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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폭우가 쏟아진다. 천지를 삼켜 버릴 듯한 기세다.
이따금 내리치는 번갯불에 이미 물 속에 침잠해 버린 도읍이
간간이 비친다.
눈에 익었다.
상방...
상방성이 물 속에 잠겨 버렸다. 언젠가 비보를 하리라 생각했
던 강둑이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범람한 것이다.
그 중에 유독 초라한 집 한 채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대관장의'라고 쓴 초라한 깃발이 물결에 휩쓸려 내려간다.
'대관장의... 대관장의가...? 사부님! 안에 사부님이 계시는
데.'
반여량은 물살을 헤쳐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힘을 쓰면 쓸
수록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관장의라고 쓴 깃발은 물살에
떠밀려 내려갔다.
'안 돼. 사부님이... 사부님이...'
"사부님!"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지른 반여량은 자신이 토해낸 목소리에
놀라 불현듯 눈을 떴다.
꿈이었다.
아직도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흙탕물이 범람하
여 상방성을 덮치고, 소와 돼지와 닭이 떠내려가고, 낡디낡은
대관장의가 홍수에 밀려가는 꿈.
의복이 땀에 흠뻑 젖어 흥건했다.
찌르륵...! 찌륵...!
그토록 요란하던 천둥 번개 대신 고요한 풀벌레 울음 소리가
적막을 일깨웠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손을 들어 식은땀을 닦아낸 반여량은 낯선 방 안을 돌아보았
다. 캄캄했지만 달빛이 스며들어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보였다.
의자, 탁자, 화려한 창틀...
'무녕 분타에 들어왔군.'
상황이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둔덕에서 정신을 잃고 난 후,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옆구리와 등에 난 상처는 그대로였다.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더러운 헝겊, 움직일 때마다 비수로 찔러오는 듯 쿡쿡 쑤시는
통증. 입고 있는 의복도 분타에 들어서기 전과 다름없었다.
몸뚱이만 들것에서 침상으로 옮겨진 것이다.
'홍수에 집이 쓸려간다.... 악몽(惡夢)이다. 일신상에 큰 재앙
이 내릴 악몽.'
홍수에 떠밀려 가는 꿈은 꿈꾸는 사람이 뭔가에 밀려간다는 예
시였다. 현재 심각한 불안거리가 있거나, 인생이 전환될 징조
였다. 각종 질환이나 재앙이 닥쳐오는 것에도 대비해야 한다.
"끄응...!"
반여량은 옆구리 상처를 움켜잡으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무녕 분타에서는 묘한 기운이 풍겨 나온다. 곽가장 다른 분타
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살기(殺氣)였다. 그래서 들어가지 않
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는데.
간신히 자리에 앉게되자 눈을 감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조중이 태극도해라고 말한 내력이었다.그것이 내공인지 아닌지
는 아직도 모르지만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고, 상처를 낫
게 하는데는 아주 그만이었다.
일다경, 반 각, 한 시진...
무심한 시간이 달빛 따라 흘러갔다.
폐기했던 숨을 토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자 몸이 날아
갈 듯 가뿐해졌다. 상처가 눈에 드러날 정도로 나아진 것은 아
니지만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만도 많이 나아진 셈이
다.
반여량은 내친김에 그 자세 그대로 동기감응을 펼치기 시작했
다.
구궁산에서 본 혈함망, 혈류묘... 그들이 풍기던 기운은 생생
하게 뇌리 속에 기억되었다. 그리고 둔덕 위에서 무녕 분타를
바라보았을때, 그들의 기운이 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단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만은 각오해야 한다. 전에도 고통
은 있었지만 이성을 잃고 발버둥칠 정도는 아니었다. 상단전인
인당에 뇌력이 집중되면서부터, 동혈에서 남저명을 만난 다음
부터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버렸다.
고오오오...!
뇌력을 집중하자 사방이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생각은 무아경
에 접어들어 오직 칠흑 같은 어둠을 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인당에서 밝은 빛무리가 떠오르며 푸른색 기운을 잡아냈다. 그
와는 조금 다른 녹색 빛무리도 같이 떠올랐다.
"아!"
절로 장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인당에서 떠올랐던 밝은 빛
무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뇌력이 분산되면서 동기감
응이 자연적으로 깨진 것이다.
"이건 투시야..."
반여량은 동기감응의 정체를 명확히 알았다. 남저명이 일깨워
줬고, 혈갈류와 싸우면서 대략 깨달았지만 동기감응이 염력의
일종이었다니. 그러면 자신은 초인(超人)이라는 말이 아닌가.
또 한 가지 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고통이 전혀 없었다. 이상했다. 두통뿐 아니라 동기감응만 펼
치면 화염지옥에 들어간 듯 몸을 뜨겁게 불태우던 기운도 일지
않는다. 마음은 남저명을 만나기 전처럼 고요하고 평안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혈함망과 혈류묘 중 한 사람은 푸른 기운을 또 한
사람은 녹색 기운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그런 색채를 지녔고, 그들이 익힌 무공이나 성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녕 분타 안에 있다. 전
에는 기운만 감지했는데 이제는 색조(色調)로 구분할 수 있다.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번 읽었던 기
운이라면.
'사지(死地)야. 여기는...'
"끄응...!"
반여량은 물밀 듯이 몰려오는 고통에 다시 한 번 뱃속에서부터
저며 나오는 신음을 토해냈다.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려 한 결과였다.
'배류시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진육이 죽으면서 남겨준 유품, 배류시. 그 효용은 놀라워 조중
조차 상대할 수 없는 강적, 혼을 간단히 제거했다. 뿐만 아니
라 혼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할 것으로 추측되는 혈갈류조차 죽
음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으로 배류시는 수명을 다했다.
혈함망과 혈갈류가 무녕 분타에 있다면 그 누가 있어 그들을
상대할 것인가. 여태까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가다듬어 퇴
로를 열어왔는데 너무도 간단히 호랑이 입 속으로 뛰어든 격이
다.
반여량은 숨을 죽이며 병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고풍
스런 집기가 가득한 방 안에서 병기로 쓸 만한 것이라고는 촛
대밖에 없었다.
그것이라도 집어듣었다.
살금살금 걸어 문까지 다가선 다음 밖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무인들이 펼치는 지청술이라도 배웠다면 옷깃 쓸리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텐데. 반여량은 전신 감각을 총동원한 감응으로
동정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맹수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듯이.
문밖은 방 안과 마찬가지로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만약 누군가 지키고 있다면 초절정 고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없다.'
삐이걱...!
살며시 연다고 열었지만 문 열리는 소리가 너무 컸다. 그렇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밖에는 달빛만 고즈넉하게 비칠 뿐 인
기척은 전혀 없었다.
반여량은 전각들이 지어진 배열을 살펴보았다.
서민들 생활 속에 뿌리까지 깊이 파고든 감여.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이 전각을 아무렇게나 짓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강서성 감여는 원방감여가 주도한다. 전각을 지을 때 방위에
특히 신경을 썼을 터.'
별자리로 북극성(北極星)을 찾았다.
택격(宅格:도로에서 본 건물의 길흉)과 택위(宅位:건물 층수에
따른 길흉)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십사산방위(二十四山方位)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역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전각이 새워진 방향과 층수를 살펴보고, 택격과 택위의 배합을
추론한 다음, 건물간의 거리를 산출한다. 그러면 정문과 중문,
후원은 물론이고 분타의 크기와 현재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식
은죽 먹기다.
능숙한 어부는 물색만 보고도 어군(魚群)을 찾아낸다. 이름난
사냥꾼은 바람결만 느끼고도 목표로 한 사냥감을 찾아낸다. 평
생 농사만 지은 농부는 싹이 돋는 모습만 보고도 흉작인지 풍
작인지 직감한다.
반여량은 일반 감여가들이 평생을 공들이는 만두(巒頭)와 이기
(理氣)를 감응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만두와 이기는 모두 생기를 찾는 방법이다.
산수(山水)의 형세를 보고 생기를 찾는 것이 만두, 가옥이나
묘혈의 방향 및 오행상생, 상극으로 생기를 찾는 것이 이기.
그는 이미 생기의 근원지를 찾았다.
이십사산방위로 현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확인에 지나지 않았
다. 방위를 계산하는 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보보(步步)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역시 천라지망(天羅地網)에 갇힌 꼴이다. 뒤에는 분타에서 내
로라 하는 고수들이 기거하고 앞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
으리라. 정문을 나서기까지는 중문과 대문을 거쳐야 한다.'
갓난아기가 호랑이 굴 속에 기어 들어간 격이었다. 앞에는 화
광을 뿜어내는 호랑이 무리. 뒤에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암벽.
감여에 맞춰 지은 전각들은 서로간에 음양 오행, 팔괘를 고려
하여 지었기 때문에 경계하기에도 용이했다. 일인이 만인을 감
시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바로 이곳이리라.
반여량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오도가도못할 무렵.
저벅! 저벅...!
회랑을 타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걸어오는 방향으로 보아서 바로 자신에게 오는 모양이었다.
반여량은 직감적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
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회랑 밑에 나 있는 조그만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인지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
시 터져 끈끈한 핏물이 흘러 나왔다.
"쥐새끼 같은 놈!"
"어쩌지? 분타주님께서 반드시 죽이라는 엄명이셨는데..."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거야."
"그럴까?"
"우린 지금 눈 한 번 붙이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아무 곳에서
도 연락이 없잖아? 무공을 모르는 놈이 어떻게 빠져나가?"
"그래도 그놈은 동기감응인가 뭔가 하는 것을 익혔다던데..."
"썩을놈의 동기감응."
두 무인이 나누는 대화는 고스란히 반여량에게 전달되었다.
'반드시 죽여라? 그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분타주가
왜...?'
반여량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혈단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무녕 분타주가
죽이려 하는 행위는 납득되지 않았다. 감응으로 느낀 사실과
무인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종합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면
무녕 분타주와 혈단은 한통속이라는 것. 그렇다면 무녕 분타주
가 변심(變心)했단 말인가.
'좌우지간 모두들 위험에 처한 것 같은데..."
반여량은 투지(鬪志)가 끓어올랐다.
'좋아 나를 죽이겠다...! 나는 죽지 않겠어.'
분타에 횃불이 밝혀지고 많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은 숨은 보물이라도 찾는 듯 분타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 나갔
다.
'크윽!'
반여량은 뼛골이 저며 울리는 아픔에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
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무인들을 피하기 위해서 조그만 틈새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곳
은 자신이 거처하던 방의 밑바닥. 다행스럽게도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 움직이기가 쉬웠지만 무인들이 헤집고 다닐 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쿵쿵 울리는 소리, 무인들이 방을 뒤지는 발자국 소리였다.
그때, 쥐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넘나들기만 하더니 반여량이 움직이지 않자 과
감하게 손가락 발가락을 물기 시작했다. 생살을 뜯기는 아픔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루 바닥 위에 약간만 기척을
흘려도 감지할 만한 고수들이 바글거려 숨소리 한올 흘리지 못
했다.
크기가 고양이만한 쥐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습격했다.
피가 흘렀다. 피냄새를 맡은 쥐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달려
들었다. 그제야 이 쥐들이 옆구리에서 흐른 피냄새를 맡고 몰
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감여에 부합되게 지은 전각에는 쥐가 드물다. 악기를 버리고
생기를 고른 탓이다. 그런데 이토록 쥐가 많다니. 일반 쥐들보
다 몸집이 두 배나 큰 쥐들. 또한 인간을 서슴없이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꽈악!
'크윽!'
얼마나 이빨을 힘껏 악물었는지 모른다.
이번에 물어뜯은 놈은 하필 발가락 중에서도 제일 아픈 새끼발
가락 살점을 물어뜯었다.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닌 덕에
발바닥이 곰 발바닥보다 두꺼워 치명적인 해는 입지 않았지만,
뼛골이 자르르 울리는 아픔은 절로 신음이 새어나올 만큼 지독
했다.
그는 남저명을 떠올렸다.
남저명은 사기로 가득한 동굴 속에서 박쥐를 잡아먹고 살았다.
그 역시 무공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동
굴 천장에 붙어 있는 박쥐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을까?
염력이었다.
강한 뇌력으로 박쥐를 끌어들인 것이다.
'할 수 없다. 비정상적인 염력은 사용할수록 뇌를 손상시켜 결
국 미치게 만들지만...'
고오오오...!
반여량은 모든 뇌력을 모아 인당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방 안
에서 일었던 현상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세상이 캄캄한 암흑으로 변하고, 인당에서 빛이 뿜어진다 생각
되고, 둥근 원 사이로 쥐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찌직! 찌지직...!
쥐들이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더니 한 마리, 두 마리 물러서기
시작했다. 쥐들에게도 감응이 있을까? 그것은 감응이라기보다
도 위험 본능이라 표현하는 쪽이 옳으리라. 반여량을 썩은 고
기처럼 여기던 쥐떼들이 고양이라도 만난 것처럼 후다닥 도망
가기 시작했다.
"제길! 이놈의 자식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분타를 샅샅이 뒤
져도 없으니..."
"속썩이네. 이놈을 잡기만 하면 단칼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반드시 잡아서 단칼에 요절내야
할 놈이야. 부지런히 찾기나 해."
"벌써 분타를 벗어난 것 아냐?"
"입방정 떨지 마. 분타주님이 네 소리를 들었다면 반여량, 그
놈 대신 네 목이 달아날걸?"
"가자. 또 한 번 뒤져 봐야지 뭐. 없는 방구석을 백날 뒤져서
뭐해?"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졌다.
무인들이 방을 벗어나 멀리 간 것 같다.
"끄으윽...!"
반여량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무인들
이 떠나간 것과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형용할 수 없는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도끼로 머리를 가격 당한다면 꼭 이와 같으리
라.
염력을 사용하고 난 후 느끼는 현상.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
다. 그런데 방 안에서 펼칠 때는 왜 고통이 수반되지 않았을
까? 반여량은 먼지가 가득 쌓인 마루 밑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염력은 태극도해에 밑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너무나 극심한 통증에 정신없이 시달리던 중 단전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감지했다. 이상하게도 단전에서 열기가 피어 오
르는 순간 그토록 머리를 뒤흔들던 두통이 한결 가시기 시작했
다.
반여량은 열기를 이끌어 평소 토납법을 운용하던 대로 이끌기
시작했다.
일주천을 마치고 나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가셨다.
뇌력이 고도로 발달된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염력. 그것은 태
극도해를 운용하며 펼쳐야 정상적이다. 굳이 태극도해일 필요
가 있을까? 어떠한 심법(心法)이라도 마음을 정심(精深)하게
가라앉혀 줄수만 있다면 상관없으리라.
심법 없이 염력을 펼친다면 자연기(自然氣)와 부딪힌 뇌력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아무리 중심을 굳건히 유지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뇌력이 약한 인간은
미치고, 뇌력이 강한 인간은 두통 정도에 그친다. 그렇다면 사
부님과 남저명은? 나름대로 심법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부님의 심법은 태극도해이지만 남저명의 심법은 무엇이었을
까.
어느 것이든 부작용이 심각하다.
남저명과 사부님의 비참한 종말은 심법의 부작용 때문이다. 내
공과 상단전의 부조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몸으로 느낄 날이
올 것이다. 어쨌던 지금은 아무런 고통이 없어서 좋았다.
비보감여에도 한층 자신감이 생겼다.
남저명처럼 염력을 사용해 무인과 대적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뇌력만 집중하여 감응을 얻었다면 염력
을 얻은 지금은 한층 세밀화된, 자신있는 감응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빨리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 얻은 능력으
로 동기감응 감여를 마음껏 펼쳐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는 먼저 무녕 분타를 벗어나야 한다.
고오오오...!
반여량은 동기감응을 펼쳤다.
남저명이 박쥐로 생명을 연장했다면, 반여량은 쥐를 먹으며 삶
을 이어가야 한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 * *
쇄심파 소중분은 석상처럼 묵묵히 앉아 있는 대주 세 명을 바
라보며 술병을 기울였다.
꿀꺽! 꿀꺽...!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숨소리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실내를 일깨웠다.
"비수당, 비화당, 일심각이 무너졌다고 들었다. 곽가장 절반이
너진 셈이야. 자! 누구든지 입을 열어 보지."
"..."
대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계대주 육시타성 이장무, 인대주 파로가관 담구, 비대주 무결
군 유의. 동어구천 동종관과 더불어 신계각을 간자(間者) 무리
에서 정보조직체로 성장시킨 두뇌들은 감정 없는 눈길을 허공
에 걸어둔 채 입을 뗄 줄 몰랐다.
"계대주, 어떤 난관이라도 여섯 시진 이내에 풀어 버린다는 육
시타성이 아닌가? 그럼 맡은 바 직무를 다해야지."
"죄송하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이 아닙니다. 맡은 바 직무를
다하라는 말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딱 부러지는 음성이었다.
"그런가? 후훗! 비대주, 사막에 버려 놓아도 살아 돌아올 사
람.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탈명화검의 복수를 하겠다고 떠
난 사람들이 이 지경이 되었어. 할말이 없나?"
"비대는 물자보급만 맡습니다. 이외의 질문은 사양합니다."
확실해졌다.
곽가장 정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가 알고 있는 일
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허수아비. 그는 허
수아비 각주였다. 신계각 모든 대원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
람은 그도, 죽은 동종관도, 최일선에서 대원들과 직접 몸을 부
딪치며 살아온 사공도 아니었다. 바로 곽가장주 장주였다.
근래에 들어와서야 그는 모든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대원들이 보내온 밀마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주에게
전달되었다. 어렴풋이 비수당과 비화당, 그리고 일심각이 무너
졌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진실을 말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허상(虛想)이었어. 허상...'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이 덧없이 느껴졌다.
곽가장에 들어온 지 단 일 년만에 장(莊)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 고수로 자리를 굳혔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신계각
각주가 되었다 여겼는데...
장주는 직책을 부여하고도 실권을 놓지 않았다. 그런 것을 왜
지금에서야 알았단 말인가. 그토록 둔했단 말인가.
꿀꺽! 꿀꺽...!
소중분은 술병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인대주 파로가관 담구. 그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지.
후후후! 어떤가? 나의 사람됨이 말야. 신계각을 맡을 위인이
되나?"
"각주님은 무인이십니다."
"...?"
"쇄심파로 펼치는 절기는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마저 모골을 송
연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인의 무용(武勇)이지요. 신
계각주는 다른 점을 지녀야 합니다. 지모(智謀). 아! 물론 각
주님의 지모가 뛰어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계각을 이끌기에는..."
"후후! 모자란다? 좋아, 좋아! 그럼 누구 정도면 신계각을 이
끌 수 있겠나? 어디, 말 나온 김에 툭 터놓고 말해 보지 그
래."
소중분은 비웃듯이 말을 던졌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수하가
아닌 것이다. 직책상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척할 뿐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곽요연(郭搖娟) 공녀(公女)이십니다."
순간, 소중분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부릅떴다.
의외였다.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
다. 뻔뻔스럽게 수하인 척하는 삼 대주가 가증스러워 던진 물
음이다. 그런데... 이토록 태연하게 말하다니. 그보다 뭐라고?
곽요연 공녀?
'곽요연... 요연...'
장주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사내자식을 보지 못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이랴. 절색의 다섯 미인이
슬하에 있지 않은가.
장주의 오녀(五女)는 특이하게도 생김새가 각기 틀렸다.
얼굴 모습뿐만 아니라 키도, 지닌 바 기질도 개성이 뚜렷했다.
첫째, 곽사연은 늘 수심(愁心)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러나 속
마음을 털어놓아도 좋을 만큼 첫인상이 좋다. 총명하고 무공도
높다. 미치기 전까지만 해도 강유(剛柔)를 겸비한 여장부였다.
그녀의 미(美)는 부드러움 속에 부귀함으로 표현되었다.
둘째인 아내 곽요연의 작호는 한담화(寒潭花). 금년 스물일곱
으로 소중분보다 다섯 살이 어리지만 무명(武名)은 훨씬 전부
터 강서성을 떨쳐 울린 여인이었다. 청의표상(靑衣 裳)을 즐
겨 입어서 청의빙화(靑衣氷花)라고도 불리는 아내.
그녀는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시원하고 맑았다.
셋째, 곽선연은 천생 여자였다.
아담한 키에 작은 얼굴 조각을 새겨 놓은 듯한 미모.
언제나 마음이 훈훈하게 녹아드는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으며
음성도 사근사근한 것이 결코 성내는 법이 없다. 늘 궁장으로
틀어 올린 머리는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넷째, 곽무연은 활달한 성격이 특이하다. 아무리 무가에서 자
랐다지만 그녀처럼 거칠다고 느껴질 만큼 활달할 수는 없을 게
다. 요염한 눈매로 살짝 치켜 뜰 때는 그 누구라도 가슴이 설
레게 된다.
막내, 곽소연(郭素娟)은 또 다른 미를 지녔다. 순박하고 청순
한 미. 곽소연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더러움은 전혀 모르는 세
상에 사는 기분이 든다. 또한 그녀는 특이하게도 오녀 가운데
서 가장 세심하고 여린 성격을 지녔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섯 자매는 닮은 점이
없었다.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뚜렷
한 개성과 미모를 지닌 여인들.
소중분은 자연스럽게 아내 곽요연을 떠올렸다.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진 눈썹, 커다란 눈망울, 오똑한 콧날
과 작지도 크지도 않은 입에 앵두처럼 붉은 입술.
아내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눈에 넣어
도 아프지 않을 아내...
그러나 그녀 역시 차디찬 심성으로는 소중분과 버금갔다.
소중분이 무정의 본보기라면 아내인 곽요연은 독심(毒心)으로
널리 알려졌다. 피에는 피로 갚는 것이 무림의 율법(律法)이라
지만 아내는 사소한 일로도 피를 부르는 잔인한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분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눈에 이미 그녀의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까.
삼 대주는 지금 자신의 아내를 논하고 있다. 신계각주의 적임
자로.
"지금 뭐라고 했나?"
되묻는 소중분은 가늘게 떨었다. 죽음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
는 그였지만 의외의 사실 앞에서는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곽요연 공녀님의 지략은 하늘과 버금갑니다. 모르셨습니까?"
"하... 하핫! 하하하하하!"
소중분은 대청이 무너져라 웃어제꼈다.
잘못 알았다. 파로가관 담구의 음성에는 극도의 공경심이 담겨
있다. 자신에게조차 일찍이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공경심이
다. 그렇다면... 신계각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장주가 아니
라 아내 곽요연이다. 그녀가... 살을 맞대고 사는 그녀가...
단지 심중만으로 단언할 수 없지만 신계각주로 지내온 지난날
의 경험이 틀림없다고 말해 준다.
벌컥!
거세게 문을 밀치고 들어선 소중분은 언체나처럼 고요히 앉아
수를 놓고 있는 아내를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요연... 신계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서 왔소."
곽요연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신계각에서 벌어지는 일을... 왜 저에게 물으시는 거죠?"
"말해 주시오."
"..."
"말해 주시오."
"호호호...!"
"요연!"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소중분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믿고 싶
지 않았거늘.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온 사람이 아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거늘.
"제 잘못이 아니에요. 상공이 너무 늦게 안 거예요."
"후후후! 아직도 내가 당신의 남편인가?"
"못난 말씀하지 마세요."
곽요연의 음성은 너무 차디차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
치 감정이 틀어진 사람끼리 이야기하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저는 곽가장에서 자랐어요. 무슨 말인 줄 아세요? 상공께서
곽가장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신계각에 대해서 알았다는 말
이에요. 신계각에서 하는 일이 제 관심을 끌기도 했고요. 그런
제가 대주들을 안다고 해서 잘못된 건가요?"
"그들은... 당신을 신계각주로 거론했소."
"그것 때문에 이렇게 쳐들어오듯이 오신 건가요? 상공답지 않
은 행동이군요."
곽요연은 상처받은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소중
분이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련만 쌀
쌀맞은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후후!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가요?"
"왜 나를 남편으로 택했소?"
세인들은 장주가 소중분을 데려왔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소중분
만큼은 진실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인.
그녀는 사부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고, 지나가는 눈길로 소중
분 흘겨보았다.
단지 그것뿐. 그러나 소중분은 그 눈길을 잊을 수 없었다. 곽
가장주에게 여췌서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괴롭기만 했다. 그
녀를 만날수만 있다면.
어찌된 일인지 사부 한담거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가거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소중분은 일그러진 얼굴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체념하고 곽가장에 들어섰는데... 뜻밖
에도 아내가 바로 그때 그 여인이었다.
"상공을 사랑했으니까요."
'거짓말.'
소중분은 부정했다. 아내와 살을 섞은 나날이 그 얼마던가. 하
지만 아내가 흥분한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목석(木石)이 따
로 없었다. 마치 생명 없는 육신과 성관계를 가지는 기분. 차
디찬 성격 탓으로 돌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허전
함이 너무 컸다.
"내가... 내가 무엇을 해야겠소?"
소중분은 허물어지는 자신을 보았다.
무림에서 쌓아온 명성은 헛된 것이었다. 신계각주라는 직위를
놓는 순간, 아니 수하들로부터 등돌림을 받는 순간 그는 이미
하잘 것 없는 낭인과 같은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아
내까지 잃는다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신계각주께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시다니요? 신계각에는 그
렇게 할 일이 없나요?"
"..."
"호호호! 초야(初夜)를 치를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도 저를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말씀. 기억나세
요?"
"기억하고 있소."
"만약 사연 언니가 제게 검을 들이댄다면요?"
"...!"
"말씀해 보세요."
"죽이겠소."
"무연이가 그런다면요?"
"죽이겠소."
"아버지가 죽이려 한다면요?"
"여보!"
소중분은 절규하듯이 아내를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처형과 처제도 그렇지만 장주가 왜 죽이려
한단 말인가. 일가족에게 비유할 만큼 커다란 그 무엇으로부터
목숨을 위협 받고 있다는 말인가.
느닷없이 찾아온 삼 대주, 그들이 보여 준 태도. 아내가 시켜
서 한 행동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무엇인가? 무
엇이 아내에게서 이런 행동을 돌출시켰는가.
소중분은 차디찬 눈망울로 바라보는 아내에게서 대답하지 않으
면 안 될 절대적인 그 무엇을 읽었다.
"장주님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장주님을 죽이겠소. 상대
가 안 되는 줄 잘 알지만 당신이 몸을 피할 시간은 만들어 줄
수 있소."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요. 너구리는 굴을 팔 때 입구를 여섯
개 만든다고 해요. 그러니 잡기가 힘들죠. 제 개인적으로 삼
대주에게 부탁한 일이 있어요. 도와 주시겠어요?"
확실했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지라 무표정하
게 보이지만 아내는 다급해 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목숨의 위
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 아실 거예요. 지금은 그저 모른 척하시고 삼 대주와
손발을 맞춰 주세요. 제 생각대로 일이 풀린다면 우리는 누구
도 해를 입지 않아요."
"일심각, 비수당, 비화당이 전멸한 일과 상관 있소?"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물어 본 말이었다.
"그래요."
"뭣이!"
"그들은 아버님이 죽였어요, 제거했다는 편이 옳겠죠. 매부(妹
夫)들은 돌아오지 못해요. 혈향봉 조중, 홍홍록록 윤명. 그들
은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거예요."
"뭐라고!"
듣자니 하나같이 놀라운 말들뿐이었다.
"희생양이죠. 곽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한..."
"그게 지금...?"
"우선은 이 정도만 알아두세요. 삼 대주와 손발을 맞추다 보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아실 거예요."
소중분은 낯선 세상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아내 역시 딴 사람
처럼 보였다.
'알아낼 거야. 무슨 일인지.'
그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반드시...'
첫댓글 즐겁게 읽었네요
감사드려요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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