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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추억
이 문 열
듣기에는 좀 이상하겠지만,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내게 무슨 특별한 재간이 있어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 냈다거나 내과의(內科醫)로 흉부 절개 수술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았다. 다름 아닌 할머니의 가슴으로, 그때 할머니가 무슨 미닫이를 열듯 누렇고 엷은 살가죽을 열어젖히자, 가장자리부터 푸르스름해져 들어가 심장께서는 온통 검푸르게 되어 있는 그 속이 훤히 보였다.
“이건 네 할아버지 때문이고, 이건 네 아버지 때문이란다.”
할머니는 청회색(靑仄色)으로 푸석푸석하게 삭아 있는 곳과 검푸르게 짓물러 있는 곳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신기하여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그렇게 일러 주었다. 그때는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조리에 닿는 말로 여겨진다. 다 같이 요절(夭折)이라 불릴 수 있는 죽음이고, 또 지아비와 자식을 정(情)의 크기로 구분할 수 없기는 해도, 둘의 죽음에는 어느 정도 느낌을 달리하는 구석이 있다. 할아버지는 서른아흡에 병석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신데 비해, 아버지는 스물아홉에 전쟁으로 생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십 년 가까이나 병석에서 시름시름하던 남편이 기어이 눈을 감은 것이 그때로부터 삼십여 년 전이라면, 홀몸으로 기른 유복자가 다시 돌 지난 손자와 스물일곱의 며느리를 남겨 놓고 총알을 맞아 벌집처럼 된 시체로 돌아온 것은 잘돼야 그때로부터 두세 해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기억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믿겠다는 듯 왼고개를 틀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먼저 내세우는 근거는 할머니에게는 도무지 맨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일 만큼 신통한 재주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다음 돌려 생각해서, 할머니가 나를 잡고 가슴속의 한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을 어린 내 기억이 잘못되어 그렇게 머리 속에 남게 된 것이라고 풀이해 보아도, 못 미더워하는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네 살 때이니, 그 일은 아무리 늦춰 잡아도 내가 네 살 때의 일이 되는데, 그 나이는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펼쳐 보일 상대로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라는 이유였다 더구나 설령 할머니가 어린 나를 잡고 넋두리 삼아 그런 말을 했다 해도 말귀조차 잘 알아듣지 못할 어린 것이 그토록 뚜렷한 기억을 지닐 수 있을 리 없다는 주장에 부딪치면 나마저도 그 기억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판이었다.
그 바람에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무렵 하여 처음 떠오른 그 기억은 이미 한 거짓말쟁이로서의 평판을 얻고 있던 나를 한층 불리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이답지 못한 잔망스러운 거짓말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기껏 나를 잘 보아주려고 애쓰는 쪽도 그 기억만은, 나를 업어 기르다시피 한 고모가 누군가와 할머니 얘기를 하는 걸 어깨너머로 들은 내가 머릿속에서 꾸며 낸 것 이상으로는 생각해주지 않았다.
생각하면, 그 전에 이미 나를 억울한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린 원인도 태반은 그 같은 기억에 있다. 몽롱한 유년의 의식을 뚫고 섬광처럼 지난날을 비춰 주는 기억이 있어, 마치 오래전에 가지고 놀다 애석하게도 잃어버린 귀중한 노리개를 다시 찾은 것과도 같은 기분으로 그것을 말하다 보면, 열에 아홉은 거짓말쟁이로 몰리게 되고 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일이 내 기억에만 존재하는 데서 빚어지는, 애꿎은 불상사였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 사실과 충돌하고, 그래서 가장 효과적으로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낙인을 받게 한 것은 6·25를 앞뒤로 한 기억들이다. 이를테면, 그 무렵 우리 마을 부근의 산에 겨울 속옷 솔기의 서캐보다 많았던 산빨갱이가 그렇다. 사람들은 그 산빨갱이만 잡으면 목을 뎅강뎅강 잘라 개울가의 바위 위에 나란히 얹어 두거나 어떤 때는 그들을 지서 앞 대추나무에 달아매 놓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나는 틀림없이 조무래기 친구들과 겁먹은 어른들 틈 사이로 그 모든 광경을 재미나게 보았는데, 나중에 신나게 추억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일은 전혀 없었던 걸로 되어 있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그때 나와 함께 구경했던 아이들까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잡아떼는 데는 정말 허파가 뒤집힐 노릇이었다. 나만 턱없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싫어 그 아이들의 기억을 깨우쳐 주려고 자세하고 생생하게 내 기억들을 늘어놓다 보면 나만 한층 심한 거짓말쟁이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내 말이 어른들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돌아오는 것은 잘해야 꾸지람이었고 잘못되면 눈에 불이 번쩍할 정도의 따귀였다. 단 한 사람 친척 아저씨가 비교적 자상하게 내 잘못된 기억의 원인을 분석해 준 적이 있는데, 그것도 내 말에 붙은 거짓이란 누명을 벗겨 주기에는 큰 도움이 못 됐다. 그 무렵 개울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면 곧바로 배를 따서 물가 바위에 널어 말리던 일이나 복(伏)날 지서 앞 대추나무에 개를 달아매고 때려잡던 것과 산빨갱이에 대한 어른들의 불온한 쑤군거림이 결합된 내 망상에 불과하다고 한 풀이가 그랬다.
모자(帽子) 일도 그렇다. 6·25를 앞뒤로 하는 내 기억에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게 있다. 아이들은 보꼬보시(보온모)라는 고깔 비슷한 모자를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밤낮 쓰고 있었고, 남자 어른들은 허름한 중절모나 갓, 빵떡모자, 개똥모자, 털모자가 아니면 경찰모나 철모를 쓰고 있었다. 여자 어른들도 한결같이 남바위나 풍뎅이, 고깔 따위를 쓰고 있었고, 그것이 없으면 처네나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양동이나 옹배기, 소쿠리, 독 따위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한결같이 입성들은 시원치 않았다는 기억이었다. 여자들은 젖가슴과 아랫도리 정도를 가리거나 말거나 했고, 남자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발가벗고 돌아다녔다는 식의 기억이 그랬다. 하지만 모자 얘기까지는 간신히 참고 들어 주던 사람들도 옷 얘기가 나오면 어림없다는 투로 왼고개를 저었고, 구체적인 증거를 대도 기껏해야 웃
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내가 처음 그 기억을 되살려 말하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이 가장 소리 내어 웃던 것은 방위군 소위 얘기였다. 방위군 소위란 6·25 이듬해 우리 마을 서당 건물에 주둔했던 방위군 소대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는 늘상 반짝이는 철모를 쓰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알몸이었다. 언젠가 나는 서당 마루에 앉아 있던 그의 거무튀튀한 남근(男根) 위에 쇠파리 두 마리가 앉아 피를 빨아 먹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안장 없는 말을 타면 불알 두 쪽이 정확히 말잔등 양쪽으로 갈라져 축 드리워지는 걸 신기하게 여기곤 했는데 ―. 내 얘기가 거기에만 이르면 사람들은 왁자한 웃음과 함께 둘 중의 하나로 나를 결론지었다. 맹랑한 허풍쟁이 아니면 머리에 적잖은 이상이 있는 꼬마로.
그 밖에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한 것은 아버지의 승천이다. 아버지가 총에 맞아 벌집처럼 된 시체로 돌아왔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일 뿐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은 다르다. 그는 선산(先山) 발치에 있는 새 무덤가에서 하얀 모시 도포 차림으로 학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나는 분명 그 신비한 광경을 흐느끼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보았는데, 나중에 다시 그걸 기억해 내 말하자 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내가 묘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큰집 마루에 걸려 있던 사진틀 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아버지가 날아갔다고 주장하는 선산 발치에는 바로 아버지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잘해야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 무덤을 찾곤 하던 기억과 그 사진 속의 모습을 결합한 것일 뿐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는데, 그나마도 두 번 다시 그 기억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엄격한 주의와 함께였다.
하지만 지금껏 돌아본 기억들은 들은 사람들이 그래도 비교적 조용히 넘어간 편에 속한다. 어린 날의 기억 가운데는 정말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뒤 스스로 철회하거나 포기하도록 강요된 기억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 가운데 하나가 납자와 여자가 붙어 있던 기억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이 항상 남녀 둘씩 붙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기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 그랬다. 어느 날 우연히 그걸 떠올리자 나는 갑작스레 그 까닭과 시기가 궁금해져서 가장 기억이 생생하고 증거도 쉽게 댈 수 있는 사촌 형수에게 물어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내게 아직 뒷날 같은 표독을 부리지 않고 있었다.
“새 아지매, 새아지매는 언제 큰형과 떨어졌노?”
“아이, 데련님, 그기 무슨 말입니꺼?”
사촌 형수는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묻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전에는 큰형님하고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떨어졌노, 이 말이라.”
“별소릴 다 하네예, 지가 언제…….”
“새아지매도 참……. 이래 붙어 가지고 누워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안 했나?”
나는 마주 보고 끌어안는 시늉까지 해 보이며 물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지 사 년이나 되었고, 말하는 나는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였지만, 웬일인지 사촌 형수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러나 나를 흘겨보는 두 눈에는 왠지 섬뜩한 악의가 느껴졌다. 그 눈길이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내친김이라 계속했다.
“둘이 아래위로 붙기도 하고 옆으로도 나래비로(나란히) 붙어 자기도 하고 들에 가 밭을 매거나 물도 긷고 안 했나 말이다. 그런데 언제 떨어졌노?”
“데련님, 그런 소리 하몬 믄써요, 다시 그러매이(그따위) 소리 하믄 형님한테 일러 시껍시킬 끼래요.”
사촌 형님한테 이른다는 품이 조금도 엄포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몰찼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와 나는 아직 큰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을 때라 사촌 형님은 집안의 유일한 남자 어른이었는데 내게는 특히 엄했다. 그러나 사촌 형님이 무서워 더 이상 캐묻지는 못해도 궁금함은 여전히 남아 있어 다음부터는 사촌 형수 말고 또 남자와 붙어 있던 걸로 기억되는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당황해하거나 성내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은데도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 발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드디어 나는 호된 꼴을 당하고 말았다. 또 누군가 동네 새댁네를 붙잡고 그걸 묻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했다. 어디선가 사촌 형님이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힘껏 따귀를 올려붙인 것이었다.
“요, 배라묵을 놈,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 카디 니가 똑 글쿠나 예라이, 요 못되 빠진 노무 짜슥…….”
그리고 그길로 집에 끌려온 나는 싸리 회초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맞고 내가 전에 본 것이 거짓이라는 걸 자백한 뒤에야 그 이해 못할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안겨 준 또 다른 기억이 바로 문둥이에 관한 것이었다. 산빨갱이들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우리 마을 부근에 문둥이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참꽃이나 송기를 꺾으러 가까운 산에 가려고 해도, 산딸기나 머루를 따러 얕은 골짜기로 들어가려 해도 문둥이 때문에 안 되었고, 들에서의 밀 서리나 감자삼곳(감자서리)조차 문둥이 때문에 마음 놓고 못 갈 지경이었다. 심하게는 텃밭의 보리 이랑에도 문둥이가 어린 우리의 간을 빼 먹으려고 숨어 있어, 그런 곳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없어진 아이가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들에 나간 사촌 형님 내외를 따라 나갔다가 심심해서 가까운 곳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한군데 막 익기 시작하는 보리밭 고랑에서 사람의 기척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 역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인기척에는 어딘가 두려움을 억누를 만한 어떤 자극적인 음향이 섞여 있었다. 마침 부근에는 들킬 경우에는 문둥이에게 잡히지 않을만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소리나는 곳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헌 원두막이 하나 있어 나는 그리로 올라가 보았다.
틀림없이 문둥이였다. 한 깍지 둥치 같은 문둥이가 어린 처녀 아이를 잡아다 놓고 간을 파먹고 있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처녀 아이는 괴로운지 몸을 비틀며 신음하고 있었는데 반나마 벗겨진 가슴께에는 정말로 피가 벌겋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나는 서둘러 원두막을 내려왔다. 그런데 전해에 묶었던 새끼가 삭아 있던 탓인지, 아니면 당황한 내가 조심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갑자기 의지하고 있던 빗대가 무너져 내리며 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소동에 처녀 아이의 간을 빼 먹던 문둥이는 나를 잡더니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얼러댔다.
“니 웃마(웃마을) 살제? 만약 이 얘기 남한테 카믄 느그 집에 찾아가 간을 빼 묵을 끼다.”
그 바람에 새파랗게 질린 채 도망쳐 나온 나는 정말 아무에게도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때 꿈을 꾸어 가위눌린 적은 있어도 결국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잘해야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찌 된 셈인지 사촌 형님에게 호된 꼴 당하기를 전후하여 불쑥 그 기억이 떠올랐다. ‘붙어 있다’는 데서 온 연상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장터에서 그때 문둥이에게 간을 뽑혀 죽은 줄 알았던 그 처녀 아이를 다시 본 때문이었다.
“거참 이상타…….”
나는 그 깍지 둥치 같은 문둥이의 위협도 잊고 빤히 그 처녀 아이를 쳐다보았다. 처녀 아이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고무신인가 운동환가를 흥정하다가 그만두고 돌아서더니 아프리만큼 내 손목을 꼭 쥐고는 장터 구석으로 끌고 갔다.
“여쯤 온나 보자. 니 머가 이상하노?”
장판을 약간 벗어난 곳에 이르기 무섭게 그녀가 날 선 눈길로 나를 다그쳤다. 멀지 않은 곳에 장꾼들이 우글거린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어 여자인 그녀를 깔본 탓인지 나도 별로 겁을 먹지 않았다.
“니는 간이 빼 묵히고도 사나?”
“뭐시라?”
“니 전에 보리밭에서 문둥이한테 간이 안 빼 묵힛나? 그런데 어예 살았노?”
“뭐라꼬? 니 그거 언제 봤노? 한 번 더 그따우 소리 해 봐라.”
별 악의 없이 한 말에 눈물이 쑥 빠지도록 꼬집히자 나도 화가 났다.
“이 가시나가 사람은 왜 꼬집노? 놔라, 놔. 간은 문딩이한테 빼 묵히고 애맨 내한테 와 지랄고?”
“그래도, 에이 요놈의 머시마…….”
그녀가 다시 알밤을 먹이고 드디어 울음보가 터진 내가 장바닥에 나뒹굴며 소리를 치고 ㅡ 그러는데 갑자기 우리 마을 청년들이 나타났다.
“처녀가 와 이리 부랑시럼노? 시집 몬 갈라 카나? 장바닥에서 알라 붙들고 먼 시비를 이래 하노?”
“와따, 그 처자한테 장가들라 카믄 당수부터 먼저 배워야 안 되것나? 사람 치는 재주가 여간 아닌가 베…….”
그들은 나를 구한다기보다는 그걸 구실로 그녀를 희롱하려 들었다
그녀도 그들이 나타나자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시 또 그러매이 소리 해 봐라. 입을 세 발이나 째 놓을 끼다.”
그러면서 나를 흘겨보는 눈길이 다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나는 분이 꼭두까지 찬 뒤였다. 거기다가 든든한 후원자들까지 있으니 거리껄 게 있을 리 없었다.
“오이야, 이 가시나야, 간은 문딩이한테 빼 묵히고 내한테 암만캐 봐라 누가 겁낼 줄 알고…….”
그런데 그 말이 그 끔찍한 풍파를 몰고 올 줄이야. 내 말을 재미있게 생각한 마을 청년들이 그 까닭을 묻고, 나는 서슴없이 본 대로를 털어놓고 그들에게서 빠져나온 지 사흘쯤 된 뒤였다. 그때 이미 집과는 정이 떨어져 저물도록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니 어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눈물을 찍고 있고, 사촌 형님만이 성난 얼굴로 웬 억세 보이는 노파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바로 조노맙(저놈아입)니더. 그 못된 소문 내고 댕긴 기…….”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내가 쭈뼛쭈뼛 사립께로 들어서자 사촌 형님이 하던 얘기를 멈추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금세 도끼눈이 된 노파가 왁살스레 나를 움키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 다리로 양팔을 눌렀다.
“요놈의 자슥, 요런 망종은 입을 삼 발이나 째 놔야 된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두 손의 집게손가락을 내 입에 집어넣더니 서로 반대 방향이 되게 힘껏 잡아당겼다 놀란 가운데 입가가 뜨끔하며 곧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입가가 터진 것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질린 나머지 울음조차 크게 울지 못하는 나를 남겨 두고 우르르 달려가 마당 구석에 놓인 삼촌의 지게에서 시퍼런 낫을 빼 들더니 다시 돌아와 나를 올라탔다.
“이놈, 바른대로 대라, 참말로 우리 은님이가 산판 인부 놈하고 붙어묵었나? 참말로 보리밭에서 붙어묵는 거 니 눈까리로 봤나?”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에다 금방이라도 내리찍을 듯 낫을 겨누는 바람에 나는 이미 반 넋이 나간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기나긴 악몽에 빠져 있었다. 무엇 때문인가 마루 끝에서 훌쩍이고 있던 어머니가 그제야 말리려고 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 놀랜다꼬? 야, 이 호양년아, 아 놀래는 거는 대단코 우리 은님이 신세 망화(망하게 해) 논 거는 아무치도 않단 말가? 예이 더러븐 년, 하기사 그 밑으로 빠진 새끼가 오직 할까마는 글티라도(그렇더라도) 낯짝이 있으믄 그런 소리는 몬 할 끼다.”
노파가 허옇게 거품을 뿜으며 그렇게 퍼부어 댔고, 사촌 형님도 한통속이 되어 되레 어머니를 윽박질렀다.
“숙모는 고마 가만있으소. 야 못된 병은 이래야 고칩니더. 그보담은 이녘 행신이나 조심하소.”
그러자 어머니는 허물어지듯 푹석 마당에 주저앉아 눈물만 줄줄 흘릴 뿐 말려 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바람에 속절없이 그 노파의 눈먼 증오에 맡겨진 나는 마침내 정신을 잃고서야 그 노파의 오금 사이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사흘을 앓고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급속히 말을 잃어 갔다.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대개 자기가 본 것이나 기억하는 것에 관해서이기 마련인데, 그 두 번의 혹독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기억에 자신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그 뒤 나는 두 번 다시 내가 본 것이나 기억하는 일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기억이 둘 있다. 그 하나는 어머니 역시 문둥이에게 간이 뽑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십 년 뒤에나 만날 아내의 얼굴을 그때 이미 보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문둥이에게 간이 뽑힌 것은 내 입이 찢어진 지 얼마 뒤의 일로, 그때 나는 공연히 겁이 나 먼발치로 보고 도망쳤는데, 결국 어머니는 그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당(堂)집에서 아랫도리로 피를 한 말이나 쏟고 죽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게 문둥이에게 간을 뽑힌 탓이라고 사촌 형님에게 일러 주고도 싶었지만, 또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라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 아내의 얼굴을 그때 이미 보았다는 것은 그 시절 우리에게 떠돌던 미신과 관계가 있다. 밤중에 뒷간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장차 맞이해 살 색시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미신인데, 어머니가 죽은 그해 고모마저 시집을 가서 여자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운 나머지 진작부터 앞날의 아내를 궁금히 여기던 나는 뒷간에 숨겨 간 거울 조각 속에서 정말로 뒷날의 아내를 보았다. 지봉 없는 뒷간의 으스름 달빛 아래서, 어딘가 낯익은 것같기도 하고 생판 낯설기도 한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걸 보고 나는 놀라 들고 있던 거울 조각을 타고 앉은 뒷간 널판 사이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더는 허풍쟁이나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끝내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날의, 어떻게 보면 허황되고 어떻게 보면 하찮은 추억에 대한 회상이 너무 길었다. 그러나 당신들, 나를 재판하기에 앞서 정신 감정부터 먼저 실시하고 있는 당신들에게는 어쩌면 그것들이 뒤에 있을 내 진술보다 더 소중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리학인가 뭔가 하는, 인간의 내면을 분석해 내는 학문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사소한 어린 날의 체험이 뒷날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 나는 점점 더 한심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고단해지기 시작한 우리 모자(母子)의 더부살이였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있을 때는 나를 마을의 천덕구니로까지 만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바람막이마저 없어져, 나는 큰아버지도 없는 큰집의 달갑잖은 군식구로서 노골적인 천대 아래 놓이고 말았다. 자기의 혈육들에게마저 미움 받는 열 살의 고아를 이웃의 누군들 예뻐해 주겠는가.
거기다가 나를 한층 그들의 멸시와 학대 속에 빠져들게 한 것은 문둥이 사건 이후 생겨난 자폐 증상과 무력감이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한 불신 내지 공포는 급속히 다른 방향으로 번져 갔다. 그 하나가 학교 공부였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첫째, 둘째를 다투던 내 성적은 3학년 때부터 곤두박질을 시작해 결국은 꼴찌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만들고 말았다. 거기에까지 기억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번져 방금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나 읽은 책 내용도 자신 있게 발표하거나 시험지에 써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린다는 것은 거의 말로 이루어지는데, 이미 말했듯이 기억에 대한 자신을 잃자 남과 어울려 말하기가 두려워진 탓이었다.
만약 그 둘만 아니었더라도 ― 다시 말해 내가 학교 공부는 꼴찌인 주제에 틈만 나면 으슥한 곳에 숨어 들어가 멍청하게 앉아 있는 버릇만 없었더라도, 사촌 형님은 하나뿐인 사촌 동생에 대해 최소한의 의무는 다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직 분가(分家)도 하기 전에 죽은 탓에 큰아버지가 고스란히 물려받은 할아버지의 재산 가운데는 분명 내 몫도 약간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고단하고 서럽기는 해도 그것만으로 어린 나를 무턱댄 가출(家出)로 내몰 만큼은 못 되었다. 나를 열네 살의 나이로 그 마을을 등지게 하고, 마침내는 이 길로 들게 한 데에는 또 하나의 섬뜩한 추억이 있다. 폭풍처럼 내 어린 영혼을 뒤흔들고 짓이겨논 아버지의 숨겨져 왔던 죽음의 진상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어른들의 설명은 전쟁 통에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당연히 어디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내 물음에 대한 어른들의 대답은 잘해야 나무람 섞인 침묵이었고, 심하면 눈흘김과 꾸중이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내 멋대로의 상상에 맡겨지게 돼 버렸는데, 그게 탈이었다. 나중에 초등학교에 들어
가 배우게 된 6·25에 대한 반공 독본적인 지식과 비록 어른들에 의해 부인되기는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때껏 믿음으로 살아 있던 아버지의 승천이 결합되어 엉뚱하게 화려한 신화로 조작된 까닭이었다. 즉, 아버지는 용감한 국군 아저씨로서 괴뢰군을 무찌르다가 총을 맞고 집으로 돌아와 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는 줄거리였다. 나중에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부분은 워낙 믿는 사람이 없어 곧 삭제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내 상상력이 닿는 한의 화려한 신화로 재생된 아버지는 내가 완전히 말을 잃기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조무래기 급우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아무런 반대의 근거도 비판의 능력도 갖지 못한 아이들이 곧이곧대로 내 말을 믿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어낸 아버지의 무용담을 신나게 떠들 때면 반드시 거기에 맞서 자기 아버지의 얘기를 들고 나오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용감한 국군 아저씨는 아니었지만 역시 공산당과 대항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둔 김정두란 아이였다. 하지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뿐 나머지는 내 아버지의 신화와 상대가 못 돼 언제나 한편으로 몰리곤 했는데, 내가 말을 잃은 뒤로는 6·25 얘기라면 혼자 도맡아 신바람을 내게 되었다. 마치 그동안 나에게 가리워 빛을 보지 못했던 결 한꺼번에 보충하려는 듯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5학년 때인가의 6·25 날 드디어 그 아이는 공격으로 나왔다. 이미 말을 잃은 뒤라, 식이 파하기 무섭게 학교를 빠져나오는 나를 한 떼의 아이들을 거느린 녀석이 불러 세운 게 그 시작이었다.
“야, 이누마야, 니 거 쫌 섰그라 보자.”
나는 공연히 주눅이 들어 굳은 듯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한바탕 자기 아버지의 얘기를 신나게 떠들어 댄 덕에 또래의 작은 영웅이 되어 내게 다가온 녀석의 얼굴에는 웬일인지 전에 보지 못하던 자신만만함과 증오가 떠올라 있었다.
“니, 전에 느그 아부지가 용감한 국군 아저씨였다꼬 캤제?”
그런 녀석의 목소리에도 전에 없던 적의와 이죽거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괴뢰군 수백 명을 혼자서 쏴 죽있다 캤제?”
녀석이 흥, 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역시 내 입으로 한 적이 있는 소리라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녀석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대뜸 내 엉덩이에 발길을 올려붙이며 으르렁 댔다
“요노무 새끼, 어따 대고 거짓말고, 순 빨갱이 노무 새끼가…….”
“뭐라꼬?”
그제야 나는 아픈 것도 잊고 항의 섞인 어조로 되물었다. 될 수 있으면 그와의 시비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 말만은 도저히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녀석이 작은 악마처럼 이죽댔다.
“빨갱이도 일마, 숭악한 산빨갱이였다 카드라.”
“누가 카드노?”
“우리 삼촌이 다 캐 주드라. 그래 가주고 애맨 사람 마이 쥑였다 카드라. 그라고, 일마…….”
그러면서 녀석은 어느새 주먹을 날려 충격으로 멍해 있는 내 콧잔등을 호되게 쥐어박으며 내뱉었다.
“우리 아부지도 일마, 바로 느그 아부지 패한테 죽었다 카드라. 그란데 머라꼬? 용감한 국군 아저씨랬다꼬?”
“참말가?”
나는 쏟아지는 코피를 닦으려고도, 다시 정강이에 떨어지는 발길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되물었다. 사실 진작부터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몇 가지 석연찮은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내 물음을 받은 어른들의 태도나, 이따금씩 나를 쓸어안고 우시면서 곁들이던 어머니의 넋두리 같은 것 외에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어른들의 수군거림을 엿들은 것으로, 어쩌면 내가 그토록 대단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미화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이미 그런 그들의 태도에서 느낀 어떤 불안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느그 형님도 내가 그걸 물으이 암 말도 안 하고 고개만 수그리드라. 니도 집에 가 함 물어봐라, 일마.”
그러자 나는 갑자기 맥이 쑥 빠졌다. 이상하게도 나 또한 전부터 그 모든 것을 뚜렷이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바람에 말없이 코피만 닦고 있는 나를 녀석은 몇 번이고 거푸 세찬 발길질을 한 뒤에야 돌아갔다.
“이누무 새끼, 한 번만 더 고따우 가짓말 해 봐라, 빼당구를 확 추려 뿔 끼다.”
하지만 더 지독한 것은 사촌 형이었다.
“너 아부지가 죽인 기 어디 가들 아부지뿐인 줄 아나?”
내가 집으로 돌아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숨김없는 증오를 드러내며 덧붙였다.
“저쪽뿐이 아니라. 산에 들어갈 때 이 마(마을)에서 델꼬 간 여섯도 결국 하나또 안 살아 왔으이 너 아부지가 죽인 택이고, 우리 아부지가 쉰도 못 돼 돌아가신 것도 그 꼴난 동생 때매 골빙 든 탓이라. 그뿐가? 나도 젊디젊은 기 비만 오믄 뼈당구가 쑤시 못 산다.”
사실 그 말은 열두 살의 아이에게는 얼른 이해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신통하게도 내게는 단번에 모든 게 뚜렷해졌다. 그리고 그 끔찍한 진상은 그러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그곳에서의 생활을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하기를 거부한 기억은 학처럼 푸른 하늘로 솟아오른 아버지였다. 그가 다시 학처럼 내려앉아 서러운 나를 구해 주는 꿈이 나날이 더해 가는 냉대와 멸시를 견디게 해 주는 유일한 힘 이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서러움과 미움의 그 마을을 떠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봄이었다. 형편없는 내 졸업 성적이 사촌 형에게 자연스러운 구실을 주어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어린 나무꾼이 된 나는 어느 날 지게를 벗어 동구 밖 당나무에 걸어 두고 아지랑이 피는 신작로를 따라나섰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지만 어디를 가도 그 마을만 못하지는 않으리란 생각에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그 뒤의 고달프고 쓰라린 삶은 차라리 당신들의 조사가 더 자세할 것이다. 구걸, 고아원, 도망, 구두닦이, 버스 차장, 트럭 조수 ― 대충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어 갔다. 스스로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발전의 포기와 헤어날 길 없는 무력감은 그동안에도 나의 삶을 비슷한 경우의 아이들보다 몇 배나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열아홉에 트럭 조수가 된 것을 계기로 나는 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기계였다. 다른 모든 기억과는 달리 그것에 대한 기억만은 아무의 시비나 방해도 받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변하는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그 기억을 믿게 됨에 따라, 차츰 그것들은 지식으로 쌓여 가고, 힘으로 변해 나를 인생의 밑바닥에서 조금씩 끌어올렸다.
군대에서 운전면허를 따고, 제대하자마자 이삿짐 센터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으며, 다시 중장비 기술 학원을 거쳐, 스물여덟에는 어엿한 중장비 기사로 한창 성장 중인 어떤 건설 회사의 불도저를 몰게 됨으로써, 나는 일단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어린 날 고향 마을에서 받았던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되어 그런 외형적인 발전에 보조를 맞추었다. 크게 배운 것은 없어도 그럭저럭 생활은 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약간 내성적이긴 하지만 옛날의 자폐 증상이나 무력감과 열등감은 거의 자취를 감춘 청년으로 변해 간 덕분이었다.
그러던 내가 다시 한 번 지난날의 상처로 괴로움을 받은 것은 조금 늦어진 결혼 초가 된다.
그렇고 그런 여자들과의 길고 짧은 몇 번의 동거 끝에 내가 드디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상대는 단골 이발소의 면도사 아가씨로, 우리 결혼은 육 개월의 연애 끝에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첫날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린 날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이십여 년 전 뒷간 으스름 속에서 거울 조각을 통해 보았던 어떤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기억 자체가 믿을 수 없다는 결 알면서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얼굴과 신부의 얼굴이 조금도 닮지 않은 걸 느끼자 문득 내가 아내를 잘못 고른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까닭 모르게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래잖아 아내의 얼굴에서 발견한 어떤 닮은 점으로 그 예감을 일찌감치 털어 버릴 수 없었던들, 우리들의 결혼 생활은 그 터무니없는 기억 때문에 진작부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내의 얼굴에서 옛날 거울 조각 속의 얼굴과 닮은 점을 찾아낸 것은 분방했던 신혼 초의 방사(房事) 중이었는데, 그 절정의 순간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아내의 표정이 바로 그랬다.
그 밖에 또 하나 잊고 있던 어린 날의 상처를 들쑤신 것은 결혼 이듬해에 계획했던 나의 중동(中東) 취업이었다. 마침 내가 소속해 있던 건설 회사가 사우디아라비아 쪽에서 큰 공사 하나를 따내 동료들 간에 중동 바람이 불자, 결혼한 지 겨우 일 년밖에 안 된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나도 어려운 결심으로 취업 신청을 했다. 이미 태어난 큰아이로 다급해져 있던 내게 짧은 시간에 목돈을 쥘 수 있는 것은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원 조회
에서 걸려 모처럼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인, 강도, 도둑, 방화, 사기 ―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범죄보다 빨갱이란 것을 더 끔찍한 죄로 알았던 어린 날의 단순한 이해가 어른들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살인도 십오 년만 지나면 벌을 받지 않는다는데 단순히 빨갱이의 아들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삼십 년이 지난 날까지 불이익을 입어야 하다니. ― 하지만 다행히도 그 문제 역시 이듬해에 해결되고 말았다. 당신들도 잘 아는 재작년의 연좌제 폐지가 그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어두운 과거와는 작별이라는 기분으로 나는 중동으로 갔다. 그 흔해 빠친 중동 얘기는 그만두자. 어쨌든 나는 그곳에서 일 년을 뼈 빠지게 일해 거의 천만 원 가까운 돈을 아내에게 송금했다. 아내는 꼬박꼬박 답장을 해 마지막 편지는 이제 조금만 더 보태면 변두리에 이십 평 아파트 한 칸은 장만할 수 있으리라고 알려 왔다. 그때 마침 회사에서도 지난해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일 년간 머물 것을 권유해 와 나는 아내와 상의했다. 아내의 답장은 예
상 외로 선선했다. 괴로운 대로 한 해를 더 기다리겠노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리하게 빚을 얻을 필요 없이 좀 더 넓은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덧붙였다.
그런데 힘들여 일 년을 채우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전셋돈까지 빼내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중동에 있을 때도 이따금씩 들어 왔고, 며칠 늦은 대로 빼놓지 않고 읽던 신문에서도 더러 본 적이 있는 그 일이 바로 내게서 일어난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처형을 찾아가 다그치니 핏덩이 같은 남매를 맡기고 나간 지 한 달째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만 내밀었다. 말인즉, 아내는 내가 송금한 돈을 한 푼이라도 늘리려고 이것저것 손대다가 모조리 실패해 돈만 날리게 되자 나를 볼 낯이 없어 그 돈을 다시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며 아이들을 맡기고 나갔다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간의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아내는 어떤 놈팡이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공식대로 간 셈이었다. 그런데 통상과 좀 달라진 것은 그 해결이었다. 처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그 방에 들어설 때는 눈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났지만, 그래도 나는 이제 겨우 젖을 뗀 딸아이와 네 살배기 큰놈을 생각하고 화를 억눌렀다.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 다시 시작해 볼 작정에서였다. 요새 세상에 남의 남자 모르고 평생을 지내는 여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용서한다. 우리가 언제 돈 때문에 만나 살게 되었는가, 돈이란 또 벌면 되는 것, 걱정 마라. ― 그렇게까지 달래 보았지만 아내는 통 마음을 돌리려 들지 않았다. 아니, 도둑이 거꾸로 매를 든다고 오히려 나를 달래 떼어 보내려고만 들었다. 돈을 날려 버린 것은 미안하지만 그건 언제든 사정이 되면 다시 갚겠다로 시작한 그녀는 지난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조용히 보내다오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부글거리는 속을 눌러 참으며 내가 다시 돌아갈 것을 권하면서부터는 돌아갈 수 없는 까닭을 댄답시고 오래 잊고 있었던 상처들을 후비기 시작했다. 고아라는 처지, 가난, 보잘것없는 학벌, 희망 없는 직업 따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 약점들을 골고루 쑤신 뒤에 난데없는 아버지까지 끌어내어 자신의 결정이 옳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제 괜찮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 아버지 일도 믿을 건 못 된데요. 몇 해 선심 쓰듯 느슨하게 풀어 줬다가 조그만 일만 있어도 전보다 몇 배나 바싹 죌 거래요. 전에도 이번 조치 비슷한 게 있었는데 몇 해 안 돼 흐지부지되고 말았대요…….”
내가 갑자기 그녀의 목을 누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하고 있는 말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는 놈팡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리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거기서 온 순간적인 분노에다가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것 같아 위협 삼아 목을 누르기 시작했는데 ―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선으로 떠오르는 어린 날 뒷간 거울 속의 얼굴과 점점 닮아 가는 것이 아닌가. 그걸 깨닫자 갑자기 억누를 길 없는 호기심이 일며 아내의 목을 죄고 있는 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이십여 년 전에 어두운 뒷간의 거울 속에서 본 그 얼굴인가, 어린 날의 환상으로 단정하고 포기해 버린 그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가를 끝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얼굴은 묘한 전율을 일으킬 만큼 시시각각 이십여 년 전 거울 속의 그 얼굴을 닮아 갔다. 그러다가, 이건 틀림없다 싶어 손을 늦췄을 때 아내의 몸에는 이미 조그만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코 말하지만 당신들이 궁금해하는 살의(殺意) 따위는 애초부터 품어 볼 틈이 없었다…….
그 뒤 내 행동의 세세한 전개는, 즉 당신들이 말하는 바 도피 경로는 내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아내의 죽음으로 하여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추억의 불길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한 마리의 불나비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포기해 버렸던 기억 하나가 사실임이 확인되자, 쓰라리게 또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포기하거나 철회를 강요당했던 갖가지 기억들이 새삼 크고 무거운 것으로 되살아나며 제각기 존재 증명을 요구해 왔다. 지금과 같이 한심하고 처량한 형태로 내 삶의 방향이 잡힌 것은 바로 그 모든 진실을 포기한 뒤부터였다는 것이 후회처럼 떠오르고, 끝내는 살인 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된 인생극에서의 내 배역(配役)도 그로 말미암아 준비되었다고 단정되었다. 이제 어긋나 버린 내 삶을 제자리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길은 그 잃어버린 진실들을 회복하고, 거기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뿐이다. ― 그것이 뜨겁게 타오르는 추억에 부대낀 내가 내리게 된, 선택의 여지없이 자명(自明)한 결론이었다. 아아, 당신들도 이해할 수 있을는지…….
그런 내가 어느 정도 냉정을 회복한 것은 잠든 듯 누워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그 방을 나온 지 대여섯 시간 뒤였다. 나는 그사이 서울을 빠져나와 A시에서 고향으로. 들어가는 막차에 오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내 기억의 많은 부분을 부인하거나 포기를 강요한 사촌 형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가만히 차 안을 둘러보았다. 나를 뒤쫓는 자가 있나 없나를 살피기보다는 혹시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천에 하나라도 내가 사촌 형을 찾아보는 데 지장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막차답지 않게 반쯤 들어찬 차 안에는 분명 낯 익은 얼굴들이 몇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쪽에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이 넘은 세월 탓이리라.
그런데 막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빈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기는 내 눈길에 뒤편 구석진 자리에서 유심히 나를 살피는 중년 부인이 들어왔다. 도회풍의 차림에 제법 가꾸어진 얼굴로 나도 오래잖아 그녀를 알아보았다. 바로 옛날에 문둥이에게 간이 뽑힌 걸 본 적이 있는 그 처녀 아이가 변한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내 기억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은 찾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나는 똑바로 그녀 옆의 빈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 쪽으로 다가가자 갑작스레 당황한 표정이 되어 황급히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마치, 조금 전 유심히 살펴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을 뿐 나는 당신을 전혀 몰라요,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나는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없이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흠칫하면서도 차갑게 시치미를 뗐다.
“누구시더라?”
“이름이 은님이라고 하시죠? 아랫마을에 사셨고…….”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누구신지 기억나지 않는데요.”
그녀는 말투까지 완전히 고향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겨우 내가 누구라는 것만 아는 체를 했다. 얄미운 기분이 들어 바로 문둥이 얘기를 꺼내려다 말고 애써 정중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요즘 어디 사십니까?”
그런데 그녀의 대꾸가 그러는 내 기분을 확 바꾸어 놓았다. 차갑고 공격적인 어조에 내 기를 꺾어 놓기 위한 것임에 분명한 반말 투가 그랬다.
“여자 사는 곳이 따로 있어? 남편 있는 곳이지.”
“송하(松下)엔 무슨 일로?”
“어머님이 위독하단 기별을 받고 가는 길이야. 그래, 요즘은 뭘 하지? 오래 고향 떠나 있은 걸루 아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러 가는 딸답지 않게 침착한 말투로 은근히 나에 관한 것을 캐물으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억센 노파의 험악한 표정과 어린 날의 내 눈앞에 번득이던 시퍼런 낫에 오싹했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아 먹고 말했다.
“거기도 역시 만나야 할 사람인데 늦은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님께 무슨 볼일이 있지?”
그녀는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살피며 물었다.
“내게 소중한 기억을 빼앗아 간 사람이죠. 그걸 찾아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을 빼앗아 가다니, 그게 무슨 기억인데?”
“어떤 처녀 아이가 문둥이에게 간을 빼 먹힌 걸 본 기억.”
“처녀가 문둥이에게 간을 빼였다구? 그건 옛날이야기 속의 일이겠지. 잘못 본 걸 거야.”
“그건 바로 당신이오. 나는 그때 똑똑히 보았소. 그런데 당신 어머니는 불쌍한 그 아이를 윽박질러 그 기억을 빼앗아 가 버렸지.”
나는 그녀의 천연덕스러움이 더 견딜 수 없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차라리 안 밴 아이를 내놓으라는 게 낫지. 문둥이는 난데없이 무슨 문둥이야.”
만약 그녀가 그때 순순히 내 기억을 돌려주기만 했어도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자 내 감정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꽤 괜찮은 데 시집가 낫게 사는 모양인데…… 남편도 그걸 알고 있어?”
나는 짐짓 거칠고 비열한 표정으로 말투마저 바꾸었다. 그러자 약간 효과가 나타났다. 태연하던 얼굴이 일순 흐려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냉정을 회복하여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십 년 가까이나 산 남편에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걸루 뭐가 될 것 같애?”
“그렇다면 이곳 일이 처리되는 대루 한번 찾아가지. 남편에게 그때 내가 본 모든 것을 차근차근 얘기하고 물어보겠어. 정말로 그것이 내 거짓말인지 아닌지.”
“쯧쯧, 못 보는 사이에 결국 나쁜 것만 배웠군. 협박하는 거야?”
“내 기억을 내놓으라는 거요.”
정말로 그때만 그녀가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사과했더라도 내가 그렇게 심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끝까지 버티려 들었다.
“갈수록 알 수 없는 말만 듣겠네. 그때도 이상한 소릴 늘어놓더니…….”
“결국 내가 잘못 보았다는 거야? 아직도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뜻이야?”
“도대체 누가 그런 괴상한 말을 믿어 주려 하겠어?”
“좋아. 그럼 네 남편에게 말해 보지. 그는 믿어 줄 거야.”
“쇠고랑 차기 십상일걸. 아니면 정신병원에 실려 가거나. 그는 그만 힘은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완연히 닳고 닳은 도회의 중년 부인이었다. 길게 말하다가는 말꼬리만 찹힐 게 뻔했다.
“알겠어. 참고로 삼지.”
나는 그렇게 말해 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자폐 증상에 빠져있던 시절에 나는 종종 침묵의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내 쪽은 할 말이 없거나 몰라서 말을 않는 것뿐인데 상대가 저절로 숙이며 들어와 모든 걸 털어놓곤 하던 게 그랬다.
과연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저만큼 고향마을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정류소가 보이는 곳에서 그녀가 한풀 꺾인 기색으로 물어왔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내 기억을 돌려줘. 나도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 살게 해 줘.”
“어떻게?”
그때 마침 차가 멈추었다. 십 리 채 못 되는 고갯길만 넘으면 고향 마을이 되는 삼거리로, 처음부터 내가 내리려고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여기서 내리지. 어둡기 전에 송하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함께 걸어가면서 얘기 해.”
나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서 옆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그녀도 결국 따라 내렸다. 아무리 도회에서 닳았다 해도 태생이 시골인 탓이라 겁을 먹은 것인지 또는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서 내 말이 빈말 같지 않게 느껴진 것인지 제법 들릴 만한 한숨과 함께였다.
유월 태양은 서산마루에 손톱만큼 걸려 있었다. 가뭄 때문인지 노을이 유난스레 고왔다. 나는 꼭 이십이 년 전 열네 살의 나이로 그 길을 떠났던 일을 문득 떠올리고 야릇한 감회에 젖어 잠시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녀가 가만히 입 다물고 따라만 왔더라면 그 아름다운 노을과 귀향의 독특한 감회는 그녀의 훌륭한 보호자가 되었으리라. 그런데 채 고갯길 증턱에도 오르기 전에 답답하다는 투로 필요 없이 입을 열어 그녀는 스스로를 구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쫓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원하는 게 뭐야? 돈?”
그리고 내가 아직도 야릇한 감회에 젖어 대답을 않고 있자 그렇게 물어 놓고 스스로 단정한 듯 덧붙였다.
“나 큰돈 없어. 알 만큼 알고 따라붙은 모양인데……. 영감이야 그럭저럭 돈푼 만지는 편이지만 내겐 노랭이지. 도대체 얼마나 원해?”
그제야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잠자다가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바람에 내 감정은 거친 정도를 넘어 잔인한 복수심으로 발전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나는 차게 내뱉은 뒤 길가의 잔솔밭으로 그녀의 손목을 왁부스레 잡아끌며 소리쳤다.
“나도 네 간을 빼 먹고 싶어!”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부끄러움과 그러면서도 이미 짐작은 했노라는 듯한 비꼼의 표정이 착찹하게 얽혔다. 그러나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꼭 그때처럼 해.”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에 이르자 나는 다시 그렇게 명령했다.
“내 나이 마흔둘이야.”
그녀가 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빈정거리는 것도 아닌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잔인한 복수의 쾌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해.”
“정말 꼭 그래야 되겠어?”
“잔소리 마.”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조를 것 같은 기세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녀도 그런 내게서 무얼 느꼈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멀거니 나를 건너다보더니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 낯선 여인의 몸이었다. 거기다가 출산으로 터진 배의 흉터나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목덜미께는 이상한 역겨움까지 일으켰다. 욕정과는 거의 무관한 나상(裸像)이었다.
“그때 그 문둥이는 어떻게 네 간을 뽑았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귀찮은 듯 두 눈을 감고 벗어 놓은 옷가지 위에 반듯이 드러누우며 말했다.
“능청 떨지 마.”
그러자 비로소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나듯 그런 그녀의 자세가 뜻하는 바를 깨달음과 동시에 맹렬한 욕정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그녀의 모습 위에 어머니가 문둥이에게 간이 뽑히던 모습이 겹쳐지며 어린 날의 몸서리쳐지던 무력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스멀거리던 욕정을 일시에 씻어 내는 대신 다시 잔인한 복수의 쾌감을 충동질했다.
“일어나. 너는 아직도 내 기억을 돌려줄 생각이 없어. 문둥이는 그렇게 간을 빼 먹지 않아.”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그녀의 벗은 몸을 걷어찼다. 나의 돌변에 이번에는 정말로 겁먹은 눈길로 일어난 그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사정없이 후려쳐 저만큼 내쫓은 뒤 흐트러져 있는 옷가지를 갈가리 찢으면서 한층 무섭게 소리쳤다.
“그대로 마을로 달려가. 가서 네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 그때 내가 본 것은 사실이라고. 문둥이가 네 간을 빼 갔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었다고…….”
나는 한동안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 악을 썼다. 그녀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한동안 나를 보다가 본능적인 공포에 쫓긴 듯 비틀비틀 작은 솔숲 그늘로 달아나 버렸다. 나는 그녀의 옷가지들이 한 무더기의 헝겊 조각으로 변한 뒤에야 그곳을 떠나 사촌 형의 집으로 향했다. ― 당신들의 추측이 어떤 것이든 그녀가 무어라고 진술했든 이상이 그 사건의 전부다.
그사이 날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추억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불꽃에 의지해서 어둠과 이십 년의 세월이 가져온 옛 마을의 변모를 이겨 내고 똑바로 사촌 형의 집에 이르렀다.
이미 초로에 접어든 사촌 형은 마침 사랑방에 있었다.
“니가 웬일고? ”
한눈에 나를 알아본 사촌 형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차디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 차가움은 질 좋은 기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내 머릿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추억들을 더욱 뜨겁고 현란하게 만들었다.
“빼앗긴 기억들을 되찾으러 왔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기 무신 말고?”
“우리 아부지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이십 년 만에 찾아와 묻는다는 기 겨우 그것가? 어예 죽기는 어예 죽어. 삼촌이사 빨갱이 짓 하다가 산에서 죽었제.”
이십 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매몰차고 꼿꼿한 태도였다. 나는 서슴없이 그럴 때에 대비해 숨겨 간 칼을 방바닥에 꽂으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이라이?”
방바닥에 꽂히는 시퍼런 칼을 본 사촌 형의 자세가 약간 허물어졌다.
“국군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학이 되어 날아갔습니다.”
“뭐시라?”
그러다가 그는 내 눈길에서 어떤 심상찮은 빛을 보았는지 가늘게 몸을 떨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을 바꾸었다.
“그거사 뭐…… 니가 똑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믄 마음대로 하라믄.”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참 불쌍한 양반이라. 스물일곱에 혼자 되어 핏덩이 같은 니 하나 믿고 살다 뭐가 잘못된 모양이제. 혼자 낙태한다꼬 우예다가 하혈(下血)이 심해 서른셋에 세상 베리셨제…….”
“아닙니다. 문둥이가 간을 빼먹어 돌아가셨습니다.”
“오야. 마 그카는 편이 속 편할 끼다. 그래, 그 망할 문둥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형수님하고 언제나 붙어 있었지요?”
“그랬을 끼다. 니는 암것(아무것도) 모른다꼬…….”
“그때 산빨갱이를 잡으면 목을 뎅강뎅강 잘라 개울가 바위에 널어 말렸지요?”
“그랬을지도 모르제. 한참 눈들이 뒤집혀 있을 때는 그쪽도 여사(예사)로 죽창 끝에 사람 목을 꿰 다니기도 했으이.”
“지서 앞 대추나무에 매달고 때려 죽이기도 하고…….”
“그거사 아이지만 산빨갱이를 붙들믄 경찰이나 국군이 개 패듯 한 거는 맞을 끼라.”
그렇게 하나하나 포기했던 기억들을 되찾고 있는데 바깥이 수런거리더니 총을 멘 당신들이 들이닥쳤다. 집 안의 누군가가 몰래 사랑방을 훔쳐보고 지서에 신고한 듯했다. 그러나 맹세코 말하지만 방바닥에 꽂혀 있던 그 칼은 잃은 것을 찾기 위한 도구였지 당신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살인을 위한 흉기는 아니었다.
생각하면 당신들은 턱없이 빨리 왔다 적어도 당신들은 내가 사촌 형과의 일이라도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했다. 아니 내게 하루나 이틀쯤은 더 여유를 주어 선산 발치에서 학으로 날아간 아버지의 깃털 하나쯤은 주울 수 있도록 해 주거나 고향 강변의 바위 틈에서 주먹만 하게 말라붙었을 아버지의 목을 찾아볼 수 있도록은 허락했어야 했다. 그런 뒤 나는 그 방위군 소위를 찾아 그의 늙어 가는 남근에서 이십여 년 전 쇠파리에게 물린 자국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 옛날 보리 이랑마다 딸기 덩굴마다 서캐처럼 숨어 있던 문둥이들이 간 곳도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도 당신들처럼 자신이 본 것과 아는 것에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싶었다. 그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세계와 인생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우고 싶었으며, 내 삶과 꿈도 새로이 가꾸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너무도 일찍 왔고, 찾아야 할 많은 것은 여전히 타오르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처절하게 또는 불안하게, 헛되이 타오르는.
(1983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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