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초기 연경(후에 북경)은 신향시로 통주는 하남성 기현으로 추정된다
통주는, 진(秦) 나라 때에는 어양(漁陽)에 소속되고, 한(漢) 나라 때에는 노주(潞州)를 두고, 수(隋), 당(唐) 나라 때에는 탁현(涿縣)에 붙였다가 다시 노현(潞縣)으로 삼았다. 오대(五代) 및 요(遼)는 그대로 따랐으며, 금(金) 나라 때에는 승격시켜 통주(通州)로 만들었으니, 조운(漕運)이 통제한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명(明) 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랐다.
연원직지 제5권 > 회정록(回程錄) ○ 계사년(1833, 순조 33) 2월[7일-30일] >
중국학계에서는 기현일대를 은나라의 수도라고 보고 있는데 현재 기현의 서북쪽에 기자산이 있고 그 유래가 기자가 은나라말기에 은나라왕을 피해서 숨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게다가 근처에는 아직도 기자묘가 남아있다.(우리 기록에는 기자는 은나라말기에 조선으로 도망와서 살았고 단군이 자기 수도를 기자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즉 기자가 숨은 곳은 조선땅이며 기자묘가 있는 곳은 기자의 수도즉 단군왕검의 수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신향현북쪽에 로주의 왕을 뜻하는 로왕이라는 지명과 실제로 로주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명나라전기에 연경이라 불렀던 곳이 지금 베이징시가 아니라 신향현일 가능성이 높다.
청천강이나 청수하나 같은 의미로 저곳이 낙랑군에 있었다는 살수일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 살수근처를 고구려와 국경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지금의 고대 황하를 바다로 인식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폭이 넓은 곳은 10km가 넘는데 지형자체가 평지지형이라 홍수가 나면 근처 수십km가 전부 물로 뒤덮힌다.
고작 10km가 넘는 호수에도 바다 해(海)자를 붙이는데 수십~백km가 되는 거대한 물줄기를 보고 바다라고 기록하지 않을리가 없다.
은나라의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는 무덤과 유물의 방향이 발해만을 보고 있어서 발해만일대의 고대국가가 은나라의 상국이라고 주장했다. 기자조선의 상국이 단군조선이니 당연한 것이다. 다만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었기에 그를 따라온 수많은 은나라사람들과 그들의 유물이 마치 은나라의 수도인 것처럼 오해된 것이다.
거란지리도인데 금나라때 작성되었다고 한다.
명나라때 신향현이 북경이고 그 북쪽 기현일대가 통주라는 것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알수 있는 지도이다.
통은 옛날 우리나라사람들은 동이라고 발음했고 중국인들은 통이라고 발음해서 사실상 구분이 어려웠다.
위의 지도에서 하주라는 지명을 유심히 볼필요가 있다. 분명히 황하근처에 기원한 지명일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소주는 송나라때 기록에 송나라의 등주래주와 발해의 소주가 마주보며 닭울음소리가 들릴정도로 가깝다고 했다. 이는 누가봐도 고구려와 발해의 소주가 요동반도이고 송나라의 등주래주가 산둥반도라는 학계의 주장은 엉터리임을 알수 있다.(소머즈인가? 귀가 그렇게 잘들리나?)
아마도 고구려의 소주와 송나라 등주래주는 5~10km거리였을 것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s/218 송나라의 등주래주는 지금 하남성 정주시의 남쪽일대
결국 고지도상에서 소주와 하주의 위치를 대략 하주는 황하일대 소주는 정주시근처라고 본다면 능히 동경이라 표기된 곳이 현재의 신향현임을 추측할수 있다.
지도상의 주필산은 금나라기록에도 금나라 장종이 주필한 곳을 주필산이라고 했다라고 하는데 당나라 이세민의 주필산이 아니라 금나라황제의 주필산일 가능성도 높다.
주원장은 네째아들 연왕주체에게 30만대군을 주고 당시의 연경에서 동북방을 방어하라고 했는데 연왕주체가 주둔한 곳이 바로 신향현이라면 그가 방비하려는 나라는 북원이나 타타르가 아니라 바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이었다. 만일 서북방의 몽골군을 방비하려 했다면 훨씬 서쪽의 낙양이나 동관에 주둔했을 것이다.
태조이성계가 20만 대군으로 출정하려 한 것 때문에 주원장은 궁궐증축도 취소하고 잠도 못이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