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강석기(姜碩期)의 본관(本貫)은 금천(衿川)이며 고려시대에 거란군을 크게 대파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으로서 그의 고조부(高祖父)는 사간(司諫)으로 재임 중에 연산군(燕山君)에게 직언하다가 귀양을 간 강숙돌(姜淑突)이었다.
증조부(曾祖父)는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은 강뢰(姜賚)이며 조부(祖父)는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역임하였던 강유경(姜惟慶)이고 부친(父親)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던 강찬(姜燦)이었다.
그런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이 가례(嘉禮)를 올리기 이전에 이미 간택된 세자빈(世子嬪)이 있었으니 윤의립(尹毅立)의 딸이었다. 그러나 서인측이 그 가례에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가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尹仁發)이 ‘이괄(李适)의 난(亂)’에 연루되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소현세자와 윤의립의 딸의 가례는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그 이후 서인 강석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례를 올린 지 8년이 되는 1635(인조 13)년 인조(仁祖)의 왕비(王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향년(享年) 42세의 젊은 연령(年齡)으로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昇遐)했다.
인열왕후는 1594(선조 27)년에 탄생하였는데 본관은 청주(淸州)로서 부친은 한준겸(韓浚謙)이고 모친(母親)은 창원황씨(昌源黃氏)로서 예조좌랑(禮曺佐郞)을 역임한 황성(黃珹)의 딸이었다. 1610(광해 2)년에 능양군(綾陽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는데 당시 능양군이 16세이고, 청주한씨는 17세였으니 능양군보다 1세 연상이었다.
1623(인조 1)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光海君)을 폐위(廢位)시키고 능양군을 왕(王)으로 추대하면서 청주한씨가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는데 1625(인조 3)년에 명나라에서 내관(內官)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를 보내 인조(仁祖)를 책봉하면서 인열왕후에게도 고명(顧命)과 한복(韓服)을 함께 내렸다.
인열왕후는 품성이 유순하고 정숙하였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모시면서 효성(孝誠)과 공경(恭敬)을 다하였고 더 나아가서 시비(侍婢)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고 하니 전형적인 국모(國母)의 모습을 보여준 왕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열왕후가 4남인 용성대군(龍城大君)을 출산(出産)한 이후 그 산후병(産後病)으로 인하여 불과 42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승하(昇遐)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