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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혁신이 공존하는' 안동을 거쳐 밀양으로 가 볼까 합니다.
'Secret sunshine', 밀양...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밀양>을 만들면서 비밀스러운 햋볕이라는 도시 이름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밀양에는 우리 독립운동역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으나 비밀스럽게 사라진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 ! 다음주 나나 님이 밀양으로 공연온다 하셨지요?
참고로 밀양에서 지호락이 사는 울산 울주는 1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이론적으로 논거한 사람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사의 변혁을 가져온 주체세력은 그런 이론가가 아니라 일제와 직접 투쟁하며 피 흘린 무장투쟁론의 실천가였다.
구한말의병, 안중근의 총탄에서부터 시작된 우리 독립항쟁의 주류는 무력항쟁이다.
무력항쟁은 역사에 대한 관념적 구성을 거부한다. 오로지 실천만을 강조한다.
대의를 위하여 소아를 희생하는 인간이 아니면 진정한 무력항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20세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무력항쟁의 기수들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가장 조직적이고 가장 지구력 있게 가장 열렬하게 타협 없이 싸운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밀양 사람 약산 김원봉을 주저 없이 말하겠다.
그의 족적은 독립운동사를 통 털어 너무도 폭넓은 행보였다.
약산 김원봉(1898-?)은 1948년 8월. 자진 월북했다. 김구의 남북협상제의에도 불구, 남한단독정부가 성립된 직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빨갱이라 기억한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가는 빨간 곳에서도 하얀 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약산은 결국 북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약산의 무덤은 그래서 어디에도 없다. 고향 밀양에는 그의 부인 박차정 여사의 묘소만 쓸쓸이 남아 있다.
박차정은 부산 출신으로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좌우합작으로 만든 근우회(여성단체)에서
활동하다 중국 남경으로 망명한다.
김원봉과의 인연은 그녀의 큰 오빠 박문희가 김원봉과 친구지간이고 박문희 역시 의열단 단원이기 때문이다.
1939년 2월, 광서성 곤륜관 전투 때 어깨관통상을 입은 후, 고생하다 1944. 5. 27 중국 중경에서 사망한다.
김원봉은 해방 후 아내의 유골을 고향 밀양에 가져와 묘소를 만든다. 박차정은 김원봉을 만나기 전부터 열렬한 투사였다.
박차정(1909-1944) 부산 동래출신. 동래여고 졸업. 여성독립운동단체 근우회 선전부장
조선여자의용대 조직. 장렬하게 전사. 약산 김원봉의 처
중국 사천성 중경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중경이다.
중경은 인구만 해도 3000만명에 면적도 남한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다. 그리고 무지하게 덥다.
중국인들은 남경, 무한, 중경 이 세 도시를 ‘삼대화로(三大火爐)’라 부르는데 그 중 중경이 가장 덥다.
이곳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었고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다.
중경 탄자석 대불단 거리 172번지. 이곳이 약산 김원봉이 거주한 곳이고 대불단 거리는 조선의용대 단원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여기서 박차정은 김원봉과 의용대 단원들이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밀양시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추원재라는 격조 있는 한옥이 나온다.
조선왕조 사림의 큰 어른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생가(生家)이다.
김종직은 조선왕조의 훈구파를 물리치고 도학의 풍도를 일으킨 사림의 선각자이다.
그의 문하에서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나왔고 김굉필의 문하에서 정암 조광조(1482-1519)가 나온다.
조광조는 급진적이었지만 유학적 합리주의인 지치주의(至治主義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를 주장하며
사림의 모범이 되는 삶을 실천하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죽는다.
그러나 그는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그 물줄기에서 퇴계 이황이 나왔다.
그러니까 퇴계학의 연원을 올라가면 조광조가 나오고 더 올라가면 반드시 김종직이 나온다.
따라서 밀양과 안동은 서로 통하는 곳이 많다.
훈구파란 세조의 왕위찬탈에 공을 세워 벼슬을 하고 공신의 녹을 얻은 사람들이다.
신진사림은 훈구파에 도전하여 새로운 도학의 기풍을 일으켰다. 훈구파와 신진사림의 갈등이 빚어낸 참극을
사화(士禍)라고 하는데 최초의 사화가 밀양사람 김종직의 무덤까지 파헤쳐 목을 베어 버린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이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制門)이라는 사초가 문제 되었던 것이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난한 글이었다.
약산 김원봉의 일생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모든 훈구파들과 끊임없이
투쟁해 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점필재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했고 약산 김원봉은 무덤도 없이 사라졌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상통점이 있다.
약산은 어려서부터 이 곳 추원재에서 놀았고 사림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
약산 김원봉(1898-?) 그는 누구인가?
그는 동학의 마지막 보루 해월 최시형 선생이 서울 단성사 뒤켠에서 처형되던 1898년 8월 13일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건너편 집에서 3년 후 태항산 열사 석정 윤세주가 태어났다.
석정 윤세주 : 중국 연안. 마전 태항산 전투 때 등소평을 구하고 죽은 조선의용대.
두 사람은 앞 뒤 집에서 형 동생하며 같이 자란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같이 서당에 다녔고, 같이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녔고, 경술국치 후 제1차 천황생일 날
변소에 일장기를 쑤셔 박아 같이 구타당하고 자퇴한다.
같이 사립동화학교를 다녔고, 같이 신흥무관학교를 다녔고, 같이 의열단을 창단했고,
같이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만들었고, 같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고, 같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 두 밀양사람의 일생이야말로 20세기 무장투쟁의 가장 기나긴 역사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민족정기를 불어 넣어준 밀양의 두 선생이 있다.
한 사람은 백민 황상규(1891-1931)이고 다른 사람은 사립동화학교 설립자 을강 전홍표(1869-1929)이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는 배후에는 백민 황상규가 있었다. 그가 지도했고 자금도 대주었다.
그는 김원봉보다 7살 위인 친고모부였다. 황상규는 어려서부터 교육사업에 투신, 상동고명학교,
창신학원(마산)를 설립했고 1918년 중국으로 망명 서일, 김규식, 김좌진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재정부장을 역임한다.
또한 상해임정의 재정위원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8만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약산 김원봉하면 테러리스트로 알고 있다.
약산을 테러리스트라 말한다면 물론 김구도 테러리스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날강도 짓을 한 일본에 대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효율적 전쟁수행의 방편으로 테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테러리즘 말 대신 의열투쟁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의열투쟁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를 의사(義士)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철(1863-1916) 전남 보성 벌교 출신. 오적암살단
장인환(1876-1930) 평양출신. 외교관 스티븐슨암살
전명운(1884-1947) 서울출신. 장인환과 스티븐슨 암살
이재명(1890-1910) 평북 선천출신. 15세 미국이민. 이토오 히로부미 암살계획.
이완용 암살 실천. 교수형으로 순국
그리고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암살 등, 위 모든 의사(義士)들의 개별적 활약은 있었지만
이러한 의열투쟁을 조직적 투쟁으로 만든 사람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후일 김구의 의열투쟁도 김원봉의 의열단 활약상에서 자극받은 것이다.
김원봉과 김구는 오랜 세월 라이벌 관계였다. 물론 김구는 김원봉보다 한 세대 위이다.
22살이나 차이진다. 김구를 19세기형 인간이라면 김원봉은 20세기형 인간이었다.
김구는 김원봉을 아들처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은 두 사람을 같은 무게로 대했다.
김원봉은 김구를 항상 앞질러 갔다. 소수의 의열투쟁도 앞서 갔고 정규군 무력투쟁도 앞서 갔다.
임정의 광복군 창설도 조선의용대 활약상에 자극받은 것이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감히 김원봉이 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너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김구의 위치에 너무 중심한다. 분명 김구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구라는 인물의 스타성 때문에
타인의 위대함을 폄하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같은 무게이다.
약산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녔고 그 시절부터 장개석과의 연줄을 확보했다.
약산은 신구(新舊)의 폭넓은 교양을 구비한 뛰어난 인텔리였다. 한학의 소양이 깊고 중국어를 탁월하게 잘 했다.
그리고 문장력이 뛰어났다. 김구는 우직했고 약산은 날카로웠다. 김구는 덕의가 있었고 약산은 이지적이었다.
‘아리랑’의 김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약산 김원봉을 꼽았다.
김산은 김원봉을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약산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홀로 행동하였다. 거의 말이 없고 웃는 법이 없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열중하였다. 톨스토이의 글은 모조리 읽었다. 그는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멀리서 그를 동경하였다. 그는 빼어난 미남이었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는 지극이 점잖고 친절했지만 매우 가혹할 때도 있었다. 혈관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의열투쟁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희생의 순간에 자기를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물 한 잔 드시고 화장실 다녀오시는 Time... 길어서 미안합니다>
약산은 밀양의 표충사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다.
천진의 덕화학당에 다니다 1918년 5월,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현 남경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다시 서간도로 올라가 이회영, 이상룡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다닌다.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한다.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정규군 독립군을 길러 일본군 정규군과 투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 주장한다.
학교교육을 받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시급하고 급격하게 직접적인 행동,
즉 의열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학생들을 설득한다.
김원봉은 8명의 학우들과 함께 길림으로 간다. 거기서 약산은 의열단을 조직한다.
후일 약산은 북경에 가서 단재 신채호를 만난다.
단재는 약산보다 18살 위이다. 약산은 단재를 투철한 민족의식의 역사학자이지만 역시 구시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재는 누구보다도 젊은 피가 끓는 급진적인 투사였다.
약산은 단재를 의열단 고문으로 모신다. 후일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심산 김창숙도 고문이다.
단재는 의열단을 위하여 6,400자에 이르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다.
이 ‘조선혁명선언’은 읽고 나면, 젊은 피가 끓지 않을 수 없는 만고의 명 문장이다.
약산 김원봉은 길림시 광화로에서 1919. 11. 11 의열단을 조직한다.
그는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평화로운 시위로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는 점을 각성하고
오로지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임을 자각한다. 또한 그들 소수만의 자각이 아니라 민중의 자각화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김원봉의 의열단 결성은 향후 무장투쟁의 모범이 되고 원류가 된다.
이후 모든 독립운동사의 무장투쟁은 의열단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폭력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임을 민중에게 고하고 무장투쟁만이
조선독립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한다.
푸른 날이 쓸데없으니 가라
칼아 ! 나는 너를 위해 우노라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서슬이 퍼런 칼날같이 살았다.
이승만을 미국에 조선 위임통치를 청원한 매국노라 하여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 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임정요인들을 모두 쓰레기 같은 놈이라 비판했다.
결국 그는 아나키스트 국제활동을 하다가 대만 귀류에서 체포된다.
그리고 10년형을 받고 안중근이 수감되었던 뤼순감옥에서 8년을 살다 보석도 거부하고 죽는다.
1936년 2월 21일 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 조선일보에서 그의 ‘조선사’를 연재하자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유는 조선일보가 쇼와 년호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와 년호는 곧 일본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말 일촌의 타협을 모르는 칼날같은 인생이었다. 단재의 이러한 삶은 약산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약산 김원봉은 정통적인 공산주의자인 이동휘나 아나키스트인 단재나 우당 이회영과는 생각이 좀 달랐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였다. 현실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투쟁을 하느냐가 그의 관심사였다.
이념에 대한 일관된 헌신보다는 항상 현실적 투쟁을 먼저 생각했다.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여러 단체들의 통합이었다.
따라서 약산은 대일전선의 통일동맹을 부르짖었다. 오랜 진통 끝에 1935년 7월 5일 남경 금릉대학 강당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상해, 남경, 중경 등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는 임시정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많은 단체들이 각자의 신념과 방법으로 조선독립울 위해 싸웠다. 약산은 그들을 통합하려 애썼다.
그러나 김구의 임정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김구는 약산 김원봉의 공산주의 색깔을 경계했고 그의 통합노력을
임정분열을 위한 포석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3년에 걸친 노력 끝에 민족혁명당은 창당된다.
김원봉의 의열단,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최동호의 조선혁명당, 이청천의 신한독립당, 김규식의 대한독립당과
뉴욕대한인교단, 미주국민회, 하와이국민회, 하와이혁명동지회의 9개 단체가 참여했다.
그러나 백범 임시정부의 강력한 견제 속에 이청천이 빠져 나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분열되고 만다.
비록 민족혁명당은 대일통일전선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약산의 대일전선 통일동맹에 대한 노력은
순수한 것이었다. 만일 김구가 당시, 김원봉의 노력을 좀 더 포괄적으로 안았더라면 항일투쟁에 있어 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후에 기회 있으면 다시 언급하겠지만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천지가 개벽할 세계사적 사건이다.
윤봉길 의거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자신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들을 시원시원하게 해내는
조선인을 마치 해결사 바라보듯 했다.
갑자기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의 은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윤봉길 의거의 가장 역사적 의미는 독립운동 진영으로 자금이 유입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세의 변화를 약산은 재빠르게 포착한다.
김구는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일본의 추격을 받았기 때문에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산 김원봉은 발 빠르게 국민당 정부와 접촉을 시도한다. 그리고 장개석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한다.
윤봉길과 같은 정예로운 투사를 길러내는 조선인 군관학교를 만들어 인재양성하면, 중국의 항일투쟁도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장개석 입장에서는 역사 깊은 정통 임정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열투쟁의 혁혁한 전과가 있는
젊은 약산을 지원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금지원 루트를 다원화한 것이다.
약산은 장개석의 지원으로 남경 근교 사찰을 빌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다.
그 학교 1기생 속에 안동 퇴계 이황의 적손 시인 이육사가 있었다.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본 산호도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춰주지도 않았다.
- 노정기(路程記) 이육사(1904-1944) -
이육사의 시는 당시 약산이 남경근교 천룡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수학할 때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대륙침공의 마각을 드러내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크게 3갈래의 투쟁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동북지역의 유격대 활동이다. 동북항일연군으로 표현되는 북간도 지역의 활동인데 김일성 유격대가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는 강남지역의 외교투쟁이다. 상해에서 중경을 걸쳐가며 노력한 임시정부의 활동이다. 셋째는 화북지역의 의열투쟁이다. 김
원봉의 의열단 투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활동을 거쳐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의 의열투쟁이 이에 해당한다.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투쟁의 삶을 살다 간 비밀스런 햋볕과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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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의를 위해서 소아를 희생한다' , 말은 간명하지만 선택하기 정말 어려운 화두인 거 같습니다. 오늘에 비추어볼 때 ..우리 삶의 조건들이 윤택할수록 '소아의 희생'은 곧 '바보' 라는 인식을 낳게 만듭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은 그러니까 30살에 어깨 관통상을 당하고 35살 사망이 되는군요. 아직 인생의 욕망이 무한 확장할 나이인데... 그 욕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친 것이네요,
쫌 길어서 그렇지 약산의 스토리 재미있습니다?
구한말의병, 동학에서부터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의 독립운동, 임정의 고투 등 많은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많습니다.
하여간 아는 것이 왜그리 많은지??
..언제 쓰리쿠숀 회의 함 해야쓰는디..
머리 아파패스
한국의 근현대사는 정말 속 터지고 답답하고 머리아프다는 생각에 깊이 읽어보는것 조차도 싫어서 학교 다닐때두 설렁설렁 넘어갔더랬습니다. 오욕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인것을..............최근 4월과5월 까페에서 각 항목의 글들을 관심있게 보던중 이제서야 비로소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이 지금 우리가 공존해가는 삶속에 알게 모르게 함께하는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知好樂님 博識하심에 감탄과 감사를....................
일반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무언가 찝찝하고 당당하지 못하고 열등감까지 느끼시는 분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의 공산혁명,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의 항일투쟁 등 어느 민족보다 장렬하고 강인하게 세계사 속에서 투쟁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뿐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여운형 선생님이 백주에 혜화동 사거리에서 암살 당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통일을 위해 북한의 김원봉과 접촉을 하셨는데 그 편지들과 문서들이 그날 가지고 계셨던 가방속에서 발견되었지요.그래서 김원봉에게 애정이 갑니다. 지호락님이 올려주신 독립운동사에 관한 모든 글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는 곳으로 스크랩해갑니다.미있게 읽으실 거 같습니다.^^"
여운형 선생께서 암살 당하시는 시기에 약산 선생과 연락이 되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룬 독립인데....나라가 반 조각 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으셨던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