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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6장 24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12-십자가를 지는 삶
사람들은 고난이나 고생이 유익한 것은 알지만 일부러 당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목회를 잘하셔서 큰 부흥을 이루시고 후임 목회자에게 교회를 물려주신 한 노인 목사님이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내가 이제서야 목회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 길을 다시 걸으라고 하면 도저히 못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목회를 조금 알 것 같으면 다시 한번 시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시 그 고난의 길을 걷고 그 고생을 하라고 한다면 가기 싫은 순간이 바로 그 고난과 고통의 시절이라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알지만 다시 가라고 한다면 가기 싫은 것은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인생에 다시 가기 싫은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 인생의 고난과 고생의 시간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에게 쫓겨서 아둘람 굴에 숨어 지낼 때였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 다시는 그런 길을 안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 또다시 피난길에 오릅니다. 소수의 병력과 백성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도망을 치게 됩니다. 물론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다윗에게는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한 가운데서 지은 시가 시편에 나와있습니다.
먼저 사울왕에게 쫓겨다닐 때 지은 시를 보면 그가 그 곤경에 빠진 때에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알게 됩니다. 시편 57편 4절을 보면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억울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사자, 불사르는 자, 창과 화살, 날카로운 칼, 그물, 웅덩이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악한 상황 속에서 다윗이 고백한 신앙고백을 보면 먼저 7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노래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노래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영역을 넘어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중에 알리겠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57편 9절을 보면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하고 있고, 1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하면서 감사와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만민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다윗이 아들인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가 시편 3편에 나오는데 1-2절을 보면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있고, 그 뒤에 결론인 마지막 절 8절을 보면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기도가 응답받아서 다시 궁궐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물론 다윗은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고갔던 길이지만 예수님은 알고 가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고난과 고통의 길임을 알고 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들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걸어가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인 제자의 길인 십자가의 길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인 오늘 본문 말씀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따라오려겨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입니다. 이것은 제자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내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자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대가없이 받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려고 할 때는 치러야할 엄청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좌절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성령충만하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쓰임받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냥 편안하게 믿으면서 필요할 때 구하면 응답해주시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만족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안일어납니다. 이들이 특징은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먼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저를 인도해주세요?”하는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두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하나는 “해 주세요”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께 자기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자기가 구하는 것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시나요?”하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기 원하시느냐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의 맛을 보아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나 동네 사람들이 “어느 식당에 갔었는데 굉장이 맛있어 한 번 가봐”하고 말하면 “그래 알았어”하고 대답은 하겠지만 그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이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먹어봤는데 그 맛이 잊을 수 없는 기가막힌 맛이라면 그 때부터는 혼자 가든지 누구를 데리고 가든지 간에 다시 가서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 은혜와 진리를 또 받고 싶어 하지만,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맛을 보고 더 가고 싶어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채 왜 저렇게 요란하게 믿는지 몰라” 이것이 은혜와 진리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한 노 목사님이 저에게 자신이 냉면을 참 좋아하는데 그 냉면 맛을 잊을 수 없는 집이 한 곳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은 서울 동대문에 있다고 하시면서 “거기 가면 사람들이 항상 길에 줄을 서 있는데 그 냉면집은 냉면도 냉면이지만 냉면과 함께 주는 육수는 겨울이건 여름이건 상관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육수맛이 기가 막힙니다. 나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봤습니다. 그 뒤로 가보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못 가보시고 돌아가셨을 것같기는 합니다. 저하고 이야기하신 지 얼마 안되어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남아 있는 맛도 잊지 못해 아무리 멀어도 시간을 내어 가는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이 반드시 가야할 길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경험한 그 은혜와 진리의 맛을 십자가를 져보지 않은 사람들을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맛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따를지 안 따를지에 대하여 강제성을 띠지 않으시고 여러분들의 의지의 선택에 그 권한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네가 나를 따른다면 그 길은 굉장히 어려운 고난과 고통이 있단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맛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그런 최고의 맛이란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받게될 그 상은 이 땅에서 받게되고 누리는 그 모든 것들로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단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표현으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누구든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남녀노소할 것없이 누구나 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니요 전 안갈래요”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멘”으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옛후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뿐 아니러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잔뜩 모인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해서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해씁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계시거늘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 영생의 말씀을 알아본자와 알아보지 못한 자, 은혜와 진리의 맛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의 맛을 본 사람은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의 맛을 보았고 하늘 양식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하면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꿀 곧 송이꿀보다 더 맛있습니다”하고 고백했겠습니까? 똑같은 66권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인데 어떤 사람은 졸립고 따분해 하면서 성경을 덮어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번 성경을 펼쳐 읽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깊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은 앞의 성경을 덮어 버리는 사람과 뒤에 성경에 깊이 빨려 들어가는 사람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또 어디에 속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바로 둘째가 나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전제를 말씀하시고나서 다음 말씀을 이어나가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고난이 따르고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측량 못활 은혜와 풍성한 진리의 지식과 체험,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따릅니다. 그것은 감격적이고 감동적인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기부인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부인함으로써 얻는 가치를 모르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의 가치를 알면 자기 부인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부인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가 죽어야하고, 십자가를 거부하면 일시적으로 자기가 삽니다. 자기가 산 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아직도 죽은 자로 계십니다. 무덤에서 불활하지 못한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의 존재가 사라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이 세상을 살 뿐아니라 죽어서도 무덤도 크게 만들고 비석에다가 이것저것 쓰기를 원합니다. 어떤 노인분이 가족 공동묘지 땅을 사시고는 굉장히 흐뭇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는데 무덤에 묻히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조차 자기부인이 안되서 죽은 후에까지도 후손들이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전히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사 속에 남기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사들과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포기했고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워주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를 부인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빛나는 이름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도 역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는 자는 상이 있지만 따르지 않는 자들은 상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나 이 세상의 복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걸림이 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물과 한숨과 근심과 두려움과 갖가지 방해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길입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1절을 보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받았던 고난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어서 2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알고 따랐던 사도 바울의 인생여정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목이 잘리는 처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았던 사도 바울의 인생은 세상에서 보면 완전히 실패자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천국에서 엄청난 환영과 상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받을 상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지는 자기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정체임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하여 지옥에 갈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곁에 지옥갈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천국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일은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땅에 오셔서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 에수님과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많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십자가를 외면하고 이 세상의 복만 받기를 원하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오늘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으신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지기를 결단하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계시는 성령님과 함께 온전히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