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모데후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믿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를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교육입니까?
우리 신앙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교육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사 속의 인물, 위대한 신앙인들의 이야기 혹은 죄인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가 믿음에 대해 가르치는 것, 또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던 바나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바나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나바가 훌륭하다. 그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초기 복음 전도에 쓰임 받은 두 교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님께서 찾아오신 후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의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회는 시리아 안디옥 교회입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지금의 중동 지역, 그리고 유럽에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하게 쓰임 받은 교회입니다.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을 이 교회가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 두 교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선교에 쓰임 받는 그런 교회, 그런 교회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교훈을 얻도록 합시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교회를 사람들이 세웠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한 결과라고 합니다. 즉 주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교회에서 누가 목회했는지 그 목회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가 들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 역시 키프로스 출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구레네와 키프로 출신들이 많이 모이는 그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 교회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나바가 가서 보니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르쳤고 복음으로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더라는 겁니다.
바나바는 시리아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로서 그 교회 성장에 아주 중요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역시도 우리 시대의 안디옥 교회, 우리 시대에 교회를 세워가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귀한 바나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복음이 가정으로 사회로 땅 끝으로 퍼져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바나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23절인데요.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갔을 때 그 교회 교인들은 아주 노련한 신앙인들이었을까요?
아니면 초신자들이었을까요?
교회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초신자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의 삶의 모양이 그날 갑자기 완전히 변화됩니까?
고린도전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편지를 받은 그 고린도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지 몇 년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아직도 음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상에게 바친 재물을 먹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찬을 통해 배를 불리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당시 안디옥 교회 사람들도 이런 고린도 교회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처음 보았을 때 왜 그들에게 복음으로 꾸짖고 가르쳐야 할 모습들이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신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 그리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신 것,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보았다고 합니다.
처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들은 다를 줄 알고 교회로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보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것을 발견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어쩌면 교회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작은 축소판일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 교회 안에도 다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고 신령한 것을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하는 수도 있습니다. 바나바 역시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인간적인 모습, 미숙한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런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다.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곳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목적을 위해 살던 사람을 예수 이름으로 세례 베풀고, 예수님 제자를 삼아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세워가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사람을 쳐다보면 실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예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시작도 하기 전에 제자 훈련은 실패합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요한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싸운 이유는 이렇습니다. 1차 선교 여행 때 이 요한 마가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선교 현장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렵다고 선교 현장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린 겁니다. 바울이 보기에 선교를 함께하기에는 당시 마가가 너무 인간적으로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는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런 마가에게도 성장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 마가와 함께하는 것을 그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와 함께하시면 미숙한 그 마가를 주님께서 변화시킬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실제로 마가는 변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바울 자신도 마가는 내게 유익한 사람이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미숙한 사람을 보면서도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미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때 대단히 불편하고 또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나바처럼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람을 세우는 일, 교회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나바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23절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가르침으로 목회했는지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23절인데요.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의 설교의 내용은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성경 원문으로 보면 바나바는 계속해서 그 사람 옆에서 격려하며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한 번이 아니에요. 반복입니다. 계속해서 그걸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주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옆에 서서 반복적으로 계속했을까요?
바나바는 신앙의 핵심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앙을 다양한 용어로 표현합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언약입니다. 신앙을 언약으로 표현합니다. 독일어에서는 이 언약을 분트로 번역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7절은 이 언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한글 성경입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 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나의 신이 되셨다.
나의 주님이 되셨다.
그것을 믿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신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책임지신다.
그 믿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부모, 자식의 관계로 연합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나바는 나중에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담임 목사였고 안디옥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바울을 데려왔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돕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이들의 선교 여행을 이끌어가시면서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을 통해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울을 보면서 바울이 더 유능한 전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나바에게 이런 상황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이 상황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이인자로서 선교의 여행을 감당합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선교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키프로스 바보라는 도시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선교 여행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역할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바나바는 이런 현상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바나바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주인께서 지금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하고 계시는 겁니다. 바나바는 그 상황에 순응한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예수님 닮은 사람을 세우는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세워가는 것, 그게 교회가 할 일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바울을 목회자로 세워줬습니다. 주님께서 그 바울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세워가고자 하십니다. 바나바는 그것을 받아들인 겁니다.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하는 주님께서 그렇게 일하시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인 겁니다.
신앙은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주님께서 일하신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 이입을 한번 해봤어요. 제가 만약에 이런 자리에 있었다면 이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기분일까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아요. 또 불안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런데 바나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하는 주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니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맡긴 일, 이인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계속해서 24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 착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성품이 착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착함이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를 담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이 표현을 덧붙이고 있는 겁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니까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착한 사람이 되더라는 겁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바나바를 보고 주님을 믿기 위해 교회로 나아오더라.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이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의 삶이 옳다 그렇게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예수를 따르겠다 결단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약점 중에 하나는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위선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은 옳은데 행위가 틀린 경우가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삶이 동반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바라바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겁니다. 이상의 내용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 신앙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교훈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관점에서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이 시대에 바나바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바나바로 살아라. 그래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일에 그 통로가 되어라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나바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며 신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족할 만한 많은 일들이 있어도 실족하지 않고 예수 닮은 사람을 세우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더라도 주님의 관점에서 그 현실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주님께 유리하다면 내게 불리해도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바나바는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바나바를 보며 주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신앙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역시도 우리 시대에 바나바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주님의 복음이 우리가 사는 삶의 사역지 일상의 사역지 그곳에 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던 깔뱅이라는 분이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 전쟁 때문에 제네바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라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에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깔뱅은 자기가 저술한 이 책,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좀 더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에 전념하고자 했고 그 연구를 위해서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때문에 길이 막혔어요. 어쩔 수 없이 제네바로 갔습니다. 제네바에 가보니까 그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던 기엄 파렐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기엄 파렐이 기독교 강요를 쓴 이 깔뱅을 만나서 당신 나와 함께 여기서 동역합시다 그런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제네바 사람들이 굉장히 거칠었나 봐요. 그래서 파렐은 자기 혼자는 이 제네바에서 이 종교 개혁을 담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당신이 논리로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반박하는 저 사람들에게 논리로 조금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깔뱅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목회의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목회 나는 공부를 해야 하고, 그 공부를 통해서 내가 쓴 이 책에 미비한 점들을 보완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성격적으로 저런 거친 사람들과 맞설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자 갑자기 이 파렐이라는 사람이 저주에 가까운 말로 깔뱅을 몰아붙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오. 당신은 당신의 편안함을 즐기려고 할 뿐이오. 당신의 공부만 생각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이 결정적인 시기에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당신에게 임할 것이오 당신의 그 안락함, 당신이 하고자 하는 그 공부 위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오.
이런 말을 해버린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 만약 그런 말을 쏟아부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달팽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무리하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나 깜짝 놀랐어요. 근데 문제는 그 말이 상처로 남은 것이 아니라 자꾸 마음속에 맴도는 메아리로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이 깔뱅의 고백에 따르면 그 순간 마치 하늘에서 주님의 손이 내려와 내 멱살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이 파렐과 그 제네바에서 같이 목회를 했는데 목회한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열정이 많고 그렇게 격정적인 성격으로 제네바 사람과 싸웠던 그 바렐은 묻혀버리고 이 깔뱅이 힘을 얻어요. 그래서 제네바 교회의 종교 개혁이 이 깔뱅이에 의해서 완성이 돼버립니다. 아렐은 낮아졌고 깔뱅은 높아진 겁니다. 그러나 이 파렐은 이걸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스위스에 이 종교 개혁된 도시가 생겼다는 거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속한 우리 교회가 속한 개혁 교회가 생겨난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을 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날 수가 있어요. 내가 세웠던 그 사람은 더 큰 사람이 되고 나는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믿었던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에 믿었던 자가 먼저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섭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바나바처럼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서 이미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려면 섭섭한 마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려면 우리 역시도 바나바와 같은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보는 신앙인,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내 주인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는 그 신앙인,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인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그들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셨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곳이 안디옥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랄 겁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바나바와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이 시간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