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깨달음과 환속에 대한 고찰
정토원 정목
차례
1. 서론
2. 출가와 수학
3. 구법의 길
4. 깨달음의 시기
5. 환속한 이유와 거처
6. 결론
1. 서론
석가모니부처님 이후에 원효(元曉: 617~686)만큼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대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기존의 불교를 뛰어넘어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며, 교학의 전반에 걸쳐 80여 부 200여 권의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세속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중생교화에 헌신한 대승보살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출가한 비구가 파계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며, 그것도 왕실의 공주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효는 불교계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언제나 영욕의 평을 함께 받아야 했다.
여기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 중에 하나는 ‘구법의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혼인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환속의 시기가 언제인가? 파계를 한 뒤에 재 출가를 했는가?’라는 문제이다. 본인은 이 문제를 『원효성사』라는 저술에서 견해를 소상히 밝혔다. 여기서는 그 요점만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2. 출가와 수학
1) 출가
『송고승전』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
“석 원효의 성은 설(薛)씨로 동해 상주[下州의 오류] 사람이다. 쌍 상투의 나이[관채지년 : 16세]에 슬기롭게 법에 들어갔다.”
2) 고선사의 18년
➀ 『삼국유사』 「사복불언(蛇福不言)」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가 고선사(高仙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보고 맞이하여 인사를 하였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했다...”
➁ 『삼국유사』 「원효불기」 “일찍이 송사로 말미암아 백 가지 소나무에 몸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모두 보살 계위가 ‘초지보살’이라고 말하였다.”
3) 세 분의 스승
「고선사서당화상비」 “대사의 덕은 오직 전생에 심은 것이고, 도는 실로 나면서부터 알았다.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깨닫고, 배움에 [일정한] 스승을 좇지 않았다[學不從師]. 성품은 또 원대하여, 중생이 어두운 네거리[생로병사]에서 [헤매는 것을 보고] 괴로움을 뽑아버리고 재앙에서 구제하고자, 이미 승가의 많은[僧那] 원을 일으켰으며, 미세함을 연구하고 이치를 분석하며 [보살로서] 그 마음을 행하였다.”
이와 같이 원효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고 일정한 스승이 없었지만 법을 배우는 데는 누구든지 스승을 삼아 수학하였다. 기록에는 세 분에게서 수학한 기록이 있다.
➀ 항상 작은 절에 머물면서 매양 미친 듯이 크게 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고 불렀던 혜공(惠空)법사이다.
➁ 삽량주[현재의 울주군] 아곡현 영취산 암자에 살면서 『법화경』을 강론하고 신통력을 지녔던 낭지(朗智)스님이다.
➂ 650년 6월 고구려에서 남쪽 완산주[현재의 전주]의 고대산(孤大山)으로 망명하여 회상을 이루고 『열반경』을 강설한 보덕화상(普德和尙)이다.
3. 구법의 길
1) 의상과 1차 유학시도
『송고승전』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
“[영휘(永徽) 원년 경술(650)에 (봄?)]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현장삼장(玄奘三藏)과 자은(慈恩)의 문하를 사모해서였다. 당나라에 들어가는 인연이 이미 어그러져서 마음을 쉬고 자유롭게 유행하였다.”
2) 의상과 유학시도 · 시기 불명
『송고승전』 「신라국 의상전」
“나이 20세 무렵에 이르러서 당나라에서 교종이 이제 한창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원효법사와 함께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여행하였다. 걸어서 신라의 바다 관문인 당주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장차 차가운 파도를 건너가려고 꾀하였다. 갑자기 중도의 진흙길에서 궂은비를 만나서, 도로 옆에 의지한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숨기는 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질풍과 빗물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에 이르러, 자세히 보니, 이에 옛 무덤의 해골이 곁에 있었다. 하늘마저 가랑비가 내리고, 땅은 또 진흙길이라서, 한 치 앞이 어려워, 머물러서 나아가지 못했다. 다시, 무덤 속으로 통하는 길의 벽에 기대어 있는 중에, 밤이 되어 아직 자정이 일렀는데, 갑자기 귀신같은 물체가 있어서 괴이하게 생각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 머무르며 잘 때는, 토감이라 생각하고 또 [마음이] 편안했는데, 오늘 저녁 머무는 밤은 귀신의 고향에 의탁하니 [번뇌가] 많이 차오르는구나. 이러한 즉, 알겠구나. 마음이 생겨나니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토감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 種種法生, 心滅故, 龕墳不二].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 가지 법이 오직 인식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달리 구하려고 힘쓸 것인가[心外無法, 胡用別求].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리고는 [의상을] 물리치면서, 바랑을 챙겨 신라로 돌아갔다. 의상은 한 사람[자신] 그림자와 홀로 가려고,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3) 의상 혼자 3차 유학시도 · 661년
『삼국유사』 「의상전교」 [영휘[永徽: 당 고종의 연호: 650~655] 초에 : 誤記]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이르러 당나라 사신의 배를 만나, 서쪽으로 돌아가는 이가 있어서, 머물다가 배로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의 장수 유지인이 관아 안에 머물기를 청하여, 풍성하고 넉넉하게 공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을 찾아뵈었다.
4) 해골의 물은 중국에서 꾸며낸 전설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 북송)가 961년에 지은 『종경록(宗鏡錄)』과 혜홍각범(慧洪覺範:1071~1128. 송)이 1107년에 지은 『임간록(林間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동국에 원효법사와 의상법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당나라에 와서 스승을 찾으려고 하였다...”(『종경록』 11권, 『대정신수대장경』 48권, p.47)
4. 깨달음의 시기
필자는 원효가 심법을 깨달았다는 시기는 위에서 말한 ‘의상과 유학시도 · 시기 불명’의 때이며, 1차 시도와 같은 해(650년)의 가을, 9~10월경[양력]이라고 보며, 이것을 ‘제2차 유학시도’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다.
➀ 원효와 의상이 현장법사가 귀국한지 5년 후에 1차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갔다는 것은 원효의 성격이나 나이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많다.
➁ 원효가 45세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80여 부 200여 권의 완전한 논서를 저술한 천부적인 명석함을 간과한 것이다.
➂ 원효가 요석공주와 혼인한 시기는 무열왕대(654~661)로 38세부터 45세까지의 시기이다. 또 요석의 남편인 김흠운(金歆運)이 655년에 전사하였으므로 원효 39세 이후이다.
원효는 계율에 관한 논서를 여러 권 저술할 정도로 계율에 철저한 수행자였는데, 깨달음을 얻기 전[661년 전]에 환속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파계의 비난을 감수하며 혼인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➃ 661년은 무열왕이 별세하고 문무왕이 즉위한 해로 나라 정세도 불안한데, 신라와 백성의 운명을 염려하는 원효가 유학길을 나섰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➄ 원효는 650년 6월 이후, 보덕화상으로부터 수학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해 가을에 유학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5. 환속한 이유와 거처
1) 환속한 이유
➀ 「고선사서당화상비」 “죽일 것 같은 활이 그를 향하였고,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이치에 맞지 않는 비난을 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옛집에 돌아와 거사가 되었다.”
➁ 『무량수경종요』 “상배의 왕생인은 다섯 구절이 있다고 설한다. 첫째, 집을 떠나 욕심을 버리고 사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인을 일으키는 방편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발보리심이니, 이것은 정인을 밝힌 것이다.”
➂ 『보살계본지범요기』 “[계를 범함이 없는 경우] 세 가지 조건 중에 하나는, 만약 정계의 율의를 일찍이 받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2) 환속한 이후의 거처
➀ 「고선사서당화상비」 “왕성 서북쪽에 작은 절이 하나 있었는데, 비결서...외서 등을 [보았으나] 세상에서는 배척당하였다. 서당의 저술 가운데서도 특히 『십문론』은...”
“만선화상의 ‘지기’ 중에 전하여 말하기를, ‘불법에 능한 자가 아홉 명이 있는데, 모두 대사라고 불렀다. 대사(원효)가 초개사에 있을 때, 현풍을 돕고 칭찬한 대 목수들이었다.’라고 하였다.”
➁ 『삼국유사』 「원효불기」 “그가 출생을 반연한 마을을 ‘불지’라고 이름하고, 절을 ‘초개’라고 이름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처음으로 불일을 빛낸다는 뜻이다. ‘원효’ 또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시골말로 ‘시단’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불렀다.”
➂ 『송고승전』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 “원효가 이 경[금강삼매경]을 받은 것[문무왕대 : 661~681]은 바로 그의 고향인 상주(湘州)에서였다. 그는 심부름한 사람에게 말했다. ‘이 경은 본각과 시각의 이각으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6. 결론
➀ 원효는 의상과 함께 1차 유학을 실패한 뒤에도 구도열정이 식지 않았다. 그때 마침 보덕화상의 망명소식을 듣고, 그곳에 나아가 수학했으나 만족하지 않아, 그해(650) 가을에 의상과 함께 ‘제2차 유학시도’를 감행하였다. 여기서 원효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34세], 의상[26세]은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의상은 10년이 지난 뒤인 661년[37세]에 홀로 ‘제3차 유학시도’로 당나라에 들어가 꿈을 이룬 것이다.
원효는 출가 이후 18년 만에 완전한 깨달음[일심증득, 평등성지]을 얻었다. 필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구법의 길을 걷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원효가 깨달은 후에 보여준 행위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➁ 원효가 환속한 이유는 깨달음 이후의 자유로운 행위와 혁명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승가로부터의 비난이었다. 그렇다면 34세 이후 곧 환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환속한 이후 7년이 지나서 혼인을 한 것인데 이것을 파계라고 볼 수도 없고, 다시 재 출가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원효의 저술과 실천으로 보아 그는 초지보살을 뛰어넘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성인이 무슨 파계를 하고, 재 출가를 하겠는가. 지금 불법문중에서 그런 말들을 입에 담거나 논쟁거리로 삼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지혜로운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응석부리는 격이다.
『법화경』에서 “부유한 장자 아버지를 떠나 거지가 된 아들을 불쌍히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만고에 빛날 한국정신의 아버지 원효를 비난하며 버리고, 빛바랜 중국 문전에서 구걸하는 한국불교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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