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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로
창 32: 1-32
야곱의 신앙 성장에 있어서 3대 봉우리가 있습니다.
①가정의 신앙 교육-브엘세바에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받은 가정의 신앙 교육이다.
②벧엘의 신앙 교육-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언약을 직접 들었던 체험적인 신앙 교육이다.
③얍복 나루터에서의 신앙 교육-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고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신앙교육이다.
야곱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이 지적으로 성장하였고, 벧엘서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이 뜨거워졌으며, 얍복강의 씨름에서 옛 사람이 꺾어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이 성화 되었고 의지적으로 큰 변화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신앙교육은 知(지), 情(정), 意(의)를 갖춘 신앙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생긴 생의 중대한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육과 영, 옛 생활과 새 생활 사이의 대결을 예증해 주는 생생한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야곱으로 하여금 잊어버렸던 과거를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형 에서가 자신을 용서 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그렇다면 야곱은 20년 동안 고생하여 얻은 것들을 하루아침에 다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과거가 어떤 사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과거를 지울 수 없었으며, 20년이란 세월도 역시 그 과거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그는 독특한 세 가지 다른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과의 만남(1-20)
야곱은 처음으로 벧엘에서 천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28장). 라반과 화해의 언약을 맺고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을 떠난 야곱이었지만 더 큰 근심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형 에서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심하는 야곱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마하네 엘로힘)라고 하였으며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하였다. 마하나임이라는 뜻은 "두 陣營(진영)"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이렇게 부른 이유는 두 진영-하나님의 진영과 야곱의 진영이 만난 장소였기 때문이었거나 두 군대로 형성된 많은 천사들, 즉 萬軍(만군)의 천사들이 야곱의 前後(전후) 또는 左右(좌우)에서 옹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걱정하는 야곱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군대로 호위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부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할 때 히브리서 1:14절과 시편 91편 11-13절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 꾀를 신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선물 공세로 에서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준비한 선물들은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젖 나는 약대 30, 그 새끼 30,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 그 새끼 10 마리 모두 합하면 580마리나 됩니다.
오늘날에 돈으로 환산한다고 하면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는 자기의 식솔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7절). 보호하는 천사들의 군대는 무시하였습니다. 육신적인 확신으로 이런 단계를 밟은 후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라반으로부터 보호하셨던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31:24)
주님과의 만남(21-26)
야곱은 이와 같이 인간적인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도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기도하기 위해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고(출3:1-12), 엘리야도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7-14).
사람이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에 일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천사(호12:4), 하나님(30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요, "하나님의 천사"(the Angel of the God) 즉 때로는 여호와의 사자라고도 표시되는(22:11, 출3:2)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야곱과 씨름하려고 오셨고, 이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것은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씨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며, 양보할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 12:2)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호 12: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호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갈2:20)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하시려고 그를 깨뜨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밤새도록 자기를 방어하였고 항복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가 죄를 지은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환도뼈를 쳐서 뼈를 부러 드렸습니다.
이제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꾀를 부리거나 축복을 받으려고 거래를 벌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천사를 붙잡고 축복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만남(27-32)
사람은 먼저 주님을 보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으며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씨름 막판에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의 참된 자아가 "야곱-사기꾼!"이라고 고백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직면하고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의 뜻이 무엇입니까? "발 뒤꿈치를 잡은 자, 앞서려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본 모습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속임수로 빼앗은 야곱, 하란에서 간교하고 욕심이 많은 라반을 능가할 정도로 능수 능란한 야곱이 아닙니까!
이제 야곱은 자신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죄를 고백하자 그는 축복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겨룸,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칼빈은 본문을 해석하기를 "네가 하나님을 상대로 그토록 강하게 맞섰으니 사람들에게야 네가 더욱 이기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능력을 소유하는 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길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큰그릇으로 쓰임 받지 못합니다. 이제 야곱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자기의 능력이 아닌 새로운 능력으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으로 행하지 않고 성령의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새로운 걸음걸이가 증명합니다. 야곱은 이제 절룩거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절게 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는 당당하게 나아가 갑니다. 만약 에서가 공격해 온다면 그는 도망도 갈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능력을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능력의 표시입니다. 세상 감방에 가면 그곳에 들어온 숫자에 따라 별을 붙여 줍니다. 물론 감방 안에서는 별의 숫자가 많을 수록 대접을 받겠지요. 그러나 그런 별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헛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급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깨어진 표시로 주시는 계급장은 능력의 표시입니다.
31절을 봅시다.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창 32: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새로운 날을 맞이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찬란한 햇살이 온누리를 비쳤습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보았던 아침 햇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가 떠오른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절룩거리며 나아갔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야곱이 받은 은혜와 영예를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야곱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깨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자아가 깨어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이제 여러분의 모습도 완전히 변화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을 겸손하게 하신 하나님
창 32:1-32
요 절 : (창32: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승리하고, 겸손의 대가를 지불하고 승리를 얻는다. 이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과 또는 사람과 씨름하여 이기는 것은 힘에 있지 않고 육신의 연약함과 고통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진리는 변치 아니할 것이다. 승리한 어린양은 아직도 갈보리의 상처를 지니고 계시며, 죽음을 당하신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날 아침 라반이 야곱을 만났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역겨움의 표시로 저는 다리를 비적했으리라. 그러나 그가 야곱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면 완악함과 교활함이 사라지고, 그 목소리가 온유하게 바뀐 사실에 놀라리라.
1. 그의 힘줄은 움추러들었고 그의 교만은 누그러졌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 영적 승리가 고조되어 야곱은 건방지고 자만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유혹을 아시고 미리 처방하사 그의 육체에 연약함을 주셔서 항상 그이ㅔ게 있어서 “야곱”으로 깨닫게 하셨다.
용기와 도전의 생애가 이제 겸손과 순종의 생애로 변화되는 현장을 보라. 이제 자신의 힘으로 형 에서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몸부림 치는 그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라.
2. 움츠러든 힘줄은 승리의 비밀이었다.
천사가 그 힘줄을 치지 아니하였더라면 야곱은 자기 힘만 믿고 계속 저항 했을 터이며, 결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외치며 천사를 부등켜 안지 않았으리라. 바로 이 행동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ㄹ이 되었고 귀인이 되었다. 환도뼈의 큰 힘줄에 상처를 받아도 “하나님과의 대면”에 자족하면서 행복해 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3. 움츠러진 힘줄 때문에 우리도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이 적고, 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야곱은 이때부터 좀더 순례자의 태도를 갖게 된다.
그가 발견한 사실은 그의 발걸음이 좀더 느려야 될 것이며, 그래도 괜찮은 것은 그가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더 집착하면서부터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모든 것을 알기 시작한 그의 생의 새로운 출발은 실로 의미가 깊다.
과거의 그 용기와 도전과 욕심이 변하여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그 모습, 바로 이것이 그의 삶을 대변한다.
적용
1)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위주로하여 살아간다.
2) 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갖게 되면 그는 하나님이 원 하시는 길에 모두를 맞추는 귀한 삶의 출발을 갖는다.
3) 하나님과의 만남은 나의 육신의 아픔이나 불편도 아무런 문제가 되 지 아니하고 오직 행복할 뿐이다.
4) 하나님과의 만남은 과거가 문제되지 아니하고 오직 미래의 확신만 이 있을 뿐이다.
창세기 32 장 브니엘의 하나님
1. 야곱은 약속의 땅을 향해 돌아가던 중 누구를 만났습니까(1)?
야곱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2)?
그 땅 이름을 무엇이라 하였습니까(2)?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2.야곱은 어디에 사는 누구에게 자기의 사자를 보내었습니까(3)?
그들에게 어떤 멧세지를 전하라고 부탁하였습니까(4-5)?
*왜 먼저 사자를 파송했을까요?
3.사자들은 야곱에게 돌아와 무어라고 보고했습니까(6)?
그 때 야곱의 심경은 어떠했습니까(7)?
그 결과 그는 어떤 작전을 구사합니까(7)?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8)?
*야곱이 1절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습니까?
4.야곱은 하나님의 호칭을 어떻게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까(9)?
왜요?
야곱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어떤 명령과 약속을 하셨으며 어떻게 이루어주셨다고 말합니까(9,10)?
그의 간구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11)?
마지막으로 그는 어떤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까(12)?
*예전에 이와같이 약속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 적이 있었던가요? 야곱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어느정도 성숙되었습니까?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적인 면은 무엇인가요?
*적용 : 나도 야곱처럼 이런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까? 그때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의 능력으로 이겼던 적이 있었습니까? 혹시 현재 어려운 문제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실까요?
5.야곱이 경야한 곳은 어디입니까(13)?
그는 거기서 에서를 위하여 예물들을 얼마나 준비하였습니까(14-16)?
야곱은 그 예물들을 어떻게 구별하였으며 어떤 당부의 말과 함께 에서에게로 보냅니까(16-20상)?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0하)?
*야곱의 기도와 그의 처신과는 조화가 됩니까? 기도 따로 일 따로의 이원론으로 봐야 되는지 아니면 지혜로운 처신으로 봐야 되는지?
6.야곱은 어떤 순서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까(21,23)?
그는 왜 홀로 남아 있습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아무리 다 써봐도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그의 간사함이 무력화 되는 순간이다.
7.누가 야곱에게 씨름을 걸었습니까(24)?
그 사람은 왜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까(25)?
야곱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26)?
8.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까요?
그가 야곱에게 준 이름은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입니까(28)?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긴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또 사람과 더불어 겨루이 이긴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입니까?
왜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읍니까?
9.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었습니까(30?
그 뜻은 무엇입니까(30)?
10.“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에서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까?
환도뼈를 친 사건 때문에 현재까지 이스라엘에서 지켜지고 있는 풍습은 무엇입니까(32)?
2.좀더 생각을 요하는 문제
1.호12:3,4에서는 야곱의 씨름 장면은 어떤 상징적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야곱의 어떤 사움이었습니까?
2.씨름 사건을 통하여 야곱은 무엇을 깨닫습니까?
3.이 장은 야곱이 거듭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거듭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