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문제인 것은..
무엇을 '이것' 이라 말로하면..
'이것'이 아닌 것은 무시될 뿐 아니라
'이것'에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무상은 불교를 상징하는 언어처럼 굳어 버리다 보니 불교는 아니
석가세존은 무상이 아닌 존재인 것은 무시한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거 아닙니다.
일단 무상이 인정받으려면 무상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선행되고 있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상이라 언제든지 주장되려면 무상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는 게 늘 있어야만 하지 않습니까?
즉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상황일 때.. "아니야, 그것은 무상한 거거든!" 이라 하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만일 모두가 "아하, 일체가 무상하구나!" 하고 깨치면 무상의 가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부처 세계에선 무상이란 말이 필요없지요
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육백년 전 부터 사람들은 아트만인 에고가 있다고 여겼어요
그것을 석가세존은 부정하고 제자들도 그렇게 깨치고 가르치고 전하지만
현재도 더 많은 자들이 아트만은 있는 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해서 무아 가르침은 여전히 싱싱합니다
테스형이나 그의 악처는 에고가 있기에 기쁨과 고통을 처절히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는데..
그것은 누구도 불보살님도 무시할 수없는 삶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그런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항상하는 에고는 없으니 무상함을 깨치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석가 세존 당시에도
출가 제자보다 재가 불자들이 더 많았어요
재가자란 무상과 무아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고 믿지만.. 그것을 여기서 반드시 깨치겠다고 수행은 하지 않습니다
살아 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고통 가운데 어떤 것은 너무 커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오면.. 많이 괴로워하다가
무상과 무아를 떠올리고.. 절에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사경도 하고.. 참선도 하고..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을 만납니다.
그래서 고통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 다시 일상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재가자의 세상은 무상이 아니라 생멸하는 존재가 있고, 에고가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그와같은 재가자 세상에 세워진 불교라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