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에 빠진 뇌격기 조종사 조지 게이 소위는 졸지에 미드웨이 해전을 눈앞에서 생생이 보았습니다.
폭격을 받고 있는 일본 항공모함
I. 영화 <미드웨이>
미드웨이 해전은 해전사에 길이 남을 기적 같은 전투였습니다. 이 해전은 미 해군이 열세의 전력으로 네 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면서 일본의 야욕을 응징한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롤랜드 에머리히Roland Emmerich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 오랫동안 공을 들였습니다. 공을 들인 결과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펙터클하고 압도적인 볼거리가 많이 등장합니다. 러닝타임 내내 공중과 해상을 넘나들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에머리히는 영화에서 이 전투를 가상의 캐릭터 없이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영웅적인 실제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엮어냈습니다. 1976년 찰톤 헤스턴 주연의 <미드웨이>가 기록영상 등을 활용해서 전투장면을 묘사한 반면, 에머리히는 CG를 활용한 독보적인 스펙터클 영상연출로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 피격되는 미국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항공모함들의 거대한 폭발, 미군 항공기들의 프로펠러 소음과 이착륙 시의 마찰음, 거기에 공중전에서의 쉴 새 없는 기관총 사격소리 등 관람석이 들썩일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사운드까지 들려줍니다. 특히 마지막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의 일본 항공모함들에 대한 돌진과 항공모함들의 대폭발 장면은 관객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안겨줍니다.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1996), <투모로우Tommorrow>(2004), <영화 2012>(2009) 등 “재난영화란 이런 것이다.”라며 그 본보기를 제시한 에머리히 감독은 이번에는 <미드웨이>를 통하여 “이것이 바로 전쟁영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잭 스마이트Jack Smight 감독이 1976년 영화화한 <미드웨이>와 비교하면 영화의 사실성이 훨씬 돋보입니다. 신파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1976년의 <미드웨이>는 비록 찰턴 헤스턴, 헨리 폰다, 글렌 포드, 제임스 코번 등 대배우들이 출연했지만 실존 인물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미국, 일본 영화에서 전투 장면을 많이 차용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이 영화는 기적의 승리를 일궈낸 평범한 영웅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실존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더해집니다. 철저한 역사 고증과 CG의 완벽함이 영화를 몰입하게 합니다. 국내에 앞서 개봉한 북미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외신들은 "숨이 멎을 듯한 긴박감, 입을 다물 수 없다"(ABC TV), "반드시 봐야 한다"(버라이어티Variety), "역사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다"(무비즈 앤 쉐이커스Movies and Shakers) 등의 극찬을 쏟아냈습니다.
* 일본 항모를 향하여 내리꽂히는 급강하 폭격기들
단 한발의 폭탄으로 일본 항공모함을 침몰시킨 미군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딕 베스트 역을 에드 스크레인Ed Screin이,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에 우디 해럴슨Woody Harrelson이, 일본 기동부대를 이끄는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 제독에 한국 영화 <곡성>에 나왔던 쿠니무라 준國村隼이 열연했습니다.
한편으로 진주만 공습, 둘리틀Doolittle 폭격대의 일본 본토 폭격, 미드웨이 해전 등 방대한 이야기를 138분 동안 모두 담으려다보니 나열식 묘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살짝 흠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진주만 공습과 둘리틀 폭격대의 묘사는 기록 영상으로 대체하고, 미드웨이 해전 묘사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리틀 폭격과 일본군의 미드웨이 섬 공략과의 관계, AF(미드웨이)라는 지명을 둘러싼 정보전,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허둥지둥하는 모습, 정찰을 허술하게 한 일본의 자만, 연료가 바닥난 상태에서 일본 항공모함을 찾아낸 미군 폭격기들의 집요함, 전멸에 가까운 미군 뇌격기 비행사들의 영웅적인 행동 등 미드웨이 해전의 기적 같은 순간을 좀 더 강조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 불덩어리가 되는 일본 항모
영화의 탄생 과정은 실화 못지않게 극적이었습니다. 에머리히 감독의 열정과 집념으로 이 영화는 20년 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1990년대 말, 그는 소니 픽처스Sony Pictures와 손잡고 영화화를 추진했으나 소니가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에 난색을 보이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아마도 소니가 일본회사이기 때문에 일본이 패배하는 전투를 만드는데 꺼려했을 거라는 뒷소문이 따랐습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중국으로 눈을 돌려 제작비를 충당했습니다. 겨우 마련한 제작비 1억 달러 범위 내에서의 영화제작을 위해 촬영 일정을 90여일에서 65일로 단축해야 했습니다.
또한 CG 작업도 완벽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념에 우디 해럴슨과 패트릭 윌슨Patrick Wilson, 에드 스크레인, 데니스 퀘이드Denis Quaid, 아론 에크하트Aaron Eckhart 등 명배우들이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합류했습니다. 에머리히 감독은 2017년에 제작에 들어갔으나 돈 문제로 지연되었으나 제작사에 이름을 올린 6개사에서 가까스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비의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 1억 달러를 긁어모으는데 성공했다는 후문입니다.
이 금액은 미국 독립영화independent film 중에서는 최고액이라고 합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아닌 독립영화사에서 찍었으니 말입니다. 에머리히 감독은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영화”라며 “시각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1억 달러 미만의 제작비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으나 힘들었지만 결국은 해냈다.”고 말했습니다.
* 일본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미 요크타운 항모
II. 태평양 전쟁의 승부처, 미드웨이 해전
해전의 배경
1942년 4월 18일 일본군 수뇌진은 미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던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폭격기들의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군부는 감히 거대한 육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싣고 와서 띄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더구나 현인신(現人神)인 히로히토 일왕이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탄이 떨어진다는 것은 기세등등하던 당시의 일본 군민 모두에게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이를 계기로 대담한 결심을 합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두고 있던 바로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여 방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밀어 붙이고 둘리틀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가능성을 아예 싹부터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진주만에 있는 항모를 포함한 미국의 잔존 태평양 함대를 미드웨이 해역으로 유인한 다음 일본의 막강한 항공모함과 전함의 전력으로, 이번 기회에 미국 함대를 완전히 박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미 태평양 함대가 미드웨이를 방어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출동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쉽게 방해 받지 않고 미드웨이를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군으로서는 미군이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좋은 입장이었습니다. 야마모토는 꽃놀이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은 근거지로 삼아 LA, 샌프랜시스코, 시애틀 등 미국 서해안 어느 곳에든지 출몰하여 함포사격과 공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미국은 일본이 원하는 조건대로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라는 것이 야마모토의 발칙한 망상이었습니다.
* 일본군의 미드웨이 공략도, 맨위는 알류산 열도 공략부대, 가운데는 일본군 주력부대
아래는 미드웨이섬 상륙부대, 오른편 파란색은 미국 기동부대
1942년 5월5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 개시를 알렸습니다. 원래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3월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비행정 1대가 미드웨이 섬에 접근했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했었습니다. 미드웨이 일본군의 정찰 시도를 니미츠 사령관이 지나쳐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1941년 진주만 피습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 바 있습니다.
당시 서열로 보아 니미츠 앞에는 스물여덟 명의 선배 제독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텍사스 출신으로서 조용하지만 무인武人의 기개가 넘치는 니미츠 소장을 대장으로 승진시켜 태평양 전쟁 수행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입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양 해역에서 대규모 공세 작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지만 도대체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 로슈포르 중령
5월 5일 야마모토가 AF를 공격하라는 전문을 일본 함대에 보냈습니다. 이것을 가로 챈 조셉 로슈포르Josep Rochefort 중령이 이끄는 암호해독부대인 ‘블랙 체임버Black Chamber’는 한시 바삐 AF가 어디인지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로슈포르는 미 해군 암호 첩보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워싱턴의 정보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미국 서해안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물론 니미츠 제독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 섬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5월 11일 블랙 체임버에서 기가 막힌 작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로슈포르가 부하들과 꾀를 내어 일본군을 잡을 덫 하나를 놓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니미츠 제독의 사전 승인을 얻어 미드웨이의 음료수 증류시설의 고장을 알리는 무전을 암호가 아니라 평문으로 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일본군이 미드웨이에 물 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반드시 본부로 보고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AF를 확인할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생긴 것입니다. 역시 이 평문 전문을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가 감청해서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가고 있다”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미드웨이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글자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무선은 다시 블랙 체임버에게 바로 감청되면서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이곳이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등과 공격 시기까지도 샅샅이 밝혀졌습니다.
* 니미츠 태평양 함대 사령관
한편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습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습니다. 니미츠 사령관은 자칫하면 할지 제독의 제16기동부대의 단 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만으로 힘에 겨운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 희망은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파손당해서 하와이 수리 도크에 있는 항모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 여부였습니다.
당시 요크타운은 최소 90일이 걸리는 수리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었습니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5월 27일 진주만에 도착한 후 45시간 만에 수리를 다 마쳤습니다. 하와이 수리 도크의 인원들은 불면불휴(不眠不休)의 돌관 작업으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도크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에도 수리 함정이 옆에 붙어 계속 수리를 했습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영합함대사령관
일본 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미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Wasp 정도가 출동하리라고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 된 제16기동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습니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둘리틀의 폭격대를 도꾜 상공으로 발진시킨 부대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5월 30일, 제17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했습니다. 17기동 부대는 프랭크 플레처Frank Fletcher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6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윌리엄 핼시William Halsey 제독은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입원중이라서 대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Raymond Spruance 제독이 부임했습니다. 총지휘는 선임자인 플레처 소장이 맡기로 했습니다. 니미츠 사령관은 추가로 일본의 공격 목표인 미드웨이 섬의 방위력을 강화했습니다. 총 60대의 항공기에서 150대로 보강시켰고, 수비군은 3,600명으로 증가시켜 이치기 대좌가 지휘하는 5,800 명의 일본 상륙부대를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 미드웨이 섬(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드웨이 비행사들의 자질은 일본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 미군은 일본 조종사들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 비행사들은 비행 학교를 갓 졸업하고 곧바로 미드웨이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조종사들은 오래전부터 진주만 공격을 위해 맹훈련을 한데다가 이후 남태평양 전투에서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은 그야말로 베테랑들이었습니다.
일본군은 5월 27일 나구모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항모군이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서쪽에서 미드웨이를 향하여 출격했습니다. 주력 항모들은 제1항공전대의 아카키, 가가, 제2항공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습니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본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항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부다케가 이끄는 상륙부대도 함께 미드웨이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입니다. 6월 3일 오후, 나구모 기동부대를 후속하던 주력 부대 기함인 야마토의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 섬 부근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의 신호를 잡았습니다. 항모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났다는 징조였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절대 무선 통신 금지라는 지시 때문에 앞서가는 나구모 부대에서도 이를 접수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전달을 포기했습니다. 항모의 통신 안테나는 전함의 통신 안테나보다 수신 능력이 떨어져 기동부대에서는 이를 감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만약에 나구모 부대가 이 정보를 접수하고 경계를 했더라면 이후 미드웨이에서의 전황은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미군은 초긴장 속에서 5월 30일 이후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 소속 32대의 카탈리나 비행정들을 초계 임무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6월 2일, 플레처 소장의 제17기동부대와 스프루언스 소장의 제16기동부대가 미드웨이 섬 북동 해역에서 합류했습니다.
미드웨이를 향해 항진하고 있는 나구모의 머리속에는 미 항모가 지금 어디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진주만에? 혹은 남태평양 어디에? 아니면 미드웨이에? 등등... 그러나 참모들이 막연히 미 항모들은 남태평양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진언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구모 함대가 미드웨이에 접근할 때 두 대의 미군기가 가까이 왔다가 사라졌으나 나구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항모도 없는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면 뭐 해’하는 심정으로 나구모는 미드웨이에 접근하면서 정찰기조차 발진시키지 않았습니다. 나구모를 비롯하여 모두가 진주만 기습 성공 이후의 자기네 무적함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자만심으로 꽉 차 있었던 겁니다.
야마모토도 미 항모들은 진주만에도 없고 미드웨이를 향해 출격하는 것도 발견 못했다고 잠수함 보고가 들어와 미 항모들은 남태평양 어디에 있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잠수함들이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에 배치된 것은 6월 1일이어서 이는 당연한 보고였을 것입니다. 그 전에 이미 미 항모들은 미드웨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국 측은 일본 측보다 훨씬 강도 높은 경계 태세를 취했습니다. 6월 3일 오전 9시, 카탈리나 비행정 한 대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진 곳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제2수뢰전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대는 노부다케展丈 중장이 지휘하는 미드웨이 공략부대로서 미드웨이에 상륙할 이치기一木 대좌 이하 5,800 명의 상륙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 해전 막바지 일본 항모에 폭탄을 적중시킨 왼쪽의 딕 베스트(실제 인물, 배우는 에드 스크레인). 영화에서...
일본이 미국 함대를 발견한 것보다 하루가 빠른 것이었습니다. 미드웨이에서 보내온 적 함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이 함대는 미드웨이 상륙 부대라고 판단했습니다. 긴급 전문이 미 기동부대에 타전되었습니다. 이 때 플레처와 스프루언스가 이끄는 항모 세 척은 미드웨이 동북쪽 500km에서 은밀히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다케의 상륙부대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공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노리는 목표는 노부다케의 상륙부대가 아니라 나구모의 주력 항모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발견할 때까지는 절대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6월 3일 저녁, 미 기동함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요격할 예상 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했습니다. 6월 4일 01:30. 미 항모 부대의 항공대원들은 이른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출격대기를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 시간 후 대원들이 정렬하여 함장과 비행대장으로부터 앞으로의 출격에 대해 주의와 훈시를 들었습니다. 새벽 4시 15분, 미드웨이 기지에서 카탈리나 비행정이 출격하였고 15분 후 제17 기동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가 정찰 임무를 받고 출격했습니다. 이 때 나구모 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서방 370km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6월 4일 새벽, 나구모는 미 항모들이 근처에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정찰기 몇 대를 발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들 정찰기들은 기상 악화로 정찰 거리의 절반 정도에서 정찰을 중지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약 날씨가 좋아 미 항모들을 발견했다면 전투의 양상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이것도 미군 측에게는 계속되는 행운이었습니다. 새벽 4시, 예정대로 미드웨이 공격을 위해 비행갑판을 떠난 일본 항공기들은 상공에서 선회하며 편대를 이룬 뒤 동쪽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의 폭탄 투하 모습
6월 4일 오전 4시 45분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막이 올랐습니다. 조심성 많은 나구모는 만의 하나 미 항모가 나타나 역습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모 네 척이 보유하던 항공기 중 절반인 108대만 출격시키고 나머지는 만약을 위해 대기시켰습니다. 제1차 공격대의 지휘관은 도모나가友永 대위였습니다. 미드웨이로부터 발진한 체이스Chase 대위의 카타리나 비행정은 수많은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향하여 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보고했습니다.
새벽 6시 7분, 일본군 항모부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미17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즉시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휘하 요크타운에 공격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 제16 기동부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즉시 기동함대 공격대를 발진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미 해군의 항모 3척은 즉시 출격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새벽 6시 16분,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가 미군 요격기들이 엄호하고 있던 미드웨이로 접근해갔습니다.
전투는 미군기들이 선제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측 간에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약 15분간의 공중전에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조종사들의 일본 제로 전투기들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미 요격기들을 물리친 도모나가 공격대는 저유소, 비행정 격납고, 전투 지휘소, 발전소를 타격했습니다. 대공 포대와 활주로가 파괴되는 등 여러 기지 시설들도 타격을 입었습니다.
* 폭탄을 투하하고 빠져나가는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동영상
로프턴 헨더슨Lofton Henderson 소령과 헨더슨 비행장
태양이 막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려고 할 때 제2차 공격을 위한 항공기 108대가 항모 네 척의 비행갑판 위에서 발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는 진주만 공격 시 뇌격기대를 지휘했던 무라다村田 소좌였습니다. 무라다 소좌의 공격대는 혹시 근처에 미국 항모나 전함이 출현하면 즉시 출격하기 위해 동체 밑에 어뢰를 부착하고 발진 대기 중이었습니다. 이때 1차 공격대 도모나가로부터 미드웨이에 대해 제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몇 분이 지나자 일본군은 미드웨이 기지에서 나구모 함대를 향해 저공으로 날아오는 미군기 뇌격기 편대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구모는 도모나가의 요청이 맞다고 생각했다.
미드웨이의 미군 항공기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 해병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은 용감하게 일본 함대에 어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항모들은 지그재그 회피 운동으로 어뢰를 모두 피했습니다. 상공을 경계하던 제로 전투기들은 속도가 느린 미군 뇌격기들을 쉽게 먹이로 삼았습니다. 살아남은 미군기들도 일본 함대에서 쏘아대는 격렬한 대공 포화에 맞아 모두 격추되었습니다. 한편 미드웨이 기지에서는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제241 비행대대 승무원들이 출격 준비를 끝내고 헨더슨 소령의 짧고 결의에 찬 훈시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행대원들은 비행 학교를 갓 졸업하고 미드웨이에 배치 받은 애송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헨더슨 소령은 45도 내지 60도의 활공 폭격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각도는 대공포화의 밥이 되기 쉬웠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여섯 대의 돈틀리스 폭격대는 전투기의 엄호 없이 나구모의 항모군을 향하여 용감하게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본 함대군은 이들 폭격기들을 모두 요절내 버렸고 헨더슨 소령의 비행기도 피격 당했습니다. 그는 항모 가가에 기체를 충돌하려고 돌진하다가 갑자기 화염에 휩싸이면서 항모 가가의 좌현 물속에 곤두박질했습니다. 열여섯 대 중 겨우 여섯 대만 기지에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헨더슨 비행대의 과감한 공격에 화들짝 놀란 나구모의 미드웨이 제2차 공격대의 발진이 늦춰지게 되고 결국 이것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패배와도 연결됩니다.
* 피격되고 있는 일본 항모
한편 나구모의 정찰기들은 출격한 지 두 시간이 되었지만 미국 함대나 미 항모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나구모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오전 7시 14분, 나구모의 제로 전투기들이 헨더슨 소령의 폭격대를 사냥하고 있을 때 나구모는 운명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공격 제2파는 장착된 어뢰를 육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꿔 장착하고 미드웨이에 대한 추가 공격을 위해 비행갑판에 대기하라!!” 이 명령을 내리고 얼마 있다가 정찰기 한 대가 요크타운 비슷한 항모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무전으로 보내왔습니다. 나구모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마침 미드웨이를 공격하고 돌아오는 도모나가의 항공기들이 나구모의 항모군 상공 위에 도착했습니다. 도모나가의 비행기들은 거의 연료가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구모는 이들 비행기를 착함시켜야 할지 아니면 발견된 요크타운을 공격하기 위해 신속히 폭탄을 어뢰로 바꾸고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숙고한 끝에 나구모는 미 항모를 먼저 공격하고 그 뒤에 미드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항모 히류에 있던 차기 연합함대 사령관 감이라는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즉각 현재의 공격대를 전투기 호위 없이 그대로 발진시키자는 제언을 해왔습니다.
* 허둥대다 기동부대를 말아먹은 나구모 제독(왼편). 영화에서...이 배우(쿠니무라 준)
는 우리나라 영화 <곡성>에 나옵니다.
어뢰로 바꿀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그대로 장착 중인 폭탄으로 신속하게 미 항모를 공격하자는 얘기였습니다. 나구모는 알았다는 말은 했지만 참모들과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구모는 현재 상공을 떠돌고 있던 전투기들을 착함시켜 연료를 보급한 다음 전투기들로 하여금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를 호위하게 하는 정공법을 택하게 됩니다. 나구모는 전투기 호위 없이 공격대를 미 항모에 보내면 방금 전의 미군기와 같은 꼴이 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미 항모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일본군은 폭탄을 바꾸랴, 전투기들을 착함시켜 연료를 주입하랴하면서 금쪽같은 시간이 이렇게 흘러만 가고 있었습니다. 네 척의 항모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비행갑판 위에 있던 모든 항공기들은 그 아래층인 격납고에 엘리베이터로 내려졌고 항모 공격을 위해 다시 폭탄에서 어뢰로 바꾸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에 쫓겨 떼어 낸 폭탄을 폭탄 창고에 갖다 두지도 못한 채 우선 비행기들 옆에 놓는 등 승무원들은 우왕좌왕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고성능 폭탄들이 항모 격납고 안 도처에 널려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잠시 후에 큰 재난을 불러옵니다. 한편 비행갑판 위에는 도모나가의 비행기들이 차례로 착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9시 20분 폭격기들의 무장을 어뢰에서 폭탄으로, 다시 폭탄을 어뢰로 바꾸는데 두 시간이 걸렸으며, 이제 모든 항공기는 발진할 태세가 되었습니다.
* 어뢰로 바꿔달지 말고 폭탄을 매단채로 비행기를
띄우자고 진언했던 다몬 소장. 영화에서...
한편 미군의 카탈리나 비행정은 구름 위에 숨어서 계속 나구모 함대의 일거수일투족을 플레처 소장에게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플레처는 공격할 최적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월 4일 동이 틀 무렵 정찰기로부터 미드웨이 북서쪽 370km 해상에 일본 항모 두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플레처는 즉각 모든 항모들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공격 제1파는 드디어 나구모 함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처음 일본 함대에 접근한 미군 뇌격부대 열다섯 대는 일본 전투기와 대공 포화에 모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이 뇌격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조지 게이George Gay소위였는데 그는 일본 전투기에 격추당했으나 조종석 고무 의자 방석을 붙잡고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이 역사적인 미드웨이 해전을 처음부터 실컷 구경하다가 다음 날 카탈리나 비행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미군은 뇌격기 부대를 호위하던 전투기들이 앞을 가린 구름과 통신 장애로 뇌격대를 놓치게 되어 뇌격기들은 일본 전투기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호넷의 뇌격부대가 공격한 지 15분이 지나서 이번에는 엔터프라이즈의 뇌격대와 요크타운의 뇌격대가 뒤를 이어 나타났습니다. 이들도 호넷 뇌격대처럼 전투기 호위 없이 나타났습니다. 이 뇌격대들도 통신 장애 때문에 아군 전투기들이 6천 미터 상공에서 헛되이 선회하는 바람에 호위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들도 모두 일본 제로전투기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 박살나는 일본 기동함대. 상상화
이로써 미드웨이 전투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미군기가 파상적으로 일본 함대를 공격했지만 일본 함대는 여태까지 하나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군기들은 처절할 정도로 일본 함대를 눈앞에 두고 모두 격추되었습니다. 이제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 함대의 승무원들은 이번 미드웨이 작전은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미 뇌격대들은 모두 섬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간접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는데 세 가지 이유에서 큰 기여를 했습니다.
첫째, 이들 뇌격대는 일본 기동부대를 연속으로 흔들어 놓아 이들로 하여금 미 항모들에 대한 신속한 반격에 나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 미군기들은 대부분의 일본 전투기들이 뇌격대에 눈이 팔려 자기 위치를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많은 제로 전투기들의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게 만들어서 다음 미군 폭격대 요격에 대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제로기들의 조종사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함-전투-착함-보급-이함을 되풀이 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다가 섬멸된 요크타운의 뇌격대는 특히 승리를 위한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 기동부대 남동쪽에서 저공으로 몰려온 요크타운의 뇌격대를 요격하느라 일본 호위 전투기들은 모두 남동쪽 해역 저공에 몰려들어 일 기동부대 상공의 하늘은 텅 비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텅 빈 공간으로 매클러스키 급강하 폭격대가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역사를 바꾼 운명의 5분, 매클러스키 급강하 폭격대
미 항모 세 척에서 날아온 마흔 한 대의 뇌격기 가운데 여섯 대만이 항모에 귀함했습니다. 일본 항모들은 한 척도 어뢰에 맞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매클러스키 소령이 이끄는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격기들이 정찰기의 보고에 의존한 현장에 도착하자 일본 함대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항로를 변경한 것입니다. 매클러스키 소령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는 필시 일본 함대가 북쪽으로 항로를 변경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일본 기동부대가 북방으로 이동했으리라고 짐작하고 변침과 수색을 되풀이하며 북동쪽 바다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함재기의 발진과 착함에는 바람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항모들이 함재기 발진을 위해서 북쪽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직감이었습니다. 매클러스키 소령의 감투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용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 폭격대의 연료가 거의 절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만약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면 폭격대는 귀함하지 못하고 바다로 추락할 판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명령을 내린지 20분이 지난 오전 10시쯤 북쪽으로 향하는 폭격대 아래 해상에 가느다란 흰 선들이 보였습니다. 곧 이어서 일본 항모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등 일본 주력 항모들 네 척이었습니다.
* 태평양 전쟁의 승부를 가른 매클로스키 소령. 영화에서...
일본의 모든 항모들이 재급유하고 재무장하는 장비와 비행기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고옥탄 연료 호스가 비행기에서 떼어낸 폭탄들 사이로 뻗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폭탄들은 막 이륙하려고 엔진을 가동하고 있는 비행기들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파국을 만드는 재료들이었습니다. 맨 먼저 나구모의 기함인 아카기가 제물이 되었습니다. 구름을 헤치고 매클러스키 소령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세 대가 겁도 없이(dauntless는 겁이 없다는 뜻) 아래에 있는 아카기를 향해 내리꽂히듯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폭탄 세발을 떨어뜨려 이 중 두 개의 직격탄을 그대로 꽂아버렸습니다.
폭탄 한 발은 아카기의 아래층 격납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폭탄과 어뢰 및 항공 연료에 인화되어 가공할 대 연쇄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함교에 있던 나구모와 함장 그리고 참모들은 가까스로 함을 탈출하여 순양함 나가라長良로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아카기 근처에 있던 가가에도 매클러스키 소령의 다른 아홉 대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아카기에 대한 공격보다 1분 전인 10시 23분에 내리꽂히면서 직격탄 네 발을 명중시켰습니다. 가가 역시 불기둥과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매클러스키 급강하 폭격대가 이런 가공할 폭격을 하고 있는 동안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열 두 대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추가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들도 10시 25분 소류에 급강하 폭격을 하면 직격탄 세 발을 직통으로 때려 박았습니다. 아카기와 가가에 이어 소류도 역시 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불과 5분 만에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세 척의 항모가 불길에 휩싸였고 이 후에도 폭발은 계속되었습니다. 세 척의 항모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 함대는 마지막 남은 항모 히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집결하면서 전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히류는 야마구치 다몬山口 多聞 소장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구모 중장보다는 직급이 낮았지만 훨씬 단호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야마모도의 후임 사령관감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습니다.
* 니미츠로 분한 배우 우디 해럴슨
그는 애초에 나구모가 어뢰를 달 것인가 ,폭탄을 달 것인가 하고 우왕좌왕할 때 어뢰가 아니더라도 폭탄을 그대로 달고 가서 미 항모에 떨어트리자고 직언을 했었습니다. 야마모토 역시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나구모보다는 다몬에게 그 지휘를 맡기고 싶어 했지만 대본영의 해군본부 내의 알력과 서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나구모 함대 뒤 550km에서 뒤따라오던 주력부대의 전함 야마토의 작전실에서 미드웨이로부터 낭보를 기다리던 야마모토는 세 척의 항모가 침몰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자 망연자실해졌습니다.
오전 10시 40분, 다몬 소장은 세 척의 항모가 침몰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즉시 급강하 폭격기 열여덟 대와 호위 전투기 여섯 대를 발진시켰습니다. 요크타운을 발견한 일본기들은 여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서 요크타운을 돕고자 달려왔습니다. 주위 함선들의 격렬한 대공포화와 전투기들의 사격으로 열 세대가 격추되었으나 다섯 대는 요크타운에 세 발의 폭탄을 명중시켰습니다.
이어서 도모나가가 지휘하는 2차 공격대가 다시 발진하여 요크타운에 달려들었습니다. 필사적인 탄막을 뚫고 들어간 일본 뇌격기들에 의하여 발사된 어뢰 두 발이 요크타운에 직통으로 명중하면서 2만 톤의 요크타운은 놀란 말처럼 물 위에서 뛰어 오르듯이 요동치면서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도모나가는 요크타운 피격 직전에 어차피 귀함 못하는 입장이어서 그대로 요크타운의 갑판에 돌진하였습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오른편), 그가 총애했던 다몬 소장(왼편). 영화에서...
히류에서 발진한 도모나가 비행대가 요크타운을 공격한 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의 마지막 공격이 되었습니다. 한편 요크타운이 집중적으로 얻어맞고 있을 때 미군 정찰기가 히류를 발견했습니다. 이 보고를 받고 오후 4시 엔터프라이즈에서 스무 대의 돈틀리스 폭격기와 호넷에서 열여섯 대의 폭격기들이 발진했습니다. 1시간 후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발진한 돈틀리스 폭격대가 히류를 발견하고 곤두박질하여 내려오면서 검은색 폭탄들을 떨어트리기 시작했습니다. 폭탄 네 발이 비행갑판에 명중하여 폭발하자 발함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들의 폭탄과 연료 탱크가 폭발하면서 히류도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야마구치 소장은 불구덩이 속의 히류에 끝까지 남아 최후를 맞았습니다.
요크타운은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면서 이미 회생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플레처 소장을 비롯한 2천여 명의 승무원들은 퇴함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구모의 함대 전체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제국의 꿈이 사라졌습니다. 진주만 공습 후 6개월 동안 “제대로 설쳐보겠다”는 야마모토의 예언은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았습니다. 이제 태평양의 균형추는 점차 미국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6월 5일 새벽 야마모토는 공식적으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작전을 취소한다고 말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대해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 일본 함대 히류의 공격으로 대파된 요크타운은 극심한 피해에도 침몰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회생이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요크타운은 예인선에 의해서 견인되어 하와이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6월 6일 늦은 오후 일본 잠수함이 추적해서 어뢰를 발사했고 두 발이 요크타운에 명중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은 이미 모든 승조원들이 대피해서 인명 피해는 불과 몇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발이 요크타운을 밀고 있던 구축함 함만Hammann에 명중하여 적재한 폭뢰가 터졌습니다. 함만은 함체가 두 쪽으로 갈라져 침몰하면서 80여명의 승조원이 사망했습니다.
* 일본 항모에 폭탄을 안겨주고 명중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딕 베스트
어뢰에 피격된 요크타운은 더 이상 예인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구조팀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요크타운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불사신 같은 투지를 보이며 다음날 6월 7일 오후 다섯 시까지 해면에 떠 있다가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스프루언스의 기동부대는 일본 함대를 웨이크 섬까지 추격하다가 다시 함수를 동쪽으로 돌려 철수했습니다. 일본은 대패하였고 미국은 대승한 전투였습니다. 미 기동부대는 하와이로 철수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일본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6월15일 일본 히로시마로 돌아왔습니다. 해군의 최고위층과 일왕 히로히토에게만 미드웨이 해전의 자세한 내용은 빼고 개략적인 사실만 알렸을 뿐 다른 모든 군관계자들에게는 철저히 감췄습니다. 심지어 육군의 최고위층에게도 깜쪽같이 숨겼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부상을 입은 장병들은 분리되어 입원 되었고 침몰함에서 살아남은 장병들은 가족과의 면회마저 완전히 금지당하고 남태평양에서 활동 중인 각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이 해전의 결과에 대해 일체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아울러 이 대패의 책임자 중 문책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최고 책임자인 나구모는 다시 편성된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 재차 임명되었습니다.
* 니미츠 제독(왼편)과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 영화에서...
일본해군의 미드웨이 패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한 주요 원인은 첫째,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에게 치명타를 안긴 암호해독에서 미군에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적 기동함대의 조기 출현에 대비한 정찰 활동도 부족했었고 조기 출현 시에 대비한 긴급 행동에 대해서도 별다를 준비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철저하게 무선 통신을 금지하면서 최초 미 항모들의 움직임을 나구모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점도 중대한 실책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집중의 원칙을 외면하고 미드웨이 점령과 적 함대 격멸의 두 마리 토끼를 쫓았다는 점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았던 결과는 미 함재기들의 공격에 노출되는 수많은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다섯 번째는 정찰기를 동원한 해상 수색 활동이 너무 빈약했습니다. 여섯 번째로 나구모 제독의 미흡한 상황 판단 능력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뢰를 달까 폭탄을 달까하며 우왕좌왕하다가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미 폭격기들의 급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몬 소장이 폭탄을 매단 채 그대로 미항모군으로 달려가자는 제언이 무시당한 것도 일본에게 뼈아픈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끝으로 승운(勝運)도 일본 함대를 외면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한 미국 해군의 한 간부가 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연속되는 행운의 혜택이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것을 일본 측에서 말하자면 “악운이 대패를 안겨주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군 항공대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던 일 항모 부대가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마지막 급강하 폭격대가 가한 단 한차례의 기습에 네 척의 항모를 잃고 개전 단 6개월 만에 일 해군의 괴멸이 시작되는 비극을 맛본 것입니다. 매클러스키 소령이 이끄는 급강하 폭격기대가 연료 문제로 그냥 귀함했다면 일본 항모군은 온존이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해전의 결과
이틀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거대한 함선들이 미드웨이 인근바다 5천 미터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일본 측 전사자 중에는 316 명의 베테랑급 조종사들과 탑승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노련한 조종사와 승조원들을 양성하는 것은 비행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고를 필요로 합니다. 이와 같은 베테랑 파일럿들과 승조원들의 대거 상실은 향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되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국력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대국 미국에 도전한 일본이 완전히 무릎을 꿇은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몇 번의 항모 기동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구모 부대의 긴 칼의 맛을 보여줄 다음 적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큰소리 땅땅 치던 기동부대 간부들은 이제 내심으로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뒤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된 어느 일본 해군 간부는 "이제 일본 해군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을 통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펀치 한 방을 되게 얻어맞고 비틀거리다가 3개월 뒤에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무수한 잽을 맞으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은 미국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제 일본은 종전 시까지 미군에 줄 창 얻어터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살공격이라는 가미가제를 비롯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원자탄 두 방을 얻어맞고 넉 다운 되어 버렸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이 영화는 1월 3일 월드컵경기장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감상했지요.
지찬이 칭구가 담아준 내용을 보니 영화를 보는 것 보다 더욱 상세합니다.
감동~ 감동~!!!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 맥락을 알고 보면 재미는
배가가 되는 법이지요. <알라모>,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닥터 지바고>,
<엘 시드>, <천일의 앤>, <스팔타커스>, <링컨>, <덩케르크>, <발지 대전투> 등등...
마하를 돌파하는 쌕쌕이를 탔던 유장군은 당시 프로펠라 비행기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항상 궁금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짝...감동을 먹
었다니 고맙네요. 건투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