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二)
"야, 놈들 목에 꽂힌 유엽비도(柳葉飛刀) 봤어?"
"목이 아니라 천돌혈(天突穴)이다. 이 무식한 놈아!"
"그래, 나 아직 밥 안 처먹어 무식하다. 그런 너는 유식해서
그렇게 배가 나왔냐?"
"어휴! 요걸 그냥! 한 주먹감밖에 안 되는 것이... 주먹이 더
러워질까봐 참는다 참아."
"한 주먹감? 오호! 그래서 한 주먹에 나가 떨어지셨군."
"뭐야?"
황백과 이삼재는 쉴새없이 티격태격했다.
그런 성격들이 아니었다. 말이 없고 맡은 일을 묵묵히 하던 사
람들이었다. 절망적인 경우를 당하면서 성격이 변한 듯했다.
그들뿐아니라 범도, 학구, 동목 특히 손과 발을 하나씩 잃은
석수는 아무것도 아닌 풀잎이나 나무를 보고도 벌린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즐거운 게다.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던 밀옥에서 나왔다
는 사실이 마냥 즐거운 게다.
반여량은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곽가장의 영향력은 강서성 전역에 미친다.
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상인, 농부, 하다못해 코흘리개 어린아
이까지 곽가장과 연(緣)이 닿아 있다고 보면 정확했다. 지금부
터 눈에 보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
이다.
끈질기고 집요한 추적.
곽가장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
지 않은가. 그들은 꽁무니에 불붙은 사람처럼 연신 뒤를 쳐다
보며 반여량을 쫓았다.
"그런데 말야... 거참 희한하지? 권각(拳脚)이 빠른 것도 아니
었는데 피할수 없었거든. 마치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듯
꼼짝달싹 할 수 없었어."
"그래?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것 같은데? 옆에서 보기에도
그리 빠른 권법은 아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야. 밀옥에서 곪기는 곪았나?"
"호호호...!"
요와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들의 무공은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밀옥 무인 한 명과 만나면 필승(必勝), 두 명과 만나면 동수
(同手)요, 세 명과 만나면 고전(苦戰), 네 명과 만나면 필패
(必敗)였다.
그런 무인들이 신음 한 번 발하지 못하고 날아오는 유엽비도에
천돌혈을 꿰뚫렸다면 텁석부리 장한의 무공은 절정에 이르렀다
는 증거였다. 그런데 이삼재는 주제넘게 그와 자신의 무공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계집애야, 왜 웃냐?"
"저는요, 반석과 요령을 연결시켜 놓은 승삭을 어떻게 끊었는
지 그게 궁금해요. 반석을 들자마자 요령이 울릴 텐데..."
"흐흐흐...! 그건 말야,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거야. 연검(軟
劍)으로 반석 틈새기를 샅샅이 찔러 보면 돼."
"뭐요? 호호! 드디어 망령이 나셨군."
"귀신은 정말 뭐하는지 몰라. 이런 뚱땡이는 빨리 잡아가야 하
는데, 안 그래?"
요와와 이삼재가 놀려 댔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황백이 한 말은
옳았다. 연검이 아니라 사검(絲劍)이라는 것이 다를 뿐.
반여량은 사검을 이용해 반석 정중앙에 연결되어 있는 승삭을
끊었다. 그리고 암굴로 뛰어들자마자 유엽비도 다섯 개를 철책
사이로 날려 무인 다섯 명을 간단히 처치했다.
안에서만 열리는 자물쇠도 발길을 막지 못했다.
사검을 날려 시신을 끌어오고 그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는 것은
식은죽 먹기보다 쉬웠으니까. 그렇게 세 번... 뇌옥을 양장(羊
腸)처럼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실수였다. 만약 모든
철책이 환히 보이도록 일직선으로 통로를 만들었다면 반여량도
그리 쉽게 통과하지는 못했으리라. 절대고수의 등장을 생각해
몸을 은신하기 위한 조처가 오히려 반여량을 도와 주었다.
퍼엉! 펑...!
멀리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버섯 같은 하얀 구름이 피어 올랐
다.
천광탄.
이제 여산 주위에 있는 삼 개 분타가 일제히 나설 것이다.
성자(星子) 분타, 여산(廬山) 분타, 청산(靑山) 분타.
그들의 총인원은 육백여 명에 이른다. 또한 이들 분타는 각 지
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밀옥의 수비에 치중하도록 지
시받았다. 그런 만큼 만일의 사태에 어떤 대형(隊形)으로 어디
를 막아야 할지 세밀히 계획되어 있다. 그것도 한 시진 안에
이루어진다.
"제길! 지겨운 천광탄... 정말 분통 터지네."
범도가 부르르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천광탄은 자신들이 늘상 애용하던 밀마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밀마가 오히려 자신들을 추적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 시진이다. 한 시진 안에 놈들이 벌떼처럼 에워쌀 게다."
능공십자 학구는 더욱 싸늘해졌다. 웃지도 않고 얼굴색이 파랗
게 죽어 귀광(鬼光)만 번뜩였다. 그는 밀옥 무인들을 서슴없이
놈이라 불렀다. 곽가장에 배신당한 충격이 그토록 가슴을 때렸
던가.
"으음...!"
웬만하면 생각 한 마디쯤 토해 놓을 동목이 묵묵히 입을 다물
었다.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전신이 물 먹은 솜방망이처럼
묵직해지며 신법(身法)이 둔해졌다. 지척지간에서 천광탄이 터
졌다면 하늘로 솟구치지 않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제길! 저놈은 심장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황백의 말에 동목은 불현듯 머리가 맑아졌다.
그렇다. 텁석부리 장한이 망설임 없이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
런데 이상했다. 그가 펼치는 신법이 아무리 봐도 눈에 익었다.
곽가장의 신법. 조금 변형된 듯하지만 틀림없이 곽가장의 신법
이었다.
적어도 당주급과 버금갈 정도의 무공을 지닌 곽가장 무인.
그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텁석부리 장한에 대치할
만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일행을 인도하고
있다. 또한 곽가장을 잘 아는 듯하니 엉뚱한 곳으로 가지는 않
을 게다. 밀옥을 깨트린 솜씨만 봐도...
여산은 모두 구십구봉(九十九峰) 이었다.
동으로는 파양( 陽), 북으로는 장강(長江)을 끼고 있다. 봉우
리가 험하고, 폭포가 많으며, 동굴이 아늑하기로 유명한 산이
었다.
반여량은 대림봉(大霖峰) 입구에 들어서자 신법을 거두고 널찍
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쉬는 시간은 반 각이다. 놈들은 쉬지 않고 달려올 터, 이곳에
당도할 무렵이면 심하게 지친다. 그 틈을 노리지 않으면 빠져
나갈 방도가 없다.'
그는 철저히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멀리 주봉(主峰) 대한양봉(大漢陽峰) 너머로 새벽의 어스레한
빛이 밝아 왔다. 정확한 시간이다. 반 각이면 대한양봉 머리
위로 붉은 태양이 솟구치리라.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장관이었지.'
밀옥을 방문하기 위해 무려 한 달간이나 지형답사(地形踏査)를
했다. 대천지(大天地), 함파구(含 口), 삼첩천(三疊泉)...
그야말로 술 한 잔을 벗삼아 풍월을 읊을 만한 명소가 즐비했
다.
도주로(逃走路)로 적당한 지형은 모두 세 군데였다.
가장 마음에 드는 도주로는 길 없는 산맥을 헤쳐 나가며 오로
봉(五老峰) 쪽으로 가는 것. 가장 힘들지만 그만큼 안전해 보
였다.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선뜻 그 길을 택했
으리라.
그래서 포기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추적자는 도망자의 입장에 서봐야 정확히
추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망자 역시 추적자의 입장에서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노선은 황룡담(黃龍潭)에서 소천지(小
天地)를 거쳐 파양호로 빠져나가는 것. 여산을 가로지르는 수
로(水路)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파양호에서
수로를 타고 거슬러 오는 청산분타 무인들과 마주칠 공산이 컸
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곳이 대림봉 노선이었다. 여
산 구십구봉을 통틀어 가장 험한 지형이기도 했지만, 제이노선
과 마찬가지로 북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여산분타 무인들과
정면으로 부딪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 중에서 도주로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대림봉을 택한 까닭
은 느낌이 좋아서였다. 동기감응으로 느낀 결과 생기가 가득
찼기에.
"헉헉! 놈들이 계속.. 쫓아오는데... 헉헉! 이렇게 앉아서...
쉬어도 괘, 괜찮아?"
이삼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이는 사십 전후라고 알려졌지만, 피부에 탄력이 없고, 주름
살이 얼굴 하나 가득 자리해 오십은 실히 되어 보였다. 더군다
나 키마저 오척단구(五尺短軀)에다 전신에 뼈만 남아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듯 위태로웠다. 만약 이마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검상(劍傷)만 없다면 이삼재를 알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그러나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은 역시 곽소연이었다. 그녀는 다
른 사람들보다 모습이 좋아 보였지만 역시 쉬지 않고 산길을
달리기에는 무공이 너무 약했다.
석수는 곽소연보다는 나아 보였다. 의수와 의족이 몸에 꽉 맞
는 의복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
들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까.
"느낌이 좋군요. 사기(邪氣)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중은 너무도 잔잔하고 정중한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험한 꼴이라면 볼 것, 못 볼 것 다 본 몸이었다. 그 중에서도
밀옥에서 겪은 일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매질은 거의 날마다 겪는 일이었고, 인두로 지지기, 오물통 속
에 틀어박기 등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오죽하면
밀옥에 갇혀 한 달을 버티면 평악(平惡), 석 달을 버티면 중악
(中惡), 반 년을 버티면 대악(大惡)이라지 않던가.
그런 곳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일행이었다. 서른두 개의 뇌
옥에 가득했던 악인들이 한 명, 두 명 죽어갈 때 동정보다는
비웃음을 흘렸던 일행. 비록 밀옥에 갇혔지만 아무 죄도 없다
는 자부심이 비웃음을 낳게 했다. 그러나 텁석부리 장한처럼
말 한 마디로 모골을 섬칫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것보다 '사기'라는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소리였다. 귀
에 무척 익숙한.
'도, 독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독한 사람일 거야. 분명해.'
곽소연은 생각했다.
'그 사람과 똑같아. 한한에게 실연을 당했을 때와...'
"헉! 어휴! 숨차네. 언제까지 쉴 참이냐?"
이삼재는 자신도 모르게 반여량에게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걸
터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던졌다. 왠지 그의 곁에 가까이 다
가서면 꼭 죽음을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 달을 밀옥에서 보내셨으니 몸이 많이 축나셨을 겁니다. 아
무리 못해도 한 달은 요양하셔야 합니다."
"누가 너보고 그런 것 걱정해 달랬냐?"
"그, 그런가.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해혈을 파괴하지 않은 거지요. 저 같으
면 제일 먼저 기해혈부터 깨트렸을 겁니다. 그래야 다시는 무
공을 펼치지 못하죠.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수습하기
도 훨씬 쉽고... 족쇄 따위를 채워 놓고 금제 했다고 생각했으
니 어처구니없군요."
'뭐야? 기해혈을 파괴해? 듣자듣자 하니...'
이삼재는 텁석부리 장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옥에서 한
대 맞았다는 것 때문은 아니다. 왠지 텁석부리 장한을 보면 자
연 주눅이 들어 버렸다. 검 한 자루에 목숨을 내맡긴 무인으로
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기해혈부터 파괴했어야지."
"궁금한 게 있군요."
"뭐, 뭔데? 말해 봐."
'내가 왜 이렇게 더듬거리지?'
"밀옥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 노룡천마(怒龍天魔). 노룡천마지. 그놈은 장장 열세 달을
버텼지."
"노룡천마라... 그와 당신의 무공 차는 얼마나 됩니까?"
'빌어먹을 자식!'
이삼재는 저절로 욕이 튀어 나왔다.
자신보다 강한 놈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쾌한 노릇이었다.
그것보다 더욱 노룡천마를 떠올리기 싫은 것은 그를 잡아 밀옥
으로 보낸 사람이 바로 지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엄청난 고
전(苦戰)을 치렀고, 만약 범도가 적시에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
히려 당한 사람은 자신이었을 게다.
"그가 나보다 쬐끔 강하지."
"그런가요? 소문과는 틀리군요. 오 초만에 패했다던데."
"어, 어느 놈이 그런 헛소문을...!"
반여량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언뜻 보면 온화해 보이기도 하고, 또 달리 생각하면 비웃음 같
기도 한 묘한 미소였다.
"노룡천마가 열세 달을 살았다. 그리고 일검관심 이삼재가 열
달. 아마 한 달만 더 지났다면 시신이 되었겠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반여량의 음성은 시종일관 잔잔했
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헤집는듯 섬
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때,
"가짜군요?"
옆에서 뚫어지게 반여량을 응시하고 있던 요와가 말허리를 자
르며 끼여들었다.
"...?"
"당신의 그 수염... 가짜예요. 아주 정교해서 잠시 혼란스러웠
지만... 호호호! 궁금하군요. 그 수염을 떼어낸 얼굴이 어떤
지."
'분명히 미남일 거야.'
조용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천성일 것이다. 듣기 좋았
다. 충분히 위압적이고 강한힘이 느껴졌다. 육 척(尺)에 달하
는 신장하며, 군살하나 없는 몸도 가죽처럼 질겨 보였다. 특히
사색적이고 지성으로 무장된 불타는 눈은 매력 덩어리였다.
반여량은 관심 없다는 듯 여와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대림
봉을 바라보았다.
이곳만 넘으면 된다.
산너머에는 장강이 있고, 한달 전에 구입해 놓은 나룻배가 일
행을 안전지대까지 데려가리라. 여산만 벗어나면, 사건 현장만
벗어나면 아무도 잡을수 없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했고, 기
대는 무너지지 않으리라.
반각, 대한양봉 위로 태양이 떠올랐다.
반여량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는 곽사연을 어깨에 걸머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갑시다."
'느낌이 안 좋아.'
반여량은 가파른 암벽 사이로 형성된 소로(小路)를 앞에 두고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길 저쪽에 알지 못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예측에 없었던 일.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여산분타 무인들이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사잇길을 걸어나와야 옳다. 그런데 아무
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매복(埋伏)이다!'
반여량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이제는 애써서 동기감응을 펼
치지 않아도 직감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만큼 감응능력
이 높아졌다. 동기감응은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퍼엉! 펑...!
검은빛으로 넓게 퍼져 나가는 천광탄. 신호가 점점 가까이 다
가왔다. 족히 십여 개는 되어 보이는 신호. 여우를 몰이하는
사냥꾼처럼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암벽을 탄다.'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이어졌다.
곽사연을 등뒤에 업고, 요대(腰帶)를 풀어 상체가 흔들리지 않
도록 단단히 묶었다. 봉긋한 가슴이 거리낌없이 밀착되었다.
여인만이 지니는 독특한 내음도 콧속을 간질였다. 그러나 반여
량이 느끼는 것은 끈끈한 긴장감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
그는 곽가장 무인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는 목숨을 취할 명분과, 시간과, 무예가 있으니까.
'정신일도(廷臣一到)! 자, 가자!'
반여량은 재빨리 풀숲 사이로 기어가 암벽 한 자락을 잡았다.
"허억! 뭐야? 절벽을 타겠다는 거야? 저 절벽을? 죽갔네."
"이거야 원! 정말 하늘로 솟구치자는 거구먼."
일행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일행에게 절벽 따위는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
었다. 그들은 반여량이 끓는 기름 속으로 뛰어든다 해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절벽을 넘은 다음이었다. 그들도 천
광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절벽을 넘는 동안
곽가장 무인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꼼짝없이 천라지망
에 걸려드는 꼴이었다.
"호호! 오라버니가 가는 길인데 소녀도 따라가야죠. 저분은 언
제나 이렇게 무심하다니까."
간드러지게 교소를 토해 낸 요와가 제일 먼저 암벽에 달라붙었
다.
"으잉? 아니, 계집애가 어디 사내 앞에서 알짱거려!"
낮게 궁시렁거린 이삼재가 뒤질세라 뒤따랐다.
"끄응! 암벽타기는 내 전문이 아닌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배
좀 집어 넣을걸. 어디 힘 한 번 써볼까."
사실 황백은 둥근 가죽부대처럼 뚱뚱했기 때문에 암벽에 달라
붙은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무척 신속
해서 어느새 요와를 앞서고 있었다.
이삼재의 전신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밀옥에서 십 개월간 지낸 사람은 저승 문턱까지 다다랐다고 보
아야 옳았다.
옥방 바닥은 두께가 한 자 가량인 청석이어서 늘 차디찬 냉기
(冷氣)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음식도 돼지나 먹는 찌꺼기가 전
부였고, 그나마 소식가(小食家)도 턱없이 부족할 만큼 적은 양
이었다.
매질은 하루도 거름 없이 계속되었고, 피고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들이 온갖 질병을 퍼트렸다.
기해혈을 파괴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생명을 연장시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밀옥
에서 한 달만 지낸 사람이라면 그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
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쓰레기 음식에 섞어 주는 갈혈산(渴血散)은 피의 흐름을 급격
하게 둔화시킨다. 노인네가 가파른 비탈길을 넘어온 듯 숨은
늘 가빴고, 운기(運氣)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처음 칠주야(七晝夜)가 고비였다.
세상을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운 것 자체가 끔찍한 형벌이었다. 게다가 살아갈 희망마저
없다면... 십 중 육, 칠은 칠 주야 안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
다. 쿵! 하고 벽이 흔들리고 난 다음날은 어김없이 머리가 깨
진 시신 한 구가 개 끌리듯 질질 끌려 나갔다.
한 달도 고비였다.
살아남은 사람 중 거의 대부분이 이 무렵에 가래 끓는 소리를
흘리며 한 많은 생을 접었다.
평악, 중악, 대악?
개가 물어 갈 잡소리.
아무리 악인이라 하지만 운기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모진 매를 가한단 말인가.
독비날검 장목은 너무 쉽게 죽었다.
그놈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놈이었다. 살점을 오독오독 씹
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다. 만약 놈이 죄수의 신분으로
밀옥에 갇혔다면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자결했으리라.
이삼재는 사력을 다해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았다.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도움이란 말을 잊고 살아왔다. 철저하게 혼자
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의 체력은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고, 한 뼘 한 뼘 기
어 올라갈수록 썰물처럼 힘이 빠져 나갔다. 곽가장에 대한 증
오가 다른 사람들보다 약한 만큼 정신력도 따라서 약해졌다.
"허억!"
이삼재가 돌부리라 생각했던 것은 푸석한 흙더미였다.
순간, 크게 균형이 흐트러진 그는 황급히 작은 나무를 잡아챘
다.
"휴우! 십 년 감수했네."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여량은 등에 사람
하나를 짊어지고도 날쌘 다람쥐처럼 기어 올랐고, 다른 일행들
또한 그보다는 상당히 거리가 벌어져 있었으니까. 가장 무공이
약한 곽소연은 조중의 도움으로 한참 위에 기어 올랐고, 신체
가 불구인 석수마저도 학구의 도움을 받으며 그보다 앞서 나갔
다.
푸스스...!
일비쌍검 문허는 떨어져 내리는 흙먼지를 쫓아 눈길을 암벽 위
로 던졌다.
"후후후! 암벽을 탄다? 기막히군. 하지만... 후후! 천라지망
(天羅地網)은 신선이라 해도 가둘 수 있는 살망(殺網)이야. 후
후후! 너희들은 잡혔어."
밀옥을 탈출한 사람들의 생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밀옥을 벗어난 대가로 죽음을 선물할 생각이었다. 순순히
포승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두 여인만은 문허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되찾아야 할 중
요 인물이었다.
'이분이 누군가 알려고 하지 마라. 옥체에 조그만 손상도 있어
서는 안 된다. 장주님이라 생각하고 극진히 모셔라. 단 어떠한
말씀을 하신다 해도 내 명령 없이 밀옥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특히, 네 무공으로는 옷깃도 건드리지 못할 절대고수라
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해라. 일이 잘못된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너를 책망할 것이다.'
삼공 중 일인인 혈영일검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했다.
"천광탄을 쏘아라."
"존명(尊命)!"
휘르륵...! 펑! 휘륵! 퍼어엉...!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새벽 아침은 천광탄 터지는 소리와 화
려한 묵빛 물결이 새 하루를 열었다.
"후후! 놈들이 제 발로 사지(死地)를 찾았군요."
여산분타주 염화옥수(炎火玉手)가 즐거운 듯 말문을 열었다.
그는 사전에 훈련받은 대로 한 시진이 채 못 되어 천라지망의
일각을 완성했다. 그러나 한때는 비수장주로 이름을 날렸던 조
중과 검을 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조중이 절벽을 타지 않고 소로를 걸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잡는 것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애꿎은 수하들이 많이 상했으
리라. 그렇다고 공로가 더 많은 것도 아니었다. 천라지망 자체
가 너무 완벽하기에 그저 할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한 혹여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 뒤를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
가.
근심걱정은 조중 일행이 암벽을 타므로 해서 성자분타주의 몫
이 되었다. 북쪽에서 여산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온 그는
정확히 반각 후에 암벽 정상에 도착할 것이고, 조중이 미처 암
벽 위로 오르기 전에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으리라.
'염화옥수께서는 여기를 지키시오. 나는 위로 올라가서 성자분
타주를 거들도록 하겠소."
일비쌍검 문허의 눈에서 분노의 화염이 활활 불타올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이시길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합니다.. 점점 재미가 ....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독 햇습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