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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반여량은 밤이 이슥해지기를 기다려 마루바닥에서 기어 나왔
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잡아먹은 쥐가 꽤 많으니 적어도 보
름은 지났으리라.
옆구리와 등에 새겨진 상처는 많이 나았다. 아직도 움직이면
근육에 잔통증이 일지만 이 정도는 몸을 움직이는 데 지장을
주지 않았다.
태극도해를 일으켰다.
이미 몇 번 사용해 본 신법이 몸에 익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무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신법만은 익혀도 좋을 성싶었다.
신법을 몰랐을 때보다 몸이 가볍고 빨라서 좋았다. 실생활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지속적으로 참오했다. 마루
바닥에서 요상(療傷)을 하던 지난 보름간 그가 생각한 것은 동
기감응, 태극도해, 그리고 신법이 모두였다.
조중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잡혔다는 것은 쉽게 짐작되었다. 어찌된 영
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녕 분타는 혈단과 손을 잡았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 아마 혈갈류와 혼이라는 괴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조중 일행이 잡힌 것은 불문가지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 갇혔는지도 모르고, 설혹
안다해도 무공을 모르는 자신으로서는 구할 방도가 없다. 무녕
분타에서 일어난 변괴를 곽가장에 알려주는 것이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내
에.
쉬익!
반여량은 낮에 점지해 두었던 나무 그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신형을 움직이는 곳은 나쁜 기운이 넘실거리는 곳이었다.
세상에는 순백(純白)이 없다. 아무리 생기가 좋다고 해도 얼마
만큼은 나쁜 기운이 섞이기 마련이다. 반여량은 그런 곳을 골
라 신형을 숨겼다.
어느 곳에 나쁜 기운이 몰려 있는가?
그것은 감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약간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
게 알 수 있다.
나무와 돌을 보면 된다. 나무와 돌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기운의 변화에 민감하다. 나쁜 기운이 흐르는 곳에서는
잎이 시들하고 잘 자라지도 않는다. 돌은 흰색과 적색이 섞인
색조를 띤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쁜 기운이 깃든 땅을 찾지 않는다. 무심
결에 생기가 깃든 땅을 골라 디디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
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무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매복을 하든 경계를 하든 사기가 깃든 땅은 피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땅은 어느 곳이든 사람의 왕래가 드문 구석진 곳에
있다. 도주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시간은 충분했다.
새벽까지 가장 빠져나가기 힘든 정문에 도착하면 된다.
새벽 어스름이 밝아 올 무렵, 그때가 무녕 분타를 완전히 벗어
나는 순간이다.
하룻밤을 꼬박 밝힌 사람이 가장 피곤한 순간은 새벽, 동이 틀
무렵이다. 몸과 마음이 노곤하게 젖어들고, 아늑한 잠자리가
새삼 그리워질 때이다. 마음은 풀어지고, 눈은 감기고... 도주
나 침투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시간이다.
반여량은 무인들의 이목이 얼마나 영민한가 하는 점을 잊지 않
았다.
전각 한 채를 빠져 나오는 데 두 시진이 걸렸다.
사기가 깃든 나무 그늘을 골라 몸을 은신하고 동기감응을 펼쳐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움직이는 지
루한 이동이었다.
그제야 반여량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을 깨달았다. 무녕 분타가 천 리, 만 리에 걸쳐 지어진 것이
아닌 바에야 충분할 줄 알았는데.
'무인들의 이목은 어느 정도입니까?'
'무공에 따라서 다르지만... 암습이라 가정하면 대략 일 장 정
도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삼 장? 무공이 똑같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언젠가 혈향봉 조중과 얼핏 나눈 대화였다.
무녕 분타 무인들은 야밤에도 대낮처럼 삼엄한 경계를 펼쳤고,
반여량은 그들과 십 장 간격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
그가 움직일 공간은 너무 한정되어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중문도 벗어나기 전에 날이 밝겠군.'
담장을 타고 넘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높이는 일 장에 불과했지만 도구 없이 맨몸으로 넘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반여량은 커다란 고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담장 밖으로 늘어진 가지를 타고 넘는다면 이목을 속일 수 있
을 것 같았다.
쉬익!
신법이 많이 표홀해져 일 장 높이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미미한
기척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척조차도 무녕 분타
무인들은 놓치지 않았다.
쉬익! 쉭...!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무인 두 명이 반여량이 뛰어내린 자
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사방을 세심하게 살펴본 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휴우! 들킬 뻔했군.'
반여량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전각 돌섬 틈에서 가는 한숨을
토해냈다.
몸을 숨기는 것과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동시였
다. 약간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는
순간이랄까.
그는 다시 몸을 날릴 곳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
다.
중문 안에서는 행동하기가 용이했다. 마루바닥에서 기어나오기
전에 움직일 곳을 미리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막상
움직이고 보니 두 시진이나 소모했다.
중문 밖은 미지의 세계였다.
동기감응으로 숨어 있는 위치는 알아낼 수 있지만, 그들을 피
해 갈 방도는 전혀 없었다.
고오오오....!
동기감응을 펼쳐 사방을 투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동기감응의 한계였다. 일단 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상을 명확
히 인식할 경우에는 기운을 읽을 수 있다. 지금처럼 대상이 없
고, 전에 읽었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기다려야 한다. 기운이 느껴질 때까지.'
낙심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엇! 이런! 방심했다. 뒤를 보지 않았어!'
반여량은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경악성을 간신히 억눌렀다.
회랑을 돌아 나오는 시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아!"
놀란 외침.
시녀도 반여량을 보았다. 그녀는 일순간 몸이 굳어진 듯했다.
그럴 수밖에. 늘 오가던 길목에 낯선 괴물이 웅크리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쉬익!
번개처럼 신법을 펼친 반여량은 시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라."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여량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약한 소녀에게 너무 험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했다. 손끝을 타고 전달되는 잔떨림.
어린 소녀는 뜻밖의 상황에 몹시 놀랐음이 분명했다.
"소리만 지르지 않는다면..."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며 손을 치워주었다. 순간,
쉬익! 퍼억!
어느 결에 날아온 주먹이 명치끝에 틀어박혔다.
"커억!"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
할 틈도 없었다. 반여량은 신물과 함께 게워 나오는 아픔에 털
썩 무릎을 꿇고 컥컥 가쁜 숨을 토해냈다.
"호호호! 네 놈이 반여량이구나. 그렇지? 호호호! 네 놈을 내
가 잡다니. 대담한 놈..."
잘못 알았다. 시녀를 얕본 것이 잘못이다. 분타에 몸담은 사람
들은 전부 무공을 할 줄 안다. 기본적인 무공이나마. 그리고
그 정도의 무공이면 충분히 반여량을 제압할 수 있다.
반여량의 뇌리에는 혈갈류와 싸웠을 때의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솜털 한 올 차이로 생과 사가 나눠지던 싸움. 얼마
나 긴박했던가. 배류시를 발사하던 손속이 조금만 늦었어도 죽
어야 했던 사람은 자신이리라.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아 굴렸다.
쉬익!
목덜미를 스쳐 지나는 싸늘한 예기.
시녀도 방심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 여기고 가볍게 일장
을 휘두른 것이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고오오오...!
동기감응이 펼쳐졌다.
이번에 펼친 동기감응은 상대의 기운을 읽고자 하는 것이 아니
라 상대를 위축시키고자 하는 공격적 감응이었다. 상대의 뇌력
과 내 뇌력을 같은 주율(周率)에 놓고, 거기에 내 뇌력을 한
단계 높여 상대를 압박한다.
쥐를 잡아먹으며 수없이 사용해 본 방법이었다.
극도로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염력이라는 것을 몰랐을 적에
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때는 대상이 천지자연이었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바로 동기감응이지 않은가. 생
명이 없는 산천초목을 대상으로 했는데도 사부가 거둬들인 제
자들 중 세 명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하물며 정신이 살아있
는 사람이야.
상대의 정신이 나보다 높으면 오히려 내 뇌력이 지배당한다.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역류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되
어 버린다. 그러면... 미칠 수밖에 없다.
시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
거리고 있을 게다.
공격 기회는 단 한 번. 조중이 일러 준 대로 용천혈에 진기를
싣고 신형을 띄웠다.
쉬익!
순간 반여량은 당황했다. 여태까지 신법을 펼쳐 물러서기는 해
봤지만 가까이 다가간 적은 없었다. 거리는 지척인데 신법과
더불어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다음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주먹을 휘둘러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랬
다.
이미 가까워진 육신과 육신.
반여량은 자신도 모르게 시녀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나뒹굴었
다.
시녀가 반여량의 몸에 눌려 같이 나뒹군다. 그렇게 생각했다.
퍼억!
다시 복부를 차올리는 무릎팍!
"커억!"
반여량은 급한 신음과 함께 힘껏 고개를 숙였다. 공격은 해야
겠는데 방법은 없고 아픔은 너무 크고...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공격은 이마끼리 부딪치는 것.
빠악!
머리와 머리가 부딪치며 둔중한 아픔이 전해졌다.
시녀는 짤막한 비명 한 마디를 내지르고는 혼절해 버렸다. 그
녀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컥! 컥!"
잠시 거친 신음을 토해내자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노랗게 질
렸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독한 여자군."
저미한 신음을 흘려냈다. 그리고... 혈갈류를 죽인 것이 기적
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발자국 소리가 부산해지며 횃불이 대낮처럼 밝아올랐다.
"놈이 분타 안에 있다! 잡아랏!"
간간이 밤하늘을 쩌렁 울리는 고함소리도 터져 나왔다.
시녀가 습격 당한 사건이 무녕 분타 무인들에게 활기를 불어넣
은 것 같았다. 확신을 가졌을 게다. 무슨 일이든 이렇다. 막연
히 추측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생기 있게 달려
들기 마련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반여량은 정확히 사기가 깃든 곳을 향해 움직인다.
시녀에게 호된 일을 당한터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
해 부단히 노력했다. 무인뿐 아니라 어린아이조차도 만나서는
안 된다. 무녕 분타의 마지막 담장을 넘을 때까지 사람이라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해야 된다.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반여량은 오히려 편해졌다. 움직
임이 있으면 허점도 그만큼 커지는 것. 그들이 제자리에 가만
히 매복해 있었다면 참으로 움직이기 힘들었을 게다.
반여량은 십 장을 더 나아가 커다란 연못에 도달했다.
연못 한가운데는 누각이 세워져 있고, 석교(石橋) 두 개가 가
로질러 놓여 있었다. '화룡각'이라는 편액이 어둠 속에서도 용
사비등한 글씨를 드러냈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뒤져라! 놈을 잡는 자에게는 은자 열 냥의
상금이 하사된다."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커다란 음성이었다.
다급해진 반여량은 앞뒤 가리지 못하고 연못 속으로 스며들었
다. 사방이 환히 트인 곳이라 물 속 말고는 몸을 은신할 곳이
없었다.
다행히 물은 깊지 않았다.
반듯이 서 있으면 가슴까지 닿는 깊이였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코밑까지 물 속에 집어넣은 다음 연꽃잎으
로 머리를 가렸다. 수북히 자란 연꽃잎 속에 숨어 있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것을 두고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하는 것
일까.
화악! 화아악...!
연못 주변으로 밝은 횃불이 가득 켜졌다. 일 장 간격으로 횃불
하나씩은 켜진 듯 사방이 대낮처럼 밝았다.
'여기서 움직였다가는 당장 잡힌다. 기다려야해...'
끈질긴 인내만이 목숨을 살려 줄 것이다.
물 속에서 지낸 반나절.
지독한 고통이었다. 물에 퉁퉁 불은 살점은 감각이 없어진 듯
했다. 무릎을 꿇은 자세였기 때문에 팔다리가 심하게 저려오다
가 점점 마비되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눈앞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면 위
로 눈길을 한 번씩은 던져왔다. 어떤 무인은 돌팔매질을 하기
도 했고, 어떤 무인은 사색에 잠긴 듯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
다.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이 오늘처럼 원망스러웠던 적도 처음이었
다. 그늘만 제공하지 않았던들 무인들이 몰려들 턱이 없었을
테니까. 날이 밝고 폭양이 내리쬐면서 연못을 찾는 무인들이
부쩍 늘었다.
아직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어젯밤보다는 한결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후우! 후우...!'
숨을 규칙적으로 골랐다.
물비린내가 역겹게 코를 찔러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 이만한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
다.'
수없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강한 신념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저녁밥을 짓는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반여량은 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배고
픔은 모든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었다. 그
것은 목숨이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똑같았다. 아니다. 배
고픔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긴장이 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
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이대로 잠시만 더 머물면 움직일 기력
조차 없어지고 만다.'
해거름이 다가오자 연못 주변에 서성이던 무인들이 뜸해졌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리려다 자칫 물 속에 쓰러질 뻔했다.
마비된 육신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태극도해! 태극도해를 펼쳐보자. 우선 경직된 근육을 풀어야
한다. 피도 원활히 돌려야 하고...'
왜 태극도해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가끔씩 태극도해로 피의 흐
름을 원활히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루하지도 않고. 운공
을하여 진기를 일주천 시키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반여량은 내친 김에 동기감응까지 펼쳐 보았다.
단전에 갈무리된 진기를 이끌어 상단전에 집약하였다.
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같이 경물이 뚜
렷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야가 좁아졌다는 것. 하지만
장님이 된다 할지라고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것 같
았다.
제삼의 눈.
부처님이 혜안9慧眼)이라 말하던 마음의 눈이 뜨인 것이다.
남저명이 일러주었어도 믿지 않았는데. 염력을 사용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기에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
데. 태극도해와 함께 펼치면 고통이 가시지만 좋지 않은 방법
이라 여겨 사부님께 배운 감여수준에 머물려고 했는데.
마음이 들떠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확실했다. 보였다. 모든 경물이 눈을 뜨고 보는 것처럼 확연히
보였다. 시야는 줄었지만 시력은 더 좋아진 듯 멀리 있는 것까
지 뚜렷하게 보였다.
'얻었구나! 혜안을!'
눈을 떴다.
시야가 다시 넓어졌다. 반면에 인당으로 경물을 보는 것보다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계속 혜안을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은 그것보다 목숨이 위급하지 않은가.
살며시 물살을 헤치며 연못가로 나오기 시작했다.
태극도해를 운용했어도 마비된 손발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조
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아찔하
고, 헛구역질이 솟구쳤다.
"음...!"
연꽃잎 사이를 기다시피 헤쳐나온 반여량은 한동안 눈을 감고
정신을 추슬렀다. 도무지 속이 울렁거려 움직일 수 없었다.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다면 곧바로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그는 무녕 분타 무인들이 자신을 발견했고,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이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흐흐흐...! 연못 속에 숨어있었어? 악착스런 놈이군."
"빨리 잡아가자. 탈나기 전에..."
"아냐, 이런 놈은..."
쉬익! 퍼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발부리가 안면을 걷어찼다.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있던 상태라서 충격은 더욱 컸다. 마치 망
치로 얼굴을 얻어맞은 느낌. 무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퍼
뜩 정신을 차렸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연마한 각법(脚法)을 피한
다는 것은 어림없었다.
"크읔!"
"이놈의 새끼! 어디 또 도망가 봐라."
퍼억!
무인은 얼굴을 감싸쥐고 나뒹구는 반여량의 배를 사정없이 걷
어찼다. 보름 동안이나 경계를 서야 했던 분풀이를 톡톡히 푸
는 듯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잘도 숨어 있었지? 또 숨어 보라니까?"
퍼억! 퍽! 퍼억...!
우박처럼 쏟아지는 발길질.
다른 무인들도 동조하는 듯 각기 세기가 다른 발길질이 몸을
짓이겼다. 그러나 반여량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무인
들이 산채로 생포하기 위하여 내력을 싣지 않은 점도 있지만,
반여량이 태극도해를 운용하여 전신을 보호한 까닭이었다.
퍼억! 퍽! 퍼억...!
사정없이 내지르는 발길질에 반여량은 데굴데굴 굴렀다. 얼마
나 맞았을까? 연못가에서부터 족히 십 장은 굴러온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데려가자."
"뭘 어때? 어차피 죽을 놈인데..."
"반드시 생포해 오라고 하셨잖아. 혹시라도 잘못되면."
"알았어."
어느 정도 분이 풀린 무인들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반여
량을 사이에 두고 한담을 나누었다.
'이때닷!'
파앗!
틈을 잡은 반여량은 망설이지 않고 신법을 전개해 뛰쳐나갔다.
"엇! 저놈이 무공을!"
"앗! 도주한닷! 잡아랏!"
쉬익! 쉬익...!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들이 전개하는 신법은 놀라워서 먼저 뛰어간 반여량과의 간
격을 순식간에 좁혀 왔다. 뿐만 아니라 기척을 들은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서도, 좌측에서도 그가 도주
할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흐흐흐...이놈의 새끼, 어디 또 도망가봐라."
잔인한 살소(殺笑)가 바로 등뒤에서 들려왔다.
'걸려들었다 꼼짝없이...'
부지런히 신형을 날리던 반여량은 극단의 결정을 내렸다. 앞에
보이는 고목을 차고 올라 옆으로 쪽 이어진 담장을 넘자는 계
획이었다.
"타앗!"
내력을 한껏 뿜은 일갈을 터트리며 달려가던 기세에 속도를 더
해 고목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뛰어올랐다.
자신에게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을까? 절대절명의 상황에 부닥
치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거력이 솟구친다고 하더니만
두 장 높이의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뛰어넘은 담장은 밖으로 통하는 담장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庭園)하며,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여
인의 거처임을 말해준다. 또한 확신이라도 시켜주듯이 향기로
운 분 냄새가 전각 안에 요동쳤다.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전각에는 누가 있을까? 사람이 있을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자신이 담장을 넘었으면 무녕 분타무인들도 그렇게 할 수 있으
리라.
다급해진 반여량은 앞뒤 가릴 틈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헉! 헉!"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은 숨소리보다 더욱 거세게 뛰는
중이었다.
황급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여인. 여인은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입에 밥을 넣던 자세 그대로 놀란 눈을 치켜
뜨고 반여량을 응시했다.
"누구...?"
쉬익!
시녀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반여량은 신속하게 몸을 날
려 덮쳐갔다. 이번에는 공격할 방도를 미리 염두에 두었다. 가
까이 다가가서는 배를 힘껏 치는 거야. 여인에게는 안된 일이
지만 무인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쉬익...!
여인의 얼굴이 코앞에 닿을 즈음 반여량은 힘껏 주먹을 내질렀
다.
순간 뱀처럼 영활하게 빠져나가는 여인. 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기묘하게 방향을 튼 옥수(玉手)가 반여량의 주먹을 옆
으로 흘리며 완맥(腕脈)을 움켜잡았다.
"헉!"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신에 깃든 기운이 썰물처
럼 빠져나갔다.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여인은 가볍게 움
켜쥐고 있는 것 같은데 족쇄라도 채워 놓은 양 움직일 수 없었
다.
"반여량...? 호호호!"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고수였다.
여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귀엽게 노는군. 보름 동안이나 숨어 있다니. 대단해."
그때였다.
"분타주님, 방겸입니다."
문 밖에서 강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반여량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부릅떴다. 이 여인
이 무녕 분타주...? 무녕 분타주가 여인? 호랑이 새끼를 피해
온 끝이 어미 호랑이의 입이라니.
"무슨 일이냐?"
"반여량이 봉황각(鳳凰閣)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수색을 할까
합니다만..."
"이곳으로? 나는 아무 기척도 듣지 못했는데?"
분타주 호소봉왕 가심은 뜻밖의 소리를 했다. 반여량에게 눈까
지 찡긋거리면서.
"분명히 봉황각 담장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수색해. 그리고... 오늘 중으로 반드시 놈을
잡아라. 그렇지 못하면 단단히 각오햇!"
방겸은 분타주의 집무실까지 뒤지지는 못했다.
"저를 살려 주신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호호호...!"
가심은 잔잔하게 웃었다.
"가볼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연유를 알게 돼. 담장을 뛰어넘
었다고?"
"그렇습니다."
"무공을 익혔나?"
"비수당주 조중이 신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심은 눈가에 야릇한 기광(奇光)을 떠올렸다.
"동기감응 감여가는 다르군. 조중과 같이 있었다고 해봐야 한
달에 불과한데 그 사이에 신법을 그 정도까지 익혔다니."
"조중과 윤명 등은...?"
"궁금한가? 네 앞일도 모르면서?"
"여행을 같이 했으니까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조중이나 학구, 동목 등은 나이를 떠나
친우처럼 대해 주었다. 만약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다면 장주의
명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구하러 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왠지 이 여인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껄끄러웠다.
"정이 들었다는 말인데... 호호호! 당분간 그들은 잊는 게 좋
아."
가심은 손을 살포시 들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속도는 불가사의
할 만큼 빨랐다. 바로 동자료(瞳子廖). 만약 손에 검을 들었다
면... 흑의인들이 비수당을 급습하던 바로 그 검식이었다.
뻐억...!
반여량은 둔탁한 기음조차 듣지 못했다.
동자료가 그렇게 아픈 것이라니.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는
충격과 함께 의식을 잃어 버렸다.
찌지직! 찌직...!
반여량은 귀에 익숙한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빨간 빛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
마 지나지 않아서 그 빛이 쥐의 눈이라는 것을 알았다.
"으음...!"
일어나서 몸을 움직거려 보았다. 불편한 곳은 전혀 없었다. 정
신을 잃기 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미소와 다정한 말,
그 다음에 짓쳐온 손속. 소리장도(笑裏藏刀)의 대표적인 여인
을 꼽으라면 가심을 말하리라.
'이곳은...? 무녕 분타주가 데려온 듯한데... 이상한 노릇이
군. 수하들에게 죽이라 명해 놓고서 정작 본인은 죽이지 않는
다? 좌우지간 빠져나가고 보자.'
어둠은 낯설지 않았다.
마룻바닥 밑에서 보름간이나 햇볕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
을 식별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더군다나 심안(心
眼)이라는 혜안까지 얻지 않았는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좌(正坐)했다.
고오오오...!
동기감응을 펼쳐 어둠 속을 살펴보았다. 인당으로 사방을 둘러
보아도 어둠만이 가득했다. 투시의 성격을 띤 혜안으로도 어둠
너머를 볼 수는 없었다. 혜안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
아서는 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타 안에서는 혈함망과
혈류묘가 토해낸 색조를 읽었는데... 어떤 점은 보이고 어떤
점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심법이 뇌력에 미치는 영향과
함께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였다.
축축한 습기, 후덥지근한 공기, 그리고 답답한 흙 냄새...
동혈이었다. 공기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해 생기가 죽고 사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앞은 철책이었다. 오래된 쇠에서 풍기
는 칼칼한 냄새가 풍겨왔다.
'옥(獄)이군. 으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직접 다가가서 손으로 만져 보았지만
두께가 어린아이 손목만한 철책을 무너트릴 방도가 없었다.
'죽이지 않고 가둬 놨으면 목적이 있을 게다. 이럴 때 무공이
라도 알았더라면... 후훗! 무림 일에 끼여드니까 무공이 절실
히 필요하군. 이거야 원...'
반여량은 낙심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고 호된 정신적 고련(苦練)을 쌓은 결과였다. 그가 지닌 정신
력은 무인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가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쥐를 여섯 마리나 잡아먹은 다음이
었다. 이틀이 지난 것이다.
"쥐를 먹고 살았군. 호호호! 대단한 생명력이야."
첫마디였다.
"장주는 너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일장에 때려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뭐, 뭣! 장주! 방금 장주라고 말했나?"
반여량은 크게 놀랐다. 자신을 죽이려한 사람이 장주라니. 그
럼 곽가장주? 곽가장주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장주
가 원하는 대로 탈명화검을 죽인 원흉이 있는 곳, 구궁산까지
일행을 인도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몰살한 것과 자신과
는 무관하지 않은가.
"장주라고 했는데 어느 장의 장주요?"
혹시 다른 사람인가 해서 물어 본 질문이었다.
"호호호! 왜? 알수록 고해(苦海)야. 모르고 죽는 편이 좋지 않
아? 아! 반드시 죽인다는 것은 아냐. 살려 줄 수도 있지. 내
말만 잘 들으면. 알아들었어? 귀염둥이?"
가심은 동혈 벽에 걸린 유등(油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넓
다란 동혈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혈은 연공실(練功室)이었다. 무공을 연마하기에 알맞은 공간
이 있고, 한쪽에는 내공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한 좌
대(座臺)가 보였다. 병장기는 없지만 벽면이 병기에 긁힌 자국
으로 가득했다.
지신은 연공실 한쪽 귀퉁이에 갇혔고, 철책은 급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벽면을 뚫은 자국이 마모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연공실에 무슨 놈의 쥐들이 이리 많단 말인가. 보통 쥐
들보다 몸집이 두 배는 큰 쥐. 빨간 눈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노려보는 모양이라니. 동혈 곳곳에 한 발만 내딛어도
밟힐 정도로 무수하게 돌아다니는 쥐들. 전각 바닥에서 잡아먹
은 쥐와 같은 종류였다.
"내가... 무슨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까?"
반여량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물었다.
가심은 육감적인 여인이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내를 자극하는 무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입에서 풍기는 달짝지근한 단내, 애교 있는 음성과 교
태. 만약 여인을 많이 품어 본 사내라면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사내들이 어떤 여인을 원하는지 잘 아
는 듯했다.
반여량으로 하여금 그녀를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게 만
든 것은 그녀의 의복이었다. 빨간 고의(袴衣)가 환히 내비치는
나삼(羅衫). 그녀는 잠자리에서도 차마 입지 못할 나삼을 입었
지만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당
당했다.
"무공... 무공을 봐줘."
가심은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무공의 문외한에게
무공을 봐달라니. 그러나 그녀의 말투가 워낙 진지해 결코 농
담 같지는 않았다.
"무공을 말입니까? 무공에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너는 문외한이 아냐. 좋아, 좋아. 문외한이라고 치지. 너는
지금부터 내가 무공을 전개하는 동안 동기감응을 펼치는 거야.
그리고 흐름을 파악해. 네 감응으로 느낀 것과 내 검로가 다
르면 그때마다 말해 줘."
가심에게서는 지독한 방향(芳香)이 풍겼다. 냄새가 너무 강해
머리가 다 지끈거리니...
반여량은 여전히 동혈 바닥을 쳐다보면서 말을 받았다.
"감응은 감응 자체입니다. 눈으로 식별하기도 어려운 쾌검을
감응으로 느끼라면..."
"왜? 자신 없어? 동기감응 감여가들은 할 수 있다고 아는데?
헛수작 부리지 마. 내 집무실에서 나에게 덤벼들던 신법은 결
코 부분타주 방겸의 아래가 아냐."
호소봉왕 가심은 이미 채대(彩帶)를 끌러서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순간, 반여량은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채대를 풀어내자 매미
날개 같은 나삼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눈이 시릴 듯한 알몸이
드러난 것이다.
공기결을 타고 들리는 옷자락 흘러내리는 소리... 그 너머에는
그녀의 알몸이 너울대고 있으리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끓는 피를 가진 젊은이에게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유혹이 아닌
가.
파아앗! 파악...!
가심은 반여량의 심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율동을
계속했다. 부드럽게, 강하게, 빠르게, 느리게... 온갖 변화가
전부 가미된 화려한 춤.
"느꼈나?"
어느 한 순간, 가심의 동작이 딱 멈춰지며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긋나긋한 교
소를 발했었는데.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느, 느끼지 못..."
쒜에엑! 퍼억!
"커어억!"
반여량은 철창 사이로 날아온 채대에 가슴팍을 얻어맞았다. 빨
갛게 달궈진 부지깽이가 가슴을 파고드는 충격. 부드럽고 얇은
비단조각도 아픔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번 더 펼친다. 만약에 이번에도 느끼지 못한다면... 너를
죽인다. 필요 없으니까."
가심은 진심이었다. 말끝에 묻어 나오는 한기가 죽음을 예고했
다.
'내가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반여량 정신 차렷!'
반여량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방금 전에 받은 일격
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매서웠다. 그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
를 소매로 쓱 문질러 닦고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고오오오...!
가심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다시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
름다운 춤사위를. 다시 일다경쯤 흐르고 난 후.
"느꼈나?"
똑같은 물음이었다.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 살기를 느낀 순간 검로는 이미 흘러
가고 난 다음이다.'
"너무 빠릅니다."
"그래? 호호호!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동기감응 감여가야.
너 같은 보물을 단칼에 죽이라니. 호호호!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사랑스런 나의 보물. 호호호! 너
는 나를 중원에서 가장 강한 여인으로 만들 거야. 호호호!"
가심은 다시 무공을 펼쳤다. 조금 천천히.
혜안에 가심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의 나신(裸身)은 상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탄력적이면서도
미끈한 종아리, 허벅지, 잘록한 허리,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보는 여인의 나신이었다. 그러나 반여량은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흔들림 없이 가심을 바라보았다. 집중된 뇌력
은 그녀의 몸이 아닌 무공을 보는 중이었다. 확연히 보이는 검
의 흐름. 하지만 아직도 명확히 파악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나삼까지 벗어 던진 이유를 알았다. 무공을 침오하는 과정에서
옷자락으로 인해 기망(欺罔)될지도 모를 불필요한 부분을 미리
제거한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기혈이 집중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나신이든 나신이 아니든 관계 없었다. 그것은 감응으로
느끼는 것이니까.
육신과 기혈의 완벽한 조화.
가심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만약 옷을 입고 무공을 펼쳤
다면 관절의 꺾임이라든지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을 이처럼 상
세히 파악할수 없었으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천천히..."
가심의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번에는 확연히 보인다. 많은 동작들 속에서 진실로 공격하는
점과 일 점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 취하는 예비동작이 뚜렷이
구별된다. 눈을 현란하게 현혹시키는 무수한 그림자들 속에서
어느 것이 허(虛)이고 어느 것이 실(實)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감응으로 느껴 보니 기운이 연결성을 지니다가 끊어진다. 동작
에 무리가 있다. 기본적인 힘으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다른 동
작을 취하면 더 강한 힘이 발휘될 것 같은데.
반여량은 눈에 보이는 동작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에 관심
을 가졌다. 먼저 취한 몸짓이 다음 몸짓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
지, 그리고 체내에 깃든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지기 위해서는
어떤 동작이 더 타당한지.
"내가 전개한 초식이 모두 몇 개냐?"
무공 전개를 마친 가심이 물었다.
"초식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격하는 횟수를
말한다면 모두 서른두 번입니다."
투월채법(套月彩法) 삽십이초식.
호소봉왕 가심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반여량을 바라보았
다.
그녀의 채법이 삼십이초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웬만해서는 채대를 풀지 않는다. 검
으로 상대하지 못할 강적 앞에서만 채대를 푼다. 그리고 반드
시 죽인다. 지금까지 채법을 사용한 적은 모두 세 번이었다.
"이 채법을 보완하고 싶다. 초식을 펼치는 과정 중에 진기가
흐트러진다고 느껴지면 즉시 말해라."
반여량은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가심은 자시(子時:밤1l시)에 찾아와 축시(丑時:새벽3시)에 돌
아갔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녀는 반
시진 동안 무공을 펼쳤고, 한 시진 동안 진기의 흐름에 대해
토의한 후 다시 반시진 동안 토의한 무공을 시험했다.
그녀가 다음날 펼친 무공에는 전날 토의한 무공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낮에도 부지런히 연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곽가장주의 명을 어기고 단숨에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알
았다. 동기감응을 무공연마에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과연 가
능할까?
처음에는 의아함도 들었지만 천고의 기재가 참오한 것보다 효
율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가심의 무공이 나날이 늘었으
니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싸늘해지더니 하얀
눈이 내린다. 그리고 다시 새싹이 돋아난다.
반여량도 손 놓고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호소봉왕 가심
의 채법이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태극도해를 바탕으로 그녀가
무공을 수련하는 낮 시간 동안 그도 연마했다.
내공과 초식을 접목하는 방법하며, 초식을 더욱 원활히 운용하
기 위해서는 어떤 투로(鬪路)를 선택해야 하는지 그처럼 잘 아
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적어도 투월채법에서는.
가심이 펼치는 것을 보는 것과 직접 펼치는 무공과는 차이가
많았다. 그런 점을 조금씩, 조금씩 극복해갔다. 자신이 둘을
깨달으면 가심에게 하나를 일러주었다. 그리하다 보면 어느 세
월엔가는 무공의 경지가 같아지지 않겠는가.
쥐가 왜 이렇게 많은지도 알았다.
남만(南蠻)에서만 자라는 성질이 흉폭한 쥐. 가심은 쥐를 무공
상대로 사용했다. 반여량이 없는 동안 쥐를 상대로 채법을 연
구했던 모양이다. 동혈에만 가둬 놓았던 것이 번식을 거듭하여
무녕 분타까지 흘러간 듯했다.
그녀가 차고 있던 지독한 향안(香囊)은 쥐들에게 극성이었다.
무공이 강한 그녀도 수련할 때 이외에는 쥐들이 싫었던 것을
보면 여인은 여인인 것을.
무공연마와 더불어 탈출 방법도 모색했다. 철책이 박힌 바위틈
을 조금씩 갉아 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처럼 호소봉왕 가심이 동혈에 들어섰을 때, 한 귀퉁이
가 무너진 철책만이 그녀를 반겼다.
첫댓글 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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