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한참을 달려온 버스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망향휴게소에 정차를 한다.
잠시 갑갑했던 공간을 벗어나 피로를 풀고, 버스는 다시 빗속을 질주 남으로 달려
간다. 설레는 마음도 가고 비도가고 산도가고 물도 따라 버스는 계속 흘러간다.
전라도 땅에 도착 하자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내려온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산 비를 맞아서 인지 한결 싱그럽고 초록위에 한겹 더 덫칠을
한것처럼 진초록으로 눈부신 햇빛을 맞이하고 있다.
하늘과 맞닿은산 정상 그 아래 군데군데 비단안개가 걸려있고 산너울이 일렁인다.
그림같은 풍경 아름다운 선경은 길위의 사람만이 볼수있는 특권은 아닐까.
여러 계곡의 물이 만나고 만나 큰 냇가가 되고 강이되어 종착점이 없이 물은 어디
론가 흘러만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부터 물을 따라 삶을 이어왔다.
천리길을 달려온 버스는 어느덧 진주땅에 들어선다. 일본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깊은 한이 서려있는곳 가장먼저 반기는 것은 남강줄기 강물이다.
그 옛날 애절했던 논개의 넋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강수는 오늘도 말없이 흘러만간다.
심금을 울리는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고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 한국전쟁후의
힘들고 가난하던 대한민국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설움을 달래
고 힘든날들을 참고 살아왔을것이다. 1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애절
한 목소리의 주인공 남인수 그의 생가는 대문이 잠겨있다. 전형적인 조그만 시골집
토방 천정에는 사진이 걸려있고, 누가 관리를 하는지 사람이 사는지조차 알수가 없다.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이 찾아올텐데,,교통문제와 협소한 장소는 풀어야할 숙제
이다. 산소에 참배를 하고 애수의 소야곡 추억의 소야곡은 기타반주에 의해 울려퍼진다.
뽀얀 새색시 시절에 이동네 시집와 젊을때부터 남인수 선생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도 듣고 노래를 부르며 한세월을 살아온 할머니들은 어느새 골이패이고 주름이 생겼지
만 찾아온 손님을 반기며 같이 어울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찡함과 동시에 애틋한
고향의 정이 느껴진다. 안성휴게소 길위에 펼쳐놓고 먹는 저녁밥은 어둠이 내릴무렵
까지 이어지고 다시 짐을챙긴다. 낯은 어둠을 잉태하고 또다시 내일을 만들것이다.
어느누구 살아가면서 가슴에 고민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힘겹고 고단할때는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들으면 한결 좋아질것이다.
노래가 있어좋고 그노래를 좋아하는 맘이 통하는 사람이 있어 좋은 세상 서로가 얽히고
설킨 세상 우리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세월을 먹고 음악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남인수선생님의 구성진 목소리는 이세상이 있는한 영원히 꽃피울 것이다.
당체우리 나라는 예술인에 대하여 무관심 하더라고요 이생가 마져 7000만원에 압류 되었다고
하더만요 동네분들이 즉석에서 키타반주에 동네 어르신들 노래도 듣구왔습니다~~
천리~~~~~~~휴 남인수 선생님 타계하실적 운구행렬 서울이 떠들석했는데 세상 무관심이 잡초로 대신 하더군요
흐르는 곡은 회원69세 정향선생님의 노래입니다...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 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南仁樹(남인수·1918~1962). 오늘은 살아생전 너무 도 유명했었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삶 자체가 하나의 神話(신화)가 되어버 린 아름다웠던 歌客(가객)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 나 젊은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南仁樹가 불렀던 히트곡 「哀愁(애수)의 소야 곡」과 「가거라 三八線」 「離別(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을 한 小節(소절 )쯤 흥얼거리지 못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줄 안다.
南仁樹가 일생을 통하여 취입한 노래는 헤아려보지 않아 뚜렷이 확인할 수 는 없지만 어림잡아 1000곡 가량 된다고 한다. 南仁樹 노래의 특징을 한마 디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의 저 밑바닥 深淵(심 연)에 가라앉아서도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 로 둘러싸인 목소리. 바로 그것이 南仁樹 聲音(성음)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南仁樹가 이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혹독한 가난을 겪었 고, 타국 땅에서 소년 노동자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겪은 체험이 그의 삶과 노래에 肉化(육화)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고통받 는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였고, 보다 훌륭하고 적절한 성음을 만들기 위해 성악가 安基永(안기영)에게 찾아가서 發聲法(발성법) 지도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한 사람의 가수로서 단지 개인적 삶에만 치우치지 아니하고 민족에게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기 위해 애를 썼던 노력 형의 가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南仁樹의 노래가 가장 아프고 절절하게 다가오는 시간은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이다. 아니면 고단한 나그네길에서 돌 아오는 경우라도 어울린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 이라면 더욱 어울린다. 이러한 시간에 성능이 보잘것없는 차량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겹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것이 바로 南仁樹다. 이런 庶民的(서민적) 소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아련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바로 南仁樹의 노래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南仁樹의 노래는 대개 流浪(유랑)과 鄕愁(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다. 이러 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를 멋지게 불러대는 南仁樹의 성음은 어딘지 모르 게 금속성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그 느낌은 금속 특유의 차디찬 냉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한참 가사를 따라가며 새겨듣노 라면 왠지 눈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작곡가 朴是春과의 만남
주요내용
그의 고향은경남 진주이다. 이 지역은 이미 작곡가 李在鎬(이재호)를 비롯 하여 藝能(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名人(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원래의 본명은 崔昌洙(최창수)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씨 문중으로 改嫁(개가)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姜文秀(강문수)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양 부 밑에서의 생활이 편할 리 없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설움과 구박 속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얼마간의 돈을 훔쳐서 무작정 집을 떠나 일본으로 가 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에는 어떤 선량한 사람의 소개로 사이타마縣에 있는 電球 (전구) 공장에 취직하여 소년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생산 공장들의 작업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고 힘겨운 악조건 이었다. 그리하여 강문수는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노동자 생활을 이어 나갔 다. 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제철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하여 한동안 쇠를 다루는 일을 하였다. 쇳물을 다루는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강문수는 타고난 藝人의 「끼」를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일본 가수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따라 불러서 주 변 노동자들로부터 가수의 칭호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이 열일곱 살이 되자 드디어 가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시에론레코드社의 문을 두 드렸다. 1935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의 文藝 部長(문예부장)은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朴英鎬(박영호)가 맡고 있었다. 이 때 강문수의 복장은 일본식 「츠메에리」차림의 떠꺼머리총각이었다고 전한 다. 또 어떤 자료에는 금단추 제복을 한 더벅머리 청년이었다고 한다. 박영호는 이 청년의 자질을 테스트한 다음 작곡가 朴是春(박시춘)에게 데리 고 갔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바로 한국歌謠史의 흐름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박시춘은 강문수의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곧 「눈물의 海峽(해협)」을 연습하여 취입시켰다. 하지만 이 음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이때 박시춘은 소속 회사를 오케레코드로 옮기면서 이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만 바꾸어서 새로 발표하는 계획을 가졌다. 改 詞(개사)는 文壇의 작가 출신인 李扶風(이부풍)이 맡았다. 곡명도 「哀愁의 小夜曲(소야곡)」으로 바꾸었고 가수로서의 이름도 강문수에서 南仁樹로 새로 바꾸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 인기를 얻어서 南仁樹는 가수로서 단번에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留聲機(유성기)를 내다 놓고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南仁樹의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다. 언론 들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美聲(미성)의 가수 탄생」을 연일 보도 하며 南仁樹의 출현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주요내용
南仁樹는 무대에 오를 적에 항시 새하얀 플란넬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는 스타일을 즐겼다. 이 노래는 대중들의 반향이 워낙 컸으므로 일본어로도 취입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여가수 도도로키 유키코가 南仁樹와 함께 불 렀다. 제목은 「哀愁의 세레나데」였다. 그러니까 「애수의 소야곡」은 南 仁樹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가수로서의 맨 처음 데뷔 곡은 「눈물의 해협」이었고, 오케레코드로 옮겨 온 뒤에는 「범벅 서울」(朴英鎬 작사, 孫牧人 작곡)이라는 노래가 첫 데뷔 곡이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서울 장안의 대중적 풍경을 그린 것이다. 네온사인, 룸바, 탱고, 재즈, 왈츠, 인조견, 랑데부 등 온통 서구 외래문화 의 범람 속에서 당시 청춘 남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황을 담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의 前奏曲(전주곡)과 전체의 伴奏(반주)는 작곡가 박시춘 이 직접 기타 연주를 적절히 활용하여 절묘한 효과를 이끌어 내었고, 이로 부터 기타에 매료된 대중들이 늘어나서 한번 배워보겠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박시춘 南仁樹 콤비는 일제강점기 한국 가요사의 중심에 우뚝 자리한 양대 山脈이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태평레코드의 李在鎬(이재호) 白年雪(백년설) 콤비와 멋진 맞수가 되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南仁樹에 대한 평판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8년 4월21일자 기사에는 「금년 22세, 오케에 입사한 지 3년. 「범벅 서울」이 처녀작이며 「물방아 사랑」으로 단연 유행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일세의 행운아로서 바야흐로 도원경에 잠겨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후로 「꼬집 힌 풋사랑」 「감격시대」 「낙화유수」 등 800여 곡을 불렀고, 광복 후에 는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 200여 곡을 취입하였다 . 늘 그 시대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서 가난하고 고달픈 서민 대중들의 기대와 호흡에 일치하였다.
南仁樹의 노래 중에서 우리의 心琴(심금)을 울리고 있는 絶唱(절창)이 어디 하나 둘 뿐일까만 그 중에서 단 몇 개를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 울며 헤진 부산항」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을 추천 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은 1940년 1월에 新譜 (신보)로 내놓은 노래인데,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 노래에 흠뻑 취했었지만 특히 挺身隊(정신대)에 끌려가던 여성들, 徵用(징용)과 志願兵(지원병)으 로 고향을 떠나가던 청년들이 혼자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비감하게 불렀 다고 한다.
광복 후 첫 취입곡이 「가거라 삼팔선」
南仁樹 성음의 특징과 창법의 장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노래로서 가수 자신이 앙코르 요청을 받게 되면 반드시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가거라 삼팔선]은 해방 후에 발표된 남인수의 첫 곡이다. 分斷과 더불어 이 노래는 겨레의 가슴에 시퍼렇게 남아있는 피멍처럼 처절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 주기에 충분 하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1954년에 발매된 노래로서 피난지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감개에 젖은 정서를 노래한 내용이다. 1950년대 정서가 물신 담겨있는 이 노래는 南仁樹 가요의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이다. 필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남인수의 노래는 [고향의 그림자]와 [울리는 京釜線] 등이다
찾어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 서서 울 적에/ 똑딱선 푸로페라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물위의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고향 꿈은 어린다 [고향의 그림자 1절].
달려가는 철로 가에 오막살이 양지쪽에/ 소꿉장난 하다말고 흔들어주는 어린 손길이 눈에 삼삼 떠오를때 내 가슴은 설레이어/ 손수건을 적시면서 울고가는 대구정거장/ 전봇대가 하나하나 지나가고 지나오고/고향 이별 부모 이별 한정이 없이 서러 워져서/불빛 흐린 삼등 찻간 입김 서린 유리창에/고향 이름 적어보는 이별 슬픈 대전 정거장([울리는 경부선] 2~3절)
[고향의 그림자]의 특성은 1950년대의 그 어떤 시작품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잇는 서민 훌륭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오래도록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노래는 왈칵 서러움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요소가 있다. 시인 金南柱(김남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노래를 너무도 좋아하여 즐겨 불렀는데, 시인의 사후에 후배들이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시인을 추억하였다 전한다.
「울리는 경부선」의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이도 또한 당시의 문학을 압도하고 있다. 문학이 해야 할 일을 대중가요 가사가 대신하고 있을 때 당시의 문학은 實存主義라는 아득한 夢幻 속을 덧없이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십대 청년시절, 나는 이노래의 정서를 더욱 실감나게 느껴보기 위해 부산까지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갔다가 돌아온적이 있다. 여름날 저녁 이었는데 열린 차창으로 낙동강 하구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내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바람에낱낱이 흩날렸다. 달리는 열차의 덜커덩거리는 소음과 합성이 되어 가슴속에서 묘한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歌王의 마지막 히트곡, 「무너진 사랑탑아」
南仁樹의 노래 중에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북한 땅에서 월남해 내려온 한 소년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으로 고학 생활을 힘겹게 이끌고 가는 고달픈 생애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 韓靑 빌딩 골목길 전봇대 옆에/ 나는야 구두닦이 소년입니다/ 나이는 열 네살 내고향은 황해도 / 피난 올 때 부모 잃은 신세이지만/ 구두닦아 고학하는 소년이지요/) .이 노랫말에 나오는 한청빌딩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화신 부근으로 짐작 된다. 광복 직후에는 朝鮮文學家同盟(조선문학가동맹)을 비롯한 左派(좌파 ) 예술인들의 組織體(조직체)가 주로 이곳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 로 알려져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南仁樹와 관련된 逸話는 너무도 많아서 이 제한된 지면에 모두 옮길 도리가 없다. 워낙 艶福(염복)이 많아서 「女인수」라 불리기도 했고, 理財(이재 )에도 밝아서 「돈인수」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의 한창 전성기에는 서울 시내의 여러 극장들을 바쁘게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직접 자전거를 타고 분주하게 다녔다고 한다. 조금 인기만 얻었다 하면 금방 외 제 차를 구입하여 공연히 豪氣를 부리는 요즘 연예인들이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南仁樹는 말년에 폐결핵으로 몹시 고생하였으나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 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충 실하였다.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자 독재정권의 총탄에 쓰러져간 어린 학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질병에 의해 다시 일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병중에도 불구하고 숨을 헐떡이며 南仁樹는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 「무 너진 사랑탑아」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취입한 이 곡은 歌王 南仁樹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1962년 6월26일 불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요계 최초로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南仁樹의 출세작인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은 은히 연주되었는데 이 구슬픈 선율이 참석자의 슬픔을 더욱 돋우었다. 진주 남강 기슭에 그의 노래비가 있다는데, 이 글을 마치고 바로 그곳을 참배하러 떠나야겠다. |
첫댓글 앞줄 좌측끝 천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