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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신년 말씀 4강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
요절 베드로전서 4장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씀바귀나 여주나 익모초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다 쓴 것인데 사람들이 몸에 좋다고 먹는 것입니다. 익모초는 쓴 것인데 쓴 맛이 있고 그것을 먹으면 식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전에 단오가 되면 여름이 시작되는 데 그때 어머니가 익모초 달인 물을 한 사발씩 자녀들에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도 때로는 고통스러운데 건강에 좋고 고난의 맛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맛을 알고 그 고난에 참여하여 삶의 맛을 돋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불에 타 죽었습니다.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받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황제를 숭배하면서 고난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사도베드로는 고난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인만이 받는 특권이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고시를 공부하는 고난은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성적으로 의대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받는 것입니다. 변호사 고시 공부하는 고난도 로스쿨 졸업생들만이 받는 고난입니다. 해군 특수전 전투단인 udt 훈련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udt에 합격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고난을 받으면 그들은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udt대원이 됩니다.그들은 그 고난을 특권의식을 갖고 영광을 생각하며 즐거움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권의식을 갖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며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 고난 받는 자와 영광의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수치와 모욕을 받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암재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멋진 사람입니다. 고난보다 어려운 것은 치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발가벗겨져서 수치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수치와 모욕을 받습니다. 수치와 목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치욕을 받는 자에게 장차 받을 영광을 이미 보여주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더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집트 왕자로서 기쁨을 잠시 죄악의 낙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안이숙 여사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안이숙 여사는 일제에 의해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에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어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안이숙 여사는 살아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순교자에서 실격된 것으로 인해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ubf선서문에 보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군이다.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맛을 즐겨야 합니다.
기쁨을 주는 것에는 쉽게 얻는 기쁨과 고난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쉽게 얻는 기쁨은 그 후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기쁨을 주지만 중독성을 강한 것입니다. 비합법적인 성적 관계를 갖거나 마약이냐 쇼핑이나 알콜이나 담배나 게임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쾌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신도 고통스럽고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습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얻는 기쁨은 운동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을 통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이런 것은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이므로 그 기쁨이 오래 갑니다. 이런 기쁨은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실 때 기쁨과 유사합니다. 아메리카노는 설탕도 프림도 넣지 않고 커피만 넣어서 처음에는 쓰게 느껴집니다. 저도 처음에 커피 맛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내가 아메리카 커피의 애호가가 되었습니다. 커피를 자주 마시다 보니 쓴 데서 단맛을 느낍니다. 조금씩 마시면 하루 종일 입이 달달합니다. 오히려 라떼 커피나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시면 입이 텁텁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얻는 기쁨보다 더 좋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즐거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는 성령이 마음 깊은 데서 기쁨을 주시고 그 기쁨이 오래갑니다. 동방박사와 같이 먼 거리를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와서 진리를 찾았을 때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기쁨은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는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인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그와 같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삶에 기쁨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건설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고난에 참여할 때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하는 고난, 서로 합심하여 기도하는 고난, 비신자 열 명(학생 5명)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고난, 양식 일기를 쓰는 고난, 전도하는 고난, 이웃을 섬기는 고난, 성령의 소원에 순종하는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실 즐을 믿습니다.
(2) 죄가 주는 즐거움을 맛보아서는 안 됩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왜 죄를 지을까요? 죄를 지을 때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죄를 몰래지으며서 쾌락을 느낍니다. 살인 도둑질 악행이나 남의 일을 쓸데없이 간섭하는 이유도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복수를 할 때 사이다와 같은 통쾌함을 느낍니다. 가인의 후예 라멕은 자신의 상처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자랑하고 노래합니다. 이런 죄로 인하여 쾌감을 느끼면 그 후에는 심판의 고통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동생을 욕보인 형을 죽이고 그것을 방임한 아버지에게 반역의 칼을 겨누었습니다. 그는 잠시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헌금을 도적질하고 엘리의 아들들도 하나님의 제물을 도적질 하였습니다. 그들은 잠시 재미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악을 행함으로 잠시 자신이 기뻤겠지만 후에는 번뇌하다가 자살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함으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일에 쓸데없는 관심을 갖고 말하는 것도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리 동네에서는 마실가서 아줌마들이 험담하다가 집안 싸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죄로 인한 즐거움보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다가 고난을 받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죄와 타협지 않고 거룩하게 살다가 고난을 받으며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고집하고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 받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박해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면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가 받을 심판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도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성도도 고난을 주신다면 순종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받을 심판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 의로운 성도가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들의 구원을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죄인은 구원받지 못하고 불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통보다 지옥의 고통은 더 크고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변화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을 때 우리의 고난보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을 생각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천국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자로 쓰임 받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4) 선을 행하며 우리 영혼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박해하는 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며 죽기까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죽을 때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하게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의 장래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주십니다.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행하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영혼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를 위해서 저주하지 않고 용서 기도를 하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을 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끝까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의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특권입니다. 의대생들이나 고시생들이 받는 고난과 같습니다. 의대생과 로스쿨의 학생들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들은 이 고난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성도들만이 받는 특권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고난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쓴나물이 입맛을 돋우듯이 우리가 받는 고난도 삶의 활력을 줍니다. 게임이나 마약의 즐거움은 빨리 얻지만 잠깐입니다. 그들은 후에 엄청난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맛이 아메리카노처럼 당장은 쓴 것 같지만 그 기쁨이 오래 갑니다. 씀바귀는 쓰지만 쓴 맛이 있고 당뇨를 예방합니다. 열대지방에서 나는 여주 열매는 쓰지만 당뇨예방 좋습니다. 우리는 커피 같은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영적인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가 고난 받은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잠시 고난을 받으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은 그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고난은 잠깐이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성령이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나 죄의 기쁨을 맛으면 그 후에는 쓰디쓴 고통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기쁨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025년 신년 말씀 4강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2-19
요절 베드로전서 4장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2025년 신년말씀 4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