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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의 작품세계 Ⅱ
-[1901~1905]- Henri Matisse
색채, 영혼의 빛을 발하다 - 마티스의 생애와 예술에 대하여
임근혜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창을열며
생의 마감을 2년 앞둔 1952년 어느 날 '방대하고 진지하며 다난했던 노력의 결실이자 일생동안 이끌어온 작업의 정점'이라 스스로 일컬은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을 방문한 마티스는 하얀 타일 위의 검은 드로잉과 대조를 이루는 파랑, 초록, 노랑의 간결한 원색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생명으로 충만한 빛을 바라보며 곁에 서있던 손자에게 말한다. “나는 북부 출신이란다. 내가 어두운 교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할 게다.”
마티스의 고향 까또 깡브레시스는 벨기에에 인접한 프랑스 북부의 변경으로, 그가 태어난 1869년을 전후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전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무자비한 토지 개발로 풍차와 종루가 평화로이 늘어서 있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향 풍경은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은 밝고 푸른 정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국경 분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는데, 마티스는 첫 돌을 맞이하던 해부터 프러시아 군대의 점령으로 인한 긴장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 어린 마티스를 지배하던 굴욕감과 중압감은 황폐한 자연과 더불어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으로 남는다.
먼 훗날 마티스는 1941년 평론가 쿠르숑과의 대화에서 “내 작업의 주요 목적은 명료한 빛을 획득하는 것”이라 말했다. 19세기 말 격변기의 침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 시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 이전부터 빛의 가치를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깨달음이 그를 혼의 빛을 발산하는 찬란한 색채 화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전부터 전 생애에 걸쳐 즐겨 다룬 소재 중 하나가 자연의 빛을 한껏 머금은 ‘열린 창’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던 10대 말,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건네주신 물감으로 소일삼아 유화를 그린 경험을 계기로 화가가 천직임을 깨달은 마티스는 회복 후 서류 여백에 낙서를 자주 끄적거니다.
이 중에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 입구를 그린 드로잉 한 장이 향후 마티스의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운명처럼 드러낸다. 안과 밖의 경계를 살짝 허물고 미지의 바깥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열린 문’은 실내외 풍경을 동시에 담은 ‘창’이라는 소재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광선의 변화에 주목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소재이기도 하지만, 특히 자신의 그림이 색채를 통해 강렬한 빛을 발산하기를 원했던 마티스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소재였음이 틀림없다.
야수주의 시기의 작품 ‘꼴리유르의 열린 창’)1905), 장식적인 화풍을 성립한 1910년 전후의 대표작 ‘붉은 색의 조화(저녁 식가)’와 ‘대화’ 그리고 생의 후반 니스 시기의 실내 풍경을 그린 작품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창’이라는 소재는 마티스가 전 생애에 걸쳐 천착한 ‘빛’의 담지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적 환기력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운명으로 끌어안기까지는 녹록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25세에 파리로 상경하나 데생위주의 고답적인 미술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결코 제대로 된 데생을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보수적인 스승 부게로의 실망스런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전하던 중에, 에콜 드 파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주류에서는 벗어난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이자 상징주의 화가인 구스타프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고전의 중요성과 더불어 대상의 내면을 강조한 모로는 “색채는 상상을 통해 사고되어야 한다. 상상이 없다면 아름다운 색채를 결코 만들 수 없다.
영원히 남게 될 그림은 생각과 꿈 그리고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손재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마티스는 이러한 가름침을 통해 어렴풋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인식하게 된다.
2.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력의 복원
에콜 데 보자르에 어렵게 합격한 후, 마티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회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거장들의 작품에서 표현되지 못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1898년 신혼여행을 겸해 런던으로 건너간 마티스는 피사로의 권고에 따라 터너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색에 대한 열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서서히 자각하고 본격적인 색채 혁명을 준비한다.
자연의 모사를 회화의 미덕으로 삼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은 전통적으로 데생에 우위를 두었으며, 상대적으로 회화의 또 다른 주요 구성 요소인 색은 드로잉의 부차적인 요소 즉, 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을 채우는 보완물로서 인식되어 왔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그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야 한다는 회화의 대전제를 파기하고, 회화 평면에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 즉 색과 형을 자연 대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는 것이 모더니즘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다음 세대의 색채는 재현의 대상과는 별개로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지니게 될 것’이며 ‘색채의 기능은 빛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마티스의 진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식은 사실 회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모로의 화실 시절부터 그는 고전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충실히 모사하였으며, 이후 전 생애에 걸쳐 한 새대 앞서 색채 혁명의 길을 열어준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 이탈리아 여행 중 경험한 르네상스 벽화 들을 연구하며 끊임없이 이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그리고, 회화 요소 자체의 물질성으로 환원되다가 결국 형상을 버리고 추상으로 귀결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초석을 다져놓으면서도, 형상에 기초한 회화 전통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점은 그와 더불어 아방가르드 미술의 양대 거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피카소와 일치한다.
그러나, ‘구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 피카소와는 달리, 마티스는 색채에 의해 구사되는 빛으로서 새로운 회화 공간을 형성하는 점에서 차이를 이룬다. 이는 이 두 거장이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색과 형을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킨 아방가르드 미술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함께 이끌어냈다는 점을 의미힌다.
이처럼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를 관통해온 구상 미술의 형식적 구성요소를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실에 뿌리를 둔 추상’이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점에서 전통을 단절하지 않고 그 연속선상에서의 발전을 이룬 견고한 혁명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런던 여행 이후 코르시카와 툴루즈에서 머물던 1898~99년 사이에 그려진 정물화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식탁 위의 과일과 식기들의 색채는 묘사적이라기보다는 색채들 간의 상호 효과를 고려해서 인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자연의 빛을 모방하지 않고 회화 내의 질서와 균형을 위해 창조된 색은 색채 화가 마티스의 예술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된다.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르는 신중한 성격의 마티스는 견고한 형태감각을 익히기 위해 세잔느를 거울삼아 조각을 연구하기도 하고 과학적 색채이론에 기초을 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며 자신의 작업 방향을 스스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선배 화가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종합하고 넘어서면서 빛을 발산하는 그림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사치, 고요 그리고 관능’ (1904~5)은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시냐크의 영향 아래 점묘법을 이용해 제작한 작품으로서, 여기서 마티스가 주의를 기울인 점은 단순히 과학적인 색채이론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고요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기쁨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신인상주의 실험에서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색채의 힘’에 대한 확신을 얻은 마티스는 1905년 역사적인 살롱 도톤느에서 ‘야수파’라는 이름을 유래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내의 초상화 두 점 ‘모자를 쓴 여인’ 때문에 고민을 해온 주최측은 심사위원들에게 그 작품을 거절하라고 설득했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시장에 걸리고 나서도 관람객의 비웃음과 평론가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는 당시의 상황은 순수한 회화 수단으로 돌아가 새로운 미술사를 시작하겠다는 아방가르드적 이상을 예술의 동기로 삼는다는 것이 과감한 결단과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말해준다.
3. 구성, 표현 그리고 장식
짧지만 강렬하게 타올랐던 야수주의 시기를 일단락 짓고 마티스 그 자신으로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할 무렵 발표한 ‘작가 노트’(1908)는 그의 일관된 예술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로서는 맹목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자연을 해석하고 이를 회화 정신에 따라 재구성해야 한다. 색채 간의 관계로부터 음악적 구성과 유사한 살아있는 색채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는 그의 기본적인 회화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지된다.
이는 현실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되 이를 단순한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그로부터 받은 감흥을 순수한 색들 통해 표현함으로써 내적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렇듯 ‘회화적 수단의 순수성’에 입각한 그의 작품은 결과적으로 단순미와 장식성으로 귀결되는데, 자칫 시각적 즐거움에 경도된 듯이 보이기 쉬운 결과물에게 마티스는 오히려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마티스가 자신의 화화를 가리켜 “편안한 안락의자처럼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피상적인 장식이나 눈요기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으로 영혼을 고양시키는 매개체로서의 미술”이라는 좀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일상 속에 존재하는 자연과 사물에서 순수한 회화적 수단, 즉 선과 색을 통해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며, 이러한 장식적인 회화를 통해 ‘현실에 보다 지속적인 해석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내러티브를 버리고 회화 수단의 순수함, 즉 색채의 순수성을 통해 마티스가 도달하고자 한 궁극적인 목적은 ‘숭고와 미의 더높은 이상’ 이었다.
한편, 마티스는 1945년에 저술한 <색의 역할과 속성>에서 자신의 회화에서 장식성은 작가 내면의 ‘표현’을 전제로 한 ‘구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표현은 인간의 얼굴이나 과격한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표현적인 것은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다. 인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그를 둘러싼 빈 공간, 각 부분의 비례 등 모든 것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 구성은 작가의 뜻에 따라 다양한 요소를 장식적인 방식으로 배열하여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라는 대목은 자신의 회화을 이루는 표현, 구성, 장식성의 의미와 상호 관계를 밝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색상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림 표면의 고유의 빛을 발산시킴으로써 회화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 또는 반응을 전달하려는 마티스의 회화관을 잘 설명해준다.
‘수단의 순수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즉 조형 예술에서 가장 단순한 수단이 가장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그의 생각은 1909년 러시아의 콜렉터 슈추킨의 주문으로 제작한 ‘춤’과 1910년 작 ‘음악’에 본격적으로 반영되며, 이는 ‘음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은 하늘의 파랑과 땅의 초록 그리고 몸의 주홍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세 가지 색으로 조화로운 빛과 순수한 색을 구성한다…. 색은 형과 비례하며, 형은 이웃하는 색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수정된다. 채색된 평면에서 비롯된 표현성은, 총체적으로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색채가 묘사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질 때 화면은 자연적으로 3차원의 환영을 잃고 평면 위에 배열된 색이 창출한 새로운 공간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감은 ‘단순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야수주의 이후의 장식성이 강한 화풍으로 발전된다.
마티스의 회화에서 단순화 과정은 단지 그림을 순수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집약된 형과 색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렬한 표현력을 가지게 한다.
서양 미술의 전통적인 원근법을 거부하고 단순화를 지향하는 마티스의 입장은 1903년과 1910년 각각 파리와 뮌헨에서 열린 대규모 이슬람 미술전에서 세밀화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이슬람 미술을 접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티스 자신의 말대로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감각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으며, 이 예술품의 도안은 보다 거대한 공간, 진정으로 조형적인 공간을 암시한다.’ 식물 문양의 장식적 패턴으로 뒤덮힌 ‘붉은 실내’)1908)이후, ‘화가의 가족’(1911)및 ‘붉은 화실’(1911)등의 작품에서 공간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실내가구와 인물은 장식적 패턴처럼 순전히 색과 형으로 이루어진 조형 요소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된다.
표현성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장식성은 1912년 모로코 여행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일련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1913년~1917년 사이 일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입체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추상을 실험하던 시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에 잠시 마티스의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 역시 순간적이고 외적인 겉모습 이면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화가로서의 기본 임무에 충실하여 사물의 구성을 해체하여 더욱 단순화시킨 단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1917년부터 1930년까지 소위 ‘니스 시절’의 작품은 다소 현실 도피적인 장식적인 실내 풍경 및 나른하면서 유혹적인 오달리스크 풍으로 연출한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마티스는 1934년까지 이젤화를 잠시 중단하고, 1930년 미국의 반스 재단이 주문한 벽화 제작에 전념한다.
이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점은 형상과 배경에 동등한 비중을 둠으로써 확장된 평면 패턴을 형성시키는 문제였다. 마티스는 반스 재단의 벽화를 위해 미리 채색해 좋은 종이를 오려 자유롭게 패턴을 배치하며 작업했는데, 이는 1940년대 초 독립적인 종이 작업을 하는데 기초가 된다.
1930년대 중반 이젤화로 복귀하였을 때, 마티스가 주로 다룬 소재 역시 여성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드에서 점차 장식적인 의상을 입은 착의의 초상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 단순성과 장식성은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39~1940)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이전에는 다른 화가 뿐 아니라 마티스 자신의 그림 중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면적이고 눈부시게 밝은 색면이 이 시기를 수놓는다.
4. 색과 형의 구분을 넘어서
‘자신의 예술의 정점을 이루는 운명적인 작업’인 로베르 예배당에 관하여 쓴 글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지나온 날들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자연을 모방하라’는 복종할 수 없는 관습적인 견해를 평생 동안 반박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사실적인 모방을 넘어선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변화를 겪으면서도 내 작업의 근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저항심으로 인해 나는 드로잉, 색상, 구성 등 각 구성요소를 별개로 연구하게 되었도…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결합시킬 때 서로를 침해하거나 풍부한 표현력을 상쇄하지 않고 고유한 특질을 감소시키지도 않은 채 구성하게, 즉 회화 수단의 순수함을 존중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마티스는 평생토록 색채의 표현력을 집요하게 탐구해오면서도 조각 작업을 통해 양감을 익히는 등 형태 연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899년 결혼 지참금으로 화상 볼라르에게 구입한 세잔느의 작품 ‘목욕하는 세 여인’을 두고두고 관찰했으며, 회화를 보완하려는 시도로서 조각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티스에게 드로잉과 색채의 대립과 조화는 영원한 과제였다.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이러한 회화의 두 가지 기본 요소들의 상호관계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1930년 반즈 재단의 벽화를 제작하면서 그 준비작업에 사용했던 종이 작업이다.
그는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하루에 한 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는데, 더 이상 이젤 앞에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되면서 그 대안으로 십여 년 전 처음 시도했었던 종이 작업을 택한 것이다.
윤곽선을 그리고 색을 채워 넣는 방식 대신, 가위로 윤곽을 오려내는 동시에 색면을 만들어내는 이 작업을 마티스는 ‘가위로 드로잉하기’라 불렀다. 기성 제품으로는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선택한 색을 과슈로 종이 위에 바른 후 의도한 형태를 오려내어 서로 어울리도록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형태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빈 공간에도 동등한 무게가 주어진다.
즉, 형상과 바탕 사이, 형상이 점하고 있는 포지티브한 공간과 그 사이의 네거티브한 공간 간의 균형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더욱 율동적인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1947년, 몇 년 전부터 잡지에 발표해왔던 종이 작업을 본격화하여 스텐실로 인쇄한 <재즈>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됨으로써 마티스의 예술 영역이 한층 더 확장된다.
종이 작업을 주로 하던 1940년대 마티스의 화실 벽에는 나뭇잎, 해조, 산호 등의 모티프로 이루어진 색종이 조각들이 가득히 걸려있었다. 1946년에 종이오리기 기법으로 대형 작업 ‘오세아니아’ 연작을 시도하는데, 이는 린넨 위에 실크 스크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티스가 이제까지 천착해온 예술적 탐구의 결실을 집대성할 수 있는 ‘건축학적 그림’이라고 여겼던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의 창문 및 사제의 제복 디자인에도 종이오리기를 이용한다.
마티스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디자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완성작으로서 종이 오리기 작품을 왕성하게 제작한다.
1952년 파란 종이로 오려낸 ‘푸른 누드’ 연작은 새로운 기법에 조각적인 양감까지 더하게 되며, 큼직한 색면들이 듬성듬성 배치된 ‘달패잉’(1953)는 매우 단순한 수단을 통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시켜주며, 초기 시절부터 견지해왔던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사항을 그 무엇보다도 완벽히 총족시켜준다.
5. 색채, 생명의 빛
1953년 한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현대미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빛’이라고 말했다. 마티스의 예술관을 토대로 해석할 때, 그가 말한 빛은 물리적인 빛 뿐만 아니라 물질적 구속을 벗어난 인간 내면의 빛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티스의 예술 세계를 포괄하는 ‘색채 혁명을 통한 회화의 해방’은 곧 ‘영혼의 빛을 향한 구도의 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티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줄곧 꿈꾸어왔던 찬란한 빛과 색은 마침내 스테인드 클라스창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통해 실현된다.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인 1945년, 자신의 간호사였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건 장식 작업에 대한 종교적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당신처럼 온 힘을 다해 영적인 지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내 작업의 진로는 당신처럼 영적인 신앙심을 향하고 있답니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화업을 시작하기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위에 끄적이던 열린 문의 낙서와 그 후 평생 동안 그의 회화의 주제 또는 소재로서 연속적으로 등장한 ‘열린 창’이라는 모티프가 빛을 발하는 실제의 창으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창과 캔버스는 직사각형의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마티스에게 창을 향해 들어오는 빛은 캔버스이며 파랑, 초록 그리고 노랑 세 가지 색의 빛을 발산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물감으로서 ‘일곱 개의 음계로 이루어진 음악’처럼 순수한 수단 그 자체로서 완결된 교향악을 연축한다.
마티스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정리벽으로 유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타고난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 부여한 것’이라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순수한 형과 색의 조화를 통해 화면에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것도 혼탁한 세상사로 어지럽혀진 인간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기말의 혼란과 두 차례 세계 대전의 격동 속에서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지와도 같은 예술’을 꿈꾼 마티스에게 균형과 조화의 추구를 통해 도달한 ‘빛’은 곧 ‘치유’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마티스가 회화에서 색채를 해방시키고 이를 통해 내면의 빛을 발산하고자 치열하게 작업한 이유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빛은 모든 선한 것, 모든 치유하는 것의 상징이며,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그러하듯이 빛은 내적인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Dishes and Fruit, 1901, oil on canvas , 51 cm X 6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Mme Matisse in a Japanese Robe, 1901 ,
oil on canvas , 116.8 cm X 80 cm , Private collection
Model with Rose Sippers,1900-1901, oil on canvas, 73 X 60 cm, Private collection
Standing Model (also known as Nude Study in Blue), 1900-1901, oil on canvas,
73 cm X 54 cm, Tate Modern - London (United Kingdom - London)
Swiss Interior (also known as Jane Matisse), 1901,
oil on cardboard , 36 cm X 48 cm Private collection
Swiss Landscape (also known as The Road to chézières à Villars), 1901 ,
oil on canvas on board , 23.8 cm X 33.7 cm , Private collection
Bouquet of Flowers in a Crystal Vase,1902 ,
oil on board , 34.7 cm X 26.8 cm , Private collection
Chrysanthemums in a Chinese Vase, 1902,
oil on board , 71.12 cm X 53.98 cm , Private collection
The Luxembourg Gardens, 1902, oil on canvas , 59.5 cm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Notre-Dame in the Late Afternoon, 1902 , oil on cardboard , 72.5 cm X 54.5 cm,
Albright-Knox Art Gallery (United States - Buffalo)
<노트르담 寺院>과 위치에서의 조망인데, 구도상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켜 그의 아틀리에 옆에 나란히 선 건물의 일부가 수직으로 들어와 있다. 2년 전의 거칠고 중후한 화면에서, 조용하고 맑은 평면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 비하면 대상을 훨씬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화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세느 강의 다리가 물에 비친 것이라든지, 원근에 의한 공간 구성이 보다 확실해진 느낌이라든지, 강둑을 따르는 거리의 묘사도 훨씬 분명하게 그려 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구성 방법은 어디까지나 색채의 알 맞는 배분에 의한 것이지, 형태의 객관적 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마티스는 그 나름대로 이러한 같은 주제에 의한 그의 독자적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Notre-Dame with Violet Walls, 1902, oil on canvas 50 X 65 cm, Private collection
Path in the Bois de Boulogne, 1902, oil on canvas , 65 cm X 81.5 cm
Pushkin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ill LIfe with Blue Tablecloth (also known as Vase, Bottle and Fruit), 1900-1902,
oil on cardboard, 73 cm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View of Notre-Dame, 1902, oil on cardboard , 46.5 cm X 56 cm , Private collection
Still Life, 1902, 64 x 46 cm, Paris, musée Picasso
The path in the Bois de Boulogne, 1902, Oil on canvas
Carmelina, 1903, Oil on canvas , 80 x 64 cm
Gallery: Museum of Fine Arts, Boston, MA, USA
Luxembourg Gardens, 1902-1903, Oil on canvas, 46 x 55.3 cm, Private Collection
Nude with a White Towel, 1902-1903,
Oil on canvas, 81 x 59.5 cm,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