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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생활을 하다가 보면 고향 사람을 가끔 만난다. 그래도 고향 사람이라면 돕는 일이 많았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타향에서 만난 고향 사람들의 끈끈한 정겨움은 때로는 눈물 겹도록 고마울때가 한두번이 않이였다. 그 중에 강 갑생군이 한 사람이다. 그리고, 보안사 옥영길 중사. 이름도 모르는 옥포 아주 사람. 진해 사람 보안대 김종수 대위. 제대후에 남해 창성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친구. 미국을 건나와서 business를 할때에 현금으로 도와주신 진해고등학교 선배님 Charles C. Kim,(김철석, 金哲錫,) 본관 선산(善山)김씨. 뉴욕에 살던 순흥안씨 안경일(마태오)군이 생각 난다. Charles C. Kim,(김철석, 金哲錫,) 선배님은 필자 보다도 9년 선배이지만 살아갈때 잊지 못할 귀중한 德目(덕목)같은 Mail은 지금도 보내 주신다. 또 미국을 건너와서 north Carolina Greensboro 에서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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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건너와서 이모저모
갑생군이 죽기전에 형아~ 형아~ 하고 e-mail이 왔다. 그러다가 얼마후 전화를 하니 소천 하였다고 했다. 나는 17세때 고등학교를 못갈바엔 차라리 해병대를 지원하겠다고 부산 모병소를 갔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뜻를 이루지 못하고 육군 창원 예비사단장을 직접 찾아가 사정을 해서 겨우 신검에 들어 가서는 중이염이 있다는 신체적 결격 사유로 실패하자 사단장이 직접찾아와서 나를 보고 안된다고 했잖으냐고 되묻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자란 나는 5살때부터 바다에서 살다싶이 하여 귀에 물이 들어가서 염증이 생겨 할머님께서 귀를 휴벼주던 추억이 난다.
1968년 戊申年(무신년) 陰曆(음력) 6(己未)월 22(戊子)일에 족하 양용준이 태어나다.
1968년 3월 12일 제2 논산 훈련소를 입대하고, 그해 6월 22일 족하가 태어 나다.
형님 가족이 족하를 다리고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허바허바 사진관으로 면회를 왔다.
대전통신학교를 다닐때도 면회를 왔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생각 했을 것이다.
1962년 10월 1일. 보병 제25사단 71연대 인사과 근무 시절에 면회를 가서 10월 1일 국군의 날 휴가를 나와 촬영한 서진이다. 당시 서근숙군이 군입대 기념으로 서울에서, 앞줄 좌로 부터 김옥녀(김정일 여동생, 양정자 고모의 시누이),양정자, 서옥자. 장목중학교, 동창.뒤로 양명생. 서근숙. 필자 : 양방수.
1963년 1월18일. 보병 제25사단 71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하다가 "캬츄사"로 전출하기전 경기도 보충대에
있을때 비상금 3만원을 들고 형님을 찾아 갔을때 형님이 보충대 PX앞에선 나를 촬영한 기념 사진이다.
서라벌 고등학교 진학한 후 부터는 객지 생활을 하면서 정처없이 빈손으로 서울에서 떠돌아 다녔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국가가 위기에 처해졌다는 긴급한 판단에 그 동안 징집에서 밀려난 장정들을 나이를 가리지 않고 45세 까지 과령자들 까지 모두 입대통보를 내렸다. 그 중에 나도 끼였다.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강갑생군은 장목초등학교 2년 후배다. 1969년 파월 백마 29진으로 출전할 당시 姜君(강군)은 나보다 일찍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오음리 훈련소 사병담당 사병으로 근무 하고 있었다. 당시 파월 용사들은 한 제대 1,000여명이 훈련을 받고 출전 하였는데,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자리에서, 과령자로 구분되어 열외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상병 한 사람이 주민 등록증을 읽어 보다가 거제군 장목면 관포리,,,,,하면서 ....어.... 그러면 강갑생 병장님을 아세요???했다... 사실 오랬동안 혜어져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거제도 특히 장목 사람이
면... 나를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는... 안다고 대답 했더니... 기다려 보라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감감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1시간이나 지났는데 육군 중위가 나타나서 거제도 장목 관포가 고향이라면 조윤길씨를 아느나고 물어서 옆집에 아저씨라고 하자 ~ 아 ~ 그래요~ 하고 떠났다.그리고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파월 전투부대 병사들과 함께 오음리 산골짜기 부대 막사에서 산에 가서 겨울용 야전용 난로에 땔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내려와서 많은 병사들과 함께 정훈교육을 받는 시간에 필자의 이름을 호명하며 찾았다. 더불빽을 정리하고 나오라고 해서 나가보니 한대의 짚차가 밖에 대기 하고 있었다.
짚차에 올라타고 한참을 이동하여 갔더니, 한 병사가 나를 보더니 형님~ 반갑습니다. 고생하십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군에 늦게 입대하여 이지경이 되어 파월을 결심했다고 하니.... 형님 걱정 하시지 마세요... 최대한 돕는데 까지 돕겠다면서...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식사하러 갑시다. 해서 그냥 따라 갔다. 부대를 경계한 나무철책사이로 나가 어느 민가로 안내 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쌀밥에 굴비에 부대에서 보지 못하던 고급 급식이 나왔다.
초등학교를 다닐때의 이야기를 할때 까지는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혜여져 한번도 만나지 않아 전혀 생각 나지 않았던 후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 동생 "양경자"가 동창이라는 말에 그때에 야~ 비로소 ~ 깜작 잊었던 강 갑생군의 어렸을때 매동에서 책가방을 어깨에 매고 등교 할때의 추억이 생각 나 ... 아~~~ 그래 그래~~맞장구를 쳤다.
형님 ! 형님께서 서라벌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니 군연예대에 편입 시켜 줄터이니 해보라고 해서, 늦게 군에 입대한것도 쑥서러운데 연예계라니 아니라고 잘라 거절 했다. 도리켜 보면 그때 갑생군의 말대로 연예계로 나갔으면 월남 위문공연자로 나가 제대후에도 연예방송에도 출연 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아 있다. 당시 군연예인들이 제대후 거의 방송에 출연하여 유명 개그맨이 되였다.
위문공연 온 가수와 함께 ~ 주소도 사진도 주었지만 ~ 연락하지 않았다.
싸이공에서
이글을 쓰는 필자의 옆자리에서 TV를 보고 있던 장 PD(한국과 미국에서 쟈니 윤Talk Show를 演出(연출) 進行(진행)을 맡았던 P D(program , direction]가 양 국장님 무엇 합니까? 물어 ~ 아 ! 군대 회고록을 쓴다고 하니 이야기를 듣고는 그때 연예계를 나갔으면 사회적으로 빨리 진출했을 텐데...아쉽다고 했다. 왜? 하니 ~ 양국장님은 남다르게 Catch를 잘 하고 瞬發力 (순발력)이 뛰어나 미국에 와서도 평생 카메라 한대로 업을 삼고 영화를 했다가 미주방송인협회 총무국장으로 할동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안타까워 했다.
재미교포 장연희 PD
http://www.yeonchang.org/index.html
http://blog.daum.net/bangyang/3049
돌이켜 보면 70년대 당대 최고의 코메디언 인기스타중에는
MBC-- 배삼룡. 구봉서.. 이기동. 박시명. 남보원. 권기옥. 남철. 남성남. 이용식. 등등
TBC( 오늘날의 kbs전신)-- 서영춘. 송해. 심철호. 임희춘. 최용순. 배일집. 배연정. 이주일. 백남봉등등이였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위의 프로그램들이 소재고갈과 오랫동안 활약했던 코메디언들에 대해 국민들이 식상함을 느끼고.. 더구나 당시 다운타운가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기존의 코메디언들과는 다른 스탠딩 개그가 인기끌기 시작하자 신선함에 반한 방송국 피디(PD)들이 젊은 신세대 개그맨들을 과감히 다양한 방송에 적재적소에 기용하기 시작하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월남으로 위문 편지를 보내왔다. 뒷면에 내용이
양씨~ 보다싶이 앞면에 당신 조카 양수와 형수가 ~ 부산송도 구름다리 입구 신산리 박석윤.
25사단 시절 허바허바 사진관 박석윤씨의 아들 양수가 유달리 따랐다.
당시 강갑생군 曰(왈) 형님 ~ 적군과 싸울때 총알이 날아오면 죽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엎드려 집니다. ~ 걱정 하지 마세요 ~ 그 의 주선으로 필자는 훈련을 받지 않고 출전하는 맹호 부대 호송관이 되어 부산 제 3부두에 맹호용사들을 인솔하고, 갔다가 휴과를 받아 한달후 귀대해서 백마 제 29진으로 월남에 투입되었다. 월남에서도 신원검색에서 과령자로 구분되어 대열에 서서 있는데, 그때 본적지가 거제도라는 사실을 안 거제도 "아주"사람이라는 담당 사병이 선배님 걱정하시지 마세요. 잘 처리 하겠읍니다. 하고...혜여졌다... 그 아주 사람이 별탈없이 월남 전선에서 다시 제 투입되게 하여 현지에서 또 다시 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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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방수 백마 29진으로 월남 전선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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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파병된 부대와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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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3부두에서 월남을 떠날때는 LST 함대를 타고 부산 앞바다를 지나고 제주도를 벗어나 남중국해를 지나자 마자 노도같은 파도가 배를 덮쳐서 지하 식당의 커피잔은 우루루 쏟아지고 모든 병사들이 뱃멀미로 쿠토하면서 엉금 엄금기어 가까스로 자기 침대에 누워 꼼작도 못했다. 그래도 나는 바닷가에서 어릴때 부터 단련이 되어 가까스로 참았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님께서는 1961년 辛丑年(신축년) 陰曆(음력) 12월 7일에 선종하셨다. 월남 전선에 투입되어 LST 함대를 타고 가던 이날이 할머님의 忌日(기일)날이라 열심히 사병들에게 봉사 했다. 할머님을 위해 기도 하는 마음으로.....
아침식사 시간에는 대열이 끝이 없었는데, 점심 시간부터는 식당에는 턴텅 비어 있었다. 전지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나오는 부식은 당시 우리 한국 병사가 평소에 먹는 식사치고는 엄청 고급이였다. 생선횟감이나, 과일은 휴지 사과며 바나나 오랜지 밀크 등등 충분히 만킥 할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개미색끼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정훈 장교 육군대가 나를 불러서 가니, 나를 보고는 사병 제대장을 하라고 선임을 했다.
계급은 상병이였는데, 그냥 병장을 달고 보니 양병장이라고 불렀다. 사병 제대장이 하는 일은 저녁 8시
면 사병들의 점호를 담당해서 보고를 했고, 낮에는 미군들이 장병들의 빨래를 하는 곳에서 사병들이 덤는 이블
시트를 빠는 새탁기 일을 도와 사병들을 데리고 가서 하라는 것이였다. 그거야 어렵지 않아 잘 할수가
있었다.
이튿날 점호 시간에 사병 한사람이 모잘라 보고를 했더니 장교 한사람이 나를 보고는 3층에 신부름을
시켰다고 해서, 빨리 불러 오라고 했더니 김경희(바오로 : 서울 신당동 성당 제16대 주임신부로 2014년 2월 ~ 2017년 2월 까지 근무후 은퇴) 병장이 왔는데 깜짝 놀랐다. 현재 염수정추기경과 신학교에서 동문수학 하던 오래전에 알던 친구가 나타나 얼마나 반가운지?! 아니 학사님이 어떻게 하니... 그냥 신학교 졸업을 위해서 등록금을 벌겠다고 제대 1년이 남아 자원했다고 해서 용케도 같은 부대에서 근무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송순용 신부님의 전속 부관으로 일하면서 일선에서 영어를 통역 했었다.
양방수 小人 나라 사람과 함께....
월남 처음 투입되어 부대 외각 근무를 설때의 필자의 모습. 김경희 신부가 혼자 설때도 같이 동참해 주었다.
부대를 들어가니 근무하는 태도가 내가봐도 말이 아니였다. 웃통을 벗고 모자도 쓰지 않고 보초를 서는 사병도 있었다. 날씨가 더워 하이바를 벗어 달걀을 놓으면 "후라이" 된다는 더위다. 전 부대원을 비상 집합시켜 혹독한 氣合(기합)을 주었다. 그후 중대장이 양병장님이 사전에 무전을 좀 쳐 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그 후 부터는 한국에서 군인 위문 공연이 오거나 "사이공"에서 눈요기 영화 필림을 각 예하 부대 중대장들이 상납을 하면 영사기를 들고 가는 사병은 아무도 없었고, 그 자리에 흥이 돋으면 양병장도 한잔 하자고 맥주를 권하기도 했다.
평소에 김경희 병장이 부대 경계초소에서 저녁이면 보초를 서서 때로는 나는 시간이 있어 같이 동무겸 서 주기도 했는데 어느날 먼저 전출온 고참들이 너무 괴롭혀서 힘들다고해서, 아니 학사님은 병장인데, 사병들이 병장 보다 높은 놈들이 어디있어요? 만약 앞으로 그러면 계급은 내가 높은데 까불면 가만 않있을테니 함부로 까불면 下剋上(하극상)으로 뽄데를 보이라고 했더니, 그 다음 부터는 더 덤비지 않더라는 웃으운 사건도 있었다.
부대장과 디안군수댁에 초청되어 갔다가 중국식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 받고 군수자녀들과 촬영한 사진이다.
어느날은 김병장이 감옥을 갔다고 했다. 그 사람이 감옥을 갈 위인이 아닌데 뭐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 했다. 1주일 후에 나왔다. 사건은 장교들이 "미군부대"에 가서 보급을 받을때 통역을 해 주었는데. 장교들이 보급품을 받아 찻떼기로 보급품을 "사이공" 시장에 팔다가 미 헌병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전후 조사 결과 김병장이 통역한것이 발각 되었지만 김병장은 영어가 안되는 장교들의 통역만 해주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풀려 나왔다.
나는 1년을 체우고 귀국하고, 김병장은 1년을 더 근무하다가 귀국하여독일 유학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더니 막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짜장면 한그릇 먹고 혜어졌다가 이태원 성당에서 독일로 유학가는 신부님에게 김경희 신부가 독일에서 수학하고 있으니 찾아 보라고 하니, 아니예요~ 일산본당 주임신부로 와 있다고 해서 달려가서 오랜만에 만나 종일 빵집으로 일선 유명한 고적지로 같이 놀다가 왔다. 고적지에서 한문을 번역하는 나를 보고 언제 한문 공부를 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후 서울로 이동하여 사목을 할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수를 도와 달라고 했더니 성당 새마을 금고에 취직도 시켜 주었다. 고마운 義人(의인)이였다.
윤수태 대위는 월남에 도착하자 병사들을 差出(차출)하는 자리에 나타나서 영화나 사진에 경력이 있는 병사가 있으면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정보과에 발령을 해서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인사계 담당 윤수태 대위는 적어도 일주일에 맥주 1팩(6캔)을 사다가 상납을 하지 않으면 전방 부대로 보낸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병이 그럴 여유도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나는 자존심으로 하지 못했다. 결국 대기발령을 받아 몇주를 있었는데 후임자가 번번히 실력이 없어 감당을 못하자 윤수태 대위는 보직을 나에게 돌려 주었다. 자주 만나던 미군 친구들과 함께
그런데 제대날이 다가와도 귀국을 시키지 않아 월남에서 떠날수가 없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사병담당 거제도 아주 사람에게 찾아가서 월남돈 7,000피아스트를 주면서 사실을 이야기하고 귀국 특명을 요청했더니, 귀국 특명이 내려 부산 3부두에 와 보니 윤수태 대위는 비행기를 타고 먼저 왔다며 귀국 BOX를 찾으려고 나왔다가 필자를 보고 어떻게 귀국했느냐며 깜짝 놀랬다. 이 사람아 ~ 자네가 제대를 막는 다고 ~ 내가 제대를 못할것 같은가??? 하고 나무랐다... 이제 우리는 사회인으로서 더 직속 상관이 아니라고 나무랐다. 그렇게 더럽게 살지 말라고.... 나무라고 혜여졌다. 그 자리에서는 구타를 할수가 없었다. 軍(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군대 이야기를 더 진솔하게 남기고 싶다. 후손들과 후배들을 위하여 남긴다. 요즈음 군대 생활도 우리때 처럼 쿠타를 많이 하는가?
25사단 근무 당시 윤봉준 25사단장을 보필하던 본부사령 전00소령은 사병들을 훈계 할때는 반드시 "욕으로 시작하여 욕으로 끝나는데... 그 욕이 과관이였다. 야~ 이 씹끼야~ 야 ~ 이 버러지 같은 놈아~ 야 ~ 양갈보 외상씹에서 나온 버러지 같은 놈아~ 상사로서 입에 답지 못할 무지 막지한 말로 사병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군에서나 사회서도 이간질하고 간신질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이런 전 소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같이 근무하는 임상병이 있는데서 대한민국 고급 장교라는 소령이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사병들에게 훈육할수가 있느냐고 개탄을 했다. 옆에 있던 임상병이 이때다 하고 전소령에게 가서 고해 바쳤다. 그러자 숙소로 찦차가 와서 필자를 연행해 갔다. 부대 막사 전소령 사무실에 들어 가자 마자 ~ 뭐! 이 씹 쌔기 ~ 이 버러지 같은 놈아~ 야 ~ 양갈보 외상씹에서 나온 버러지 같은 놈아~권총으로 쏴 죽인다면서 권총을 꺼내어 실탄을 장진하고 쏘아 죽인다고 노발대발 야단이였다.
나도 오기가 발동했다. 나도 한달에 3만원을 사단장에게 상납을 하는 충성스러운 부대 필수 요원이다. (그 당시 서울 변두리 집 한채가 30만원 하는 거액) 한번 해 보라는 배짱으로 나왔다. 그래 ~전소령 ~ 한번 쏴바 ~ 나는 홀몸이고 ~ 당신은 장가를 가서 가족이 있으니 누가 손해인지 한번 해보자고 맞 바다쳤다...
결국 그날부터 전소령은 사무실 창고에 가두워두고 퇴근을 못하게 열쇄로 잠그고 가두었다. 이런 사건을 두고 감옥에
보낼수가 없자~ 자기 사무실 창고에 가두었다. 이날 저녁 전소령은 자매결연으로 맺은 진명여중고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BOX를 헌병대장, 참모장, 보안대등등,, 상납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정작 일선 병사들에게는 보내주는지알수가없었다. 하룻밤을 지내자, 이소식을 듣고 이튿날 훈련 더불백 동기인 참모장 당번이 저녁이면 열쇄로 열어주고아침 일찍 전소령 출근전에 출근하라고 도왔다. 그날부터 숙소로 나와 신산리"허바허바사진관"과 민간 숙소에서 잠을청하고 출근을 했다.
천주교를 신봉하던 나는 하느님께와 돌아가신 어머님께도 간절히기도 했다. 며칠후 어느날"허바허바사진관"에서 대위계급을 단장교를 만났는데, 경상도 사투리 로말해 경상도가 고향이냐고 묻자. 진해라고해서... 진해라면 우리 고모님도 진해에 살고, 삼촌도 진해고등학교를 나왔다며 말하고, 진해선배들의 이름을 모두 말했더니... 그러면 거제도 김덕근씨를 아느냐고 물어 저의 아저씨라고 하자~ 아~그래~ 그러면 오늘 내숙소에 놀러오라고 해서 찾아갔다.
군생활에 어러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소령하고 일어난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비상전화로 전소령을 불렀다. 전소령~ 나 김사장인데~ 부대 양방수라는 사병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니 우리 어머님께서 양병장 안부를 묻길래 전소령에게 잘부탁한다고 전화를 끈었다. 이튿날 다시부대로 복귀했다.
그후 윤봉준 소장이 25사단을 이임하고 주월부사령관으로 근무하던 김용휴 장군이 25사단 사단장으로 발령 받아왔다. 사단 장병들을 모아 연설하던 이야기중에 아들 이야기를 끄집어내엇다. 소위로 입관하여 가난할때 집안에 TV가 없어 아들은 부잣집 문틈으로 TV를 시청하다 보면 창문을 탕하고 닫으면, 아들은 오기가 발동해서 연탄재로 혹은 돌로 그 집 창문을 뿌씨기가 일수였다고 했다. 그래도 아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고 사병들에게 탱볕에 서 있는 장병들에게 연설했다.
자신은 하늘의 비행기를 보고는 나는 겨우땅에서 자동차로 다니는 자신이 한심할때가 있다며, 장병 여러분들도 웅지
와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상관이 바뀌자 전소령도 육본 전출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우연히...PX에서 전소령을 만났다. 나는 전소령 옆자리에 앉아서~ 전소령~ 양방수는 평생 못잊을것이야~ 하니.. 허허 웃었다... 제대후에 육본에 출입할때 전소령이 육본에 근무한다는 소문을듣고도 찾지않았다. 人間(인가) 말짜~
25사단 시절 중대장을 맡았던 오신기는 대령을 달고 있어 만났다. 육본 출입증을 달고 자동차로 육본을 드나드는 나를 보고 감짝 놀랬다.
2008년 오수영(히지노) 신부를 보필(輔弼)한다고 1월 부터 3월 말까지 있으면서 마지막 한국을 떠나올때는 김경희(바오로) 신부님의 숙소에서 같이 기거(起居)할때 3월 28일에 성당 성모상 앞에서 촬영한 사진. 그때 오수영(히지노) 신부에게 양바오로씨는 오히지노 신부를 따라 다니면서 보필할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김경희(바오로)신부의 말이 적중했다. 金慶熙(김경희)신부도 2017년 2월 14일 왕십리 본당에서 은퇴했다.
사람의 운명은 한치의 앞을 모른다. 필자(筆者)가 월남전선에서 육군(陸軍) 상병(上兵)으로 근무할때에 주월사령관으로 재임 하시던 이세호(李世鎬) 사령관을 우연히 육군본부(陸軍本部)입구에서 헌병(憲兵)들과 출입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보았다.
8기통 쎄단차를 몰고 온 이세호(李世鎬) 장군을 못들어 가계했다. 아~ 이 사람아 나, 1군 사령관 이형근(李亨根) 장군(將軍)을 만나러 왔네. 들어 가게 해줘. 이세호(李世鎬) 사령관이 난감해 하시는 모습을 보고 참을수가 없었다. 필자(筆者)가 달려가서 사령관님! 하자. 당신을 알고 사령관님이라고 하자. 눈이 번쩍 띠었던 모양이다.
제대(除隊)후 새문안 교회를 나가시던 이세호(李世鎬) 장군은 집 전화를 번호를 몰라 긴급 사항이 있어도 못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늘 전속부관이 걸어서 전화를 주었으니 기억 할 이유가 없다. 그런분이 이렇게 당했으니 얼마나 귀가 찷까 생각 해 보았다. 자동차 키를 저에게 주시고, 그냥 일단 들어 가세요, 자동차를 회관 주차장에 Parking시켜 놓고, 열쇄 키를 드리면서 자동차가 어디에 Parking 했는지 위치를 알려드리고 혜여졌다.
사진 : 좌측이 김경희 신부. 양방수. 앞에 옆집 조윤길씨 아들 조 성제군. (성제군이 어느날 부대를 찾아와서 형님 좀 도와 주세요 했다. 결국 신체도 건장하고 인물도 있어 헌병대로 발령받아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헌병대장에게 찾아가서, 그래도 역대 참모총장은 예우(禮遇)는 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아저씨 ~ 저 사람들이 육군대장으로 근무할때는 우리는 초등학교 학생이였는데, 어떻게 다 알수가 있습니까? 하고, 난감해 했다. 어느날 육본 신재성 장군이 전역을 하고 3일 후에 육본을 들어 올려고 하자 헌병(憲兵)들이 아저씨 못 들어 갑니다. 하고 제지(制止)하자. 필자(筆者)에게 와서 너무 어이가 없다고 하면서 한탄 하던 모습이 떠 오른다. 실세(實勢)다. 자리를 뜨면 낙엽이 땅에 떨어 지는 형국(形局)이다. 그러니 누구나 한치의 앞을 모르니 자만(自慢) 하지 말아야 한다.
월남에서 일이다. 정글속에서 이세호 사령관을 만났다. 모든 병사는 철모를 썼지만 필자는 카메라에 전투복을 입고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 해서인지 명찰을 손으로 살펴보고 아무 소리 없이 혜여졌다, 철모를 쓰면 기동력이 없다.
김용휴 장군이 사단장으로 오자 인사 이동이 단행 되었다. 전 주월사령관 전속부관 이던 김용성 대령이 인사참모장으로 발령받아 와서 근무했는데. 2012년 필자가 LA에서 Computer 교육프로금을 운영할때에 용감하게 손을 들고 선생님 ! 질문 있읍니다. 하고 용감하게 질문하던 김대령을 만났다. 김해김씨라는 김대령은 뿌리를 찾기를 원해 SNS상에나타나는 같은 姓(성)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꾀하기 위하여 이룬 모임 花樹會(화수회)를 연결 시켜 주었고, 그 후 오랜지 카운티 재향군인회에서 부회장으로 할동하던 모습을 보고 서로 교류 했다.
김용휴 장군이 사단장으로 오자 인사 이동이 단행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월남을 지원할때 사병게 요원이 돈을 요구 했다. 그래서 월남을 지원을 할수가 없었는데. 마침 부대 인사 이동으로 72연대로 전보 발령을 받아 눈오는 날 더불빽을 질머지고 연대로 가는 필자를 본 연대 주임 노상사가 나를 보더니 양병장 어디가느냐고 칲차를 타고 가면서 물었다.
72연대로 전출되어 간다고 하니, 잘되었다고 파월을 지원 했으니 최대한 돕겠다고 했다. 노 상사는 허바 허바 사진관에 가끔 들리면 박석윤 사장과 친끈하게 지냈고, 군인 위문 공연 가수들이 오면 가수들의 사진을 전지로 만들어 진열대에 걸면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추억이 나고 더우기 신산리 사진관에서는 꿈도 못꾸는 사진을 걸자 박 석윤 사장도 목에 힘을 주었다. 그때 노상사를 데리고 파주 장마루 촌에 가서 "PETRI(패트리)"카메라를 사드리고 촬영 방법을 설명해 드린것 일이 있어 친한 편으로 양병장의 병과는 "전신타자병"인데 자리가 없고, 타겟이라는 무전통신병 자리는 있다고 해서 지원을 했어 월남으로 가게 되었다.
파윌 장병중에 5사단 장병들이 65명이나 되어 한 내무반을 차지해서 내무반 모두 함께 한 자리에서 오늘 부터 내가 내무반장을 한다고 하니 하사들도 대꾸가 없어 내가 그날 부터 내무 반장을 하고, 점호를 취했다. 그때 서울대를 다니던 양완모군이 같은 25사단 정훈부에서 근무해서, 양완모군도 같이 갔다. 점호 시간에는 밖에 나가 보초를 서게 도왔다. 그런데 지금 SNS상에 Facebook에 양완모군이 나와 안부를 물어도 대꾸가 없다. 항렬로 따지자면 조카인데... 나는 錫(석)자로 30세손이고, 완모군은 模(모)자 돌림으로 31세손이다.
드디어 월남에 전출하여 고참 부대원들이 신고식을 강요해서 마지 못해서 했다. 신고식 ~ 신고식을 하자 마자 ~ 어이 ~ 양상병 ~ 누나 있어 ~ 젖똥이 커~ 예뻐~ 별아별 모욕을 주어 ~ 나는 벌럭 소리를 질렀다. 신고식은 이런 것이 아니야~ 그러자 내무 반장 방하사란 놈이 구두발로 와서 차는 순간 ~ 야 ~ 이 개색끼 ! 이것이 신고식이야~ 네놈들은 형님도 부모도 없는 놈들이야~ 하고 M16소총을 잽싸게 들고 탄창을 장진하고 모두 쏴 죽인다고 고함을 쳤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생결단을 하고 전투에 뛰어든 나는 죽는것이 무섭지 않았다.
혼비백산한 내무반 병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한놈도 보이지 않았다. 총을 버리고 월남부대로 와서 잠을 자고 아침 부대로 복귀하니, 윗전에는 보고도 못하고 부대가 발깍 뒤집혔다, 그날 일직 선임 중사가 양병장 그런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에게 이야기 할 것이지 해서. 야~ 너도 똑 같은 놈이야 ! 까불지 말어~ 죽기 아니면 살기야 ~ 한번만 더 그래 봐라! 가만히 안 있을 테니... 하고 경고 했다. 당시 우리 부대는 계모의 등살에 군에 입대하여 월남에 지원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나머지 부친은 현역 보안사 대령으로 재직하던 자식인 사병이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건이 있어 부대는 어수선 할때였다.
필자가 주월 대사와 미군장성과 담소하는뒤에서 급히 필림을 장진하고있다.
때로는 오토바이로 트럭에 몸을 싣고 기동력이 있어야 많은 사진을 얻을수가 있었다.
사실 25사단 본부중대 사진 후생병으로 발탁되어 나가보니, 필자의 눈에는 모두가 돈밭이였다. 사단 12,500명이 나에게 돈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직할 예하 4개부대는 물론이고, 전방 71연대, 72연대, 수색대대에 나가보면 돈방석이였다. 검문소는 물론이고 가는 곳마다 양담배를 뿌렸다. 보층대나 전방부대는 훈련받는 사병들에게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양담배를 상납하고. 30분이면 거의 촬영이 끝난다. 수금은 사진을 전달하고 경리단에 명단을 제출하면 돈이 쏟아 진다.
신산리에서 양병장을 모르면 간첩이랄 정도로 인기가 대단 했었다. 심지어 오빠라고 찾아오는 아가씨도 없지 않아 있었다. 군대 생활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할동무대였다. 어느날 휴가를 얻어 후암동 성당에 갔더니 염수정 추기경이 자기동생 염수완이도 25사단 "유도탄"부대에서 근무한다고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귀대해서 부대를 찾아 갔더니 밖에서 담요를 털고 있었다. 그때 염수완 싱부님을 처음 만났다.
사실 "유도탄"부대는 돈많은 부잣집 자제분들이 와서 근무하다가 제대 하는 곳으로 유명하고, 아들들의 면회를 올때는 떡을 동궁이로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퍼 먹인다는 유명한 부대다. 그런데 염수완이는 그럴 처지가 못되어, 얻어 터질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유도탄"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전출 대기 발령을 받을때 필자와 같이 대기 발령받고 마음 고생을 같이 했던 전우다. 그때 많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았다.
수원교구 출신 이규철 신학생과 함께 훈련장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입대한 추기경 염수정의 동생 염수완 신부는 월남을 가기전에 같이 대기하면서 마음고생하다가 매
형이 26사단 인사장교라면서 결국 25사단 의무중대를 발령받아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제대를 했는데 "월남 가는 날"
아침에 과일 한 바구니를 사병을 시켜서 보내왔다. 제대후 1984년 "파푸아뉴기니" 신문기사를 보고는 금호동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할 당시 벽에다가 "양방수 파푸아 뉴기니를 가다"라는 신문을 대문짝하게 만들어 전 교우들이 읽어 보도록 벽에 붙혀둔 것을 보았다.
그도 2018년 9월 23일 상게동 성당에서 은경축을 맞고 은퇴하였다.
염수정씨는 1967년 후암동 성당에서 성가대와 "레지오" 활동을 같이 하면서 알게된 신학생으로 한살 후배로 어느날 성당에서 남산고개를 같이 내려 오면서 "수정"아 너 앞으로 뭘 할꺼야? 하니 "나 신부 될꺼야" 했다. 그후 1970년 7월 5일 부제서품을 받고, 1970년 12월 8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제대하여 나는 영화업을 했는데, 어느날 동생 수완이가 서품을 받는다고, 기록영화를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영사기를 들고 신학교 숙소를 찾아 시사회를 해 드렸더니 5만원을 사례비로 주었다. 그때 동생 수완이가 졸업을 못하고 留級(유급)해서 울었다고 고백 했다. 5남 3녀 중 여섯째로 셋째 아들로 태어나고 넷째가 수완이라고 했다. 廉洙政(염수정), 廉洙完(염수완), 염수의(廉洙義) 삼형제 모두 司祭(사제)가 되었다.
1968년 25사단 비룡부대 근무시 휴가나와 후암동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과 함께
1977년에 이태원 성당에 부임했다. 1978년 2월 23일 한남동으로 이사를 오자 "이태원 본당 신부"로 사목하고 있었다. 반가워 우리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그후 1979년 7월 15일 필립핀 연수차 이태원 성당을 떠났다. 2002년 1월 25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2012년 5월 10일 대주교로 2014년 2월 22일 바티칸 시국에서 추기경으로 서임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내가 촬영해준 사진을 가지지 못한 전우가 없었다. 돈을 안 받고 퍼 주었다. 모두들 좋아 했다. 물론 그들의 선임 장교들에게도 사진을 제공하고 잘 부탁한다고 섭외 할동도 빠짐없이 했다. 이분들은 제대 후에는 사제가 될 인물이니. 잘 부탁한다고.....내가 할수있는 유일한 무기였으니.....
이규철 신학생이 25사단에 입대하여 훈련장에 나와 기념촬영을 했다. 제대후에 카톨릭 연예계 협회장을 맡고 있던 이낙훈 국회의원이 한남동 자택으로 당시 일반인들이 타지 못하는 창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고급 검은 Sedan차를 타고와서, 배우 신성일씨의 양아버지가 수원교구에서 세례를 받으니 같이 가서 축하를 하자고 왔다. 인기 스타 신성일씨도 와 있었고, 가보니 본당 신부가 이규철 신학생이였다.
그날 우리들은 파티를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혜어졌다. 가톨릭 주교회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개인 교리지도를 했고, 그분은 옛날 카톨릭 잡지를 보았더니, 할아버지께서 이북에서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기사를 보고,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이 규철 신부님에게 말씀드리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그후 본당 유치원 교육 프로그램 녹화를 부탁해서 해 드리고 현재는 SNS에서 접할수 있다.
죽기 살기로 전투에 투입하여, 한달에 전투 수당 1.000불을 준다는 이야기에 정작 와 보니 강제송금 40불에 주는 돈이 불과 한달에 5불이였고, 상관이라는 사병계 인사 담당 윤수태 대위는 저녁마다 캔 맥주를 상납을 강요했다.
대전 육군통신학교 TTYOC 164기 기장으로 졸업. 1968년 6월 29일. 우측 旗(기)를 잡은 筆者(필자).
대전 육군통신학교 TTYOC 164기 졸업기념. 각기 기장들과 구대장~1968년 6월 29일~ 앞줄 맨우측.
旗(기)를 들고있는 병사 쪽에서 세번째가 "군가"를 잘못 부르면 "촌-놈"이라고 하던 상주 친구 "구대장"
1968년 전방 25사단 시절의 본부중대 전우들과 사복을 입고 촬영한 이등병 시절 필자.
나보다 먼저 입대한 고참. 병장, 상병들이고, 뒷쪽 오른쪽 2번째가 고향이 통영이라고 했다.
대전 통신학교를 입교하자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 교관이 김수환 신부가 추기경으로 서임 될것 같다고 했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入所(입소)하자 중대장이 불러서 갔다. 오늘 부터 164기 기장로 소대를 陣頭指揮(진두지휘)를 하라고 했다. 저녁 8시 지침전에는 점호를 하고, 아침, 저녁, 저녁. 식당에 갈때는 소대를 인솔하고, 인솔할때는 대열에 마추어 "군가"를 부르고 "호령"하는 일등등... 일거일동을 잘 못할때는 문책을 받는 다는 조건이다. 식당에 오갈때는 "행군간"에 군가를 시작한다. "군가는 "<행군의 아침>"...하고는...하나. 둘. 셋... 동이트는 새벽꿈에......
주로 불렀던 군가는 <육군가>...백두산 정기뻗은 삼천리 강산... <휘날리는 태극기>....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들의 표상이다.....<제2훈련소가>....백제의 옛터전에 태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뼈가 지하에 훈연하니...
1968년 3월 논산 29연대를 출소하고 대전 육군통신학교 164기로 입소 하였다. 당시 서슬이 시퍼렀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 ~ 2009년 10월 31일)의 동생 이창의가 163기 기장을 하고 있었고. 164기 기장을 중대장이 選任 (선임)해서 했다. 9주 코스를 밟고 101보충대를 거쳐서 25사단으로 轉出(전출)되었다.
제2 논란 훈련소를 입대 할때는 한사람 한사람 신상 조사를 한다. 부모 친척중에 장군이나 정계의 인물, 장,차관 등등...심지어 학벌 까지... 대졸.. 고졸...중졸...훈련을 마치고 나면 장병 모드가 IQ와 aptitude test를 받고 주특기를 받는다고 알고 있다. 우리도 그랬으니... 대전 통신학교에서 9주 코스로 졸업하면, 각 부대에 배치된다. 9주 동안 타자반에서 분당 150자를 통과 못하면 유급을 시킨다. 유급 당하지 않키위해 졸업할때까지 타자연습을 있는 힘을 다해 하였다.
월남전선에 위문공연이 오면 장병들이 환호한다.
101보충대에서 65명이 투입되었는데, 진주사대를 나온 친구와 나는 사단본부에 差出(차출) 되었다. 진주 사대를 나온 친구는 참모장 당번으로 떠났고, 나는 사단장의 자제들의 가정교사로 채용한다고 여군 중사가 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교재를 가지고 나왔다. 그때 당시도 군에서도 호남 영남 족벌 싸움이 보이지 않게 擡頭(대두) 되었다.
하동 사람이라는 보충대장 하소령이 찾아와서 자네 이력서를 보니 화려한데, 왜 하필 사단장 가정교사로 가느냐고 하면서 내 시키는데 하라고 했다. 사단장 가정교사로 가면 청소도 하는 노예라면서 못가게 말리면서 차라리 사진 후생병으로 방향을 돌려, 사진 후생병으로 발령 받아서 처음에는 신산리 사진관으로 숙소를 옮겼다.
25사단에 위문 공연온 인기 가수 양미란양과 위문편지.
그곳에 가보니 서라벌 중학교를 졸업한 4,5년 후배인 박재완이가 병장을 달고 선임자라면서 양말도 빨고 빤스도 빨아 待令(대령)하라고 했다. 그래서 야~ 대한민국 군인 복무규율에 병장이 일등병에게 양말, 빨아서 상납하라는 군인 복무 규율에는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그가 앙심을 품고 그날 저녁 나를 신산리 앞 논두렁 개울가에 불렀다. 해병대 출신으로 신산리에서 태권도장을 차리고 있던 깡패를 대리고 나와서 술을 같이 하자고 하면서 흥을 돋구었다. 서로 노래도 하고, 신나게 놀다가 박병장이 그에게 나를 손을 좀 보라고 했다.
그러자 ! 야 ! 나는 현역이야 ! 너가 나에게 손끝이라도 됐다가 엄무 방해죄로 너는 이 자리에서 요절난다. 그리고 이시간 부터 태권도 도장은 날아간다. 이래뵈도 나는 서울 남산에서 "힛트러"라는 별명의 사나이로 할동한 유단자다. 한번 해 보던지. 아니면 며칠후 신산리 학교 운동회때 공설운동장에서 사단장이 있는데서 한번 대결하자고 하자.
맨손으로 벽돌 10장를 한번에 깨트리는 정소룡 친구와
군 입대전에 1960년 초 고궁에서 김광남군과 함께
그는 더 덤비지 못하고 혜여졌다. 당시 25사단에서 유명한 정소룡이 태권도 격치기왕도 제대하여 면회를 올 정도로 절친한 후배였고, 남한산성에서 살다가 이등병으로 강등하고도 25사단 72연대에서 하사 계급장을 달고 설치던 김광남군도 나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신산리에서는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보안대 옥영길 중사가 항상 저녁이면 헌병대 요원들과 함께 술자리를 함께 하는 사실도 자자했던 터이라 감히 대항하지를 못했다.
운동회날 필자와 전우들 뒤가 필자
당시 신산리 사진관에서 박재완이를 다리고 납품할 능력이 없자 구룡포 사람인 허바허바 사진관 박석윤씨가 인계하여 운영하면서 내가 나서서 제대로 운영해 갔다. 질투가 난 박병장이 어느날 선임자를 무시 한다고 뭉둥이로 쳤다. 나는 다급한끝에 손으로 막아야 했다. 선임자를 때릴수는 없었다. 결과는 오른손 쌕기손가락 뼈가 나갔다. 휴가를 받아 서울동대문 보건소에 근무하던 형님을 찾아가서 Gip
이마 박치기로 기와장 10장를 깨는 25사단 태권도 현남국상사 교관과
25사단 택권도 시범장에서 필자.
1969년 7월 25사단 태권도부 현남국 상사 교관. 22기 수료자 맨 오른쪽이 필자.
1969년 7월 26일 25사단 태권도부 현남국 상사 교관. 23기 수료자 카메라를 맨 필자.
옥영길 중사
연행해서 몽둥이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저녁 숙소에 엄금엄금 기어서 오면서 말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단단히 일렀다. 그런데 사건이 또 터졌다. 당시 박병장이 남한산성을 왜? 갔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느날 미국 군인이 박병장을 찾아와서 카메라를 훔쳐 달아났다고 해서 찾아왔었다.
25사단 부대 마크를 단 군인이 "PETRI(패트리)" 카메라를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어 찾아왔다고 해서 그를 불러서 카메라 돌려주고 용서를 구하라고 했다. 나라 망신이니....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런 저런 앙심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래서 다친 손을 동대문 보건소에 근무하던 형님에게 "Gip
맨 앞줄 아래 오른쪽 철모를 벗은 군인이 필자
양 미란,권 혜경,김 세레나,다음다음.김화정양이 1969년 25사단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차 찾아왔었다.
작전나갔다가 생포한 구렁이가 사람보다 더 휠씬 크다.
뱀을 해치지 않은한 뱀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필자가 들어 볼려고 했으나 들수가 없었다.
1970년 말 월남에서 귀국 할때다. 나는 월남에서 내의를 빨아서 더불빽에 챙기자 전우들이 코웃을 쳤다. 이 무더운 날씨에 내의가 왜 ? 필요하느냐고??? LST 함대에서 하선하기전에 방송이 울렸다. 잠자던 침대 씨트를 가지고 가다가 발각될 경우 감옥을 보낸다고 방송이 나왔다. 가난 하던 시절 별아별것도 다 가지고 오던 때였다. 귀국길에는 총을 쏘고난 탄피까지 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군인들이 월남에 투입되어 "빤스"만 숫자로 따지면 전쟁을 하지 않고, 5분만에 입었다가 벗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부산 3부두에 도착하니... 엉동설한에 "동장군"이 휘몰아쳤다. 모두들 재채기에 오돌 오돌 떨었지만 나는 따듯한 내의를 입어 전혀 추운줄도 몰랐고, 더우기 떠날때는 경부 고속도로가 없었는데 귀국하고 보니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뻐스가 있어 "그래이하운드"를 타고 서울역 앞 " 후암동 성당 "차 남숙" 회장님댁에 여장을 풀었다. 1년여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아 사정을 알고 기꺼히 받아 주었다.
차 남숙 여사님은 15세에 平壤(평양) 남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7세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시면서 昌原黃氏(창원황씨) 福三(복삼)公(공)과 婚姻(혼인)하시고, 20세에 외아들 圭誠[규성:陸士(육사) 八期生]씨를낳으시고, 22세에 夫君(부군)을 따라滿洲(만주) 奉天(봉천) 龍井(용정) 南京(남경) 씽가폴 프놈펜등지에서 생활하시다가 中國(중국) 뗀충에서 戰爭(전쟁)중에 夫君(부군)과 생이별하시고 32세에 중경 임시정부에서 金九(김구) 先生(선생)을 모시고독립운동에 참여하시다가, 34세에 귀국하셔서, 서울警察(경찰) 女子(여자) 전문학교 간부특기생으로 졸업후, 경사로임관, 35세에 경위로 진급, 중부경찰서 조사계 주임, 36세에 경무주임으로 재직중, 서울충무공민학교를 설립하시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신후, 공직을 사퇴하시고, 육영사업에 헌신중에, 38세에 6,25사변으로 부산피난중, 경남도청 사회과에 근무하시다가, 41세에 서울수복과 함께귀경, 44세에 후암동 성당에서“"엘리사벳”"으로“ "영세”" 개종하시고, N,C,W,C.의무료급식소 책임자로 자원봉사하시면서 전교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어려운처지에 있는 전쟁난민을 수없이 구제하시여 만인의 어머니로 알려진 인물이시다. 차남숙 여사님께서 아들같이 생각해 주시고, 중매도 하시고, 후암동 성당에서 혼배도 시켜 주시고 幣帛(폐백)도 받으셨다.
차남숙 여사님에 관한 자료는 아래를 크릭하세요
http://blog.daum.net/bangyang/2758
http://blog.daum.net/bangyang/531
http://blog.daum.net/bangyang/529
부모형제 아무도 나를 반겨 주지 않했던 아픈 추억이다. 고향 가면 결혼을 그토록 반대 하던 계모가 반겨 줄리가 없다. 제대후 결혼할때도 나타나지 않은 계모는 내가 6살때에 오셔서 그냥 전처의 자식이 꼴보기 싫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리성을 가서 어느날 배가 고파서 부억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5살도 안된 호동이 동생이 "엄마" "엄마" 형아 ! 형아가! 밥먹어~하고 고자질 하였다. 엄마가 살피라고 하지 않았는데 꼬마가 그렇 이유가 없다. 형님도 넉넉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없던 의료보험을 만들고, 보사부 보험급여 과장을 거쳐 식약청장을 거쳐 부산지방 식약청장 보사부 국장을 역임하고 퇴임했다. 자수성가를 했다.
1948년 음력 정월 20일에 동생 호보가 태어 났다. 1950년 庚寅年(경인년) 음력 11월 1일.에 둘째 동생 선애가 태어나고, 1952년 壬辰年(임진년) 1월 21일에는 셋째 동생 효덕이가 태어나자 마자 사망하고, 1953년 계사년(癸巳年) 음력 9월 21일 생에 넷째 동생 호덕이가 태어나고, 1955년 乙未年(을미년) 陰曆(음력) 5월 19일에 다섯째 동생 영숙이가 태어 나기전에 100원짜리 마누라 잃고 1원짜리 마누라하고 사신다고 한탄 하시던 아버님은 아예 집을 나가 버렸다. 영숙이가 태어 나자 나는 가장이 되어 힘들었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아버지의 동갑이신 옆집 황수아버지 갈치 잡이에도 나가 도왔다. 뭐 좁 소득이 있을까하고, 그러나 빗나갔다. 욕심많은 그분은 이용만 했다.
그래서 경북 구룡포 대보에서 어장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린 나이에 엄동설한 추운날씨에 "돈이 없어 밤새도록 꼬마선을 얻어 타고, 부산 자갈치에 내려서" 3살 많은 정수 외삼촌에게 찾아가서 하루를 추운 "다다미"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정수 외삼촌이 "차표"를 사주어 "뻐스"를 타고 "경주" 포항"를 거쳐서 "구룡포" 큰 고모님댁을 찾아 갔다. 저녁 무렵 유리문을 열고 들어 서니, 얼굴도 모르는 "고모님" 누고? 하는 소리에 "예~ 저 방수입니다. 하니 보지도 않고,다짜고짜로 ~ 야 ! 쌔 빠질놈아 ! 마로 왔노? 하고 욕 부터 퍼 부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님께서 그 동안 폐를 많이 끼친 화풀이를 나에게 쏟았던 것으로 생각했다.
무작정 아버지를 찾아가서 1달동안 집으로 돌아와야 우리가 산다고 졸랐다. 장목 중학교 2학년 담임 이셨던 김기태 은사님의 도움으로 1959년 봄에 하청고등학교를 입학하여 다녔다. 1959년 己亥年(기해년) 陰曆(음력) 4월 14일에는 여섯째 동생 호동이가 태어났다. 1960년 봄에는 거제도 해성고등학교를 3개월 다니다가, 잠간 진해 충무상고를 전학했다가, 바로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서라벌 고등학교에 전학하여 다녔다. 1961년 辛丑年(신축년) 陰曆(음력) 6월 28일에는 일곱째 막내 호진가 태어 났다. 6남매를 키우는 계모가 전처 아들이 안중에 있을리가 없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누글 탓 할수가 없다. 내 운명이다. 1달 휴가를 마치고, 수색에 있는 5193 예비 사단에서 제대 수속을 밟을때도 며칠동안 부대에서 놀리지 않았다. 부대 똥 오줌을 퍼라는 것이다. 그중에 빽이 있는 전우들은 아예 부대에 들어 오지 않고 제대하는 광경을 보자 분통이 터졌다. 아니꼬우면 출세 하라고 했다. 세상사 모두가 요 지경이다. 군 3년을 넘게 근무한것이 일생에 참으로 값진 인생 경험이였다. 사랑도 해봤고 이별도 해봤지 ~ 사는게 별거 없더라는 노래말이 생각난다. 또 신신애 세상은 요지경 노래말도 생각 난다....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 살면 칠팔십년 화살 같이 속히 간다.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다음은 미국을 건너와서 오랜지 카운티 재향군인들에게 workshop을 한 내용이다. 아래를 크릭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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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방수 잊혀진 조상(祖上)을 찾아서
http://blog.daum.net/bangyang/1013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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