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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날, 그러나 그늘이 깃든
―심호택의 삶과 시
호병탁
그가 갔던 해(2010), 지역신문에 추모의 글을 올리고, 박경원 시인에게 유고시 몇 편 얻어 내가 관여하는 문예지에 어설픈 특집을 꾸몄던 일이 있다. 이것은 순수한 자의였다. 그리고 간간이 술자리에서 동료 문인들과 그를 회억하는 얘기를 나누었을 뿐 바쁜 인간들의 시간은 부질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데 늦은 겨울밤 그의 시집을 다시 뒤적거리고 있다 보니 그가 내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한 사람과 그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그의 의식과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마련이다. 작년에 괸 눈물이 금년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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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택처럼 작가와 작품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도 드물다. 어느 정도만 주목해 보아도 삶의 궤적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그와 작품은 지근거리에 있다. 그의 시에서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이 실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시적 형상화 당시의 정황과 그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행동 또한 상당히 구체적인 편이다.
그에 대한 연보는 지난해 발간된 유고시집 (『원수리 시편』)에 자세히 정리되어있다. 그럼에도 사무적 이력이 아닌, 그가 직접 작품에 남긴 그늘이 깃든 삶의 자취를 주마간산 격으로라도 들춰보기로 한다. 장비에게 풀벌레 그리라는 제한된 지면이 아쉽다.
심호택은 1947년 “해당화 향기롭던”(「하제의 꿈」), 전북 옥구의 하제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 시절을 보낸다. 당시 농촌살림의 삶은 지주이거나, 관에서 일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대개 그렇고 그러하듯 시인도 배고픈 시절을 산다. 그러나 삶은 신산했지만 그 걱정은 주로 어른들의 몫이었고 어린 시인은 행복했다.
그만큼 행복한 날이/다시는 없으리/싸리빗자루 둘러메고/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여기저기 찾아보아도/먹을 것 없던 날
―「그만큼 행복한 날이」 전문
이 시는 그의 대표시집, 『하늘밥도둑』의 초두 작품으로 어느 작곡가가 곡을 붙여 노래로도 불린 시다. 시인의 유년시절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정서가 짧은 몇 행에 모두 녹아들어 있다. 대자연이 놀이터였고 그 속에 사는 모든 생물이 동무들이었다. 산과 들에서 놀이에 열중하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을 5, 60년대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면 누구나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가난한 집안에 먹을 것은 없을 때였다. 그럼에도 “다랑논 가에서 콩잎에 붙은 땅개비를 잡아 유리병에 담”고, “도랑물가에서 송사리떼 들여다보며 갈잎배 만들어 띄”(「아무 것도 모를 때」)우던 그 유년시절을 시인은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대엿 살 철부지 때/할아버지에게 붓글씨”(「똥구멍 새까만 놈」)를 배웠다. 한약포를 운영하며 서당을 열었던 그의 조부는 부친을 일찍 여의었던 그에게 자부(慈父)를 대신했고 또한 엄한 스승이기도 하였다. ‘심생원’으로 호칭되는 조부는 여러 방면에서 그의 유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한 모습으로 그의 시편에서 산견된다.
학문은 있으나 박복하였다/외아들 먼저 앞세우고/그가 하던 한의원 맡았다 심심풀이로/사랑방에 서당도 차렸는데/월사금 밀린 놈들이/장난질만 이골이 나서/회초리 한주먹 장만해야/며칠 못간다
―「심생원」 부분
세상에 “외아들을 먼저 앞세우”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비통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그 외아들, 즉 시인의 부친에 대한 한 편의 시가 있다. 문장은 평이해도 속내는 처절하다. 그에게 아버지는 ‘관념’에 불과했다. “근엄한 콧수염에/료오마에 양복 입고/흑백사진 속으로 들어간/아버지여/낯선 관념이여”(「아버지」) 라고 시인은 말한다. 같은 시에서 “지나온 길 샅샅이 뒤져도 아버지라는 낱말 흘린 일이 없”었다며 “애비 없는 설움이 다하고/나 또한 아비가 되었건만/나 이 세상에서 그 말과 인연이 없”다고 ‘아버지’라는 호칭 한번 불러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출한다. 일견 원망의 정조로도 느껴지지만 실상 짙은 그리움이 행간에 절절하게 배어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말은 없었지만 평생 그의 행적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시인에게는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죽어도 어머니를 보고 죽는다고/먼 산속에서 내려온 형”(「초겨울」)이 있었다. 그해 겨울 이 형도 떠나고 마는데 그 정경이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
겨울이 다가왔다/삭정이가 다된 젊음이 마지막/거친 숨 몰아쉬고 있었다/너는 나가 있거라…/알았어…/싸락눈 맞으며 팽이를 돌리는데/불길처럼 곡성이 번졌다
―「초겨울」 부분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 여섯 행의 글만으로도 원고지 100매 이상의 평문을 쓸 것 같다. 그만큼 절창이다. 감정의 격발은 없다. 특별한 문학적 장치도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위 글은 형의 죽음을 보지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배려, ‘나가 놀라’는 말에 밖에서 “싸락눈 맞으며 팽이를 돌리는” 철모르는 동생, 단장의 슬픔으로 ‘불길처럼 번지던 곡성’은 서로 기막히게 어우러지며 우리의 가슴을 후빈다. 시인은 “추억을 함께 나누지 말자고/그는 일찍 죽었지만/쓸쓸한 기억이 더러는 있다”(「형」)고 그를 회억한다. 형의 죽음은 “쓸쓸한 기억” 즉, 또 다른 조용한 그늘로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길다란 집은 처음입니다/검은 널빤지 잇대어 붙인 옥봉국민학교/입학하러 가면서 멀리서 보고/세상에 무슨 집이 기차같이 생겼나
―「첫 수업」 부분
시인은 “천자문 첫머리 거기 벌써/ 하늘따의 이치 뚜렷하거늘” 무엇 하러 “바둑아 이리와/나하고 놀자”(「도적놈 소굴」)나 배우는 ‘소굴’로 손자를 보내느냐는 조부의 ‘쇠고집’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하소연’ 덕에 ‘기차같이 생긴’ 옥봉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동네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았고 “여선생님 앞에 선” “이쁜 가시내”도 처음 만난다. “손닿지 못하는 그리운 것”을 떨어져 보아야 하는 “아릿한 몸살기운”도 처음 느끼게 된다. 그의 시편에는 곳곳에 해학이 번뜩이고 방언이 난무하며 무식한 농사꾼 말이 여과 없이 견인되지만 행간에는 언제나 잔잔한 페이소스가 흐르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예쁜 여자아이’는 시인의 가슴에 오래 남아있게 되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 된다.
이때 그와 어울리며 함께 놀았던 동무들이 있다. “옥봉국민학교 3, 4학년 때/점심시간 돌아오면” 학교 울 밖으로 나가 ‘양은도시락’ 하나를 함께 나누어 먹던 “피난민 아들 철재”(「도시락」), 장기 둘 때 “단 둘이 있으면 몇 판이고 져주다가도/구경꾼만 있으면 꼭 이기”(「때때기」)고 말던 완길이, 뒷날 그가 “힘 안 들이고 경우 바른 사람”으로 기억하는, 대책 없이 좋은 사람 최기권(「최기권이와 더불어」), “찬바람 속에” ‘가오리연’을 함께 날리던, 그리고 그때가 “생애의 절정”이었다고 회고하게 되는 「봉구」, “찌륵소 성깔머리”에 “가운데 물건 대단했던”(「까침바우 선창」) 순용이 등.
특히 시인의 고종사촌이었던 남기는 “띠뿌리 캐먹으며/오들개 따먹으며/없는 대로 배고픈 대로 함께 자”란(「두부 맛」) 친구다. 시인은 두 사람이 “두 마리 풀무치”같았다고 쓰고 있다.
생각나는가 그 아늑하던 고래실/바랭이풀 쇠비름 억수로 절어붙던/수은을 엎질러놓은 아침 이슬밭
―「풀무치」 부분
묘사의 압권이다. 그들이 함께 놀던 고래실의 반짝이는 풍경이 선연하다. 그러나 그가 떠나던 날, “그 이슬밭의 기쁨이 사라졌네/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렀네”라고 시인은 슬퍼한다. 세월 가는 걸 몰랐기에 시간은 멈추었고, 그가 떠남으로 시간은 다시 흘렀다. 어떤 이별의 아픔보다 더 아프다.
시인은 “검은 교복에 하얀 이름표 자랑스러운/군산중학생”(「옥구선」)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선의 강약과 미의 감각”(「고바우 선생」)을 알게 되고, “예술혼에 이글거리는 눈동자”「올빼미 선생」)에게서 음률을 습득한다. 스펀지가 물 흡수하듯 많은 지식을 이곳에서 체득했을 것이다. “이마에 사마귀 난”(「아름다운 과장법」) 국사선생 황연택, ‘입 큰 사람 도량도 큰’ 체육교사 「아구 선생」, “소리만 들어도 도시락 속사정 훤”히 알던 「개코 선생」 도 물론 한몫 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여러 선생님들을 이처럼 시편에 담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때도 “방바닥엔 온기가 부족하고/ 달랑 갈치 한 토막”(「하숙」)에 늘 허기졌던 시절이었다.
시인의 고교(군산고), 대학(한국외대) 시절에 대한 얘기는 시편에서 찾을 수 없다. 이미 상당한 높이의 지적수준에 달한 그는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관념의 눈초리를 세상에 던진다. 「철조망」, 「유에쓰」, 「개보초」, 「미제 철모」 등에서는 자신의 고향을 비행장으로 점령한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앞개울 건널 때면」, 「헐리는 알뫼섬」 등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에 주먹을 치고 있다.
대학을 마치고 그가 광주에서 강사생활을 할 때의 시가 몇 편 있다. 그러나 이때를 “사오년 배겨낼 적”이라며 “가시를 삼킨 아픔”(「짐승들에게 안부를」)이었다고 술회한다. 사람을 짐승 취급하던 학교의 ‘어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행간을 비집고 가시처럼 돋아나온다.
그는 이후 고향 근방인 원광대에 자리를 잡고 익산에서 가족과 함께 둥지를 튼다. 두 번째 시집 『최대의 풍경』을 상재하고 계속하여 세번 째 시집 『미주리의 봄』, 네번 째 시집 『자몽의 추억』을 출간하며 대학 교수로, 시인으로 중년의 원숙한 삶을 살아간다.
시인은 『최대의 풍경』, 「그날의 평화」에서 달빛이 농밀한, 호밀이 익어가는 밤풍경을 그야말로 ‘최대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역시 유년시절의 풍경이다. 시인은 한 해의 미국체류기간 동안 그곳에서의 일상을 『미주리의 봄』으로 깎아낸다. 염생이가 물똥 싸랴. 시가 품어야 할 미덕, 즉 삶의 아이러니와, 긴장, 모호함 등을 모두 갈무리하지만 기교도 과장도 없이 시를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배경만 다를 뿐 이 시집에서도 변함없다. 2005년, 가볍고 투명하여 상쾌하고 쌈박한 연애 얘기를 쓴 『자몽의 추억』을 낼 때 시인은 “이것들 덕분에 한 동안 즐거웠다.”(시인의 말)라고 말한다. 우리도 시를 읽으며 덩달아 ‘한 동안 즐거웠다.’
시인은 2003년부터 여산, 원수리로 거처를 옮겨 전원생활을 한다. 그는 이곳 풍경과 마을 사람들 얘기를 쓴 시편들을 모아 다섯 번째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집을 보지 못하고 갔다. 이것이 유고시집이 된 『원수리 시편』이다.
원수리에서 쓴 시편들은 마을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을 뿐 다시 고향 하제로 돌아가 속편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무섭고도 정다웠던 훈장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들려온다. “무스거 하느냐!/그 말 한마디 떨어지면/나는 꼼짝없이 꼴 베러 가야한다”(「나는 북청을 꿈꾼다」). 그러나 이 시에서 할아버지를 보는 시인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젖어있다. “한아바이는 북청태생/ 물장수도 아닌, 그보다 나을 것도 없는/찬바람만 지고 내려온 사내”다. 그의 조부는 「함경도 사내」였다. “북관에서 수천리/전라도 회문산으로 그는 돌아”갔다고 시인은 다소 감상적 어조로 회상한다.
훈장 나리는 “죽을 날짜 정한 터라/그 날짜 맞추고자 곡기 끊고”(「회문산」), 죽음을 맞아들여 회문산 중턱에 묻혔다. 시인은 “달갑지도 않은 시부모님/죽어서까지 시중들어 드리라고”(「추석전야」) 미안해 하지만 어머니도 회문산에 모셨다. 그리고 지금, 그도 ‘솔바람 여전하고 산짐승 놀러오는’ 회문산 선영들의 발치에서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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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작가의 눈』 겨울호에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못 보아도 사람은 큰 사람 덕을 본다’고 심호택과의 인연과 그가 나에게 끼친 영향을 술회한 바 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그에 대한 글을 또 쓰고 있다. 그는 지금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쓸 기회를 다시 만들어 주는 것을 보니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나에게 그는 과연 ‘큰 사람’ 역할을 단단히 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중 잘 뛴다니까 장삼 벗어 걸머지고 뛰는 우스꽝스런 짓은 여기까지로 충분하다. 설령 앞으로 그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작품’과 ‘평자’의 객관적인 관계로만 그를 다시 만날 것이다. 심형, 편히 쉬시오.
─『시에』 2012년 봄호
호병탁
충남 부여 출생. 1997년 『표현』으로 등단. 시집 『칠산주막』. 평론집 『나비의 궤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