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평린이(평가원 어린이)들, 올해에도 어김없이 사고를 쳤네요. ㄹ 선지를 봅시다.(평가원이 발표한 정답은 ④번임)
ㄹ. 갑, 을: 개인은 자신의 유리한 천부적 자산을 소유할 권한을 갖는다.(갑은 노직, 을은 롤스)
이 선지의 오류를 논하기 전에, 이 선지가 기출 선지와 명백히 상충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합니다.
(1) 2014학년도 수능 7번의 ④
④ C: 개인의 타고난 재능을 사회의 공동 자산으로 간주하는가?
롤스 입장에 대해 묻는 것인데, 평가원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2) 2017학년도 9평 9번의 ‘병’(롤스) 제시문
“개인의 타고난 재능은 응분의 것이 아닌 사회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 더 불운한 자들의 선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그 행운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이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개인의 타고난 재능의 분포’라고 해야 했는데, 이때만 해도 ‘~의 분포’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평가원이 모르고 있었고, 그 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이후에는 ‘~의 분포’를 붙이고 있죠.
어쨌든 기출 선지와 제시문에서 사용된 선지와 이번에 제시된 선지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비교해봅시다.
개인의 타고난 재능을 사회의 공동 자산으로 간주한다.(2014학년도 수능)
개인의 타고난 재능은 사회 공동의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2017학년도 9평)
개인은 (자신의 유리한) 천부적 자산을 소유할 권한을 갖는다.(2022학년도 수능)
기출에서는 천부적 자산(=타고난 재능)을 ‘공동 자산’으로 간주한다(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느닷없이 ‘소유할 권한을 갖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공동 자산’과 ‘사적으로 소유할 권한’이 같은 건가요? 명백히 반대의 의미입니다.
선지의 상충을 평가원은 뭐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과거에 그 선지 및 제시문의 오류를 인정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평가원은 선지의 상충 문제부터 반드시 해명해야 합니다.
2. 이제 이번 선지의 오류 여부를 논하겠습니다.
먼저, 평가원이 사용한 ‘권한’이라는 용어부터 이상합니다. 번역서에 이 용어가 사용되어 있기는 한데(번역어의 적절성 여부는 논외로 함), 평가원은 번역서 인용도 잘못하고 있습니다. 영어 원문을 봅시다.
To be sure, the more advantaged have a right to their natural assets, as does everyone else; this right is covered by the first principle under the basic liberty protecting the integrity of the person. And so the more advantaged are entitled to whatever they can acquire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f a fair system of social cooperation.
첫째, 롤스는 더 유리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자산(천부적 재능)’에 대한 ‘권리(right)’를 갖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기본적 자유(권리)’를 보장하는 제1 원칙에 의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자연적 자산에 대해 각자가 ‘마땅히 가질 만한 자격(권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격의 통합성 보장을 위한 기본적 자유를 규정하는 제1 원칙에 의해서 자연적 자산에 대한 권리가 인정될 뿐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자연적 자산에 대한 권리가 일단 인정되면, 이제 사회적 협력을 위한 공정한 체제의 규칙에 따라 그들이 획득한 재화에 대해서는 ‘권한(자격)’이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용어는 ‘entitled (to)’입니다. 노직도 그렇고 롤스도 그렇고, entitle은 ‘마땅히 받을 자격'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공정한 체제의 규칙’이란 차등 원칙을 뜻합니다. 차등 원칙의 의미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차등 원칙에 따라,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된 재화에 대해서는 더 유리한 재능을 가지고 더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몫을 분배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배된 몫에 대해서는 ‘마땅히 받을 자격’, 즉 ‘응분’이 인정된다는 것이며, 다만 롤스는 이 ‘응분’이 ‘당연히 받을 자격’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그로서는 entitle을 ‘응분(desert)’이 아닌 ‘정당한 기대치(expectation)’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정당한 기대치’란, 개인이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어서 지니고 있게 된 것이 아니므로(=우연적인 것이므로), 그러한 재능을 발휘해서 생산된 재화에 대해서도 마땅히 받을 자격(즉, 응분)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차등 원칙 및 이를 구현한 제도에 의해 ‘더 많은 몫’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된 경우에는 사회는 그의 그러한 기대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차등 원칙 및 이를 구현한 제도는 무엇을 규정하고 있을까요? ‘사회적 협력을 통한 생산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더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몫을 분배해 준다’는 것을 규정합니다(차등 원칙이 바로 그런 취지죠).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ⅰ) 제1 원칙(평등한 자유의 원칙)에 의해 각자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권리(right)’를 갖는다. 즉, 마땅히 받을 자격(즉, 응분)이 있어서 재능을 갖게 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천부적 자산’에 대해 마땅히 가질 자격‧권한(entitle)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제1 원칙에 따라 그러한 권리(right)가 인정된다.
ⅱ) 사회적 협력으로 생산된 생산물에 대해서는, 더 유리한 재능을 가지고 더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는 차등 원칙에 따라 더 많은 몫(재화)이 분배되며, 이렇게 분배된 몫에 대해서 그는 그것을 소유할 자격‧권한(entitle)이 있다.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롤스는 천부적 자산에 대해 소유할 자격‧권한(entitle)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등 원칙에 따라) ‘분배받게 된 재화’에 대한 자격‧권한(entitle)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ㄹ 선지를 다시 봅시다.
ㄹ. 갑, 을: 개인은 자신의 유리한 천부적 자산을 소유할 권한을 갖는다.(갑은 노직, 을은 롤스)
선지는 롤스의 경우에 ‘개인은 천부적 자산을 소유할 권한(entitle)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롤스는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롤스 이론의 취지에도 전혀 안 맞습니다. 이 선지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이 문제 가지고 소송 들어가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출 선지와 상충하는 데다가, 객관적으로 명백한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ㄴ 선지의 '모든 성원을 고려'가 중의성을 갖는다는 문제점도 있으나, ㄹ 선지 오류가 중요하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