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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니
(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밀옥이 깨져?"
난(蘭)을 치던 곽가장주 곽모천의 붓끝이 뚝 멈췄다.
"추풍 반여량의 짓으로 사료됩니다. 성자 분타주의 말을 빌리
자면 곡음으로 늑대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여산 지리를 손
바닥 보듯이 알고 있었다 합니다. 무엇보다 반여량이라고 추측
되는 것은 방화 사건입니다. 사전에 벌목해 놓은 나무들 때문
에 불길이 산 전체로 퍼지지 않고 밀옥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럴 만한 놈이라면..."
쇄심파 소중분은 느릿하게 말을 받았다.
"추풍... 후후후! 놈이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군. 감히 밀옥을
건드리다니."
"그 동안 무공도 익힌 것으로 파악됩니다."
"호오! 그래? 어느 정도지?"
"능히 당주급과 비등할 정도...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당주급이라... 그럴 거야. 놈은 동기감응을 익혔으니까."
곽모천의 음성은 극히 평온했고 또 냉정했다.
"허허허! 어떤가? 그놈 정도라면 좋은 호적수일 것 같은데, 잡
을 수 있겠나?"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희 곽가장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잘
못된 점을 시정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을 겁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중분이 추적하고 있다면 이미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늘 그래왔으니까.
"좋아. 나는 누가 나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싫은 일이 없어. 그
렇지 않나? 꼭 억지로 물가에 끌려가는 망아지 꼴이란 말야.
허허허! 다시 그려야겠군. 호흡이 끊겼어."
곽모천은 태연히 난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은 일은 소중분의
몫이었다. 그것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보여 줘야 되리
라.
신계각으로 돌아온 소중분은 즉시 정대로 가서 중원 각처에서
보내온 전서를 빠짐없이 훑어 나갔다.
전 같으면 정 대주가 직접 전서를 들고 찾아와야 옳았다. 하지
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집무실로 전서를 가져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신계각주로 인정하는 수하도 없
었다. 그렇기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
다.
지난 열 달 동안 그가 주력한 것은 오직 하나. 동종관과 사공
이 빠진 정대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
하기 짝이 없었다. 사대(四隊)를 통솔해야 할 신계각주가 정대
하나를 장악하려고 부심하다니.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인대주 파로가관 담구가 추천한 태인검(太印劍) 독고광(獨孤
光).
그는 정대에 몸을 닫은 지 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심계(心
計)를 추측할 수 없는 효웅이었다. 정대원 대부분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간자 생활을 한 것에 반해 그는 처음부터 정
대주를 목표로 곽가장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정대원은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그는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외에 짬짬이 곽가장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신계각을
주도하는 인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명령체계를 벗어나 신계각을 움직이는 실세(實勢).
곽요연이었다. 신계각주의 부인이자 장주의 둘째 딸.
그는 곽요연에게 충성을 바쳤다.
방당인(倣唐人) 네 점은 송대(宋代) 청주(淸州) 용천현(龍泉
縣)에 살던 장씨 형제의 유품이었다. 독고광은 장씨 형제를 암
살하고 방당인을 손에 넣었다.
황화리목(黃花梨木)으로 만든 장미 문양의 의자는 많다. 하지
만 독고광이 구한 의자는 만든 지 백 년이 지난 것이라 반들거
리는 윤기와 독특한 아치(雅致)가 극에 달했다.
화려한 문물이 피어나는 남창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진품
들.
그밖에도 그는 청명도(淸明圖)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사두(四
頭)가 이끄는 동마차(銅馬車)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물을 곽요연에게 보냈다.
"내 호감을 얻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뭘 하려고?"
"이공녀께서는 신계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인이십니다."
독고광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독고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대는 두 부류로 갈라졌다. 대주
동종관을 따르는 사람과 이공녀 곽요연을 추종하는 무리. 파로
가관 담구가 접근해 오지 않았던들 결코 알아내지 못했을 비밀
이었다.
그밖의 것은 전혀 모른다. 설혹 안다해도 말할수 없다. 아는
척 하는 것만큼 위험스런 일은 없으니까.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으냐?"
"대주입니다."
"네 눈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정말로 만족합니다."
"정말이냐?"
"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이냐?"
"..."
"호호호!"
그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직위는 공석(空席)으로 비어 있는 총
관(總官)이었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증명할 수 있을까?"
"하명만 내려 주십시오. 어떠한 명이라도 수행하겠습니다."
"가족이 어떻게 되지?"
"아내와 두 살 난 아들놈이 있습니다."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
곽요연은 얼음처럼 찬 얼굴로 감정 없이 물었다.
독고광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날 저녁, 목함
두 개를 곽요연 앞에 내밀었다.
"정 대주 동종관과 사공이 일시에 자리를 비웠으니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소중분은 각내의 일을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비어 있는
정대주 자리를 마냥 내버려 둘 수 없어 단천열검(斷天裂劍)을
불러들였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 외에도 몇몇을 추려
봤지만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직 능력이 닿지 않습니다. 정히 대주를 맡으라고 하시면 목
숨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황공하신 말씀... 그러나 저는 입문이 늦습니다. 마음으로
만...'
'하하!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통솔력이 없어서...'
소중분은 낙심하지 않았다. 정대원 중 누군가는 아내의 손길에
서 벗어난 자가 있으리라. 동종관과 사공이 그랬던 것처럼.
금절옥장(金切玉掌) 소사(蘇獅)를 힘들게 찾아냈다. 곽가장 입
문 구 년째로 봉성(鳳城)에서 파락호(破落戶) 행세를 하는 정
대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곽가장에 들어온 다음날 싸늘한 시신
이 되고 말았다. 사인(死因)은 운공 중 주화입마(走火入魔).
소중분은 암울한 절망감을 느꼈다. 과연 신계각은 전부 아내에
게 장악된 것일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내는 신계각을
장악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삼 대주가 하는 일을 도와 주라는 것은 정대에서 취합한 정보
를 고스란히 넘겨 주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도 삼 대주와 아내는 소중분에게 일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
"인대주를 불러서 물어보세요. 그는 곽가장 모든 문도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렇겠지. 나까지...'
"태인검 독고광이 적당합니다."
담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후후후! 나도 그 친구를 조금 알지. 아내에게 진귀한 선물을
많이 하던 친구 아닌가?"
"능력이 뛰어나서 천거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능력이 뛰어나지."
우연일까? 독고광은 마침 본장에 들어와 있었고, 채 반 각 지
나지 않아서 정대주로 취임했다.
사백이십칠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
소중분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 놓고 일을 맡길 수 없는 이름뿐인 수하들.
그는 사부 한담거사를 찾아갔다.
"신계각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허허허! 정상으로 되돌린다? 무엇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
"신계각을 네가 장악하든, 아내가 장악하든 그것이 무슨 차이
가 있느냐?"
"신계각은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럼 곽가장은 누구의 소유물이냐?"
'강서 무림은 장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입 안에서만 맴도는 소리였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했거늘... 아내를 도와 줘라.
아직까지 아내된 사람이 마음을 털어 놓지 않은 것은 그만큼
미덥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한다면... 그러고도 어찌 한 침상에서
잠을 잔단 말입니까.'
"네 무공은 뛰어나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야. 거기에다가 실
전 경험만 쌓는다면 능히 곽모천도 이길 수 있을 게다. 그런
무공을 그냥 썩히다니... 아내를 도와 줘야지."
소중분은 이상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어쩌면 사부와 아내는 모종의 끈이 닿고 있지 않을까? 자신만
제외시킨 밀약(密約). 무엇일까? 한 사람에게는 남편이요, 또
한 사람에게는 제자인데.
그는 명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부님을 찾아갔었다면서요?"
이제는 확실해졌다. 사부와 아내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무도 모르게 다녀온 길을 아내가 알고 있다니. 정대원의 이
목조자 따돌리고 다녀온 길이 아니었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요. 이제는 말해 줄 수 있다고 보
는데."
"아직 아니에요. 이 일은 너무 중차대한 일이라서 그러니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하하하! 그럼 나는 계속 허수아비 각주 노릇이나 하고 있으면
되겠구려."
"그래요."
"뭣!"
"허수아비 각주 노릇... 그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만약 상공께
서 일의 전모를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평온하게 계시지 못할
거예요."
"나는 무인이오. 평온과는 거리가 먼..."
"휴우! 좋아요.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면... 곽가장에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곽요연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일심각, 비수당, 비화당이 모두 당했어요."
"혈조수의 후인들이 아니오?"
"아니에요. 혈조수는 아버님이 만들어 낸 가공 인물이에요."
"뭐라고?"
"그늘을 일컬어 혈단이라고 불러요. 아버님이 양성한 무인들이
죠. 수뇌는 옥순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 그 중 세 명
은 장에 돌아와 삼공이란 칭호를 얻었고, 나머지 두 명은 어딘
가에 은거하여 혈단을 조종했죠."
"세, 세상에 그런 일이!"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소중분도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아내가 들려준 말은 곽가장의 존폐와도 관련되는 중요
한 발언이었다. 만약 강서성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
찌할 텐가.
소중분은 마음속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곽가장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저는 혈단이라는 존재를 아는 순간 신계각을 장악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곽가장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하니까.
상공께는 죄송한 마음 누를 길이 없었지만 이해하세요. 방법이
그것뿐이었어요."
"으음...!"
"삼 대주는 그 동안 혈단에 대해서 조사했어요. 이제 그 윤곽
이 거의 드러났죠. 하지만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요. 혈단의 뿌리는 의외로 깊더군요. 사십칠 개 분타 대부
분이 혈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후훗! 나와 똑같은 입장이군. 정대원... 그 중에 당신 사람이
아닌 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번에 이 당 일 각과 혈단이 서로 상잔(相殘)한 것도 아버님
이 지시한 거예요. 그 이유를 알아 내지 못했어요. 곽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한 초석이라는 것밖에는..."
소중분은 묵묵히 말을 들었다.
그는 이제 아내에 대한 믿음이 깨진 상태였다. 사부와 아내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래 전부터였다.
아내가 사부를 찾아왔을 때, 그때부터 밀약이 형성되었다. 그
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곽가장에 들어와 혼인했고, 허
수아비 각주 노릇을 했다. 그 긴 세월 동안을...
"삼 대주는 분타를 분류하고 있어요. 순수 곽가장 무인과 혈단
을. 그 작업이 끝나면 아버님께 건의드릴 거예요. 이제 그만
은거하시라고요. 상공께서는 그때부터 나서면 되는 거예요. 곽
가장주로 당당히."
"하하하!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있어도 곽가장주가 된다는
말이구려. 하하하!"
"아니오. 아버님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도 있어요. 그때는 상공
께서 아버님을 제압해 주셔야 해요. 아버님은... 아버님은 너
무 많은 악행을 저지르셨어요. 지금이라도 물러나셔서 억울하
게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비셔야 해요."
곽요연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하나만 더 물어 보지. 사부님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
소?"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그래요. 신계각을 운용해 보시니 아시겠지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해요. 혈단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아
버님이 모르는 돈을 써야죠. 그만한 돈을 대주실 분은..."
"사부님이란 말이오?"
"그래요. 모르셨죠? 사부님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셨죠. 나중에
차차 아실 거예요."
금시초문이었다. 사부님에게 그만한 돈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이 없었다. 아니, 돈과는 인연이 먼 분이시지 않은가.
"평시대로 행동해 주세요, 혈단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날, 아
버님께 울면서 간청 드릴 거예요. 그때를 대비해서 무공수련에
박차를 가하시고요."
소중분은 아내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 이야기 같았으면 혼인할
당시 사정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어야 옳았다. 그 후로라도 부
부간이면 얼마든지 상의할 만한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
고 바로 장인에 관한 일이지 않은가.
'곽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한 초석이라는 것밖에는...'
그 말을 할 때 아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미 육 년이나 살을 맞대고 산 부부가 아닌가. 아내에 대해서
라면 작은 떨림조차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만한 세월이다.
아직도 숨기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
다.
혈단의 존재는 사실일 게다. 그밖에는 하나하나 직접 알아내야
한다. 아내가 말한 것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니.
한때는 곽가장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들뜬 적도 있다.
세인들에게 쇄심파란 무명(武名)을 받았을 때가 그랬고, 신계
각주 직위를 받았을 때가 그랬다.
지금은 아니다.
강서 무림을 위하고, 협(俠)을 위해 한 목숨 바친다는 사명감
이 없어져 버렸다. 마치 진흙 구덩이에 몸을 담근 기분이다.
소중분은 계대주 육시타성 이장무를 찾아갔다.
"말을 다 들었다. 장주님에게 혈단이란 조직이 따로 있다고?"
"쉬잇!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습니다. 우리가 혈
단에 대해서 조사한다는 사실이 누설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합니다."
신계각 대주들이 사용하는 집무실은 한결같이 경계가 삼엄했
다. 그런데도 이토록 자지러지게 놀라는 것은 사태가 정말 심
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주님이 우리를 죽인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남을 분이죠."
"얼마나 알아냈나?"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닙니다."
이장무는 소중분을 각주로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전에는 그래
도 겉으로나마 복종했지만 이제는 완연히 태도가 돌변했다.
"좋아. 한 가지만 더 묻지. 계대는 신계각의 머리다. 정대는
손발에 불과하지. 이번 일도 계대가 주관했나?"
"머리라니요. 감당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저희 계대에서 주관하
고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으음...!"
소중분은 아내의 입김이 너무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이장무. 그가
주관한 일이라면 빈틈이 있을 리 없다. 결국은 무식하면서도
단순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가.
그는 정대원들을 일일이 불러들였다.
"혈단?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승룡삼점(昇龍三點), 너는 아내 사람이군.'
"혈단요? 그런 방파( 派)도 있습니까?"
'음! 천풍뇌검(天風雷劍), 너도...'
사방이 밀폐된 방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였다. 그러나 아내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아내의 조종을 받
는 대원들이 아닌가. 자신과 나눈 대화가 흘러든 것은 너무 당
연했다.
"주의가 부족하군요. 그토록 혈단에 대해서 모른 척하라고 말
씀드렸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장인과 관계된 일인데 무엇보다 우선적으
로 알아 봐야지."
"삼 대주가 알아보고 있다고 했잖아요."
"..."
"상공... 저는 상공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 날부터 소중분은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다.
"전서를 날려라. 마면배심(魔面排心)을 들어오라고 해."
"죄송합니다. 정대원은 저의 관할입니다. 각주님은 저의 상관
이시지만 제 수하들에게 용건이 있으시면 먼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독고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죽고 싶으냐?"
"제가 말씀드린 것이 죽을 사유가 된다면 죽음을 달게 받겠습
니다."
"건방진... 노옴!"
"제 죽음은 가볍습니다. 각주님의 죽음에 비하면."
쉬익!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소중분은 쾌속하게 신형을 날려 분노
를 가득 담은 일권을 독고광의 가슴에 쳐냈다.
퍼엉!
독고광은 요란한 가죽 북 소리를 흘리며 대여섯 걸음이나 비칠
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피하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육신으로 일권을 받아냈다.
"용건이 없으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독고광은 입가에 가는 피를 흘려냈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
다.
"음...!"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정대원들은 본장에 들어오라는 명
령을 받지 않았다. 전서조차 차단되었다. 행동은 자유로웠지만
그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삼 대주를 불러 명령을 내리면 독고광처럼 정당한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강압은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아내가 있
었고,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흔적 없이 죽을 것이라
는 것을 잘 알았다. 금절옥장 소사처럼.
"폐관(閉關) 해야겠소."
"잘 생각하셨어요. 한층 높은 무공을 지니시기 바래요."
왜 혼인을 했을까? 혼인할 당시에는 무공도 그리 높지 않았는
데. 분명한 것은 아내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얼마나 폐관하실 건가요?"
"한 서너 달 걸리겠지."
"그러세요."
소중분은 그 날, 신계각 지하에 마련된 연공실 문을 안에서 걸
어잠궜다.
무공연마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허허! 이곳은 신계각주를 위한 연공실이야. 무림에는 무공 못
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있지. 머리. 신계각주로 있다 보면 수하
들 모르게 장을 나갈 필요가 있을 거야. 그때, 이곳을 이용해.
돌침상을 밀면 장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장주는 곽가장 곳곳에 미로(迷路)와 같은 암로(暗路)를 뚫어
놓았다. 그 중에 소중분이 알고 있는 통로는 오직 연공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뿐이었다.
'혈단... 혈조수의 후인이라...'
소중분은 탈명화검을 처음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을 상기했다.
오른쪽 동자료에서 예풍혈까지 휘둘려진 검상. 워낙 깨끗한 솜
씨라 같은 무인의 입장에서 얼마나 놀랐던가. 만약 자신이 그
런 검공을 펼친다면... 강한 호승심(好勝心)에 등줄기가 짜르
르 저리던 그때를.
그가 곽가장을 빠져 나와 발길을 옮긴 곳은 가장 가까운 삼양
분타(三陽分舵)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삼양 분타 무인 중 한
명을 살해했다. 오른쪽 동자료에서 예풍혈까지 갈라낸 깨끗한
검공이었다.
'환영귀검(幻影鬼劍)... 네 행동을 보겠다.'
환영귀검 공가(孔茄)는 석수(石手)였다. 삼양성에서는 제법 이
름이 나 있는 석공(石工)). 홀어머니와 아내, 여섯 자식과 함
께 화목한 가정을 일구고 있는 사람. 그가 곽가장 정대원이라
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신임 정대주 독고
광과 자신 그리고 장주. 거기에 한 사람을 덧붙여야 하리라.
아내 곽요연.
공가는 죽은 무인을 직접 보았다. 평소 곽가장을 흠모하였기에
직접 석관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정대원이 사용하는 밀마를 남겼다.
- 삼양 분타 무인 전국(田鞠) 피살됨. 사인은 동자료에서부터
예풍혈까지 베어진 검상. 초일류 고수의 솜씨임. 삼양 분타에
이상한 기류(氣流)가 흐르고 있는데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
음.
'이자는 아니다! 환영귀검(幻影鬼劍)! 드디어 찾았군.'
금절옥장 소사의 죽음만 아니라면 대원들을 만나 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그를 죽인 행위는 정대원 중에도 진실을 모
르고 있는 무인이 있다는 증거다.
소중분은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는 공가의 앞을 가로막았다.
"뉘시오?"
늙직하고 힘이 없는 음성이었다.
이런 사람이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신법을 지녔다
면 누가 믿을 것인가. 더군다나 그의 검은 귀검이다. 귀신처럼
흔적 없이 나타나 흔적 없이 목을 베어 낸다는.
"쇄심파 소중분이라 하는데..."
"가, 각주님!"
공가는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른 새벽인지라 길가에 오가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각주님이 몸소... 무슨 일이신지?"
뜻밖에도 그는 떨떠름하게 물어왔다. 호의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약간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내심에서
풍겨나오는 적의(敵意)를 읽을 수 있었다.
'응? 잘못 알았나?'
정대원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아내의 사람이 아니
라면.
"본장으로 들어오라는 밀마를 받지 못했나?"
소중분은 슬그머니 허리춤에 꽂아 놓은 쇄심파를 잡아갔다. 만
약 아내가 심어 놓은 사람이라면 가차없이 죽일 셈이었다. 자
신의 행동이 아내에게 흘러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밀마? 무슨 말씀이신지? 금시초문입니다."
확실하다. 환영귀검은 아내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말끝마다
풍겨나는 적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음... 좋다. 못 받았다니... 혈단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 있
나?"
"혈단...? 음...! 본장에서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었군요. 혈
단이라 이름부터 피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소중분은 하늘을 날듯이 즐거웠다.
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목적한 사람을 찾아내다니. 천우신조(天
佑神助)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이 도왔다. 하늘이...
"환영귀검, 조용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적당한 곳
으로 가자."
"그 전에... 각주님, 동대주님을 왜 죽이셨습니까? 사국주(四
局主)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말씀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소중분은 확연히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아내가 손을 대지 못한 정대원들. 그들은 바로 전임대주 동종
관과 밀착된 사람들이다. 그렇다. 바로 정대주와 사공을 죽인
사랑은... 아내다. 정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
'곽가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계각이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
죠. 동종관을 보내세요. 그는 탈명화검과 깊은 교우(交友)를
맺고 있어요. 무공을 모르니... 사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좋겠
네요.'
아내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내가 호승심에 불을 질
렀다. 그리고 아내가 원하던 대로 동종관은 죽었고, 사공은 생
사를 모르는 처지가 되었다.
환영귀검 이자는 동종관의 죽음을 추궁하고 있다. 그에게서 발
산되는 적개심은 동종관에 대한 충성심이다.
소중분은 천천히 다가가 환영귀검의 투박한 손을 어루만졌다.
"가자. 가서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자."
사백이십칠 명 중 그렇게 해서 찾아낸 무인은 사십삼 명에 지
나지 않았다.
"상공께서 무슨 무공을 얻으셨는지 보고 싶군요."
"전에는 없던 큰 힘을 얻었소."
"보여 쥐요?"
"필살(必殺) 무공(武功)이오. 펼치면 반드시 피를 부르지. 적
이 없는 곳에서는 펼칠 수 없소."
"호오! 대단하군요."
"대단하지. 큰 힘이니까."
"그럼, 강서성에서 상공을 이길 사람이 없겠군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소. 싸움이란 무공과 더불어 운(運)이
따라줘야 하니까. 하지만 내가 큰 힘을 얻은 이상 운은 내 편
인 것 같소."
"상공, 잊지 말아주세요. 저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
'그 약속은 잊은 지 이미 오래요. 당신이 기만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잊지 않지."
"믿겠어요. 상공은 꼭 그래 주실 거예요."
소중분은 사십삼 명에게 밀명을 내렸다.
'혈단에 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조리 보고하라.'
그들이 전해오는 전서에는 그들과 소중분만이 아는 밀마를 사
용했다. 함상이 실종되기 전에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밀마 중
에 하나. 독고광은 자신이 읽는 전서 중에 또 다른 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독고광은 지금 유유히 녹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소중분이 전서를 살펴보고 있지만 그와는 무관한 일인 듯 여유
를 즐겼다.
"새로운 사실이 없군."
독고광은 찻잔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
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십삼 명의 능력은 놀라웠다. 그들은 곽가장 분타에서 일어나
는 이상기류 정확히 파악했고, 전서를 쓰면서 먹물을 흘린 듯
한 이상한 도형으로 할말을 다했다.
"정대주. 장주님의 명령이다. 추풍 반여량을 추적해라."
"이미 하고 있습니다."
독고광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밀옥이 파괴되었다는 전서를 받은 날부터 정대는 바쁘게 움직
이기 시작했다. 분타에도 밀명이 떨어졌다. 강서성 모든 사람
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밀옥을 깬 텁석부리 괴한이 과연 무녕 분타에서 소리없이 사라
진 반여량인가. 아직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반여량일 것이라는
추측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독고광... 내가 신계각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하하하! 알고 있습니다. 무슨 하명이라도 계신지?"
"후후후! 명을 내릴 것이 있지. 하지만 내리지 않겠다. 분명히
다른 핑계를 댈 테니까."
독고광이 입가를 실룩거렸다. 웃음을 간신히 참는 듯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아직 신계각주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에 터진 밀옥 사건은 장주님이 직접 명을 내리신 것... 무
슨 말인 줄 아나? 내가 내린 명령이 아니라는 거다. 정대의 활
약을 기대하겠다. 기대에 어긋난다면 문책을 하지 않을 수 없
지. 아마도 네 목을 걸어야 할 게다."
독고광의 얼굴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가에 경련을 파르르
일으키는 것으로 미루어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단순한 놈...
소중분이 보기에 독고광은 정대주를 맡을 자격이 없었다. 동종
관과 비교한다면, 아니 사공과 비교하더라도 지략이 한참 뒤지
는 인물이었다. 탁월한 점은 곽요연에 대한 충성심과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인 성격뿐.
"놈들을... 찾아 낼 겁니다."
"꼭 그래야 할 거야."
소중분은 예의 소름끼치는 냉혹한 시선을 던지고 몸을 일으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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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쓴한 주말 보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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