 다시 닦아서 만들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얻고자 노력하고 애쓰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생사(生死)가 곧 실상(實相)이요, 지금 이대로의 삶 그대로가 완전한 실상이다. 한 생각 올라오는 것도 실상이고, 숨을 쉬는 것도 실상이며,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이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그대로 실상 아님이 없다.
중생이 곧 부처요, 어리석음이 곧 지혜다. 파도가 곧 바다다. 그 둘은 전혀 둘이 아니다.
어찌하여 밖에서 보물을 찾고자 하는가? 자기 안에 본래 자성이라는 밝은 보배구슬이 있다.
바른 길과 삿된 길이 둘이 아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범부와 성인은 둘이 아니다. 그 모든 양 극단이 곧 하나의 부처다. 일불승(一佛乘)이며, 불이법(不二法)이다.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이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이 우주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벌이는 한바탕 꿈판이 전부 낱낱이 법 아닌 것이 없고, 실상 아님이 없다. 그러나 그 법은 얻고 잃을 것이 없다. 본래부터 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얻고자 할 것도 없고, 얻을 수 있는 법도 없다.
삶은 지금 이대로 자재하여 저절로 무여열반(無餘涅槃)일 뿐이다. 중생의 생각에서만 환영의 괴로움이 펼쳐질 뿐, 그 괴로움의 본체를 보면, 텅 비어 공하고, 모든 것은 문제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본래 자재한 무여열반이었음이 확인된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