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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산(斗升山 444m)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한가운데 낮지만 우뚝 솟은 산이다.
도순산(都順山), 영주산(瀛州山)으로도 불렸던 두승산은 부안의 변산(邊山),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렸다.
고려 초 이곳 지명인 영주(瀛州)를 붙여 영주산(瀛州山)이라 했고, 또 도순산(都順山)이라고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말 두(斗)’와 ‘되 승(升)’자를
써서 두승산이라 불리고 있다.
이는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두승산 서쪽 골짜기 입석마을의 산성은 고려시대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백제토기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승고산성 또는 영주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두승산성은그 유물들로 보아 백제가 쌓아서 계속 사용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구조는 수구에 서문을 설치하고, 동남면에 남문지(南門池)가 있으나 석축의 대부분은 무너졌다.
유선사(遊仙寺)는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서 두승산 정상부근에 자리한다.
대부분의 사찰이 대개 계곡 깊숙한 곳에 있지만 유선사는 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범상치 않은 지리적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구름 속으로 홀연히 절의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아, 신선(仙)이 노니는(遊) 곳인 듯 신비로움에 감싸인다.
맑은 날 두승산에 오르면 산 아래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진강과 연결된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유천희해(遊天戱海)’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 예로부터 신선의 세계에 올라 수행정진하려는 이들이 즐겨 찾은 듯 그 흔적들이 즐비하다.
유선사의 거대한 호랑이상은 풍수지리상 ‘좌청룡우백호’의 약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세워놓은 독특한 사례라고 한다.
도교사상과 불교의 결합으로 선불일치(仙佛一致)인 셈.
그러니까 대웅보전의 좌청룡은 실한 반변 우백호가 허해 커다란 호랑이상을 우측 내룡맥에 세웠다는 이야기.
두승산 정상의 '수두목승(水斗木升)' 각자는 동초 김석곤(金晳坤 1874, 고종11년~1948년)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추눌어(東추訥語)로 진사 연추의 아들이다.
그는 정읍군 태인면 태성리 출신으로 전간재(전 우)의 문인으로 천품(天稟)이 청검하여 세사를 초월했으며,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산수를 즐겼다.
그리고 승지(勝地)의 기암(奇巖)에 예초(隸草)로 기념시구(紀念詩句)를 음각해 놓았다.
지난 순창의 회문산 산행 때 '천근월굴(天根月窟)'이란 각자를 확인하였고, 지리산 의신계곡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장산 불출암 서편에 내장풍악(內藏楓岳)이라 새겨져 있고, 칠보산 보림사 이일제 서당지의 암벽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 유수불부(流水不腐)라 새겼다.
수당(秀堂) 김교윤과 종유(從遊)하며 도의를 강론하니 사람들은 그를 소요처사(逍遙處士)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정읍인물지'에 전한다.
고부관아터((古阜官衙址)는 영조 41년(1765년)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정읍군에 편입될 때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봉기때(1894년 2월 15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이다.
그 후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었고, 석조물 몇 점만이 역사의 현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산자락 아래 입석리에는 ‘6,25 피학살묘’가 있다.
6.25 당시 북한군이 군경, 종교인 등 반공인사 500여명을 정읍경찰서에 감금한 후 9월 27일 150여명을 입석리 폐금광으로 끌고와 학살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인양하여 합장한 묘역이다.
나머지 350명은 유치장에 감금한 채 불을 질러 죽였는데 이들 중 연고를 찾지 못한 시신을 모아 안장한 곳이 42지주묘이다.
<클릭하면 원본크기>
<클릭하면 원본크기> A팀들은 하흑에서 바작산~망제봉~동죽산~치재~두승산을 산행하였다.
두승산성 안내판과 고부관아터를 찾았으며, 고부향교를 답사한 후 '고부역사문화관'을 관람하였다. 약 8.6km에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고도표
두승지맥은 변산지맥 옥녀봉(玉女峰)에서 분기하여 좌로 고부천(古阜川), 우로 동진강(東津江)을 가르며 비룡산, 국사봉, 두승산, 천태산, 부안 백산을
지나 고부천이 동진강에 합수하는 지점까지 약 40km의 산줄기.
'입석삼거리' 옆(고부면 입석리 611)에서 '황토현푸른터(수련원)', 보문사, '두승산 흑두부' 입간판이 가리키는 좁은 길로 대형버스가 꺾어 들어간다.
두승산 흑두부를 지나 '국도 29호선' 아래를 굴다리로 통과하여 29번 국도 옆에 나란히 버스를 댄다.
우리 버스는 날머리 고부관아 앞 '동학울림센터' 대형주차장으로 이동을 할 것이다. 다시 U턴할 필요없이 29번 국도를 좌측에 끼고 그대로 가면 될 것.
황토현수련원 방향으로 진입하며...
돌아본 모습.
삼거리 지점에서...
좌측으로 황토현수련원이 있고...
잘 생긴 소나무와...
입석2 저수지를 우측으로 흘리면...
곧 두승산 등산로 안내도와 '광주 노씨 세천비'가 있다.
유선사로 곧장 오른은 길은 안내판 뒤 비석 옆이지만 두승산성 안내판은 보문사 방향 임도를 따라 500여m 위에 있다.
안내도.
널따랗게 조성된 무덤은...
'행주은씨지천'
그 바로 옆에 우두커니 선 두승산성 안내판. 승고산성, 영주산성이라고도 불렸다.
일행들은 곧장 올라 능선에 붙을 것이지만 우리는되돌아나와 입석 1,2저수지 사이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너 시누대 숲속 능선으로 붙을 것이다.
제2저수지 제방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니 제1저수지 위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능선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
작은 다리를 건너면...
키큰 시누대 숲이 도열해 있고...
잘 관리되는 무덤을 연달아 지나며...
통덕랑 언양김씨 합장묘 비석을 확인한다.
연이은 언양 김씨 묘를 지나...
호젖한 산길을 이어가다...
뒤돌아 본 모습.
비석 없는 무덤이 있는 봉우리가 노적봉.
노란 비닐에 노적봉(露積峰 347.3m)이라 쓰고 뒷면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노적봉 무덤 옆에서 "할배, 할매, 좀 시끄럽더라도 이해해 주이소."하며 정상주를 곁들인 밥상을 차렸다.
그런 뒤 내리막을 내려서다 우측 자바목 사이로 끝봉 정자가 보여...
살짝 당겨 보았다.
분지인 듯한 안부에서는...
이정표가 있어...
끝봉 방향 평탄한 길로...
진행하노라니...
드러나지 않게 소박해뵈는 단풍이...
산꾼들을 맞는다. 어디 붉고 노랗고 화려한 채색의 단풍만 단풍인가?
화전민들의 흔적인 듯, 두 칸짜리 움막을 들인 움막터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학정을 피해 식솔들을 이끌고 들어왔을 것.
군데군데 움막터인 듯, 집터인 듯.
분지인 듯한 곳에 개간을 한다면 얼마든지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것.
다시 만난 이정표는...
관음사 갈림길. 관음사 방향으로 좀 내려섰다가 비잉 둘러 끝봉에 올라설 수도 있겠지만...
바로 올라 고갯마루에서 장수 씨가 퍼졌다.
팔각정 정자가 있는 끝봉은 두승산 반대방향 3분 거리에 있어...
바위를 지나...
팔각정에 닿았다.
잘 관리되고 있는 팔각정.
정자에선 사방 조망이 트여 만수저수지를 내려다 본다. 멀리 내장산인가?
당겨보았다.
동쪽으로 A팀들이 걷고 있을 동죽산과 망제봉 일원이 조망된다.
아래 만수저수지 너머 멀리 내장산인가?
만수저수지 앞으로 29번 국도와 우측에 입석터널이 보인다.
우리가 지나왔던 노적봉 볏가리.
끝봉에서의 이정표.
이제 두승산을 향해 밧줄이 안내하는 등로를 따른다.
쉬어가기 좋을 커다란 바위를 지나고...
경사가 완만한 등로를 따르면...
마애불이나 각자를 하기 딱 좋을 바위를 만나고...
크고 작은 바위가 어우러진...
암봉에 올라선다.
암봉 바위 옆자락에 빽빽이 새겨진 각자. '정유생갑계원불망대'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엔 아무개아무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꼭 이래야만 했을까?
남명 선생은 "대장부의 이름은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지 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날아다니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하다."고 하지 않았나?
암봉 정수리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무슨 형체를 조각한 듯한 곳에 눈길을 준다. 둥그런 모양의 되와 말 모양의 조형은 덕천면 하학리 최석학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서쪽으로는 호남평야가 아득히 눈앞에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정읍시가지가 한눈에 굽어보인다.
이쯤되면 신선의 영역이 분명할 터이니 망선대(望仙坮)가 빈말은 아닐 것.
그런데 이 각자는 누가 새겼능감? 그 아래 새겨진 이름 우측에 '단기 4276년'이 보인다. 단기 4276년이면 서기 1943년인 셈.
강택수, 윤돈식, 권영규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시회를 열었다는 것일 것.
문제의 수두목승(水斗木升) 각자.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퍼뜩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덤 님은 ‘물은 말과 같이 큰 그릇으로 헤아려야 하고, 곡식 등은 작은되로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수두화승((水斗禾升)의 오자일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글쓴이가 동초 김석곤이니 오자(誤字)일 리는 없을 것.
5행(五行)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다섯 개 원소로 생각된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의 운행변전(運行變轉)을 말한다.
전국시대에 5행사상(五行思想)이 생겨 우주나 인간계의 현상을 5행의 상생·상극으로 이해하고 예측하는 사고법이 발생하였다.
5행의 '상생(相生)'이라는 것은 목(木)은 화(火)를 생하고, 화(火)는 토(土)를, 토(土)는 금(金)을, 금(金)은 수(水)를, 수(水)는 목(木)을 생한다고
생각하는 순환 변전의 이치이다. <자료요약>
더우기 이 시대에 이곳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제각기 한 도(道)씩 하는 사람들이지 않는가?
지난 회문산 산행 때에 보았던 동초 김석곤의 ‘천근월굴(天根月窟)’ 각자.
천근(天根)은 남자의 성(性)이고 월굴(月窟)은 여자의 성이니 음양이 한가로이 왕래하므로서 소우주인 인간의 육체가 완전하게 된다는 뜻.
내장산 방향으로 훤히 열리지만 미세먼지 탓인가?
"유주학선 무주학불(無酒學佛 有酒學仙)"이라고 하지 않는가? * 술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라는 뜻.
그렇다면 나는 정상주도 한 잔 곁들였으니 신선을 배울, 아니 흉내라도 낼 일이다. ㅋ
남쪽 멀리 산맥이 굵은 선을 긋고 있고...
동쪽 가까이엔 우리 일행들이 걸어 올 치재 건너 동죽산과 망제봉이 보인다.
이 지점의 이정표.
지나온 끝봉과 멀리 내장산.
이 지점이 지형도에 표시된 두승산(445.1m)인데, 이정표엔 말봉으로 표시한 듯.
두승산성 서문지와 보문사 이정표가 좌측으로 가리키는 무덤에서는...
말봉이 지나온 방향으로 70m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까 망선대 암봉을 말봉이라 부르는 게 확실한 셈.
그리고 만나는 수더분한 봉우리를 두승산(444m)이라 스테인 표시판에 적혀있다.
노적봉과 끝봉이 내려다 보이는 소나무 쉼터.
무인 산불감시 시설에는...
'준·희'님이 441.0m 표지판을 걸어 놓았다.
노적봉과 끝봉 사이로 만수저수지.
그 뒤로 멀리 내장산을 당겨 보았지만 희미할 뿐.
등로 옆 암각자는...
망화대(望華臺). '대'자는 좀 특이하게 씌어져 있어 옥편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글자로 토(土)위에 사(舍)를 놀려 놓았다.
망화대 좌측 석벽을 반듯하게 다듬어 연꽃문양을 새겼고, 그 아래...
초서체로 새겨진 명문(銘
신주의 시대가 이제 끝났으니
봄가을로 의탁할 바가 없도다
일제 아래 암담하니
홀로 망화대에 오르다.
복주 정우달이 짖고
간재 전우가 삼가 이어 아울러 쓰다.
뭇 세상이여 일월이 어찌 혼미 하겠는가
복주의 흔적이 여기에 있도다.
팔방에 암울한 바람이 부니
망화대야 말로 진중한 보배로다.
병자년(1936)4월 모일 불초자식 해근과 해표
* 이곳에서 신주는 중국을 일컫는 별칭임
<느낌표! 느낌...!그대로>에서 옮김.
정교한 연꽃문양.
도형 암각화는 윷놀이판을 위시한 여러가지 도형.
유선사 일대는 수행정진하고 싶은 도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며,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시방에서 공부하며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니...
정성가나 점술사들의 난해한 천문의 흔적인가?
망화대 우측엔 삼인결의 각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 세 사람이 결의를 하니, 세세토록 잊지 말기를 확약하다’.
정헌 윤대홍 칠곡인/ 휴남 강환선 진주인/ 둔암 전운구 정선인/ 병술년(1946)8월 모일/ 은남 강규선 58세에 졸하다 입석리<자료출처 느낌표>
오래전의 편의시설들은 이제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만추의 유선사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어...
산비탈을 돌아 내려서는 절집.
산자락의 이정표.
절마당으로 내려서는 길.
마당이고, 지붕이고 가리지 않고 낙엽이 쌓였다.
대웅보전 계단을 따라 올랐더니...
대웅보전 좌측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산자락을 성큼 내려서고 있다.
‘석가여래입상’ 우측의 종각으로 가서...
종각을 들여다 본다.
주조한 지 오래돼 보이지 않는 커다란 종에 ‘두승산 유선사’라 새겨져 있다.
절마당에는 스님도 나와 계신다. 유선사는 비구니 사찰.
포효하는 호랑이상 가까이 접근한 뒤...
카메라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취약한 우백호의 기를 보완하기 위하여 커다란 호랑이 상을 세웠으니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이라고 보면 될 것.
바위 틈새에 곱게 꽃을 피운 이것.
가까이 다가갔지만 문외한의 시각으론 어림도 었어.
마치 잘 가꾼 분재와도 같아. 아니나 다를까, 한덤 님이 "무슨 꽃입니까?"하며 주지 스님에게 묻는다.
마침 가까이 다가와 살피지만 스님도 모른단다. 또 이렇게 예쁜 꽃이 피어난 줄도 몰랐단다. "아~인간세상에 가을이 이렇게 깊은 줄도 몰랐나 보다."
나중에 스님이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일부러 차를 세운 뒤 상세하게 가르쳐 준다. "참빛살나무에요."
비보풍수(호랑이 상) 이후에 절 문턱이 닳을 정도로 신자가 늘어나면서 시설물들은 규모가 커졌다.
고부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은 포장도로이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돌탑.
포장도로엔...
가을 분위기가 물씬하고...
순흥 안씨 묘역을 지나고...
영원배수지를 지나면...
곧 갈림길.
좌측 도선사 경내로 꺾어 들어가...
절마당을 가로 질러...
4기의 비석과...
5층석탑을 당겨 본다.
그리곤 횡단보도를 건너....
우리 버스를 확인한다.
살짝 당겨본 (▽)지점의 우리 버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조금만 진행하면...
동학울림센터 주차장.
고부관아터로 올라가 본다.
고부초등학교로 들어가...
늙은 느티나무에서 교정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어.
전통한옥이 있는 곳으로 접근해 보지만...
더 이상 접근 불가. 알고보니 '고부향교'여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홍살문 안으로 들어가며...
과차자계하마(過此者啓下馬)비를 카메라에 담았다.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서 가라'는 말.
솟을 삼문 앞에는 비석군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고...
나는 습관적으로 카메라 셔터만 누른다.
고부향교에는 고부향교일요학교와 유도회고부지부 목판이 걸려있다.
서재 현판은 경오 중양절에 전교 박종수 書. 경오년이면 1930년인가, 1990년인가?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
명륜당(明倫堂).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유학을 강학하는 곳.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는 돌계단을 올라...
고부향교 대성전 안내판.
대성전에 오른다.
대성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
고부관아터 안내판과 1872년 지방지도.
주차장으로 돌아와 마주 보이는 건물인...
동학울림센터로 들어간다.
고부역사문화관으로 들어가...
고부의 역사를 간직한 고사부리성에 오른다. 성황산으로 직접 올라간 일행들이 있지만 나는 여기서 자료를 통해 간접 오르는 것.
<클릭하면 큰 그림> 고부의 고지도.
<클릭하면 큰그림>
고부 이야기
각종 유물들.
고사부리성의 모습들.
사적 제 494호인 고사부리성.
고사부리선의 가치와 이의.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황토로 덮힌 작은 산이 전승지이다.
1894년 4월 초, 관군이 농민군을 쫓아나서자 농민군들은 이를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날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하였으며, 경상, 충청지방으로까지 농민혁명의 불길이 번져 갔다.<자료>
<전봉준 절명시>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運去英雄不自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것이 무슨 허물이리오
愛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사랑한 단심 누가 알리 있으리
조병갑의 수탈과 고부농민봉기.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 거사를 330자로 기록한 문건이다.
전봉준의 이력.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지도자는 전봉준을 비롯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요람지(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는 '동학농민모의탑'이 세워져 있다.
전봉준 유적,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만석보지(전북 기념물 제 33호), 동학농민모의탑.
<클릭하면 큰그림> 고사부리성
고사부리성은 성황산(132m)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으로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뒤 통일신라 때 고쳐 쌓았다.
역사관을 나와 주차장에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상.
고부 향교 뒤로 둔덕같이 나즈막한 성황산의 모습을 올려다 본다.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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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야 새야 파랑새야 / 전주고부 녹두새야 /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 하절인줄 알았더니 /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는구나 ♪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만가(輓歌)였다.
만가는 죽은이를 애도하는(輓) 노래(歌)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동학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인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중들은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다.
전봉준은 어린 시절 키가 녹두콩만큼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동학군의 대장이 됐을 때도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 군대, '청포 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