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三 章. 믿음과 배신의 기로
(一)
동목은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능공십자 학구를 방문했다. 두
드릴 여유조차 없었다.
"누구╋?"
"쉿! 나, 동목이야."
다짜고짜 문을 확 밀어젖히고 뛰어들어간 동목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학구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의를 주었다.
"이 늦은 밤에..."
"쉿! 조용히 하랬잖아!"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동목은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청각에
모았다. 있을 것이다. 이당일각을 초토화시킨 집단이 바로 곽
가장이라면 학구의 침소에도 눈과 귀가 숨어 있으리라.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상당한 고수... 빌어먹을! 추풍이라면
감응인가 뭔가로 읽어 냈을 텐데.'
어둠 속에 반짝이는 이목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극히 당연했
다. 설혹 학구를 감시하는 자들이 없다 할지라도 자신을 쫓던
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따라다닐 터였다. 무녕성에서 놓친 사
람이 두 시진이나 훌쩍 넘긴 다음에 분타로 돌아왔으니. 그러
나 동목이 아무리 청력을 집중시켜도 먼지 떨어지는 소리조차
잡아낼 수 없었다.
"바람 좀 쐬지 않겠나? 노숙(露宿)을 밥 먹듯이 하다가 푹신한
침상에서 자려니 영 잠이 오지 않는군."
학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치를 알아챈 듯 맞
장구를 쳐왔다.
"거 사람 참... 나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막 잠이 들
려던 참인데 이렇게 깼으니 잠자기는 틀린 것 같고... 그러지.
바람이나 쐬세."
동목은 눈짓으로 침상 머리맡에 놓인 검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떡인 학구가 검을 집어들자, 동목은 다시 한 번 사방
을 유심히 살펴본 후 태연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마음도 심란하고 해서 무녕성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하하하!
천지가 분 냄새, 술 냄새로 진동하더군."
"원래 뱃사람들이 거칠지 않나. 무녕성 사람들은 절반이 뱃사
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객고(客苦)를 달래기는 그만이지!"
"응? 왜? 기루에 들르고 싶은가?"
"하하! 실없는 소리. 더군다나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새끼처럼
구궁산을 빠져나온 주제에 기루까지 들른다면 무슨 낯으로 장
주님을 뵈려고."
동목은 말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반여량의 거처로 향했다.
이하극륜이 분타에 있는 이상 자신들이 빠져나갈 방도는 전혀
없었다. 존장으로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앉아서 포박
이라도 당해야 할 처지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절감한 동목은 분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조
중의 거처로 달려갔다. 그러나 혈향봉 조중은 거처에 없었다.
분타주 가심에게 차 마시러 간다고 가서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불길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자 동목은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반여량의 거처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
칫하다가는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만 초래할 것 같았다. 그는
결국 학구를 찾았다. 이하극륜과 겨룬다면 몇 수나 버틸지 모
르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한사람이라도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마음 든든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학구가 소곤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난 다음 말하자. 추풍이 옳았어."
"뭐? 무녕 분타에 이상한 예감이 든다고 한 말 말이야?"
"그래,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자."
동목은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한 음
성으로 말하면서도 혹시 누가 듣지 않을까 연신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반여량의 거처는 경비가 삼엄했다.
무녕 분타 무인 중 이 할은 화룡(火龍)이라 부르는 누각(樓閣)
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추풍을 만나러 왔다."
동목은 태연히 말을 걸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의원이 다녀갔는데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인들 중 한 명이 동목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건네 왔다.
몸이 다부지고 눈빛이 날카로워 검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물
러서지 않겠다는 기백이 물씬 풍기는 무인이었다.
"누군가?"
"부분타주 방겸(邦鉗)입니다."
순간, 동목과 학구는 반여량의 신상에 이변(異變)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적지(適地)도 아니고 분타 내에서 부분타주가
직접 경계를 지휘할 정도라면 사태가 급박하게 흘러간다는 의
미다.
"부분타주가 직접 밤이슬을 맞고 있으니 고맙군. 추풍의 상세
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
서...한마디만 물어보면 되니..."
"안 됩니다. 분타주께서 유시(酉時) 이후에는 그 누구도 출입
을 금하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게 모두 추풍을 위한 일,
밝은 대낮에 찾아와 주십시오."
방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후후후! 방겸이라고 했나? 이봐, 나는 비수당 양대주 능공십
자다."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방겸은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나는 장을 나올 때 장주님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추풍을 보호하라고. 그 말은 추풍의 곁을 떠나
지 말라는 말과도 같은 것. 무녕 분타주의 명이 장주님의 명보
다 앞선다고 보나?"
"장주님께서 서신을 보내온 것으로 압니다. 그 순간부터 양대
주님의 임무는 없어졌습니다. 자세한 것은 분타주님께 알아보
시지요."
동목과 학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감했다. 이변이 생
긴 것은 확실한데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볼 방책이 서지 않았
다.
"하하! 갑시다. 밝은 대낮에 찾아오면 되지 뭐."
"으음... 하기는 밤이 너무 깊었군."
동목과 학구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사십여 명에 이르는 무
인들을 일거에 도륙할 자신이 없는 한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
다.
범도, 이삼재(李三才), 황백(黃伯)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
다.
"늦은 밤에 무슨 일..."
학구가 투박한 손으로 이삼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모두 조용히 하고 잘 들어라. 일심각주님과 비수당주님의 행
방이 묘연해졌다. 추풍에게도 이변이 일어난 것 같고... 후후!
너희들은 평소 개개인의 무공이 사당 대주와 버금간다고 말해
왔지. 지금부터 그 무공을 선보여 봐라."
삼 인의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일심각 정예 무인답게 상황을 한눈에 깨달은 것이다. 사단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
쯤은 직감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병장기를 챙겨 들었다.
도둑 고양이처럼 발걸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준비를 하는 모습
에서 사당 대원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마치 예
정된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일사불란함.
이번 여정은 고된 길이었다.
일심각원 스물일곱 명이 하루 아침에 몰살하리라고는 그 누구
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비화당 사백 명, 비수당 이백 명이 죽
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희생일지도 모
르지만 죽음의 의미는 사뭇 달랐다. 비수당 전원과도 상잔(相
殘)할 실력이었지 않은가.
충격이 그것뿐이랴. 하루 두 시진 이상 자보지도 못하고 언제
어느 구석에서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말 그대로 지옥
이었다.
무녕 분타는 낙원과 다름없었다.
동목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팽팽한 긴장감을 심어 주었다.
"우리는 적지에 들어와 있다. 어제까지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었어. 잊지 마라. 검을 휘두를 순간이 되면 가차없이 휘둘러
라."
방심은 금물이다. 놀라운 무공을 지닌 친우들이 한 순간에 몰
살해 버렸으니까.
화룡각과 전각 하나를 사이에 둔 일행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
진했다. 먼저 동목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말은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나누자. 우선 추풍을 빼내
오는 게 급해."
"당주님과 윤명각주는?"
"음...!"
동목은 갈등이 일었다.
조중과 윤명은 장주의 여서들이 아닌가. 설마 장주가 여서들까
지 죽이려고 작정했을까. 그렇지만 한번 검을 뽑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장주의 성격 아니던가. 여서들이라고 죽이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와 범도, 이삼재는 추풍을 빼내오는 거
야. 그리고 학구 자네는 황백과 함께 두 분을 찾아. 성공하든
실패하든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분타를 빠져나간 다음
동문을 빠져나가면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거기서 만나는 거
야. 단, 동이 틀 때까지만. 그 때까지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
리지 않기로 하자."
"동목, 영문이나 알고 움직이자. 도대체 무슨 일이야?"
"동이 틀 시각이 가까와지니 간단히 한 가지만 말해 주지. 혈
단... 그들은 곽가장 문도야. 혈함망과 혈류묘는 이하극륜과
혈영일검이지. 곽가장 삼정검사."
"뭐! 어떻게 그런 일이!"
학구가 경악성을 토해 냈다.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동목이 말한 것
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우리 쪽이 실패할지도 모르기에 일러 주는 말이다. 혹여, 두
분을 모시더라도 절대 곽가장으로는 돌아가지 마라. 나도 영문
을 모르겠다. 하지만 추살량(追殺令)이 내려진 것은 틀림없
다."
"확실한 거야?"
"확실해."
"으음...!"
그 누구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곽가장을 떠난 다음부터 계속 그랬다. 코앞에 들이닥치는 일마
다 하나같이 놀라운 것뿐이었다. 동목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
다. 워낙 황당한 말이지만 그래도 공(公)의 칭호를 듣는 사람
이 캐온 정보에는 그만한 신빙성이 있었다.
"시간이 없다. 그만 움직이자. 참! 당주님과 각주님은 분타주
의 집무실로 간 후로 소식이 없어. 거기부터 뒤져 봐야 될 거
야."
"조심해."
"자네도..."
동목과 학구는 혈기 어린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것도 잠
깐, 학구와 황백은 곧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룡각은 연못 한가운데 세워진 누각이었다.
누각으로 가는 길은 연못가에서 중앙으로 이어진 교각(橋脚)을
건너는 길뿐이었다. 연못의 크기는 방원 이십 장에 달했고, 수
면에는 연꽃 잎이 빼곡하게 널려 있어 물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동목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저 어둠 한구석에는 무녕 분타 무인들이 독아(毒牙)를 번뜩이
고 숨어 있을 터였다.
화악!
갑자기 건너편에서 불길이 일며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분타주 방겸과 분타 무인들 몇 명이리라. 그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범도를 둥글게 에워쌌다.
"응? 뭡니까?"
범도는 일부러 큰 소리를 질렀다.
예정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범도, 무슨 일로 야밤에 화룡각을 들어선 게냐?"
역시 방겸의 음성이었다.
"잠이 일찍 깨서 추풍을 만나러 왔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돌아가라!"
동목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이삼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못 속으로 물 흐르듯 스며들었다.
수면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파문도 없고, 찰랑이는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단 삼십 명으로 비수당 무인 이백 명과 어
깨를 나란히 하려 했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랄
까.
동목은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주시했다.
단순히 무공만으로는 동목보다 일심각 무인들이 한수 앞섰다.
그래서 행동은 일심각 무인들이, 경계는 동목이 서기로 한 것
이다.
"일심각 무인들이 무공만 믿고 방자하게 군다더니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검을 뽑겠다."
방겸은 재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일 다경은 끌어 줘야 할 텐데.'
불안한 심정으로 황백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학구도 겪은
일이지만 방겸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시간을 끌기가 여간 어
렵지 않았다.
"하핫! 같은 곽가장 식솔끼리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황백이 제법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부분타주라면 검공 또한 거셀 테지만 일심각 무인이 지닌 긍지
도 그에 못지않았다. 검이라면 사양할 황백이 아니다. 그런데,
"하하하!"
느닷없이 방겸이 대소를 질렀다. 동시에,
화악! 확...!
어림잡아 사십여 개의 횃불이 일시에 켜지며 화룡각 주변이 백
주대낮처럼 밝아졌다.
"쥐새끼가 숨어들었다. 잡아랏!"
방겸은 태연히 황백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응? 쥐새끼가 숨어들어? 부분타주, 나도 돕겠소."
황백은 목구멍까지 치민 경악성을 도로 삼키며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했다. 오히려 놀란 것은 동목이었다. 이삼재가 연못으
로 스며든 자리에서 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빨간 횃불이 일렁
인 것이다. 실로 천운이었다.
무녕 분타 무인들은 호(壕)를 파고 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
니 숨소리 한 올 들리지 않을 수밖에.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
도 그림자 하나 찾지 못할 수밖에.
동목은 급히 연못을 바라보았다.
이삼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 이상 무한정 물
속에 있을 수만은 없으리라.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누각
아래까지 헤엄쳐 갔으면 잠시 숨이라도 돌릴 공간이 있으련만
이십 장 거리를 찰나간에 헤엄쳐 간다는 것은 희망에 불과했
다.
'이러다간 일을 망쳐 버린다.'
마음 속으로 결단을 내린 동목은 망설이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
다.
"하하하! 부분타주의 눈길은 속일 수 없군. 이 정도면 속아넘
어가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빠른 걸음으로 방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가 아무
리 빨리 걸어도 연못을 빙 둘러 가자면 족히 일다경은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이삼재도 버티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올라
야 되리라.
'제길! 이거 신법을 펼칠 수도 없고...'
방겸의 주의를 분산시키자면 되도록 태연해야 한다. 다급히 신
법을 펼치는 것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경계심만 부추길 뿐이
다. 그때,
"후훗!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귀에 익은 음성이 동목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헉! 이 목소리는 이하극륜...'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경문혈(京門穴:등 쪽으로 갈비
뼈 맨 아래)을 꽉 잡혔다 느낀 순간 전신이 자르르 마비되며
풀썩 고꾸라져 버렸다.
"방겸, 범도를 제압하라. 물 속에 있는 이삼재도 나왓!! 이게
도대체 무엇 하는 짓들이냐?"
멀어지는 기억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학구는 황백과 함께 호소봉왕 가심의 집무실을 향해 소리없이
움직여 나갔다.
가심의 집무실은 낮에 와본 적이 있어서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마음에 받은 충격이었다. 혈단이 곽
가장이라니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주와 각주를
찾는다 해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설혹 도주한다고 간주하더
라도 강서성 전역에 이목이 깔려 있는 곽가장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싸운다? 그건 더욱 말이 안 된다. 살아남은 사람의 모
든 힘을 집약해도 무녕분타 한 곳도 상대할 수 없다.
'휴우! 동목의 말대로 나중에 생각하는 거야. 우선은...'
분타주의 집무실에는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조중과 윤명이
아직도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학구는 잠시 멈칫거렸다.
동목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무녕 분타 무인들을 피해서 움직
이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조중과 윤명이 아직도 집무실 안
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면... 방법이 없다. 불빛이라도 없으
면 숨어서 움직이련만 대낮처럼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넓은 마당을 어떻게 가로지른단 말인가.
'그냥 당주님을 뵈러 왔다고 당당하게 나서?'
학구가 멈칫거린 이유였다. 그런 자신의 생각이 더욱 타당성
있어보였다.
'동목을 믿자. 실없이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은 아냐.'
학구는 몸을 숨기고 있는 담장과 집무실 간의 거리를 계산했
다. 신법을 펼쳐 집무실까지 다가가려면 디딤돌 두 개가 필요
했다. 그러나 가심은 여인답지 않게 집무실 부근에 꽃 한 송이
심어 놓지 않았다. 그저 널찍하기만한 마당. 디딤돌로 사용할
만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경계를 서는 무인은 둘.
'할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제압할 수밖에.'
그는 황백에게 턱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황백은 신속하게
상대를 확인하고 곧바로 암기를 꺼내 던졌다.
쉬익! 쉭...!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 소리, 그리고 극히 얕은 신음이 짤막
하게 들렸다. 거리를 격하고 날린 유엽도는 신음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학구도 신형을 날렸다.
그는 분타 무인 두 명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화톳불이 살라
진 마당을 가로질러 전각 지붕으로 뛰어올라갔다.
곧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활활 살라지는 화톳불이 쓰러진 무인들을 비추고 있건만 그 어
디에서도 숨소리 한 올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 분타주의 집무
실을 지키는 무인들은 고작 두 명뿐이란 말인가.
일전을 대비하고 있던 황백은 바짝 긴장한 채 사태의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학구는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
서도 안 된다. 그가 맡은 일은 집무실 안에 당주와 각주가 있
느냐 하는 것. 그리고 있다면 무녕 분타 무인들에게 들키지 않
고 사태의 위급함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사악! 사아악...!
기왓장이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대들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조중과
윤명이 다탁(茶卓)에 멍하니 앉아 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
은?
학구는 너무 놀라 자칫 경악성을 토해 낼 뻔했다.
혈영일검.
장주를 도와 곽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전설적인 인물, 그
가 의연히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리고 분타주 가심은
혈영일검의 등 뒤에서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이러니 몸을 뺄 수 없지.'
학구는 격동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두 손을 모아 입에 갖다 댔
다.
째재잭...! 짹! 짹! 째재잭...! 짹! 짹!
산새가 울면서 지나가는 듯한 청량한 소리. 아니, 영락없이 산
새의 울음소리였다.
조중과 윤명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무엇이라고 입을 벌려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앉아 혈영일검을 바라볼 뿐이
다.
학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명이라면 모른다 하지만 비수당주 조중은 비수당의 밀마를
잘알고 있지 않은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전투상황을 알리는
밀마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째재잭...! 짹! 짹! 째재잭...! 짹! 짹!
학구는 다시 한 번 밀마를 띄웠다.
이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똑같은 가락을 연속해서 두 번
이나 발출한다면 그리고 상대가 조금이라도 예민한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가는 산새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도 있다.
"허허허! 새도 아닌 것이 새소리를 내다니."
'제길!'
학구는 혈영일검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위치가 노출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영일검 같은 고수라면 학구가 지붕 위에 착
지하는 순간부터 침입을 깨달았을 터였다. '참 운이 좋았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는데 역시 세상에 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파앗!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종적이 드러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
러나 지붕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가로지르려던 학구는 땅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집무실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흑의인들 바로 구궁산에서 보
았던 그 흑의인들이다. 황백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땅바닥에 널
브러져 있고.
혈단, 그들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제길! 동목이 옳았군. 믿고 싶지 않았는데 혈단이 곽가장이라
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대여섯 명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많아서는... 개죽음이다."
손에 힘이 빠졌다. 아찔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죽음을 택하느
냐 아니면 순순히 잡히느냐의 기로였다.
'당주님이 혈영일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혈단이 공식적으로
나타났다면 당주님도 알고 있을 터... 더군다나 제일급 밀마를
보냈는데도 응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 어떤 사연이
있을 게다.'
학구는 흑의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비수당 이백여 형제
가 죽어간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러나 형제들이 왜 죽
어야 했는지 이유만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학구는 허탈한 심정으로 검을 놓아 버렸다.
'삼화일지 최신, 이놈의 자식이....'
윤명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아내와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았다. 머리끝까지 치
솟는 분통을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그런데
그놈이 장주가 될 수 있는 길마저 막아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쉽게 죽였어. 더 처참하게 죽이는 건
데.'
후회가 막급했다.
삼화일지 최신이 신흥 사파(邪派) 연합체인 사우맹과 연을 대
고 지냈다는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일심각 무인 삼
십 명 모두가 최신의 수족이라는 말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러면 자신은 무엇인가. 속마음이 다른 수하들을 이끌고 허세
만 잔뜩 부린 못난 호랑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장주는... 장주
는 모든 사실을 알았다.
'놈을 죽이고 나면 각원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야 해. 일심각
원들은 자네가 일심각을 맡기 훨씬 전부터 최신과 손발을 맞춰
왔어. 분명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을 거야.'
그러면서도 구궁산으로 보냈다. 차기 장주로 내정할 생각은 처
음부터 없었으면서.
어쩌면 그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정녕 가능
할까? 곽가장 투혼의 상징이라는 일심각 무인들이 무엇이 아쉬
워 사우맹 나부랭이들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곽가장 전복? 웃
기는 소리다. 사우맹이 비록 거세게 일어나고 있지만 감히 강
서성에 들어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심각이 내
응한다면, 그리고 비수당과 비화당 무인들이 일거에 들고일어
선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는 사람이 전대 일심각주이자 곽가장 삼정 중 일인인 혈영
일검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고 보니 범도 그놈은 각주인 자
신에게 대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윤명은 앞으로 어떻게 상황대처를 해야할지 난감했다.
'수하가 없으면 운신하는 폭이 좁다. 이번 일이야 손조차 대지
못하고 당한 것. 으음...! 쇄심파를 밀어내고 신계각을 맡으면
금상첨화인데... 쇄심파도 동종관과 사공이 사우맹과 손잡은
사실을 몰랐던 책임이 있고, 나야 정보와 관련이 없지만 쇄심
파는 정보의 중심이 아닌가.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쇄심파가
더 클 터....'
윤명은 혈영일검을 바라보았다.
유일한 희망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전대 일심각주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일심각 사람들은
서로를 감싸주게 되어 있다.
그는 차기 장주로 내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반면에 조중의 안색은 어두웠다.
몸집이 유난히 큰 탓에 약간만 얼굴빛을 굳혀도 인상이 험악하
게 보이는데 지금은 마치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니.
'이상하다... 능공십자 학구가? 파가자 황보청이? 모함인데...
근원지가 어디란 말인가?'
조중은 학구의 밀마를 듣고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란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누가 있어
곽가장 무녕 분타 안에서 싸움을 걸어온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만한 상황이면 왜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아무리 귀를 쫑긋이 세워도 밖에서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뚜라미 울음 소리만 한가롭게 들릴 뿐.
"혈단은 어떻게 처리할 방침이신지요?"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닐세."
혈영일검은 매정하게 대답했다.
"그럼 저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병(兵)의 잘못은 장(將)에게 있는 것 아닌가?"
"..."
"차를 마저 들게. 그리고 나면... 자네들은 죄인이 되는 거야.
무공을 제압할 걸세. 반항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네. 그런 것
까지 뭐라 할 수는 없지."
너희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었다. 그
리고 혈영일검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진위(眞僞)나 제대로
알고 당했으면 합니다."
"본장으로 호송할거야. 진위는 장주님 앞에서 가리게."
호소봉왕 가심이 조중의 뒤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처제와 산귀, 석수가 혈단에 잡혀있습니다."
"벌써 알고 있는 일일세."
"구하실 방책은...?"
"허허! 그런 것은 염려하지 말래도..."
조중은 뒷골 밑 천주혈(天柱穴)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것을
감지했다. 약간의 향기로움과 함께. 그러나 그 손길이 준 고통
은 너무 컸다. 도문불출(道門不出)의 조조법( 爪法)을 익혔는
지 뒷골이 으스러지는 듯했다.
조중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신음 한 마디 내뱉
지 않는 굳건함을 보여 주었다.
가심이 윤명의 뒤로 욱직였다.
"어르신, 꼭 이럴 필요가...?"
윤명은 천주혈에 닿는 손길을 뿌리쳤다.
"잠시만 참으면 될 거야. 고통은 잠깐이지."
천주혈에 다시 손이 닿았다. 이번에는 윤명도 뿌리치지 못했
다. 혈영일검의 음색이 너무 단호했기에. 그는 이미 정신을 잃
고 있는 조중을 암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짤막
한 비명을 토해내며 탁자 위로 고개를 떨궜다. 혼절이 목적이
라고는 하지만 뒷골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은 참으로 참기 힘들
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감사 합니다
건강한 주말 보네세요
감사히 즐독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히 즐독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감사합니다.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