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서 태어났으며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보일러 일을 하면서 별다른 걱정 없이 순탄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폐암이라는 병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주에서 아내는 미용실을 하고 저는 가끔 보일러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폐암 말기 환자의 체험담을 모든 분들에게 알려 드리고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992년 3월경쯤 왼쪽 가슴 아래가 많이 아픈 것도 아니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아픔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 하면서 일을 계속하러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암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 두달 쯤 되었을까 몸이 많이 피곤하면서 조금 이상이 있는 것 같기에 천호동에 있는 Y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본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해서 계속 또 일을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또 아팠습니다. 이번에는 강동구 길동에 있는 K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가정의학과 과장님 하시는 말씀은 암은 아닌 것 같으니 혹시 결핵이 아닌가 하시면서 한 달 정도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한 달이 지난 다음에도 역시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열도 많이 나고 꼭 감기 몸살 증세가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S병원엘 가게 됐습니다. 병원에서는 폐렴이 왔으니 입원을 하라고 해서 약 2주일간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별로 호전이 되지 않으니까 컴퓨터 사진을 찍자고 해서 컴퓨터를 찍었습니다. 역시 결과는 암은 아니었습니다.
암은 아니니까 통원치료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어쨌든 저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밤에 왼쪽 가슴 아래가 너무나 많이 아팠습니다.
고통을 참고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아침 병원을 찾았습니다. 폐렴이 또 왔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시더군요. 왠지 두려운 마음으로 K병원을 찾았습니다. K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하더니 지금 당장 입원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저는 평상시에 술과 담배를 많이 했었는데, 입원해서도 담배를 피웠고 혹시 암은 아니겠지, 왜 큰 병원까지 오게 됐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암은 아닐 거야. 컴퓨터 촬영에서도 암은 아니라고 했었는데, 사진 찍은 지 얼마나 됐다고.’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도 마음은 역시 불안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결과는 나온 것 같은데 괜찮다고만 할 뿐 아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과 얼굴에서 심상치 않음을 알고, 솔직히 얘기하라고 하면서 저는 담배를 피웠습니다. 아내는 저보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저는 결과가 나오면 피우지 않겠다 했습니다. 아내는
안 되겠는지 밥을 먹는데 저를 부르더군요. “희남이 아빠, 잘 들어요.” 그 말만 하고는 아내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순간 저는 한숨을 내쉬며 ‘암이로구나’ 생각하며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 놓고 “암이래?” 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그 동안 내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흘리면서 “응, 암이래.”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았습니다. 무서운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암은 아니겠지 하면서 기다렸는데 암이라니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죽는 걸까 생각하니 눈물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내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데 왜 내게 이런 병이 온 걸까.’ 억울하고 분하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나오는 것은 눈물 밖에 없었습니다. 옆에 있는 아내를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의사 선생님은 초기라 수술만 잘 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시면서 S대 어느 교수님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다음 날 아내와 저는 서울대 병원으로 추천서를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그래, 초기니까 수술만 잘 하면 살 수가 있어.’ 그렇게 위안을 하며 서울대 병원을 찾아갔지만 모든 것은 마음과 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수술은 커녕 입원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병원인데 입원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집에서 병실이 비어있다는 전화만 기다리고 앉아 있는 우리는 힘이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 암세포가 빨리 퍼진다는데 아무런 대책 없이 며칠을 기다리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몇 번이고 병원을 다시 찾아가 사정한 결과 특실이 비었다는 전화를 받고 재빨리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정확한 진단을 위해 더 세밀한 진료를 밤이고 낮이고 계속 받았습니다.
역시 결과는 암으로 판정되었고 수술만 잘 받으면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두 주먹을 힘껏 쥐었습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수술하기 전날 수술에 필요한 준비사항을 간호사들이 알려 주면서 혹시 모르니까 머리 컴퓨터를 촬영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컴퓨터 촬영을 끝내고 이제는 결국 수술을 하는구나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있는데 저녁 회진 시간 교수님이 오셔서 “안대영씨 수술 보류입니다” 하시더군요. 수술만 잘하면 살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입원조차 하기 힘든 서울대 병원에 간신히 들어와 수술을 받는구나 했더니 수술 보류라니 이게 웬말인가. 의사를 만나러 간 아내는 10분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실을 나와 아내를 찾았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식기 세척장에서 저희 어머니와 둘이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그날 저녁 병실은 초상집이었습니다. 이미 암세포가 머리까지 올라가서 수술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약 12일간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더군요. 머리도 다 빠지고 몸무게도 10kg이나 빠지며 음식을 하나도 못 먹었습니다. 녹즙이 좋다고 해서 녹즙만 한달간 먹었고 밥은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습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으니 길동에서 서울대까지 매일같이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조차도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짜증만 내게 되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럭저럭 방사선 치료도 끝내고 항암제 주사를 맞는구나 했더니 내과 ○○○교수님께서 머리로 올라간 이상 항암제 투여를 해도 30% 효과밖에 기대를 못하니 환자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하시면서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시더군요. 또 울었습니다. 우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더군요.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병원에는 갈 필요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하나, 산 속으로 들어갈까, 기도원으로 들어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몇 일이 지났을까, 시골 사시는 형님이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골은 공기도 좋고 하니까 시골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향에 있는 형님 되시는 분이 전화를 하셔서 한마음 선원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시골로 내려온 뒤 안양 본원의 스님을 찾아 뵙고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하시는 말씀은 관하는 것 아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뭐라 말을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관하는 것을 배우고 주인공 공부 열심히 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친견 때도 그러시고 또 그 다음 친견 때도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관하라.” “주인공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관하라고도 하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주인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나는 무언가가 스쳐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 바로 주인공이구나 저는 매달렸습니다. 내 안의 근본이며 온 우주의 근본일 수도 있는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그 자리가 모든 것을 일으키고 해결해 주는 그 자리가 아닌가, 관하는 것도 알게 되고 주인공 그 자리에서 만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안 아프게 하는 것도 그 자리, 바로 주인공이구나 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법을 만나기 위해서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공부하면서도 약은 약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주인공 공부하는 동안 여러 차례 통증이 오고 목에서 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통증이 올 때는 금왕지원으로 달려가 주지스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괜찮다. 주인공 그 자리에 맡겨라. 공부하기 전에는 나빠지느라고 아프지만 공부하면서 아픈 것은 좋아지느라고 그러는 거니 거기다가 맡겨라.” 그래서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인공한테 맡기고 편안히 마음을 놓고 있으면 어느 순간 통증이 없어지곤 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통증이 나고 몸살이 나면 주인공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심하게 아프면 혹시 여기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지스님을 찾았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따뜻하게 저를 가르치시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렇게 하기를 3년이 지났습니다. 병원에서 나와 원자력 병원까지 차트를 들고 찾아 갔을 때는 2~3개월밖에 못 산다고 하던 제가 3개월이 아닌 3년을 살았습니다. 주인공 공부하면서 내 스스로 밝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어떤 병이 저를 데려가겠습니까.
저는 이제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병원 진단 결과 완치되었다고 하더군요. 의성에 있는 일심 한의원장님께서도 약은 그만 먹으라고 하시더군요. 이 모든 게 마음 공부하면서 이루어낸 결과라고 보아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여러분들 좋은 불법 만났으니 성불하십시오. 끝으로 큰스님을 비롯해 여러 스님들, 제 약수발 해주신 주위 분들과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자기 뿌리가 위대하다는 걸 여러분들은 아주 절실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 뿌리만이 자기를 리드해 나갈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시고 잊지 마세요. 남을 아무리 믿어도 소용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십만 명이 깨달았다 하더라도 우주간에 꽉 찼다 하더라도 하나입니다. 하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하나도 고정됨이 없으니 공했느니라, 그저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돌아가니 이것 또한 하나도 없는 게 아니겠느냐는 거죠.
오고 가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진짜로 믿고 맡겨 놓으세요. 옛날에 공부할 때 물 내려가는 걸 하루종일 보면서 그 물이 말할 때를 3일 동안이나 기다렸답니다. 나도 그렇게 미련스러웠어요. 그랬듯이 열심히 하십시오.
오늘만 살고 그만 두는 것 같으면 이런 소리도 안 할 겁니다 아마. 그런데 세세생생이니까요. 이 중세계에서 상세계로 벗어나야 되겠죠.
그럼 오늘은 이 것으로써 끝마치겠습니다.
- 한마음 대행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